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 이후의 논쟁거리들에 대하여 ”
2020년은 코로나 19로 세상이 뒤숭숭하다.
21세기에 들어오면서 감염 병의 전성시대라 아니할 수 없다. 사스도 그렇고 메르스도 그리고 코로나 19까지 감기바이러스의 창궐로 말미암아 인류 문명의 대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아직도 음모론적인 의심을 벗어던지기엔 꺼림직 한 현상이 도처에 남아있으나 지식 정보화 사회라는 큰 틀에서 보면 도도한 흐름이 우리들의 앞에 훨씬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인류가 자연의 정점에 이르게 한 이유 중의 하나가 협동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협동의 기저에는 대면이라는 스킨십을 전제로 가능했다.
자연의 절대 약자인 인간이 서로 협동하면서 자연의 난관을 극복해온 지난한 역사가 존재한다. 협동이란 말도 전에는 없던 말일께 다. 인간의 창의적 부산물이 협동이고, 보편적 가치인 사랑과 평화 등도 또한 인간의 창의적 활동으로 생긴 보편성을 띤 가치의 하나라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의 창의성 역사 속에서 새로운 복병이 등장했으니 코로나 19를 포함한 바이러스의 창궐을 들 수 있다. 어떤 난관과 고난 속에서도 인간은 창의성을 바탕으로 보편적인 가치를 유지시키면서도 새로운 역사를 써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코로나 19로 인하여 대면 관계가 축소되기 시작했다. 사람이 만나지 않고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는 가지도 않고 랜선 문화가 도입되고 있다. 드라이브 스루가 보편화되고 콘서트도 랜선 콘서트가 열리며, 급기야는 진료도 비접촉진료의 제도화를 하려고 한다.
벌과 나비 그리고 넓게는 사람과 자연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생태계가 전면적인 변화를 목전에 두고 있는 이 시점에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지 성찰하고 고민할 필요가 있다 하겠다. 기계가 전면적으로 도입된 산업혁명시대만큼이나 파급력이 클 거라고 믿는 사람에서부터 복제의 시대가 곧 다가올 것처럼 외쳤지만 끝은 미약하고 찾잔 속의 태풍으로 끝날 것이라고 강변하는 사람들까지 다양하다. 인간에게 다가온 지식정보화 사회가 과연 젖과 꿀을 보장하는 가나안 땅이 될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편견과 비자유가 넘치는 우주탐사대가 될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
부모를 보면서 부모처럼 살기 싫었다는 다짐도 해보았고, 아이들을 보면서 교육은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쯤은 알 나이가 되었는데 새로운 가치의 충돌의 지점에 서있기조차도 어지럽다. 그동안의 가치 속에 충실하고자 노력했던 지금까지의 내 모습이 전혀 새로운 가치의 출현 속에 불안해하고 서두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지식 정보화 사회가 인간의 창의성을 지속적으로 발현시키는 도구가 되길 바란다. 또한, 인간의 창의성이 거세되는 지식 정보화 사회가 아니길 진심으로 바란다.
하지만 그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이다보니 당황스럽고 혼란한 것은 사실이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가야만 할 것 같다. 참 그러고 보면 내 인생은 험난함의 연속이다. 지금까지 쉬어 가거나 남의 길을 따라간 적이 없는 것 같다. 대면과 비대면의 갈림길에서 나는 대면의 길을 가련다.
신은 결코 인간을 버리지 않을 것라 믿기 때문이다. 사람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 사람은 자연을 만나야 한다. 사람은 사회를 만나야 한다. 어려울 때마다 인간은 만나면서 역사를 창조하였고 창의성을 발휘하면서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만들어 왔으니 말이다.
필요이상의 만남은 아닌지 자문하게 하는 감염 병의 시대가 되어야지 만남 자체를 없애는 시도는 지양되어야 마땅하다. 우리는 만남 속에서 창조가 생기고 역사가 생기고 변화가 생긴다는 사실을 알고 가셨으면 좋겠다.
21세기 감염 병이 도래한 것은 만남을 없애라는 것이 아닌 빠른 만남을 성찰하고 늦은 만남으로 속도 조절을 하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인류의 역사는 오래되었지만 자본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21세기도 우린 만나야 한다. 좀 더 천천히 좀더 성찰하는 만남이 되었으면 한다. 빠른 만남은 만남이 아니란 걸 바이러스가 웅변하고 있음을 우린 성찰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계속 만나 창의성을 발휘하면서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유지하고 발현시켜야 마땅하다. 그게 나의 소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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