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경상도 출토 고구려 유물이 말해주듯이 경상도는 고구려 강역이었고, 경주는 신라의 천년고도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신라를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 놓고 해석해야 여러 사서기록들이 성립된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 대표적인 경우가
나당연합군과 백제와의 전쟁과 해상왕 장보고에 대한 기록일 것이다.
신라 위치가 경상도가 아니라는 기록들
<조선왕조 세종실록>에 기록된 경상도 인구는 48,993호(173,759명)였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신라 전성기 때 도성의 인구가 178,936호라고 기록되어 있다. 1,300년 전 신라 도성만의 인구가 600년 전 조선왕조 초기 경상도 인구의 3.6배가 넘는다는 사실은 한마디로 지금의 경주가 신라의 도성이 아니었다는 말과도 같은 것이다.
<전진록(前秦錄)> 부견 건원 16년(380)에 “부락이 반란을 일으키자 사신을 보내 백제와 신라 등의 군사를 징발하고자 했으나 모두가 따르지 않았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고구리가 백제·신라의 북쪽에 버티고 있는 관계로 양국의 군대가 지나올 수 없음에도 전진이 황해 건너 한반도 남부에 있는 백제와 신라에게 파병을 요청했다는 기록이 상식적으로 성립될 수 없지 않은가!
<삼국사기 신라국본기> 박혁거세 38년(B.C20)에 “예전에 중국인들이 진(秦)나라의 난리에 시달려 동쪽으로 건너온 자가 많았는데 대개 마한(馬韓=백제 전신)의 동쪽에 자리 잡아 진한(辰韓=신라 전신)과 더불어 섞여 살았다. 그들이 지금까지 차츰 번창해졌으므로 마한이 시기해 호공의 문책이 있었던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의 예전 진나라의 난리란 진시황의 폭정과 장성축조부역에 이어 2세 호해의 공포정치에 반기를 든 진승과 오광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는 명분으로 하남성에서 일으킨 농민반란을 말하는 것이다. 현 사학계의 비정대로라면 위 기록은 진시황이 쌓은 만리장성과 농민반란이 일어난 하남성이 경상도 신라 가까이 있었다는 의미인데, 과연 그랬을까?
<통고>와 <북사>와 <신·구당서>에 “신라는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있다.”라는 기록과 <삼국사기>에 중국왕조들이 신라왕들을 ‘낙랑군공 신라왕(樂浪郡公新羅王)’으로 봉했다는 기록이 있어 신라와 낙랑은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할 것이다. <삼국사기>에도 신라 초기에 낙랑이 신라를 여러 차례 공격했다는 기록들이 있다.
<한서지리지>에 유주(幽州)에 속한 낙랑군(樂浪郡)에 패수(浿水)현이 속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패수의 위치가 밝혀지면 신라의 위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위서지형지>에 패수현은 하내(河內)군에 속했다가 떨어져 나간 무덕(武德)군에 속하는 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패수가 황하북부 하남성에 있었으므로 낙랑은 부근 산서성 남부에서 찾아야 마땅할 것이다.
장보고의 청해진으로 본 신라 위치는?
장보고와 청해진 이야기는 우리 역사의 실체를 조명하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장보고(?~846년)가 활동했던 시기는 고구려 멸망 약 170년 후이고, 후삼국의 후백제가 건국되기 약 50년 전으로, 이 시기를 통일신라시대라고 말하고 있으나, 고구리의 정통성을 계승한 대진국(발해)과 대치한 남북국시대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우리는 신라가 박혁거세의 건국 이래 줄곧 한반도 동남부(경상도)에 위치했고, 경주는 신라 천년의 고도로 배워왔다. 또한 신라는 당나라의 힘을 빌려 삼국을 통일한 후, 한반도에서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선으로 영토를 확정했다고 배웠다. 과연 그랬는지 지금부터 해상왕 장보고의 이야기를 통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삼국사기>에는 장보고의 출생지와 조상에 대해 알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인동장씨대동보에는 “장백익(張伯翼)의 자는 대호이며 중랑장우복사 벼슬을 지냈고, 본(本)은 절강성 소주 용흥부(蘇州龍興府)이다. 보고(保皐)의 자는 정집이고 어릴 때 자는 궁복(弓福)이다. 당나라 조정에서 우승상을 지냈고 동국(東國)으로 와서 청해진대사가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장백익이 신라로 귀화한 당나라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상해 서쪽에 있는 소주는 당시 신라 땅이었기에 장백익과 장보고는 원래 신라 출신으로 부자가 모두 당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한 것이다. <삼국사기>에도 장보고가 의제(義弟) 정년과 함께 당나라로 들어가 무령군 소장(武寧軍小將)이 되었는데 그들의 무예를 당할 자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당나라 무령군 절도사의 치소는 하남성과의 경계에 있는 강소성 서주(徐州)이다.
장보고는 훗날 고국 신라로 돌아와 흥덕왕을 뵙고는 “당나라를 둘러보니 우리 백성들을 노예로 삼고 있으니 청해를 지켜 해적들로 하여금 약탈한 신라인들을 서토로 데려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아뢰니 왕이 1만 명의 군사를 주어 청해진을 설치하게 했다. 이후로 해상에서 신라백성을 잡아가는 해적이 없어졌다고 한다.
장보고가 전라도 완도의 부속섬인 장도(將島)에 청해진을 설치해 당나라 해적들이 황해바다를 횡단해 한반도까지 와서 신라인들을 붙잡아가는 것을 막았다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어불성설로 현실적으로 100% 불가능하다.
당시 선박과 항해기술로는 육지에서 가깝게 항해하는 연안항해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청해진으로부터 약 750년 후인 임진왜란 때 일본수군이 좁은 명량의 율돌목으로 들어온 이유도 육지에서 먼 바다로 나가는 항해를 꺼렸기 때문이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해 신라인을 당나라로 잡아가는 해적들을 소탕했다는 말은 바로 신라가 대륙에 있었다는 의미인 것이다.
한편 장보고보다 날래고 강인했던 정년은 당나라에서 관직을 버리고 춥고 배고픈 몸이 되어 사수(泗水)의 연수(漣水)현에 머물게 되었다. 정연은 그곳을 지키는 장수 풍원규에게 “나는 동쪽으로 돌아가 장보고에게 몸을 의탁하려고 한다.”고 말하고는 청해진으로 찾아가니 장보고가 반가워서 같이 술을 마시며 즐거워했다.
사수는 산동성 곡부(曲阜) 우측 사수현에서 시작해 남쪽으로 강소성을 흐르다가 연수현 부근을 지나 회수(淮水)로 들어가는 강이고, 회하 부근에 있는 연수현은 현재 강소성 회안(淮安=淮陰)시의 직할현으로 옛 명칭은 안동(安東)이다. 이렇듯 대륙에 있는 지명들이다
장보고와 정년의 상봉연 술자리가 끝나기도 전에 도성에서 온 김우징과 김양이 “민애왕이 시해당하고 나라가 어지러운데 임금 자리가 비어있다.”면서 원병을 청하자, 장보고가 군사 5천명을 정년에게 주며 그의 손을 꼭 잡고 울면서 “그대가 아니면 능히 화란(禍亂)을 평정할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강소성 연수현에 머물던 정년이 청해진으로 오자마자 김양의 군사들과 함께 도성으로 진격해 정변을 일으켜 신문왕(김우징)을 세우니, 왕은 장보고를 불러 재상으로 삼고 청해진은 정년으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는 숨 막히는 이야기 전개가 신라도성이 경주였다면 과연 가능했을까?
신문왕이 즉위 후 바로 죽자 아들 문성왕이 즉위해서는 청해진대사 장보고를 승진시켜 진해(鎭海)장군으로 삼았는데, 여기서의 진해는 경상도 진해가 아니라 아래 <중국고대지명대사전>의 설명처럼 상해 남쪽에 있는 절강성 영파(寧波)의 주산(舟山)이다. 아마 이곳이 장보고의 청해진이고 후기 신라의 도성은 절강성 항주(杭州)일 가능성이 아주 크다.
“진해현 : 당나라 군현의 땅, 오대시대 양나라 때 오·월이 망해현(望海县)을 설치했고, 송나라 때 정해(定海)로 고쳤고, 청나라에서 주산에 정해현을 설치해 옛 정해를 진해로 바꿨다. 절강성 영파부에 속했다가 민국 초기 절강성 회계(会稽)도에 속했다.”
다음 주에 이어집니다.
- 상기 컬럼은 본지의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