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황제를 암살하다 실패한 장자방과 창해역사
독재하는 절대권력자에게는 항상 암살과 쿠데타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 이유는 정적을 많이 제거하고 경쟁자를 숙청하기에 항상 불만세력이 많아지고, 언론을 통제하고 언로를 차단하기에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측근들의 비판 없는 아부로 판단력이 흐려져 독단으로 비정상적인 정치를 하기 때문이다.
중국역사상 최고의 절대권력자였던 시황제에게는 역사상 3건의 암살시도가 기록되어 있다. 첫 째가 형가에 의한 암살 실패이고, 이번 연재에서는 고점리와 창해역사 여홍성의 암살 시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이렇듯 암살 시도가 이어졌다는 것은 절대권력자였던 시황제에게 정치적으로 원한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의미이다.
고점리의 암살 실패
형가의 암살이 실패로 끝나자 친한 친구였던 고점리는 성명을 바꾸고는 숨어 살았다. 동쪽을 순행하던 시황제가 낭야(琅邪)에 이르렀는데, 그곳에 축(筑)을 신기에 가깝도록 잘 타는 명장(名匠)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시황제는 고점리가 형가의 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나 설마하고 방심하고는 그의 축 연주를 들어보기로 했다.
행궁에서 축을 연주할 때 시황제를 암살하기로 결심한 고점리는 납을 넣은 축을 이용해 특수한 흉기까지 고안했다. 연주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고점리는 음악에 도취되어 있는 시황제에게 납이 든 축을 집어던졌으나 빗나가고 말았다. 고점리는 그 자리에서 붙잡혀 극형을 당했고, 이 암살미수사건 이후 시황제는 죽을 때까지 외지사람을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시황제를 저격한 창해역사와 장량
강단사학계에서 위서(僞書)라고 주장하고 있는 <환단고기 북부여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시조 해모수 단군 22년 계미년(B.C 219) 창해역사 여홍성이 한나라 사람 장량(張良)과 함께 진나라 왕 정(=진시황)을 박랑사 가운데서 저격했으나 빗나가 신하들이 탄 수레(副車)를 박살냈다.(癸未二十年滄海力士黎洪星與韓人張良狙擊秦王政于博浪沙中誤中副車)”
<중국고대지명대사전>은 박랑사에 대해 “박랑사는 고대지명으로 현재 지명은 고박랑사이다. 역사문화의 명지로 하남성 원양(原阳)현 성 동쪽 교외에 있다. 역사적으로 한나라 승상의 후예인 장량이 사람을 보내 이곳에서 진 시황제를 죽이려했으나 미수에 그쳐 천하에 그 이름을 얻게 되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위 <환단고기 북부여기>의 기록과 <중국고대지명대사전>의 설명이 일치한다는 것은 <환단고기>의 내용이 위서가 아니라는 말이다. 또한 중국자료에서는 장량과 함께 시황제를 저격했던 인물이 누구인지에 대해 밝혀놓지 않았으나, 오히려 <북부여기>에서 그는 성명이 여홍성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다.
소설 <초한지> 제37장 창해공(滄海公)편에 의하면, 시황제에게 망국의 원한을 풀려던 장량은 창해역사를 만난 자리에서 시황제 저격계획을 밝혔다. 그러자 그는 장량에게 “저의 성은 여(黎)이며 바닷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창해공이라 부릅니다. 저에게는 다른 재주는 없고 오직 백 근 정도의 철추(鐵鎚)만은 마음대로 휘두를 자신이 있습니다. 오늘 우연히 귀하와 같은 분을 만났으니 무슨 임무나 맡겨 주십시오.”라고 말한 문구가 있다.
韓 승상의 후예 장량은 자신의 조국이 시황제에게 멸망당하자 원수를 갚기 위해 사재를 털어 시황제를 저격할 자객을 찾았고, 120근의 철퇴로 동순하던 시황제를 박랑사에서 저격했으나 빗나가 부거(副車)만 박살내고 말았다. 이 자객이 바로 창해역사 여홍성이다. 시황제의 암살미수로 수배된 장량은 몸을 숨겼다가 훗날 한왕 유방의 일등책사가 되어 항우를 무너뜨리고 漢나라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워 소하·한신과 함께 창업공신 삼걸(三傑)로 꼽히는 인물이다. 오히려 이름인 장량보다 자를 쓴 장자방(子房)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장량과 여홍성(대역사)이 진시황을 저격하려다 실패한 박랑사에서 벌어진 상세한 상황은 다음과 같다. B.C 208년, 장량은 창해의 임금을 배알하고는 공동으로 진시황 암살계획을 세웠다. 대역사를 찾고 120근 대철추를 제작하고는 시황제의 동순 길에 매복했다. 원래 규정에 의하면, 황제는 6필의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신하들은 4필 마차를 탄다. 자객의 목표는 당연히 6필 마차였다.
장량은 시황제가 곧 무양현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대역사와 함께 무양현에서 반드시 지나가야 할 길목인 박랑사에 매복했다. 멀리서 36량의 마차가 박랑사로 오는 것을 보고는 장량과 대역사는 숨어서 시황제의 마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36량 모두가 4필 마차뿐이었다. 분명한 것은 그 중의 한 마차에 시황제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성공확률은 3% 이하였다.
어느 마차에 시황제가 타고 있는지 알 수 없던 장량은 대역사에게 가장 호화롭게 보이는 중간 마차를 치라고 명했다. 120근 대철추 한방에 마차는 박살나고 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으나, 부서진 마차에는 시황제가 타고 있지 않았다. 장량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풀숲에 숨었다가 현장을 떠나 몸을 피했다. 참고로 대철추에 맞은 마차를 부거(副車)라고 한다.
진시황은 자객을 여러 번 만난 적이 있기 때문에 아침에 예방준비를 했다. 수레를 모두 4필마로 바꾸고 수시로 바꿔 탔기 때문에 장량이 어느 마차에 시황제가 타고 있는지 판단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시황제는 행운으로 죽음을 면했고, 전국에 10일 내로 관련자를 체포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고박랑사는 이 일로 단번에 유명해졌다.
장량과 창해역사 여홍성의 거사가 실패한 박랑사는 황하북부 하남성에 있는 지명이다. 실제로 시황제를 저격한 여홍성은 박랑사의 지형을 손바닥 꿰듯이 잘 알고 있어야 저격이 가능했을 것이다. 즉 여홍성은 그 부근에 살고 있던 사람이란 말이다. 그럼에도 식민사학계는 이러한 창해(滄海)를 강원도 강릉으로 비정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강릉 출신 여홍성이 어떻게 지리도 모르는 하남성 박랑사에 가서 시황제를 저격할 수 있단 말인가!
<다음 연재 참고자료>
(원문) 12세 아한단군 재위 52년
무자 2년(B.C1833) 여름 4월에 외뿔 달린 짐승이 송화강(松花江) 북변에 나타났다.
가을 8월에 단제께서 나라 안을 두루 순수하다 요하(遼河)의 좌측에 이르러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를 세워 역대 제왕의 이름을 새겨 이를 전하게 하였다. 이것이 가장 오래된 금석문이다. 후에 창해역사 여홍성(滄海力士黎洪星)이 이곳을 지나다 시 한수를 읊었다.
“마을 교외 변한이라는 부르는 곳에 유난히 특이한 돌 하나 서있구나
받침은 무너지고 철쭉꽃이 붉게 피었고 글자는 이지러져 이끼가 푸르구나
아득한 옛날에 만들어져 흥망의 황혼에 서있구나
문헌으로 고증할 길 없으나 이 어찌 단씨(=단군)의 유적이 아니겠는가!”
을묘 29년(B.C1806) 청아(菁莪)의 욕살인 비신과 서옥저(西沃沮)의 욕살인 고사침과 맥성(貊城)의 욕살인 돌개를 봉하여 열한(列汗)으로 삼았다.
(해설)
외뿔 짐승이 나타난 송화강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백두산에서 발원해 동만주를 흐르는 현재의 송화강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하겠다.
12세 아한단제께서 순수관경비를 세운 요하의 좌측인 변한 땅은 과연 어디일까? 현재 중국과 대한민국의 식민사학자들 모두는 고대의 요하는 요녕성을 가로지르는 요하이며, 요하의 서쪽이 요서이고 동쪽이 요동이라고 말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먼저 요하의 대략적인 위치를 알게 해주는 <자치통감(資治痛鑑)>의 기록을 보기로 한다.
(번역) 정관 18년(644) 10월 14일 당태종이 탄 어가는 장안을 경유해 낙양으로 향하였다. 황제가 친정하기 때문에 재상 방현령과 우위대장군 겸 공부상서인 이대량이 도읍을 지켰다. 11월 초 영주도독 장검 등은 당나라 군대를 거느리고 요수 서안까지 나아갔으나, 당시 하수(=황하)가 범람하는 시기여서 오랫동안 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당태종은 실망하고 낙양으로 돌아왔다.
(원문) 贞观十八年十月十四日,唐太宗乘车驾由长安行幸洛阳,欲御驾亲征,留宰相房玄龄和右卫大将军、工部尚书李大亮守卫京师。十一月初,营州都督张俭等帅唐军进至辽水西岸,正值河水泛滥,久不得渡。太宗以其畏惧怯懦,召回洛阳,欲治其罪。
위 기록에서 보듯이, 10월 14일 장안을 떠난 당태종이 요하 서안에 도착했으나 황하가 범람해 건너지 못하고 낙양으로 돌아온 때가 11월 초이다. 장안에서 요수 서안까지 갔다가 20일 만에 낙양까지 돌아왔다면 요수는 낙양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을 수밖에 없다. 즉 요수는 황하변 하남성에 있는 황하 또는 황하의 지류로 보인다. 참고로 수양제는 고구리 침공 시 장안에서 떠난 지 약 20일 만에 낙양을 거쳐 요수에 도착했다. 당태종과 수양제는 같은 길을 거친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
▲ <자치통감>에서 10월 중순 장안을 출발한 당태종이 20일만에 요수까지 갔다가 낙양으로 돌아왔다면 진짜 고대 요수는 하남성을 흐르는 강이다. 장량이 진시황을 저격한 박랑사는 황하북부 하남성 신향시 원양현으로 옛 요하 근처에 있다. 그러므로< 환단고기>의 위 기록은 너무도 정확한 것이다.
순수관경비를 보고 시를 읊은 여홍성은 누구일까?
12세 아한단제가 요하 왼쪽인 변한 땅에 세운 순수관경비를 보고 멋진 회상의 시를 읊은 여홍성은 과연 누구일까? 여홍성이란 인물을 <중국인터넷자료>에서 찾으려 했으나 그런 이름은 중국역사에 없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누구일까?
그런데 위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도 장량이 사람을 보냈다고만 언급할 뿐 그 인물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다.
역사적으로 창해역사 여홍성이란 인물은 아래
(원문) 博浪沙 历史沿革 : 向北过黄河,向南过官渡河后,官军都不易抓到。张良选择此处行刺,可谓神机妙算,用心至上。张良到东方拜见仓海君,共同制定谋杀行动计划。他弟死不葬,散尽家资,找到一个大力士,为他打制一只重达120斤的大铁锤(约合现在60斤),然后差人打探秦始皇东巡行踪。按照君臣车辇规定,天子六驾,即秦始皇所乘车辇由六匹马拉车,其他大臣四匹马拉车,刺杀目标是六驾马车。
公元前218年,秦始皇东巡,张良很快得知,秦始皇的巡游车队即将到达阳武县(现在原阳县东半部),于是张良指挥大力士埋伏在到阳武县的必经之地——博浪沙。不多时,远远看到三十六辆车队由西边向博浪沙处行走过来,前面鸣锣开道,紧跟着是马队清场,黑色旌旗仪仗队走在最前面,车队两边,大小官员前呼后拥。见此情景,张良与大力士确定是秦始皇的车队到达。但所有车辇全为四驾,分不清哪一辆是秦始皇的座驾,只看到车队最中间的那辆车最豪华。于是张良指挥大力士向该车击去。120斤的大铁椎一下将乘车者击毙倒地。
张良趁乱钻入芦苇丛中,逃离现场。然而,被大力士击毙命者为副车,秦始皇因多次遇刺,早有预防准备,所有车辇全部四驾,时常换乘座驾,张良自然很难判断哪辆车中是秦始皇。秦始皇幸免于难,下令在全国大肆搜捕凶手10天不得,后来不了了之。古博浪沙从此一举成名。
그리고 강단사학계가 위서(僞書)라고 말하는 <환단고기>의 내용이 이렇듯 중국사서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무엇으로 설명하겠는가? 중국사서도 위서인가? 대답해보라!
▲ 황하북부 하남성 원양현 박랑사 현장에 있는 비석과 장량과 창해공의 석상
곧 이어지는 (23-2부) ‘시인 조조의 시로 본 창해는 어디인가?’ 에서 창해군(滄海郡)의 정확한 위치가 밝혀집니다. 아울러 예맥(濊貊)과 옥저(沃沮) 땅이 어디인지도 밝혀집니다.
(원문) 12세 아한단군 재위 52년
무자 2년(B.C1833) 여름 4월에 외뿔 달린 짐승이 송화강(松花江) 북변에 나타났다.
가을 8월에 단제께서 나라 안을 두루 순수하다 요하(遼河)의 좌측에 이르러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를 세워 역대 제왕의 이름을 새겨 이를 전하게 하였다. 이것이 가장 오래된 금석문이다. 후에 창해역사 여홍성(滄海力士黎洪星)이 이곳을 지나다 시 한수를 읊었다.
“마을 교외 변한이라는 부르는 곳에 유난히 특이한 돌 하나 서있구나
받침은 무너지고 철쭉꽃이 붉게 피었고 글자는 이지러져 이끼가 푸르구나
아득한 옛날에 만들어져 흥망의 황혼에 서있구나
문헌으로 고증할 길 없으나 이 어찌 단씨(=단군)의 유적이 아니겠는가!”
을묘 29년(B.C1806) 청아(菁莪)의 욕살인 비신과 서옥저(西沃沮)의 욕살인 고사침과 맥성(貊城)의 욕살인 돌개를 봉하여 열한(列汗)으로 삼았다.
창해역사 여홍성의 고향인 창해군은 어디일까?
지난 (1부)에서는 창해역사 여홍성과 장량이 진시황을 저격한 박랑사의 위치와 미수에 그친 그 저격상황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창해공(滄海公) 여홍성의 창해는 과연 어디일까? 이 창해를 밝히면 위 <단군세기> 원문의 요하가 어디인지 저절로 알 수 있게 된다. 참고로 창해는 기록에 따라 滄海 또는 蒼海로 한자가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 같은 지명으로 보인다.
먼저 <중국백과사전>에 언급된 창해군에 대한 역사연혁은 다음과 같다.
(번역) 창해군 : <한서 무제기>에 “원삭 원년(B.C128) 가을 동이족 예의 임금 남려 등 28만 명이 항복한 곳을 창해군으로 했다. 3년 봄에 창해군을 없앴다.”고 기록되어 있다.
복건은 “예맥은 진한의 북쪽에 있고, 고구려와 옥저의 남쪽에 있고, 동쪽 끝이 대해이다.”고 주를 달았으며, 안사고는 “남려라는 자는 예의 임금 이름이다.”는 주를 달았다.
<사기 평준서>에는 “팽오가 예와 조선을 돈으로 사서 창해군을 설치했다.”라고 전하며,
<한서 식화지>에는 “팽오가 예맥·조선을 뚫어 창해군을 설치했다.”고 전한다.
범엽이 쓴 <후한서 동이전>에는 “원삭 원년 예의 임금 남려 등이 우거왕을 배반하고는 28만 명을 이끌고 요동에 도착해 내속되었다. 무제가 그 땅을 창해군이라 했고, 수년 뒤 폐지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모든 설이 같지 않다.
복건의 위치 설에 의하면, 창해군의 관할지는 당연히 한나라 무제 원봉 3년(B.C108)에 설치한 임둔군(=한사군)을 포괄한다. 역사서의 기록이 간략한 연유로 그 세운 정황을 고증하기 어렵다.
(원문) 苍海郡 : <汉书武帝纪>记载:元朔元年秋,“东夷薉君南闾等口二十八万人,降为苍海郡”,“三年春罢苍海郡”。服虔注:“秽貊在辰韩之北,高句丽、沃沮之南,东穷于大海。”颜师古注:“南闾者,薉君之名。”<史记平准书>云:“彭吴贾秽、朝鲜,置沧海郡。(則燕齊之間 靡然發動)”<汉书食货志>云:“彭吴穿秽貊朝鲜,置沧海郡。”范晔<后汉书东夷传>则说:“元朔元年,濊君南闾等衅右渠,率二十八万口诣辽东内属。武帝以其地为苍海郡,数年乃罢。”诸说不同。案服虔所说,苍海郡辖地应包括武帝元封三年所置的临屯郡。由于史籍记载简略,其建制情况已难以考证。
위 역사연혁에 대한 필자의 주는 다음과 같다.
* 주1 : 아래 <사기 평준서>의 문구 뒤에는 다음의 일부 내용이 생략되어 있다. “(창해군을 설치하자) 연나라와 제나라 사이에서 소요가 일어났다(則燕齊之間 靡然發動)” 즉 창해군은 연나라와 제나라 부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주2 : 팽오가 돈으로 산 조선은 나라가 아니라 아래 <한서지리지> 유주의 낙랑군에 속한 25개현 중 하나인 조선현을 말하는 것이다. 예맥의 동쪽 끝인 대해 즉 창해는 발해(渤海)로 하남성과 산동성 사이에 있던 큰 내륙호수를 말하는 것이다.
(乐浪郡 낙랑군) 武帝元封三年开。莽曰乐鲜。属幽州(유주에 속한다)。户六万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万六千七百四十八。有云鄣。县二十五:朝鲜(조선),讑邯,浿水(패수),水西至增地入海。莽曰乐鲜亭。含资,带水西至带方入海。黏蝉,遂成,增地,莽曰增土。带方(대방),驷望,海冥,莽曰海桓,列口,长岑,屯有,昭明,高部都尉治。镂方,提奚,浑弥,吞列,分黎山,列水所出。西至黏蝉入海,行八百二十里。东暆,不而,东部都尉治。蚕台,华丽,邪头昧,前莫,夫租。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창해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번역) 창해군 : <한서>에 팽오가 예맥과 조선을 뚫어 창해군을 설치했다. <사기>에서 창해군이라 한 것을 후에 임둔군으로 했다. (지금의 압록강과 동가강의 두 강에 이르는 흥경 부근의 땅이다. 혹 소위 창해군은 지금의 한반도 남부에 있다.)
(원문) 沧海郡 : 汉书彭吴穿秽貊、朝鲜置沧海郡,史记作苍海郡,后为真番郡,(今辽宁省鸭绿、佟佳两江及兴京附近之地,或谓沧海郡当在今朝鲜南部。)
* 편집자 주 : ( ) 안의 지명 설명은 지명이동을 통한 역사왜곡으로 사실과 다르다.
즉 창해군은 한사군(漢四郡)의 핵심인 낙랑군 지역에 있었으며, 번조선과 연나라의 경계였던 패수(浿水) 근처로 보아야 할 것이다. 패수는 연나라 장수 위만이 번조선으로 망명하며 건넜던 강이며, 한 무제와 번조선 우거왕과의 한사군전쟁의 주 무대였으며, 고구리의 남쪽 경계라고 여러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패수현과 조선현이 속한 낙랑군의 위치는 황하북부 하남성 일대이다.
(패수와 조선현과 발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아래 싸이트 참조)
(제목) 조선과 燕의 경계인 패수(浿水)는 어디인가?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172§ion=sc6§ion2=
(제목) 동북공정의 핵심은 지명을 국명으로의 역사왜곡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689§ion=sc6§ion2=
(제목) ‘발해’를 지명조작하여 역사왜곡한 중국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150§ion=sc7§ion2=
결론적으로 창해공 여홍성은 황하북부 하남성 출신으로 박랑사 부근의 지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진시황을 저격할 수 있었던 것이지, 그가 식민사학계의 이론대로 강원도 강릉 출신이라면 절대로 이런 일을 기획할 수도 실행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여홍성이 보고 시를 읊었다는 순수관경비가 세워진 요하도 황하변 하남성에 있는 강일 수밖에 없다.
▲ 한사군은 원래 황하변 하남성에 있었다. 갈석산과 패수의 지명이동으로 하북성과 한반도로 옮겨져 해석되고 있다.
조조의 시로 본 창해는 어디인가?
또한 창해라는 지명은 <삼국지>의 주인공인 조조의 시 ‘관창해(觀滄海)’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선 그 시가 어떤 시인지 아래와 같이 <중국백과사전>의 설명을 보기로 하자.
(번역) <관창해> : 건안 12년(207) 9월 북쪽으로 오환을 정벌하고, 원소의 잔류부대를 소탕하는 승리를 거둔 후 돌아오는 길에 갈석산에 올라 해(海)를 바라보며 자연의 경치를 노래한 4언시이다. 중국고전의 서경시 중 비교적 일찍 출현한 명작이다.
(원문) 《观沧海》: 是建安十二年(207)九月曹操北征乌桓,消灭了袁绍残留部队胜利班师途中登临碣石山时所作。这首四言诗借诗人登山望海所见到的自然景物,描绘了祖国河山的雄伟壮丽,既刻划了高山大海的动人形象,更表达了诗人豪迈乐观的进取精神,是建安时代描写自然景物的名篇,也是我国古典写景诗中出现较早的名作之一。
东临碣石,以观沧海 (동쪽으로 와 갈석에서 푸른 바다를 바라보네)
水何澹澹,山岛竦峙 (물은 어찌 저리 담담하고 산과 섬은 우뚝 솟아있도다)
树木丛生,百草丰茂 (수목이 울창하고 백초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구나)
秋风萧瑟,洪波涌起 (가을바람 소슬하니 큰 물결이 이는구나)
日月之行,若出其中 (달과 해의 운행도 그 속에서 나오고)
星汉灿烂,若出其里 (은하수의 찬란함도 그 속에서 이는 듯)
幸甚至哉,歌以咏志 (다행히 내가 보아 그 뜻을 노래하노라)
위 시에 대한 <중국백과사전>의 해설은 다음과 같은데,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추출해낼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갈석산의 위치와 진시황이 쌓은 만리장성의 서쪽 기점으로 알려진 임조(臨兆)=롱서(曨西)의 원래 지명이 어디인지를 알 수 있다. 갈석산은 대대로 고대중국과 동이족의 경계로 기록되어 있으며, 롱서는 진시황 만리장성의 역사왜곡을 위해 현재 서안 서쪽의 감숙성 남부로 옮겨져 있는 지명이다.
참고로 진시황이 쌓은 장성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사기 진본기)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몽염의 30만 대군으로 하여금 북쪽의 융적을 몰아내고 하남을 얻어 장성을 쌓았는데 임조(=롱서)에서 일어나 요동까지로 길이가 만여리이다. (<史记秦纪> 始皇并天下,使蒙恬将三十万众,北逐戎狄,收河南,筑长城,因地形开附制塞,起临洮至辽东,处袤万余里)”
주: 여기서의 하남은 황하변 하남성을 말하는 것이다.
갈석산과 만리장성 역사왜곡에 대한 상세한 것은 아래 싸이트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제목) 진짜 갈석산은 원래 어디에 있었을까?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230§ion=sc6§ion2=
(제목) 진시황은 지금의 만리장성을 쌓은 적이 없다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214§ion=sc6§ion2=
▲ 원래 산서성 남단 갈석산과 황하북부 하남성에 있던 진시황 장성이 지금의 만리장성으로 왜곡돠어 있다. 진장성의 서쪽 기점인 롱서가 산서성 서남단에서 감숙성 남부로 옮겨져 있다. © 역사복원신문
(중요한 부분만 번역) 해설 : <관창해>라는 제목은 후세사람이 붙인 것이고, 원래는 <보출하문행>의 제1장으로 혹은 <롱서행>이라고도 하며 한락부 중 <상여가.금주곡>에 속한다. 하문은 원래 낙양 북면 서쪽 머리의 성문이며, 한나라 때는 하문으로 칭했으며 위.진 때는 대하문이라 칭했다. 조조는 이 작품을 <송서.락지>의 <대곡>에 넣어 제목을 <갈석보출하문행>이라 지었다. 이 시는 건안 12년(207) 북쪽 오환을 정벌하고 승리를 얻어 돌아오는 도중에 지었다.
(원문) 解说 : 《观沧海》是后人加的,原是《步出夏门行》的第一章。《步出夏门行》,又名《陇西行》,属汉乐府中《相如歌·瑟调曲》。夏门原是洛阳北面西头的城门,汉代称夏门,魏晋称大夏门。古辞仅存“市朝人易,千岁墓平”二句(见《文选》李善注)。《乐府诗集》另录古辞“邪径过空庐”一篇写升仙得道之事。曹操此篇,《宋书 · 乐志》归入 《大曲》,题作《碣石步出夏门行》。从诗的内容看,与题意了无关系,可见,只是借古题写时事罢了。诗开头有“艳”辞(序曲),下分《观沧海》、《冬十月》、《土不同》、《龟虽寿》四解(章)。当作于公元207年(建安十二年)北征乌桓得胜回师途中。
위 해설에서 보듯이, 우리는 조조가 지은 시의 제목으로부터 갈석산은 낙양에서 걸어서 갈 정도로 가까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또 그 갈석산에 진시황 장성의 서쪽 기점인 롱서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조의 시에 등장하는 갈석산은 지금의 중조산으로 산서성 남단 황하변에 있는 큰 산이었다. 조조가 갈석산을 올라갔는지, 아니면 갈석산 건너편에서 갈석산을 보고 읊은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碣石步出(낙양에서 걸어서 갈석)이라는 용어로 보아 하남성 낙양 북쪽에 있는 황하변에서 건너편에 있는 갈석산을 보고 시를 쓴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조조의 위 시는 시인의 감성으로 상상의 나래를 편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조조가 북쪽 오환족을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지었다는 것은 후대의 역사조작으로 보인다. 참고로 오환족(烏桓族)은 글자 그대로 까마귀 환족으로 고구려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 진시황, 한무제, 조조, 수양제, 당태종 등 중국의 유명한 9명의 황제가 올랐다는 갈석산은 원래 산서성 남단 황하변에 있는 지금의 중조산인데, 이를 각각 하북성과 한반도 황해도에 있는 것으로 역사해석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에 있는 가짜 갈석산(해발 695m)의 모습. 중국은 지명이동을 통한 역사왜곡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조조의 시 ‘관창해’를 이곳에 새겨 놓았다.
▲ 갈석산에 올라 ‘관창해’라는 시를 읊었다는 조조의 시를 하북성 가짜 갈석산에 새겨 놓았다. 물론 지명이동을 통한 역사왜곡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서 창해에 대한 부연설명을 다음과 같이 했다.
(번역) 창해 : 창해라는 문구는 큰 바다를 가르킬 수도 있으나 해수의 색을 말하는 것이다. 여갈홍의 <포박자.궁달>에 나오는 “우물 안 개구리는 창해를 알지 못한다.”의 창해는 대해로 역시 동해의 별칭이다. 본 시의 창해는 동해를 가르키는 것이다. <초학기>의 여섯가지 해석 방법에는 “고대의 동해는 발해를 칭하는 것으로 역시 소위 창해로 통한다. 여기서 말한 동해는 중국동부해역으로, 지금의 절강성 동쪽 해역인 동해와 같지 않다.”
(원문) 沧海 : “沧海”一词,可泛指大海,因为海水苍色,一望无际,故称。如葛洪《抱朴子·穷达》:“井蛙之不知苍海”。苍海:即沧海,大海。“沧海”又作东海的别称。本诗“东临碣石,以观沧海”,“沧海”指东海。《初学记》六解释道:“按东海之别有澥,故东海共称渤海,又通谓之沧海。这里说的东海泛指我国东部海域,与今天特指浙江以东的海域“东海”不同。
즉 조조의 시에 나오는 창해는 고대에 창해 또는 동해라고도 불렸던 하남성 동부에 있는 발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푸른색 바다 즉 낙양 북쪽을 지나는 황하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위 해석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고대 중국의 동해가 하남성 동쪽에 있던 발해라는 사실이고, 지금의 절강성 앞바다가 고대 중국의 동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렇듯 <단군세기>와 <북부여기>에 기록된 창해역사 여홍성에 관한 기록이 주는 역사적 사실은 우리의 고대역사강역을 정확히 이해하는데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엄연히 기록으로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환단고기>를 위서 운운하는 식민사학계를 바라보노라면 웃음 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니들이 그러고도 문학박사냐? 이 나쁜 者들아!
▲ 하남성과 산동성 사이에 있던 큰 내륙호수인 대야택은 고대 중국의 동해였던 발해로 일명 창해라고도 불렸다. © 역사복원신문
이어지는 (23-3)부에서는 위 기록에서 숱하게 언급된 예, 맥, 옥저가 어디인지 밝혀집니다.
(단군세기 원문) 12세 아한단군 재위 52년
무자 2년(B.C1833) 여름 4월에 외뿔 달린 짐승이 송화강(松花江) 북변에 나타났다.
가을 8월에 단제께서 나라 안을 두루 순수하다 요하(遼河)의 좌측에 이르러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를 세워 역대 제왕의 이름을 새겨 이를 전하게 하였다. 이것이 가장 오래된 금석문이다. 후에 창해역사 여홍성(滄海力士黎洪星)이 이곳을 지나다 시 한수를 읊었다.
“마을 교외 변한이라는 부르는 곳에 유난히 특이한 돌 하나 서있구나
받침은 무너지고 철쭉꽃이 붉게 피었고 글자는 이지러져 이끼가 푸르구나
아득한 옛날에 만들어져 흥망의 황혼에 서있구나
문헌으로 고증할 길 없으나 이 어찌 단씨(=단군)의 유적이 아니겠는가!”
을묘 29년(B.C1806) 청아(菁莪)의 욕살인 비신과 서옥저(西沃沮)의 욕살인 고사침과 맥성(貊城)의 욕살인 돌개를 봉하여 열한(列汗)으로 삼았다.
지난 (23-1,2)부에서는 위 원문에 나오는 요하와 창해군의 위치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번 (23-3)부에서는 우리 귀에 익숙한 옥저(沃沮)와 예(濊), 맥(貊)이 어디에 있었는지 그 위치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장문이라 2부로 나뉘어 연재합니다)
을묘년 기사는 청아, 서옥저, 맥성의 욕살들을 각기 제후국의 임금으로 봉했다는 말이다. 욕살은 한 지방을 다스리는 관직명인데, 중앙에서 관리를 임명하여 다스리던 지역을 자치권이 있는 제후국으로 승격시켰다는 기록인 것이다. 그리고 원래 예와 맥은 각각 다른 지역인데 우리에게는 예맥(濊貊)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예는 제천행사인 무천(舞天)을 행한 동예(東濊)로 알려져 있다.
먼저 각각에 대한 <대한민국 백과사전>의 설명을 보도록 하겠다. 참고로 청아(菁莪)는 어디에 있는 지명인지 알 수가 없다.
맥[貊] : (1) 상고시대에 중국의 동북 지방에 있던 종족.
(2) 고조선 시대, 강원도 지방에 있던 나라.
예맥[濊貊] : (1) 만주와 한반도 북동부에 걸쳐 살았던 고대 민족. 부여(夫餘)와 고구려 등이 그로부터 생겨났다. 《신당서(新唐書)》 <발해전(渤海傳)>에 따르면 발해의 동경(東京)은 예맥의 옛 땅에 자리하였고 일명 책성부(柵城府)라고도 하였다.
(2) 상고시대에 중국의 동북 지방에 있던 나라. 만주와 한반도 북쪽의 예(濊)와 인접해 있어 이렇게 불렀다.
(3) 우리 겨레의 조상을 통틀어 이르던 일반적 이름.
동예[東濊] : 상고시대에 함경남도 남부와 강원도 북부 지역에 있던 부족 국가. 족외혼(族外婚)의 풍습이 있었고 농사를 주업으로 하였으며 호랑이를 신으로 섬겼다. 해마다 10월이면 무천(舞天)이라는 추수감사제(주:제천행사)를 지냈으며 명주나 삼베 따위의 방직기술이 발달하였다. 반어피(班魚皮), 과하마(果下馬), 단궁(檀弓), 표범 가죽이 유명하였다. 광개토대왕 때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옥저[沃沮] : 우리나라 고대 국가 가운데 함경도 함흥 일대에 있던 나라. 또는 그 나라의 부족. 후에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위 <백과사전>의 설명과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의 지도로 보듯이, 예맥과 동예와 옥저 모두 한반도 내 강원도와 함경도 지방에 있었던 부족국가라는 설명인데 과연 그럴까? 이는 민족반역자 이병도로부터 이어지는 식민사학계의 이론인 반도사관일 뿐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과연 예, 맥, 옥저는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 실려 있는 동예와 옥저의 위치
예, 맥, 옥저에 관해 기록한 중국사서의 기록을 찾아보기로 하겠다.
- 삼국지 위서 권30 오환선비동이전 (三国志 魏书卷三十 乌丸鲜卑东夷传)
(번역) 고구리는 요동의 동쪽 천리에 있다. 남으로 조선(현)과 예맥에 접하고, 동으로 옥저, 북으로 부여와 접한다. 도읍은 환도의 아래에 있고, 넓이는 방 이천리, 가구 수는 3만이다. (高句丽在辽东之东千里。南与朝鲜·濊貊,东与沃沮,北与夫余接。都于丸都之下,方可二千里,户三万。)
(번역) 동옥저는 고구려(현)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으며 대해변(=황하변)에 있다. 그 지형은 동북쪽이 좁고 서남쪽이 길어 천리가 가능하며, 북으로 읍루와 부여와 접하고, 남으로 예맥과 접한다. 호는 오천이며, 대군왕이 없어 세세토록 읍락이며 각기 장수가 있다. 그 언어는 구려와 거의 같은데 때때로 다를 때도 있다.
한나라 초기 연나라 사람 위만이 조선에 망명하여 왕이 되었을 때 옥저가 거기에 속했다. 한무제 원봉 2년(B.C109) 조선을 정벌해 위만의 손자 우거를 죽이고 그 땅을 사군으로 나누었는데 옥저성이 현토군이 되었다. 후에 이맥족이 거기를 침입해 구려(현) 서북으로 옮겼는데 지금의 소위 현토 옛 부이고, 옥저는 여전히 낙랑군에 속했다.
(원문) 东沃沮在高句丽盖马大山之东,滨大海而居。其地形东北狭,西南长,可千里,北与挹娄、夫余,南与濊貊接。户五千,无大君王,世世邑落,各有长帅。其言语与句丽大同,时时小异。汉初,燕亡人卫满王朝鲜,时沃沮皆属焉。汉武帝元封二年,伐朝鲜,杀满孙右渠,分其地为四郡,以沃沮城为玄菟郡。后为夷貊所侵,徙句丽西北,今所谓玄菟故府是也。沃沮还属乐浪。
-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제75 (后汉书 卷八十五 东夷列传 第七十五)
<후한서 동이전>에도 위 <삼국지 동이전>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후한서 동이전> 동옥저는 고구려(현)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주> 개마는 현의 이름으로 현토군에 속하고, 그 산은 지금의 평양성 서쪽에 있다. (《后汉书东夷传》东沃沮在高名骊盖马大山之东,《注》盖马,县名,属玄菟郡,其山在今平壤城)
예.맥과 옥저가 낙랑군에 속했다는 <후한서 동이전>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번역) 예의 북쪽은 고구려(현)과 옥저에 접하고, 남쪽은 진한과 접하고, 동쪽으로 대해, 서로는 낙랑에 접한다. 예와 옥저와 구려는 본래 모두 조선의 땅이었다. 옛날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해 기자가 예의와 누에치기를 가르쳤고 또 8조의 가르침을 만들었다. 그 사람들은 도둑질 할 생각을 안했고, 문이 없이 열어놓고 지냈다. 부인들은 정숙하고 믿음이 있으며, 변두(도마)를 사용하며 음식을 지었다.
그 후 40여세가 내려가 조선후 준이 자칭 왕이 된다. 한나라 초기 대란이 있자 연, 제, 월 지방의 사람들이 피난간 자가 수만 명이다. 연나라 사람 위만이 준을 격파하고 스스로 조선의 왕이 되었다. 나라가 손자 우거에까지 전해졌다. 한무제 원삭 원년(B.C128) 예의 임금 남려 등이 우거를 배반하고 28만 가구를 이끌고 요동에 이르러 예속하기를 청하여 무제는 그 땅을 창해군으로 했다가 수년 뒤 없앴다. 한무제 원봉 3년(B.C108)까지 (번)조선을 없애고 낙랑, 임둔, 현토, 진번으로 나누어 4군을 설치했다. 한소제 시원 5년 임둔과 진번을 낙랑과 현토에 병합했다. 현토는 옮겨 구려(현)로 돌아갔다. 단단대령부터 이미 동쪽 옥저와 예맥 모두 낙랑에 속했다. 이로써 그 땅이 넓고 멀어 고개 동쪽을 7현으로 나누었고, 낙랑동부도위를 설치했다.
(원문) 濊北与高句骊、沃沮,南与辰韩接,东穷大海,西至乐浪。濊及沃沮、句骊,本皆朝鲜之地也。昔武王封箕子于朝鲜,箕子教以礼义田蚕,又制八条之教。其人终不相益,无门户之闭。妇人贞信。饮食以笾豆。其后四十余世,至朝鲜侯准自称王。汉初大乱,燕、齐、赵人往避地者数万口,而燕人卫满击破准,而自王朝鲜,传国至孙右渠。
元朔元年,濊君南闾等畔右渠,率二十八万口诣辽东内属,武帝以其地为苍海郡,数年乃罢。至元封三年,灭朝鲜,分置乐浪、临屯、玄菟、真番四郡。至昭帝始元五年,罢临屯、真番,以并乐浪、玄菟。玄菟复徙居句骊。自单单大领已东,沃沮、濊貊悉属乐浪。后以境土广远,复分领东七县,置乐浪东部都尉。
위 기록에 언급된 조선은 아래 <한서지리지> 기록에서 보듯이, 단군이 다스렸던 나라가 아니라 유주의 낙랑군에 속한 25개현 중의 하나인 조선현을 말하는 경우도 있다. 중국은 지명인 조선현과 고구려현을 때때로 나라인 조선과 고구리로 해석해 엄청난 역사왜곡을 해왔다. 우리가 위 <삼국지 동이전>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예맥은 고구리의 남쪽으로 낙랑군 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옥저 역시 낙랑군 땅에 있는데 그 위치가 예맥의 동북쪽임을 알 수 있다.
▲ 원래 황하 북부 하남성 일대에 있었던 낙랑군이 일제식민사학에 의해 한반도로 옮겨져 역사왜곡 되었다.
따라서 낙랑군의 위치를 알면 예맥과 옥저의 위치를 알 수 있다 하겠다. 낙랑군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낙랑군에 속한 패수의 위치를 추적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즉 낙랑군은 황하 북부 하남성 일대에 있었다. (아래 컬럼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제목) 조선과 燕나라의 경계인 패수(浿水)는 어디인가?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172§ion=sc6§ion2=
(乐浪郡 낙랑군) 武帝元封三年开。莽曰乐鲜。属幽州(유주에 속한다)。户六万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万六千七百四十八。有云鄣。县二十五:朝鲜(조선),讑邯,浿水(패수),水西至增地入海。莽曰乐鲜亭。含资,带水西至带方入海。黏蝉,遂成,增地,莽曰增土。带方(대방),驷望,海冥,莽曰海桓,列口,长岑,屯有,昭明,高部都尉治。镂方,提奚,浑弥,吞列,分黎山,列水所出。西至黏蝉入海,行八百二十里。东暆,不而,东部都尉治。蚕台,华丽,邪头昧,前莫,夫租。
▲ <수경주>에 기록된 패수는 낙랑군에 속했으며 동류하는 강인데, 이병도의 일제식민사학은 서류하는 청천강을 패수로 비정했다.
곧 이어지는 (23-4부)에서 예, 맥, 옥저의 정확한 위치가 밝혀집니다.
- 상기 컬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