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 14.〈전우야 잘자라〉〈전선야곡〉〈비목〉(2021. 6. 7.)
어제(6일)은 ‘현충일’ 기념일 이었습니다. 각 가정마다 조기를 게양하셨으리라 믿고 있습니다.
구리시에서는 어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관계로 자율적으로 현충탑 참배를 실시했습니다.
‘현충일’은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국군 장병들과 호국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지정된 법정 기념일,
1956년부터 6월 6일(24절기 중 9번째 절기 ‘망종’이 6월 6일 무렵)을 지정해 기념하고 있습니다.
1953년 9월 29일 서울 동작동에 국군묘지 설치 확정, 1955년 7월 15일 국군묘지관리소 발족,
1956년 4월「국군묘지설치법 제정」과 4월 19일「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을 개정해서
6월 6일을 ‘현충기념일’로 공포했으며, 1975년 12월 공식적으로 ‘현충일’로 개칭, 1982년에는 공휴일로 지정 1988년부터 현충일 추념식과 참배행사를 국립현충원에서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오전 10시 정각 싸이렌 소리와 동시에 전국민은 1분간 경건히 묵념하며 순국선열과 호국선열을 추모합니다.」 매년 ‘현충일’이 되면 ‘동작동 국립묘지’ 현충탑을 비롯해 전국 지방 자치단체별로 세워진 현충탑에서 ‘현충일 기념식’이 개최되고 있는데, 구리시에서도 매년 개최하고 있습니다.
「구리시 현충탑」: 구리시 동구릉로66번길 29(인창동 313-29 인창중앙공원)에 1991년 6월
6.25전쟁 때 전사한 호국영령 87위(육해공군, 경찰, 애국단원, 노무자)를 추모하고, 그 숭고한
애국 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현충탑을 건립하였습니다.(독자의 손위 동서댁 땅이었음)
〈전우야 잘자라〉,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1950년 현인이 취입해서 불렀던 노래입니다.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직후, 작사가 유호(필명 호동아)는 피난을 가지 못해서 청파동의
집에서 지내던 어느날 오랜만에 외출하여 명동을 거닐다가 우연히 밀짚 벙거지모자를 푹 눌러
쓴 작곡가 박시춘을 만납니다. 박시춘도 피난에서 돌아와 가족을 필동의 집으로 보낸 후 명동이
그리워 나온 길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명동의 한 선술집에서 통음(痛飮)을 하게되고, 박시춘의
집으로 함께 걸어가서 밤새워 술을 마시며 해방 후 방송국 시절과 전쟁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하던 중 술이 얼큰한 기분에 박시춘은 “북진통일이 가까워졌으니 군인들 사기를 북돋울 노래
를 만들자”고 제안해 박시춘이 기타를 퉁기고, 유호는 오선지에 멜로디와 가사를 적어 하룻밤
사이에 만들었다는 일화가 있는 노래가〈전우야 잘자라〉입니다. 그 당시 국방부에서 제정한
정식 군가는 아니었지만 국군에게 애창된 진중가요(陣中歌謠)였고, 국민들이 함께 불렀던 국민
군가(國民軍歌)였습니다.
1절은 연합군과 국군이 승기를 잡은 낙동강 전투, 2절은 추풍령 돌진,
3절은 한강과 서울의 수복, 4절은 삼팔선을 향한 진군을 노래에 담았던 곡입니다.
1947년 HLKA(현 KBS)에서 맺어진 인연(1947년〈신라의 달밤〉1948년〈비내리는 고모령〉)이 있는
작사가 유호와 작곡가 박시춘, 가수 현인은 또다시 콤비가 돼 만들어 낸 명가요. 서울이 수복
되면서 제일 먼저 방송전파를 타고, 국군장병 위문공연에서 단골로 불린〈전우야 잘자라〉는
6·25전쟁중엔 승리를 기원하며 불렀고, 전쟁 후엔 통일을 기원하면서 불렀던 국민가요입니다.
–〈전우야 잘자라〉–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현인(1950년)
1절.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 앞으로 앞으로 / 낙동강아 잘있거라 /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 꽃잎처럼 떨어져 간 전우야 잘자라
2절. 우거진 수풀을 헤치면서 / 앞으로 앞으로 / 추풍령아 잘있거라 / 우리는 돌진한다
달빛 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 / 화랑담배 연기속에 사라진 전우야
3절. 터지는 포탄을 무릎쓰고 앞으로 앞으로 / 한강수야 잘있거라 우리는 돌진한다
흙이 묻은 철갑모를 / 손으로 어루 만지니 / 떠 오른다 내 가슴에 / 꽃같이 별같이
–〈전우야 잘자라〉(원곡, 元曲) –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현인(1950년)
1절.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 낙동강아 잘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 꽃잎처럼 떨어져 간 전우야 잘자라
2절. 우거진 수풀을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 추풍령아 잘있거라 우리는 돌진한다
달빛 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 /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3절. 고개를 넘어서 물을 건너 앞으로 앞으로 / 한강수야 잘있더냐 우리는 돌아왔다
들국화도 송이송이 피어나 반기어 주는 / 노들강변 언덕 위에 잠들은 전우야
4절. 터지는 포탄을 무릅쓰고 앞으로 앞으로 / 우리들이 가는 곳에 삼팔선 무너진다
흙이 묻은 철갑모를 손으로 어루 만지니 / 떠오른다 네 얼굴이 꽃같이 별같이
그러나, 국방부 정훈국을 통해 전군에 보급돼 군인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던〈전우야 잘자라〉는
1951년 1·4후퇴 후 ‘화랑 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구절이 불길하다면서 육군본부에서
금지곡으로 지정을 했고, 휴전 이후에 해금돼 6.25 참전용사들과 국민들의 애창곡이 됐습니다.
☞ 현인(玄仁), 1919년 부산에서 태어나 2002년 작고하신 가수 현인의 본명은 현동주입니다.
1938년 경성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1942년 우에노 음악학교에서
성악과 플루트를 배웠습니다. 광복 후 귀국해서 ‘고향음악단’을 만들어 UN군 위문공연을 했고,
팝송을 부르며 극장무대에서 활동하던 중 작곡가 박시춘의 권유로 대중가수가 되어 1947년
〈신라의 달밤〉음반을 제작 발표해 ‘대한민국 가수 제1호’로 불리웠습니다. 1948년 시공관
무대에서 첫 발표된〈신라의 달밤〉은 아홉 번 앵콜을 받았던 일화로도 유명했고, 특유의 창
법으로 가요계에 새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이듬해〈비내리는 고모령〉을 발표해 국민들이 아픈
실향의 기억을 되살리게 하는 국민가수로 떠올랐습니다. 또한 샹송, 칸초네, 탱고, 맘보 등의
서양의 새로운 음악들을 국내에 들여오기도 했고, 1947년 한 해 동안 그는 박시춘, 유호와 손
잡고 무려 5곡을 히트시키면서 ‘현인시대’를 열었습니다. 〈굳세어라 금순아〉는 전쟁의 아픔을
간직한 국민들에게 삶의 의지를 심어줬고, 월남한 가족들의 애창곡이 됐습니다. 현인이 부른
대표적인 노래, 1947년〈신라의 달밤〉1948년〈비내리는 고모령〉〈푸른언덕〉1949년〈고향
만리〉〈럭키 서울〉〈베사메 무쵸〉〈육탄 10용사〉〈인도의 향불〉1950년〈전우야 잘자라〉
〈서울야곡〉〈애정산맥〉1951년〈굳세어라 금순아〉1953년〈비의 탱고〉1956년〈꿈속의 사랑〉
〈나포리 맘보〉1957년〈즐거운 여름〉1959년〈꿈이여 다시한번〉1960년〈불국사의 밤〉
1963년〈체리핑크 맘보〉1947년 유동일 감독 영화 ‘푸른 언덕’ 주연배우, 1965년 악극 ‘춘향전’
이도령 역할, 1999년 대한민국 화관문화훈장 수상, 2000년 경주 불국사 앞에〈신라의 달밤〉
노래비 건립, 2003년에는 부산 영도다리에 동상과〈굳세어라 금순아〉노래비가 건립됐습니다.
〈전선야곡(戰線夜曲)〉,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1952년 신세영이 취입해 발표한 곡입니다.
1951년 10월 어느 날〈전선야곡〉을 녹음하던 신세영은 그 날, 어머니가 작고하셨다는 비보를
접하고 목이 메인 상태로 녹음을 했고,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에 북받혀
목이 메었다고 합니다. 진중가요(陣中歌謠)〈전선야곡〉은 6.25.전쟁에 참전한 장병들을 위로
하기위해 만들어진 노래였고, 노래가 전파되자 군인들의 ‘불멸의 보초가’로 병영막사에서 군가
보다 많이 불렸습니다. 전선에서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그리는 심정을 고스란히 담아 그 시절
군인들은 물론 국민들의 심금까지 울렸습니다. 특히 ‘어머님의 흰 머리가 눈부시어 울었소’ 하는
대목에서는 더욱 가슴이 북받쳐서 부르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함께 소리 내어 울었다고 합니다.
– 전선야곡 –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신세영(1952년)
1절. 가랑잎이 휘날리는 / 전선의 달밤 / 소리없이 내리는 / 이슬도 차가운데
단잠을 못 이루고 / 돌아 눕는 귓가에 / 장부의 길 일러주신 / 어머님의 목소리
아아아아 아 아아아아아 / 그 목소리 그리워
2절. 들려오는 총소리를 / 자장가 삼아 / 꿈길 속에 달려간 / 내 고향 내 집에는
정안수 떠놓고서 / 이 아들의 공 비는 / 어머님의 흰머리가 / 눈부시어 울었소
아아아아 아 아아아아아 / 쓸어안고 싶었소
1951년 박시춘은 가수 남인수를 염두에 두고 곡을 하나 만들어 제목을〈전선야곡〉으로 해서
작사가 유호에게 노랫말을 부탁했고, 유호는 한 편의 시와 같은 가사를 만들어 보내왔습니다.
박시춘은 대구 오리엔트레코드사에서 한창 음반작업에 몰두하고 있는데, 마침 이병주 사장이
그 광경을 목격하고 “박선생, 뭐하고 있습니까?” 묻자 박시춘은 “아, 노래를 만들고 있습니다.
남인수한테 한 번 취입시켜 볼려고 하는데…” 이병주가 악보를 보면서 노래를 읊어 내려갔고,
정말 좋은 노래라고 생각한 순간 신세영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습니다. 잠시 후 이병주 사장은
“박선생, 이 노래 꼭 남인수선생한테 줘야겠습니까?” 묻자 박시춘은 “아, 뭐 꼭 그럴 필요까진
없습니다만…” 이병주는 잘됐다고 생각하며 “그럼, 이 노래를 신세영이한테 줘도 되겠습니까?”
다시 묻자, 박시춘은 괜찮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병주는 신세영을 찾아가
악보를 건넸고, 신세영이 노래를 불러보니 상당히 좋은 노래였던 것입니다. 신세영이 녹음한
〈전선야곡〉음반이 시중에 판매되고 있을 무렵에 신세영은 국군장병 위문공연을 나갔습니다.
신세영은 딱히 잘 알려진 히트곡이 없던 터라 처음엔 데뷔곡인 <로맨스 항로>를 불렀었는데,
반응이 시큰둥하자 자신의 신곡이라며〈전선야곡〉을 불렀습니다. 1절을 끝내자 공연을 보고
있던 군인들과 피난민들이 벌떼같이 무대 위로 올라왔고, 신세영은 그 동안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라 상당히 당황했으나, 모두 하나같이 노래를 한 번 더 불러달라는 앵콜 요청이 쏟아졌던
것입니다. 노래를 다 부른 것도 아니고, 1절만 부른 상태였는데… 감격한 신세영은 더 구슬픈
목소리로〈전선야곡〉을 2절까지 완창을 했습니다. 〈전선야곡〉은 신세영의 노래가 됐습니다.
〈전선야곡〉은 2011년 개봉된 영화 ‘고지전’에 삽입되면서 다시 한 번 조명을 받았습니다.
‘가요무대’ 1986년 신세영, 1987년 현철, 1991년 윤수일, 2000년 리화, 2008년 신세영,
2009년 신유, 2012년 강민주/박진도, 2013년 진시몬, 2014년 구나운/김광남, 2015년 태진아,
2018년 배금성, 2019년 조항조, 2020년 민수현, 2021년 신승태, 2020년 미스터트롯 한태웅,
2021년 ‘미스트롯2’ 공소원·김은빈·김의영, ‘사랑의 콜센터’ 정동원 ‘트롯매직유랑단’ 진해성·송가인
이미자 선생님께서는〈전선야곡〉을 1987년 4월 10일 MBC ‘가요초대석’에서 부르셨습니다.
☞ 신세영(申世影), 1926년 부산 동래에서 출생 2010년 작고한 가수 신세영의 본명은 정정수,
예명 신세영은, 당시 최고의 가수들인 신카나리아의 성 ‘申’과 장세정의 가운데 ‘世’, 이난영의
끝부분 ‘影’ 한글자씩 조합해서 작명. 1947년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구 오리엔트레코드사가
주최한 콩쿠르에서 입상해 전속가수가 됐고, 1948년〈로맨스 항로〉로 가요계에 데뷔했습니다.
광복이후 현인에 이어 두 번째 대중가수로 데뷔한 신세영의 대표곡은, 1949년 〈무영탑 사랑〉
1952년 〈영 너머 고갯길〉1953년 〈병원선〉1954년 〈날려라 해병대〉 1956년 〈부산야곡〉
〈추억의 다방〉등이 있습니다. 작곡한 노래는 1966년 최무룡〈정처없는 방랑자〉1969년 배호
〈화전민〉 1967년 신행일 〈청춘을 돌려다오〉 (1991년 나훈아, 1992년 현철) 등이 있습니다.
1981년 미국으로 갔다가 2004년 귀국해 2013년 대한가수협회 원로가수회장을 역임했습니다.
☞ 유호(유호)는 1921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2019년 작고하신 극작가 겸 작사가입니다.
본명 유해준, 필명 호동아. 1939년 경성제2고등보통학교(경복고등학교, 현인 1년 후배) 졸업.
1942년 동양화가, 1943년 극작가, 1944년 서예가, 1945년 경성 중앙방송국(현 KBS) 국장,
1946년 시인, 1950년 영화 ‘여인애사’ 조연, 1963년 서라벌예술대·1968년 중앙대 전임교수,
1968년 TBC 전속작가, 1980년 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 1992년 한국방송작가교육원장 역임.
1947년〈목장의 노래〉(옥두옥),〈신라의 달밤〉(현인), 1948년〈비내리는 고모령〉(현인)
1949년〈낭랑 18세〉(백난아),〈고향만리〉〈럭키 서울〉〈서울야곡〉(현인), 1950년〈전우야 잘자라〉, 1952년〈전선야곡〉(신세영)〈삼다도 소식〉(황금심)〈아내의 노래〉(심연옥),
1954년〈이별의 부산정거장〉〈고향은 내 사랑〉〈가을인가 가을〉(남인수), 1956년〈여옥의
노래〉(송민도), 1960년〈카츄사의 노래〉(송민도), 1964년〈맨발의 청춘〉(최희준),〈떠날
때는 말없이〉(현미), 1966년〈길잃은 철새〉〈종점〉(최희준), 1968년〈짚세기 신고왔네〉
(김세레나), 1969년〈님은 먼 곳에〉군가〈진짜 사나이〉〈맹호부대의 노래〉등이 있습니다.
극작가 : 1968년 ‘TBC 일요극장, 일명 유호극장’ 2년동안 일요일 저녁 9시부터 45분간 방송함.
TV드라마 : ‘서울야곡’(TBC), TBC 주말드라마 ‘그건 그려’, MBC 주말연속극 ‘왜 그러지’ 등.
–〈비목〉– 한명희 작사, 장일남 작곡(1969년), 노래 소프라노 신영옥
1절.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 친구 두고 온 하늘가 / 그리워 마디 마디 / 이끼 되어 맺혔네
2절.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 달빛 타고 흐르는 밤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 서러움 알알이 / 돌이 되어 쌓였네.
‘비목(碑木)’ 백과사전엔「〈비목〉(碑木)은 한국의 가곡으로, 한명희가 지은 시에 장일남이
곡을 붙였습니다. 1969년에 처음으로 발표되었다. 한명희는 강원도 화천 백암산 부근에서 십자
나무만 세워져 있는, 무명용사의 돌무덤의 비목을 보고, 조국을 위해 죽어간 젊은이들을 기리
는 내용의 시를 지었고, 이를 장일남에 보여주자 즉석에서 곡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에서 희생된 무명용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화천에 비목공원이 조성되었고, 매년 현충일을 전후
하여 비목 문화제가 열리고 있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도 한번 불러보
시겠습니까? 화천군에서는 1995년 ‘비목 공원’을 조성했고, 1996년부터 현충일을 전후해 비목
공원에서 ‘비목 문화제’를 개최해 무명용사들의 젊은 영혼들의 넋을 추모하는 위령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한명희 선생님은 작년 현충일에 직접 연출을 맡아 비나마을(비목과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주최한 ‘춘천현충문화제’를 춘천 KT&G상상마당공연장에서 개최하였습니다.
〈비목(碑木)〉매년 6월 호국·보훈의 달이 되면 부르거나 들으면서 가슴이 아려오는 감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1967년에 창작돼 1969년에 발표된 가곡으로 고등학생 때 배웠을 것입니다.
〈비목〉을 작사하신 한명희(1939년 충주 출생)선생님은 1960년대 중반 ROTC 육군 소위로
수색중대 비무장지대 초소장으로 자원해 근무하던 초가을 어느날 백암사 부근 양지바른 산모
퉁이를 지나며 나무로 만든 십자가만 세워진 무명용사의 돌무덤을 보고 자기 또래였을 무명
용사가 조국을 위해 싸우다 전장에서 쓰러져간 것을 안타까이 여겨 한편의 시를 지었습니다.
전역 후 TBC방송국에서 가곡을 소개하는 프로그램 진행을 맡고 있었는데, 작곡가 장일남으로
부터 신작 가곡을 위한 가사를 의뢰받았고, 그 날의 비목을 떠올렸습니다. ‘첩첩산골 이끼 덮인
돌무덤 옆에는 새하얀 산목련이 있었다. 그는 이내 화약 냄새가 쓸고 간 그 깊은 계곡 양지녘
이름 모를 돌무덤을 포연에 산화한 무명용사로, 비바람 긴 세월 동안 한결같이 그의 무덤가를
지켜주고 있는 새 하얀 산목련을 주인공 따라 순절한 여인으로 승화해 사실적 어휘들을 문맥
대로 엮어 시를 써 내려갔습니다.’ 2절의 ‘궁노루’는 ‘사향노루’이다. 어느 날 숫컷을 잃고 홀로
남아 울부짖는 암노루의 울음소리를 들었던 것을 가사에 넣었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노랫말은
작곡가인 故 장일남에게 전해졌고, 슬퍼서 더욱 아름다운 가곡〈비목〉의 곡이 완성됐습니다.
독자는 지난달 21일 점심때 한명희선생님 자택을 방문 처음 선생님을 뵙고 점심도 먹었습니다.
집앞 터에 놓인 진열장에는 세 개의 촛불이 타고 있었습니다. ‘평화의 불’ 2013년 7월 27일
평화의 댐에서 채화, ‘호국의 불’ 6.25. 60주년 비목공원에서 채화, ‘영원의 불’ 4343년 개천
절 해뫼에서 채화. 이 촛불들이 6일간 타고나면 다시 켜놓는다고 하셨습니다. 한명희 선생님께
서는 서울대 음대국악과를 졸업 1964년부터 2년간 군복무를 하였고, 그후 TBC 방송국 근무,
1997년부터 3년간 서울시립대 교수와 국립국악원장을 역임했으며, 14개 대학에서 음악개론과
서양음악사에 대한 강의를 하셨습니다. 1974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 어룡마을에 터를 잡고
지금까지 살고 계십니다. ‘궁노루 다정(茶亭)’ 1981년 분군된 남양주군 군민헌장과 남양주군가
가사(歌詞)와 1986년 시로 승격된 구리시의 시민헌장과 구리시가 가사(歌詞)를 만드셨다고도
하셨습니다. 6살 터울의 사모님께서도 구리여자중학교·퇴계원중학교·덕소중학교에서 미술선생
님으로 재직하셨다 하셨습니다. 두분께서 언제나 건강하시고 행복이 가득하시기를 소망합니다.
다음에는 금사향〈님 계신 전선〉심연옥〈아내의 노래〉에 대한 글을 올리겠습니다.
☞ 구강보건의 날(9일) : 어금니가 나오는 6세의 ‘6’과 어금니구(臼)를 숫자 ‘9’로 바꾼 6월 9일.
구강보건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높이기 위한 기념일입니다. 구강건강의 중요성을 알리고 구강건강을 위한 생활을 실천하는 분위기를 확산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날짜는 매년 6월 9일로, 1946년 조선치과의사회(현 대한치과의사협회)가 어금니가 나오는 시기인 6세의 ‘6’과 어금니(臼齒, 구치)의 ‘구(臼)’를 숫자 ‘9’로 바꾼 6월 9일을 ‘구강보건의 날’로 정한 것에서 유래했고, 2015년 5월 18일「구강보건법」에 따라 법정기념일로 시행됐으며, 주관처는 보건복지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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