구리시에도 많은 예술가들이 저마다의 전공분야와 예술세계와 시민들에게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구리시에서 성악가수로서 작은 교회에서도, 구리시청 강당의 삼일절 행사에서도 , 아니 음악가들의 꿈의 무대인 “카네기홀”에서도 공연한 왕성한 예술활동을 하는 소프라노 손정윤씨를 본지 편집발행인이 만나보았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Q: 구리시와의 인연과 의미는 무엇인가요?
A: 그 때는 구리를 ‘교문리’라 그랬어요. 시골이었죠. 제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며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모두 구리에서 다녔어요. 부모님, 언니들과 친척들과의 추억이 제 정서를 키웠어요.
그 때는 구리가 가장 넓고 좋았으며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했죠. 대학에 들어가서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며 다양한 친구들과 사귀면서 넓은 시야를 넓혀 갔어요. 언제나 내 편이셨던,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신 ‘아빠와 구리시’를 생각하면 언제나 마음이 행복하고 따뜻해져요.
내 마음의 안식처입니다. 몇 칠전 제가 다녔던 ‘구리초등학교’를 방문을 했습니다.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곳에 여전히 제 모습이 넓은 운동장에,학교 교실에 그리고 지나가서 골목길에도 남아있었습니다. 그 시절이 너무나 행복했던 순간입니다. 또 친인척들이 살고 있는 구리는 저의 엄마이고, 아빠이고,그래서 더 마음을 다해 품고 싶고,말하고 싶고,사랑하고 싶은 곳이요 . 대답이 됐나요?
Q: 성악을 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A: 노래는 어머니가 좋아했어요. 자연스럽게 자매들이 노래를 즐겨 불렀고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는 성격 이었던 제가 언제나 형제들 중 노래를 가장 많이 불렀어요. 중학교 때 독창부문에 처음으로 오디션을 보았죠. 처음 여러 사람 앞에서 서서 노래를 불렀는데 긴장되고 떨리는 마음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어요. 지금도 기억하는데 곡목은 “동그라미”에요. 누군가에게 배우지도 않았는데 성악의 기초인 발성과 복식 호흡이 좋았다는 칭찬을 들었어요. 이게 제가 성악가의 꿈을 갖는 계기가 되었어요. 물론, 그 결과 구리에서 열리는 대은문화제에서 우수상을 받았지요. 구리여고로 진학한 저는 당시 음악선생 이셨던 이경규 선생님을 만나 본격적인 성악 공부를 시작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지도와 노력이 제 인생을 한 단계 높이는 결과가 되었어요.
Q: “카네기 홀”이란 모든 음악가들이 꿈꾸는 무대인데요. 그 이야기와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말씀해 주세요.
A: 카네기 홀은 모든 음악가들의 꿈의 무대입니다. 제가 그곳에서 연주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습니다. 제 꿈들 중 하나가 이뤄진 순간이었습니다.
2016년 저의 이태리 매니저가 아시아 투어 연주와 미주 순회연주 등 다양한 연주를 기획해서 저를 초청해 주셨습니다. 미국 전국순회 연주 때 10번이 넘게 비행기를 갈아타며 미국 전역을 다녔습니다. 각 지역을 다니며 펼쳐진 연주회로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고, 그들의 다양한 문화를 겪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힘들었지만 3주 가까이 되는 일정을 소화하면서 정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체력을 늘리는 것보다 몸을 관리하는 게 더 힘들었지요. 그래도 그 연주의 마지막 연주 장소가 카네기 홀이었기 때문에 더욱 힘을 냈습니다. 오랜 여행으로 몸도 마음도 지쳤지만 카네기 홀에 들어섰을 때 모든 것이 보상받는 느낌이었습니다. 감동과 벅참 그리고 감사가 터져 나왔습니다. 리허설이 시작되었고, 원래는 드레스를 입고 연주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외국인에게 우리나라의 한복의 위용과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공연 계획을 약간 바꿔서 제가 한복을 입고 연주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공연 날, 관객들의 예상치 못한 한복과 제 연주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에 저도 속으로 놀랬습니다. 그래서 “Floridia Pietro” 라는 특별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연주는 어디서나 할 수 있지만 외국인 앞에서 한복을 입고 카네기 홀에서 노래했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Q: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씀도 있는데요,훌륭하신 스승님으로 더욱 빛이 났을텐데, 은사님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A: 대학 시절부터 유학 후 예술 최고 연주자(교육부 인정 박사) 학위를 수여 받을 때까지 여러 스승님이 계셨어요. 성신여자 대학교 “박연숙 교수님”, 독일 만하임 국립음악대학교 “Katalina Dau” 교수님. 이태리 로마 Pitiliano 국제 음악 아카데미 “Lino Pulici” 교수에게 사사를 받았는데 특히 독일 스승이신 “Katalina Dau” 교수님에게 음악가로서 알아야 될 인성과 음악적인 기량 등을 배웠습니다.
이 분은 독일계 유대인으로 언제나 음악가로서 성실함과 열정을 강조하셨습니다. 힘든 유학생활에 혹 제가 물질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 본인이 먼저 저에게 큰 도움을 주셨고 엄마 같이 따뜻한 음악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분입니다. 그분의 뜻에 따라 제가 제자들을 지도할 때도 기량보다는 진심을 전달 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Q: 유학시절 기억나는 기억을 해 주신다면요.
A: 9년 동안의 유학시절과 또 오페라가수로서 활동했던 시간을 생각하면 그 에피소드는 정말 많습니다. 이것들을 하나하나 다 말씀드리기는 힘들지만 그 중 음악가로서의 진로에 영향을 주었던 두 가지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유학시절 카셀 국제 콩쿠르에 나갔던 일입니다. 콩쿠르가 있던 날 연주 복이 없어서 고민하던 중 그 어려운 살림에 저의 남편이 무려 500 유로짜리 드레스를 사와서 저를 감동 시켰습니다. (그땐 정말 가난한 유학생이었거든요.) 그 보다 큰일은 콩쿠르 본선에 올라갔을 때 제가 심한 독감에 걸려서 도저히 목소리가 안 나왔습니다. 그저 제가 믿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죠. 참으로 막막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콩쿠르 당일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노래하려고 무대에 올라갔을 때 언제 감기에 걸렸냐는 듯 소리가 나와서 최우수상과 특별인기상을 수상 했습니다. 이건 제게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두 번째 일은 제가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을 시험 보는 때였습니다. 독일 음대는 석사 과정은 각 과에서 학생들을 뽑지만 박사과정은 전체를 기준으로 극소수의 학생을 뽑기 때문에 자국의 학생들도 진학이 어렵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과정을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시험 전부터 제가 존경하는 “Katalina Dau” 교수님께서 지금현재는 학생을 받을만한 자리가 부족하니 석사과정으로 오페라를 공부하고 있으면 1년 뒤에 받아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아시겠지만 유학생활이라는 것이 하루하루 지내는 생활비나 유지비 때문에 저로서는 막막하고 대단히 걱정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남편은 아무걱정 말고 천천히 박사과정 시험을 보라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래도 생활비 때문에 미안한 마음이 앞섰습니다. 떨어져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 최선을 다해 시험 준비를 했습니다. 시험당일 교수님께서 저를 좀 나무라시는 말투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더니 이왕 접수한 거니 장담은 못하지만 시험은 보라고 말을 바꾸셨습니다. 드디어 제 순서가 되었습니다. 최선을 다했고 노래 소리를 들은 여러 심사위원 교수님들께서 갑자기 수군거리시며 잠깐 나가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더니 담당교수님께서 “정윤아! 너 정말 축복 받았구나 모든 교수님들이 자리가 없어도 만들어서 너를 받아야 한다고 하시는구나!” 하시며 합격소식을 전하셨습니다. 뜻밖에 결과에 함께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런 사례가 거의 독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Q: 예술을 시작하는 이미 진행 중인 후배들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
A: 예술가로 산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과정을 넘고 또 넘어야 하는 배고픈 직업입니다. 어찌 보면 배우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많은 좌절과 후회 그리고 닥쳐오는 경제적인 고통이 그리고 홀로 외롭게 추구해야 할 절대적인 것들이 있습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한 인내와 노력은 절대 없는 것입니다.
예술가로서 인생을 설계하려 해도 앞날이 보이지 않기에 막막하기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음악을 사랑했기에 내 삶을 사랑했기에 길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끝이 보이지는 않지만 저 높은 곳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오르듯 자신을 끌어 올리는 일입니다.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자신을 갈고 닦아 스스로 빛날 때까지 노력하는 삶. 이것이 진정한 예술가의 모습입니다. 자신감을 가지고 도전하세요. 지금의 나에 만족하지 마시고 미래를 향해 전진하세요. 그러면 언젠가는 내가 꾼 꿈이 실현되어 있을 것입니다.
Q: 앞으로의 공연계획을 말씀해주세요.
A: 제가 연주를 하는 목적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달 해주는 것입니다. 보다 많은 스케줄로 관객과 만나며 제가 느낀 감흥을, 감동을 생생하게 고스란히 청중 여러분께 사랑으로 전달해 주고 싶습니다.
이번년도에 일본연주와 7월에 이태리, 해외연주를 준비 중에 있습니다. 내년에는 ‘아시아 순회연주’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국내적으로는 ‘개인독창회’와 ‘자선 음악회’, ‘소외계층들을 위한 연주회’를 개최하고 싶습니다.
특히 소외계층들에게 다양하고 보다 풍성한 음악을 전달하는 것과 누구나 함께 즐길 수 있는 음악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꿈입니다.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통해 청소년들의 음악세계 확대를 궁극적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구리시와 넓게는 한국의 음악과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더불어 사는 그래서 다들 행복한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Q: 좋아하는 책을 추천해 주신다면요.
A:
요즘 읽은 책 중 도서출판 돋보기에서 출간한 “가자 뒷다리”요. 황보출 할머니의 맑고 순수한 언어로 살아온 날을 시로 표현한 시집입니다. 시인도 아니신데 ‘어르신의 언어’로 시로 표현했는데요.
마음이 뭉클해지기도 하고, 화려한 단어로 꾸미지 않은 감정표현들이 저에게는 감동이었습니다.
Q: 부모님에 대해 감사의 한마디 해 주신다면요?
A: 엄마, 아빠 늘 제 삶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응원해 주시고, 어려움가운데 다독여 주셨던 저의 정신적인 지주이신 부모님 1남5녀 중 다섯째로 태어나 많은 사랑을 받고, 지금까지도 응원해주는 부모님이 계셔서 저는 이렇게 오늘도 살아가요. 늘 성품이 곧으시고 사랑이 많은 울 엄마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여주시고 많은 대화로 저의 부족함을 채워주시는 엄마 많이 사랑해요. 지금까지 이렇게 키워주시고, 지금도 저의 펜으로써 지지해 주시니 감사해요.
그리고 작년 12월에 아빠가 세상을 떠나셨는데도 다하지 못한 효도가 너무나도 죄송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제 마음이 먹먹해 져 옵니다. 아빠를 빼다 박은 저는 아빠를 그리워합니다. 딸 중에 제가 아빠를 제일 많이 닮았고 그래서 아빠를 좋아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지 늘 아빠 편이였거든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결혼하기 전까지 마사지 담당했던 막내딸 정윤이에요. 지금도 보고 싶고., 글 쓰는 가운데 눈물이 흐릅니다. 아빠의 지원으로 인해 저는 당당 할 수 있었어요. 하늘나라에서 우리를 보고 계신다면, “사랑한다고“ 응원해 주세요.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아빠 사랑해요!
Q: 성악가 손정윤씨의 활약을 기원하는 구리시민들에게 봄의 메시지를 전해 주신다면요?
A: 제가 어렸을 때 구리시는 소도 다니고,개울도 있고, 칡도 캐먹고 머루 ,다래도 따먹고,가끔씩은 배서리(?)를 하다 과수원 주인 아주머니께 혼쭐이 났던 저에게는 아름다운 기억의 도시였어요. 그래서 추억이 많이 묻어나는 곳이죠.
구리시가 개발이 되어서 이렇게 멋진 도시로 우뚝 서게 되었는데, “유채꽃 축제, “코스모스 축제”, 여러 축제로 누구할 것없이 멋지게 구리시에서 행복함을 봅니다. 다들 행복하게 희망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예술가에게는 ‘나라’가 있어야 한다”고 했고, 오늘 소프라노 손정윤씨에게는 ‘나라와 고향’이 있어 행복한 분 으로 느껴졌습니다.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좋은 일과 많은 활약이 있으시기를 기대해봅니다.
기사작성 허득천 편집발행인(truepen88@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