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2. 백년설〈번지 없는 주막〉〈나그네 설움〉(2021.05.24.)
오늘은 필자에게는 뜻 깊은 날입니다. 1980년 4월 1일 ‘양주군(楊州郡)에서 남양주군(南楊州郡)이 분군(分郡)되어 치뤄진 지방 5급 을류(지금의 9급) 선발 시험을 거쳐 남양주군 공무원으로 발령 받은 날입니다. 벌써 40년이 지나 명예퇴직했지만… 80년 5월 24일, 오이 사이소! 오이 사!
〈번지 없는 주막〉박영호 작사, 이재호 작곡, 백년설(본명 이창민)이 1940년 발표한 곡입니다.
1940년 당시 헐벗고 굶주리던 동포들의 통한이 담겨져 있는 노래가〈번지 없는 주막〉입니다.
나라가 없는데, 어찌해 거처할 집이 있겠는가? 그래서 주막조차 문패도 번지수도 없었습니다.
「1940년 그해 여름은 몹시 뜨거웠다. 작사가 박영호(필명 처녀림, 불사조)는 태평레코드사의 문예부 부원들과 함께 백두산에 오른다. 고된 등정길이었다. 백두산은 역시 민족의 성산(聖山)다웠다. 가파르고 험준한 고개와 골짜기가 앞을 가로 막았다. 일행이 산 중턱에 도착했을 무렵, 비를 만났다. 너무 지친 나머지 비도 피할 겸해서 어느 주막에 들른다. 이른바 ‘아리랑 술집’이었다. 통나무를 베어 흙을 발라 추위와 비바람을 겨우 면할 수 있을 만큼 얼기설기 지은 집이었다.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던 주막 주인은 그래도 나그네를 반갑게 맞이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밤이 으슥하도록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주인이 내놓은 도토리 술은 도토리를 가루로 빻아 누룩에 담근 술이었다. 밖에는 여름비가 하염없이 퍼붓고 있었다. 호롱불을 줄이면서 비를 바라보고 있던 박영호는〈번지 없는 주막〉노래시를 쓴다. 기막힌 심정이었다. 만주 이민사를 다룬 ‘등잔불’을 썻던 작사가 박영호는 황폐한 조국 산하를 이렇게 노래시로 읊었다. 그는 피폐하고 황폐한 우리 사회를 ‘번지 없는 주막’에 비유했고, 이 때의 비참한 심정과 울분을 노래에 쏟아 부었다.」 (2013년 발간된 정두수 선생님의 ‘노래따라 삼천리’에서 발췌했습니다.)
– 번지 없는 주막 – 박영호 작사, 이재호 작곡(1940년)
1절,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 / 궂은 비 내리는 이 밤이 애절구려
능수버들 휘늘어진 창살에 기대어 / 어느 날짜 오시겠소 울던 사람아
2절, 석유등 불빛 아래 마주 앉아서 / 따르는 이별주에 밤비도 처량구려
새끼 손을 걸어 놓고 맹세도 했건만 / 못 믿겠소 못 믿겠소 울던 사람아
3절, 아주까리 그늘 아래 가슴 조이며 / 속삭이던 그 사연은 불같은 정이었소
귀밑머리 쓰다듬어 맹서턴 그 시절이 / 그립구려 그리워요 정녕 그리워
주막(酒幕), 독자에게는 참 정겨운 단어입니다. 사극을 보면 동네 사내들이나, 길가던 나그네, 과거 보러 가던 선비, 때로는 암행어사와 백성들의 삶을 잠행하던 상감마마 수행원까지 정겹게 부르던 말 “주모, 여기 국밥에 탁배기 한 잔 주소” 캬! 정겨운 소리… 조선시대 인천에서 한양으로 가던 소사와 오류동에 많았었고,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던 문경새재에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천안삼거리와 섬진강 나루터 화개장터 등 주로 장터와 큰 고개 아래의 길목, 나룻터, 광산촌 등에 성업했던 주막의 기원은 신라시대까지 올라가는데, 김유신이 말의 목을 벤 곳이 천관(天官)이 술파는 집이었다는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볼 수 있다는 추론입니다.
우리나라의 마지막 주막(酒幕)은 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에 있는 ‘삼강주막’입니다. 삼강나루 나들이객에게는 허기를 면해주고, 보부상들의 숙식처였으며, 시인묵객들의 안식처인 ‘삼강주막’
1900년 경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 주막은 2005년 마지막 주모 유옥연 할머니가 90세로 생애를 마쳐 방치돼 있다가, 2007년 건축역사 자료로서의 희소성과 옛 시대상을 읽을 수 있는 문화적 의의를 간직한 옛 모습을 그대로 복원해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34호로 지정됐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전쟁에 소요되는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혜산진 철도(성진〜혜산, 길이 141km)를 개통하는데, 그 해 5월 만주의 동북항일연합군은 갑산군 혜산진 소재 보천주재소를 습격하여 전국에 삼엄한 경계령이 내려졌고, 이들을 색출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1938년 12월 어느 날 작곡가 나화랑(본명 조광환)의 형인 작사가 고려성(본명 조경환)은 가수 백년설과 함께 세종로 골목길 허름한 선술집에서 울적한 심사를 한 잔 술로 달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종로경찰서에 잡혀가 조사를 받았다. 작년 5월에 허가해 준 해산진 공연을 왜 제 날짜에 하지 않았느냐고 밤샘조사를 받았던 것입니다. 보천주재소 사건 수사에 혈안이 된 고등계의 한국인 형사가 이 사소한 사건을 그 사건과 결부시킨 것입니다. 경성에서 3월에 떠난 고려성의 태평악극가무단은 5월 늦은 봄에 함흥에 도착한다. 궂은 날씨 탓도 있었지만 백년설의 폭발적인 인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공연을 연장해야 하였고, 자연히 혜산진 공연도 순연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는데, 그 무렵 혜산진 소재 보천주재소 사건이 터졌던 것입니다.
(고려성은 일본 와세다대학시절부터 반일 행동으로 일본경찰 불순분자 리스트에 올라있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이 태평악극가무단을 의심하고 있다고 생각한 조선인 밀정의 거짓 제보였다.)
그 기에다 백년설의 노래가 대중들의 사랑을 받자 노래 가사의 눈물, 사랑, 고향 등이 일제에 반항하는 내용이 들어 있을 것이라 여겨 요시찰 대상으로 지목을 하고 있었던 것도 있습니다.
그 보다는 같은 핏줄인 동족의 제보에 의한 것이었던 것에 대한 울분, 나라를 잃은 서러움 등이 그들의 마음을 더욱 차겁게 했다. 이에 백년설은 “형님 언제부터 낯익은 서울거리가 이국보다도 더 살벌해졌습니까? 하고 울분을 토했다. 그 때까지 술잔만 기울이며 울분을 삭이던 고려성이 갑자기 양복주머니를 뒤적였다. 수첩을 찾았지만 고등계 형사에게 다 빼앗겨 있을 턱이 없었다. 고려성은 잠시 망설이던 끝에 호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집어 내어 거기에다 즉흥적으로 가사를 쓰기 시작했다. 바로 이 순간이 불멸의 명곡인〈나그네 설움〉이 탄생하게 된 배경인 것입니다.
– 나그네 설움 – 고려성 작사, 이재호 작곡(1940년)
1절, 오늘도 걷는다 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 지나 온 자죽마다 눈물 고였다
선창가 고동 소리 옛 님이 그리워도 / 나그네의 흐를 길은 한이 없어라
2절, 타관 땅 밟어서 돈지 십년 넘어 반평생 / 사나이 가슴속엔 한이 서린다
황혼이 찾어들면 고향도 그리워져 / 눈물로 꿈을 불러 찾어도 보네
3절, 낯익은 거리다 마는 이국보다 차워라 / 가야 할 지평선엔 태양도 없어
새벽 별 찬 서리가 뼈골에 스미는데 / 어데로 흘러가랴 흘러갈소냐
1978년 3월 17일 미국 LA에 있는 ‘TV한국’ 방송에서 김영우 아나운서와의 대담에서 가수 백년설이 직접 말씀하신〈나그네 설움〉에 얽힌 비화 “에, 그때는 바로 제가 바로 데뷰해서 3년이 채 안됐을 때입니다. 2년이 지났을까 하는 정돈데요. 에, 사실 제가 그 레코드계로 데뷔한 것은 과거에 요시찰이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도피처라고 할까요. 에, 역시 그때 저도 그런 이상스런 혐의를 받고 지금 서울에 치안본부 자리가 옛날에 경기도 경찰부거든요. 2층이 바로 외사괍니다. 거기에 불려 갔댔어요. 제가 불려가서 밤 11시 쯤이나 해서 이제 풀려났습니다. 혐의가 풀려서 그때 나오니까 아까 그 그림에 나와 있는 그 조경환씨 작사자가 대기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두 사람이 광화문 사실 그 요즘에는 서울 광화문이라는 게 굉장히 번창합니다’ 만은 그때 당시만 하더라도 그 전차가 끊어질 무렵에 이거 이 인적이 끊어질 무렵에 광화문이라는 것은 쓸쓸했습니다. 네, 그래서 그 광화문 그 근방에 어떤 그 주점에 들어가서 둘이서 대포를 마셨어요. 마시면서 그 담배 껍질에다가 이제 이 메모를 한 겁니다. 낙서를 한 거예요. 낮 익은 거리다 마는 이국 보다 차워라 그 광화문 거리라는 것은 낮 익은 거리 아니예요? 하지만은 그 날따라 그 아주 그 매서운 말이지 문초를 당하고 나오니까 이 땅이 누구네 땅이냐 이 말이죠. 소위 일본 사람이 주인이 되고 우리는 나그네가 되었다. 이제 그런 의미에서 이국 보다 차워라 가야 할 지평선엔 태양도 없어 새벽 별 찬서리가 뼈골에 스미는데 어데로 흘러가랴 흘러갈 소냐. 그때 그 조선사람들의 심정이 그렇지 않았어요? 네, 정말 설 땅이 점점 좁아지고 상그러워졌을 그 무렵을 그대로 그린거죠. 제가 그 담배 껍질에다 한 줄 썼드니 그랬더니 그 작사자인 조경환씨가 여보! 그거 노래나 한 번 만듭시다. 그래서 그 다음에 쓴 것이 타관 땅 밟아서 돈지 십년 넘어 반 평생…” 그로부터 2년이 지난 백년설은 LA에서 생애를 마쳤습니다.
7회차 이미자 선생님의〈님이라 부르리까〉에서도 소개한 바 있는, 작사가 고려성의 본명은 조경환. 나화랑의 큰형(나화랑은 셋째)으로「경상북도 금릉(김천)에서 부잣집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수재이고 미남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당시 조선 학생들이 선호하던 법대를 마다하고 문과를 택할 만큼 보통 고집쟁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백년설의 고향은 금릉과 이웃해 있는 경상북도 성주(특산물 성주참외)였고, 그는 원래 배우 지망생이었다. 두 사람은 죽이 잘 맞아 문학과 연극에 대해 토론하며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고려성이 태평레코드사 문예부장이 된 인연으로 백년설은 가수로 데뷔했다.(2013년 정두수 선생님의 ‘노래따라 삼천리’에서 발췌.)
또한, 1939년 7월 29일부터 이틀간 조선일보사와 태평레코드사 공동 주최 ‘태평레코드 예술상 전국 콩쿨대회’를 김천극장에서 유치 1위 진방남(1916년〜2012년 본명 박창오 예명 반야월, 경상남도 마산 출생)과 2위 태성호(본명 이성호 경기도 이천 출생, 1942년〈삼각산 손님〉), 3위 백난아(1925년〜1992년 본명 오금숙 제주 출생, 1942년〈찔레꽃〉)을 배출한 가요 프로듀서.
보너스 하나, 문연주의〈삼강주막〉입니다. 강민주〈회룡포〉와 함께 경북 예천군 노래입니다.
–〈삼강주막〉– 김병걸 작사, 김인철 작곡, 문연주(2014년)
1절. 술타령 한나절에 꺾어지는 저 세월 / 강물도 취하는가 비틀비틀 흘러가는 한 세상
주고받는게 술잔뿐이더냐 가슴에 정을 끄집어내어
삼강나루 주막집 봉놋방에 풀어놓으면 / 아아 꿈같은 꿈같은 하루가 또 간다
2절. 회룡포 저녁 바람에 붉게 타는 저 노을 / 쫒기며 사는 세상 한 박자만 쉬어가자 인생아
주고받는게 술잔뿐이더냐 가슴에 사연 끄집어내어
삼강나루 주막집 들창문에 걸어놓으면 / 아아 꿈같은 꿈같은 하루가 또 간다
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 삼강나루에 있는 ‘삼강주막’. 그 곳엔 나루와 주막(酒幕), 주모(酒母)라는 3박자의 전통 정서가 있습니다. 푸지고 끈덕진 애환이 스며있는 곳, 그 곳에 삼강주막이 있었습니다. 삼강(三江) 말 그대로 세 개의 강이 만나는 곳, 내성천이 금천을 끌어안고, 그 내성천을 낙동강이 끌어안으니 삼강입니다. 거기에다가 삼산(三山)이 있으니 동쪽에는 학가산(해발 882m), 서쪽에는 주흘산(해발 1108.4m), 남쪽에는 팔공산(해발 1192.3m)인 것입니다.
유옥연(1916년〜2005년)할머니, 삼강주막 마지막 주모(酒母) 일명 ‘뱃가할매’라 불렸습니다. “뱃가할매요. 나 왔소!”하고 주막 평상에 앉으면 술과 안주가 나왔습니다. 기분이 좋으신 날엔 술뿐만 아니라 이야기 보따리도 함께 풀렸다고 합니다. 현재 복원된 ‘삼강주막’ 주모는 아지매.
유옥연 할매가 들려주는 생생한 목소리. “1932년 16살이 시집와 서른네 살때 사별을 하고 홀로 주막을 지켰지. 오남매를 키워 시집, 장가 다보냈고 여 주막한지가 50년이 넘었어. 여 주막이 한창일 때는 1960년대였지, 그때는 낙동강에 배가 끊이지 않았지. 여 삼강나루도 큰 배, 작은 배해서 두 채나 있었지. 통선인 작은 배는 주로 사람을 실어 나르고, 큰 배는 짐을 싣고 소도 다섯, 여섯마리 씩 들어갔어 여기는 차가 없어서 주로 왜관에서 낙동강을 따라 올라왔지. 늦은 봄이되면 장담기를 하니까 소금을 가득 싣고 안동까지 배가 올라갔지 배가 내려 올 때는 나락(벼)을 사서 왔고, 소금하고 나락을 바꾼거지. 이 아래에 백포나루가 있고, 더 내려가면 하풍나루가 있지, 저 위로가면 우망나루가 있고, 그 위에 예천 지보장에서 물건 들을 사고 그랬어.
우리 클적엔 낙동강 칠백리 참 소용없는 물이라 캤는데, 지금은 천수답이었던 논도 큰 양수기 3대를 설치해 옥답이 다 됐어. 또 농사뿐만 아니라 식수도 되지, 공장도 돌리지, 요샌 이 물 없으면 못 살지, 암 못 살고말고. 영남사람이 마카 이 물 묵고 안사나. 제방 생긴 뒤로 큰물 진다고 캐도 걱정은 안돼 좋다만, 난 제방 놓으니 더 안좋아. 제방 없을 적에는 주막 마루에 앉아 강을 보면 세 강과 세 산이 합쳐지는 기 훤히 내다보이고 해서 참 볼만했어. 삼강나루와 삼강 이야기는 내가 뭐 무식해서 잘 몰라. 우리 웃대부터 어른들이 그카더만. 여는 산이 세 개, 강이 세 개가 모이는데 산은 남짝으로는 대구의 팔공산, 서짝으로는 문경의 주흘산, 동짝으로는 안동의 학가산이 마카 여로 와가 딱 떨어졌다 그러더만. 강은 안동짝에서 내려오는 낙동강과 문경짝에서 내려오는 금천, 영주 예천짝에서 내려오는 내성천이 모여서 삼산, 삼강이라 카지.”
☞ 백년설(白年雪 1914년~1980년, 본명 이갑룡, 이창민, 필명 향노, 이향노, 경북 성주 출생) 부인 : 심연옥〈아내의 노래〉〈한강〉〈시골버스 여차장〉〈야래향〉〈도라지 맘보〉 등
성주농업보습학교(현 성주중·고교) 졸업 후 일본에 유학 중 고베에서 태평레코드사 문예부장
박영호와의 운명적 만남으로 1939년〈유랑극단〉을 취입하여 인기가수 반열에 올랐습니다.
1939년〈유랑극단〉〈두견화 사랑〉 1940년〈나그네 설움〉〈번지없는 주막〉〈일자일루〉〈산팔자 물팔자〉〈어머님 사랑〉1941년〈고향길 부모길〉〈대지의 항구〉1942년〈고향설〉
1958년 대한가수협회 초대회장, 1963년 7월 10일 은퇴공연(시민회관), 2002년 문화훈장 보관장
☞ 작사가 박영호(1911년〜1953년 예명 처녀림 불사조 김다인, 강원 통천 출생)
1936년 고복수〈짝사랑〉, 1937년 남인수〈물방아 사랑〉, 장세정〈연락선은 떠난다〉
1938년 박향림〈오빠는 풍각쟁이〉박향림/남일연/신희춘〈타국의 여인숙〉1939년 백년설〈유랑극단〉1940년 백년설〈번지없는 주막〉, 1941년 백난아〈직녀성〉백년설〈만포선 길손〉
☞ 작곡가 이재호(1919년〜1960년, 본명 이삼동 예명 무적인, 경상남도 진주 출생)
대중음악 작곡가로 작곡과 편곡, 연주 실력을 고루 갖추고 있어 “가요계의 슈베르트”라고 불렸다.
1938년 무적인이라는 예명으로 콜롬비아레코드사를 통해 첫 히트곡인〈항구에서 항구로〉 (박향림)을 발표 이름을 알렸고, 다음 해 태평레코드사로 옮긴 뒤, 예명을 이재호로 했습니다.
1996년 10월 21일 방영된 가요무대 ‘이재호 특집’에서 문화훈장 보관장이 추서되기도 했습니다.
가요무대 시작 전 아나운서 나레이션에서는,「한국에 뿌리내려온 대중가요의 80년의 역사 그 수많은 뭇별들 중에서도 지금도 이 땅에 가요가 우리 국민과 함께 사랑받고, 숨쉬는 한, 영원히 빛날 큰 별이 있으니 그가 바로 천재 작곡가 이재호(한국가요의 슈베르트)입니다. 나라를 잃어 암울하고 고통스러웠던 일제시대, 감격의 해방을 맞으면서 기쁨에 들떠있던 혼란기, 또 동족상잔의 쓰라린 6.25전쟁 등 질곡의 세월을 거치면서 그때마다 주옥같은 선율로 민족의 가슴에 맺힌 한을 풀어주고 애환을 달래줬습니다. 좌절 속에서도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게 해준 그의 작품들은 우리 가요를 한층 아름답고 빛나게 장식합니다. 이재호 선생이 가요 속에 남긴 겨레 사랑의 따뜻한 숨결은 우리 민족이 있는 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
1938년 박향림〈항구에서 항구로〉1939년 한국 최초의 직업가수 채규엽이 부른〈북국 5천K〉
1940년 백년설〈나그네 설움〉〈번지없는 주막〉진방남〈불효자는 웁니다〉고운봉〈남강의 추억〉1941년 진방남〈꽃마차〉백년설〈대지의 항구〉1946년 이인권〈귀국선〉1950년 박재홍〈물레방아 도는 내력〉1952년 남인수〈산유화〉1953년 박재홍〈경상도 아가씨〉〈향수〉1954년 금사향〈홍콩 아가씨〉, 1956년 이해연〈단장의 미아리고개〉, 남인수〈무정열차〉 1957년 손인호〈울어라 기타줄〉 권혜경〈산장의 여인〉 1958년 최갑석〈고향에 찾아와도〉
1960년 작곡가 이재호가 타계하자 곧 바로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는 타이틀의 추모앨범이 나왔습니다. 내용중 일부를 살펴 보면,「일제하 망국의 설움을 노래한 ‘오늘도 걷는다만은.’의 나그네 설움, 지도상에서 사라져 버린 나라를 탄한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로 시작되는 ‘번지 없는 주막’ 우리의 옛 국토 고구려의 하늘 밑을 달리는 ‘노래하자 하루삔, 춤추는 하루삔’의 ‘꽃마차’ 되찾은 광복의 기쁨을 가슴 벅차게 노래한 ‘귀국선’, 6.25 참상을 생생하게 고발한 ‘단장의 미아리고개’」,「휴전 후 서울로 올라온 이재호는 이후 ‘홍콩아가씨(금사향)’ ‘물방아 도는 내력(박재홍)’ ‘단장의 미아리고개(이해연)’ ‘아네모네 탄식(송민도)’ ‘울어라 기타줄 (손인호)’ 등을 잇달아 발표하였고, 당시 대중가요를 저급문화로 보는 일부 지식층을 겨냥해, 남인수가 노래한 ‘산유화’를 작곡, “이래도 대중가요를 천시하겠는가?”라며 대중가요에 대한 일부 시각에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고도 전해집니다.」 잠시 진주중학교 음악교사로 재직할 때 제자가, 1962년 가수 현미의 데뷔곡〈밤안개〉를 비롯해〈맨발의 청춘〉〈안개〉〈무인도〉〈떠날 때는 말없이〉등 수많은 노래도 작곡했고, 현미의 남편이었던 색소폰연주자 겸 작곡가인 이봉조(1932년〜1987년, 남해 출생)인데, 대중가요는 못 부르게 하고 동요만 부르게 했답니다.
다음엔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가거라 삼팔선〉〈삼팔선의 봄〉에 대한 글을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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