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 34. 경상남도편〈처녀 뱃사공〉〈삼천포 아가씨〉(2021.10.25.)
글피 28일은 대중가요 3대 작곡가 중 한 분인 밀양 출신 박시춘(1913년~1996년)의 생신입니다.
경상남도(慶尙南道), 우리나라 남동부 일대를 아우르는 행정구역. 1896년 전국을 13도로 개편하면서 경상남도가 발족되었는데, 남쪽으로 남해에 접하고, 동쪽으로 부산광역시·울산광역시, 서쪽으로 전라남도·전라북도, 북쪽으로 대구광역시·경상북도와 접하고, 도청 소재지는 창원시. 위치 동경 127°35’~129°28′, 북위 34°39’~35°54′, 면적 1만 537.97㎢, 인구 335만 8,828명(2020년말 현재)입니다. 1980년 부산으로 편입되기 전 필자의 고향도 경남 김해군이었습니다.
대중가요 작곡가 박시춘님의 고향 ‘밀양’은 참 살기좋은 고장이라고 생각합니다.
필자의 고향 김해와 접해 있고, 남천강과 아랑낭자, 영남의 알프스인 재약산, 사명대사의 표충사, 더덕구이..
영화배우 전도연은 2007년 이창동 감독의 ‘밀양’으로 칸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처녀 뱃사공〉– 윤부길 작사, 한복남 작곡, 황정자(1958년 도미도레코드사)
1절. 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을 스치면 / 군인 간 오라버니 소식이 오네
큰 애기 사공이면 누가 뭐라나 / 늙으신 부모님을 내가 모시고
에헤야 데헤야 노를 저어라 / 삿대를 저어라
2절. 낙동강 강바람이 앙가슴을 헤치면 / 고요한 처녀 가슴 물결이 이네
오라비 제대하면 시집 보내마 / 어머님 그 말씀에 수집어질 때
에헤야 데헤야 노를 저어라 / 삿대를 저어라
3절. 낙동강 강바람이 내 얼굴을 만지면 / 공연히 내 얼굴은 붉어만 져요
열아홉 꽃과 같은 여학생들이 / 웃으며 서양말로 소곤거리면
에헤야 데헤야 노를 저어라 / 삿대를 저어라
필자의 어머님께서 1960년 아버지와 혼인하신 날 새색시 노래로 부르셨다는 바로 그 노래인
〈처녀 뱃사공〉1958년 윤부길 작사, 한복남 작곡, 가수 황정자 노래에 담겨져 있는 이야기, 「윤부길(尹富吉, 1912년~1957년)은 충남 보령에서 태어난 대중가요 작사가, 성악가, 뮤지컬배우와 극작가, 희극인 등 다양한 활동을 했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만능엔터테이너’였습니다. 가수 윤항기와 윤복희 남매의 아버지인 그는 1953년 전국유랑극단 ‘부길부길쑈단’을 이끌면서 원맨쇼, 팬터마임 등으로 유명세를 떨치며 전국을 돌면서 공연을 했습니다. 9월 어느날 경남 함안 가야장에서 공연을 마치고 대산장으로 이동하다 강을 만나게 되자 일행들은 나룻배에 몸을 실었는데, 그때 윤부길은 나룻배에서 노를 젖고있는 뱃사공이 20대의 처녀라는 사실에 의아해 했고, 분명히 깊은 사연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알고 보니 자매가 교대로 뱃사공 일을 하고 있었는데, 이름은 ‘박말순(당시 23세)’과 ‘박정숙(19세)’이라고 하였습니다. 1950년 군에 입대한 오빠(박기중)을 기다리면서 나그네들에게 강을 건너 주는 뱃사공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학수고대 하면서 기다리던 오빠는 전쟁 중에 전사한 것으로 확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안타까운 사연을 전해 들은 윤부길은 곧바로 노랫말을 지었고, 한복남이 곡을 붙혀 당시 최고의 신민요 가수였던 황정자에게 부르게 해 세상에 빛을 발하게 됐습니다. 음반이 발매되자마자 크게 히트를 한 노래는 지금까지도 국민 애창곡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건넜던 나루는 악양 나룻터로 추측하고 있는데, 경상남도 함안군 법수면 악양마을과 강 건너 대산면 서촌리를 잇는 나루로서 낙동강의 지류인 남강과 함안천이 만나는 지점입니다. 뱃사공 일을 하던 오빠가 군대를 간 사이 늙으신 홀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보살피면서 살던 처녀 뱃사공은 직접 뱃사공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는데, 전장터에서 싸우고 있는 오빠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지만 꼭 살아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면서 앙가슴을 드러내고 노를 저었던 애처로운 처녀 뱃사공의 모습이 아련하게 다가옵니다. 1997년 악양교가 놓이면서 악양나루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나룻배를 젖던 처녀와 노랫말을 지은 윤부길, 슬픈 가사를 경쾌한 곡으로 만든 한복남, 그리고 맑고 깨끗하며 시원시원한 목소리를 남기신 가수 황정자 모두 악양나루와 같이 역사의 한 페이지만 남기고 떠났지만,〈처녀 뱃사공〉노래는 영원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1976년 후배가수인 ‘금과 은’이 리메이크해 MBC 10대가수와 KBS 최우수 남자가수상을 수상하기도 했고, 2000년 함안군 악양나루에〈처녀 뱃사공〉노래비가 세워졌으며, 2007년부터는 한국연예예술인총연합회 함안지회 주최로 매년 봄「함안 처녀 뱃사공 전국가요제」가 함안공설운동장 등지에서 개최되고 있습니다. 뉴스아이신문 애독자 여러분들도 중부내륙·남해고속도로를 달릴 때 악양나루에 들리셔서〈처녀 뱃사공〉을 듣으면 새로운 맛과 멋, 운치가 날 것입니다.
코메디언 배삼룡(1926년∼2010년 강원도 양구 출생)의 추억담 하나, “1950년 초. 배우 김진규씨가 장미악극단을 인수해서 직접 단장을 맡았다. 배역진도 막강했는데, 여배우 이민자씨와 윤부길씨 등 쟁쟁한 배우들이 있었다. 당시에도 열혈 팬은 있었다. 공연에 대한 식견도 있고 좋아하는 배우를 향해 꽃다발을 날릴 줄도 알았다. 그들은 바로 기생들이었다. 배우를 향해 열광하는 여성들 십중팔구명은 기생들이었다. 기생들의 환호는 공격적이었다. 좋아하는 배우의 공연장으로 인력거를 보내거나 직접 타고가서 기다릴 정도였다. 인력거 숫자가 배우의 인기도 척도였다. 장미악극단이 지방공연을 다닐 땐 인원이 꽤 많았다. 당시 배우들은 월급제가 아니라서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생겨나서 가족들을 데리고 다녔다. ‘먹어도 같이 먹고, 굶어도 같이 굶자.’ 그때는 춥고 배고팠던 시절! 덕분에 나는 윤항기와 복희 남매의 어린 시절을 기억한다. 분장실 구석과 여관 마당에서 소꿉장난을 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오빠는 얌전했고, 대여섯 살쯤된 윤복희는 무대에서 노래도 곧잘 불렀다. 당차고 똘똘한 모습에 관객들이 푹 빠질 정도였다. 부친인 윤부길씨는 천재였다. 일본에서 성악을 전공한 그는 최고의 가수이자 희극배우였고 탁월한 연출가이기도 했다.
그가 쓴〈처녀 뱃사공〉의 노랫말은 지금 읊어도 가슴이 아리다. ‘낙동강 강 바람이 치마폭을 스치면 군인 간 오라버니 소식이 없네…..’ 전쟁터로 떠난 오빠를 대신해서 생계를 위해 노를 저었던 두 자매(당시 19세, 23세)의 절절함이 노랫말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었다. 한국전쟁이 터진 뒤 유랑극단을 이끌고 시골 장터를 떠돌던 윤씨가 경상남도 함안군의 악양나루터에서 직접들었던 사연이라고 한다. 나중에 전해 들었지만 그 두 자매 처녀 뱃사공의 오빠는 결국 전사했다고 한다. 배우들에게 윤부길씨는 ‘대가 중의 대가’로 꼽혔다. 자타가 공인하는 천재였다. 대중들은 그에게 열광하지 않았지만, 기생들은 그를 알아봤다. 공연이 끝날 때 즈음해서 극장 앞엔 기생들의 인력거가 몰려들었다. 하나같이 윤부길씨를 모셔 가려는 열성적인 기생 팬들이었다. 공연이 끝나도 그는 극장 안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때 그에게 조금만 더 연기를 배웠더라면’ 너무 아쉽다.」
‘삼천포(三千浦)’, “잘나가다 삼천포로 빠진다.”는 말이 국민들 사이에 회자돼 삼천포 주민들이 굉장히 싫어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의 첫 번째 유래는 ‘옛날 어떤 장사꾼이 장사가 잘되는 진주로 가려다가 장사가 잘 안되는 삼천포로 가는 바람에 낭패를 봤다’는 것이고, 두 번째 , ‘진해에서 근무하던 서울 등 출신의 해군 장병들이 휴가를 왔다가 부대로 복귀할 때 경부선 삼랑진역에서 진해로 가는 기차를 타야 하는데 삼천포로 가는 기차를 잘못 환승해서 부대 복귀가 늦어져 혼이 났다’는 이야기와 세 번째 ‘부산을 출발 진주로 가는 기차가 개양역에서 진주행과 삼천포행 객차로 분리되어 운행하는데, 한잔 술 등으로 인해 안내 방송을 잘못 듣고 진주로 가는 분이 삼천포행 객차로 옮겨타서 삼천포로 갔다.’는 이야기, 네 번째, ‘조선의 수군과 조운선(漕運船)이 통영을 오고 갈 때에 삼천포로 잘못 접어들어서 나왔다.’는 이야기, 다섯 번째, ‘그냥 삼천포 주변의 길이 심각하게 복잡해서 생겼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920년대 ‘잘나가다 삼천포로 빠진다.’는 말을 사용하지 말자는 신문 기사도 있었다니 이젠 그만!! 삼천포를 전국에 빛낸 또다른 주역은 ‘삼천포여자종합고등학교 농구팀’ 1984년 LA 올림픽 여자농구 은메달 주인공 성정아와 2010년∼2012년 전국대회를 휩쓴 주역 김이슬(부천 하나원큐), 강이슬(부천 하나원큐), 김한비(용인 삼성), 홍아란(청주 KB스타즈) 등 농구선수가 있습니다.
필자가 어릴 때 부모님께서 고향 상설시장인 신포시장에서 생선장사를 하셔서 부산공동어시장, 여수, 삼천포, 통영 등 지명들을 많이 들으면서 자라나서 그런지 매우 정감이 가는 곳입니다. 1995년 3월 1일 실시된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사천시(泗川郡)로 통합되어서 삼천포시라는 행정구역은 역사의 한 페이지 속으로 묻혀져서 사라졌지만, 은방울자매의〈삼천포 아가씨〉는 발표 후 5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국민들에게 애창곡으로 남아서 영원히 불리워지고 있습니다.
–〈삼천포 아가씨〉– 반야월 작사, 송운선 작곡, 은방울자매(1965년 크라운레코드사)
1절. 비나리는 삼천포에 부산 배는 떠나간다 / 어린 나를 울려놓고 떠나가는 내 님이여
이제 가면 오실 날짜 1년이요 2년이요 / 돌아와요 네 돌아와요 네 삼천포 내 고향으로
2절. 조개껍질 옹개종개 포개놓은 백사장에 / 소꼽장난 하던 시절 잊었나 님이시여
이 배 타면 부산 마산 어디든지 가련마는 / 기다려요 네 기다려요 네 삼천포 아가씨는
3절. 꽃 한송이 꺾어 들고 선창가에 나와 서서 / 님을 싣고 떠난 배는 날마다 기다려도
그 배만은 오건만은 님은 영영 안오시나 / 울고 가요 네 울고 가요 네 삼천포아가씨는
〈삼천포 아가씨〉는 1962년 결성된 ‘은방울자매’가 1963년〈쌍고동 우는 항구〉에 이어서 두 번째로 발매한 곡으로 당시 서울 스카라극장 주변 스카라계곡에 위치한 대폿집 ‘초막집’에서 막걸리 안주로 삼아서 흥얼거리다 작곡가 박시춘의 조언을 얻어 송운선이 완성한 노래입니다.
2013년 10월 정두수 선생님의 ‘노래따라 삼천리’에 실린〈삼천포 아가씨〉노래에 담긴 사연,
「1961년 초. 작곡가 송운선은 반야월(가수명 진방남)으로부터 노래시 한 편을 건네받는다. 노래 제목은 ‘삼천포 아가씨’ 가사 내용이 애절했다. 이별한 임을 부두에서 기다리는 안타까운 여인의 마음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이건 실화야. 둘도 없는 내 친구의 딸 이야기이거든…
지금은 삼천포에서 약국을 하며 혼자 살아. 처녀로.” 노래시에서 감동을 받은 송운선은 가수 은방울 자매를 떠올리며 그 자신이 주인공이 돼 곡상을 다듬는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발표가 되자마자 〈삼천포 아가씨〉는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야말로 빅히트였다.
1950년대 후반. 가수 진방남(반야월)일행은 진주에서 삼천포로 향한다. 공연을 하기 위해서 였다. 삼천포는 우뚝 솟은 와룡산을 뒤로 하고 한려수도와 마주한 아름다운 항구다. 살아 숨 쉬는 듯한 한 폭의 풍경화였다. 삼천포를 떠나 부산, 마산, 통영, 고성, 남해, 하동, 여수로 가는 여객선과 연락선은 뱃고동을 울리며 잔잔한 바다를 오갔다. 통통배며, 고기잡이 어선들이 그림처럼 떠다니는 한려수도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포구인 삼천포는 통영과 더불어 전국 제일의 생선회 맛을 자랑한다. 진방남은 노산공원 인근 삼천포 수산시장에 들러 친구 딸이 좋아한다는 전어, 멸치, 갈치 젓갈 등을 사 들고서 약국을 찾았다. 친구의 딸의 모습은 눈에 띄게 초췌해 있었다. 큰 눈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한 남자를 못 잊는 듯해 보이는 느낌이 얼굴에 역력했다. 여고를 갓 나와 사귀게 된 삼천포 청년과의 풋풋한 사랑은 하지만 오래 가질 못했다. 서울의 명문대학에 다니며 방학 때면 고향을 찾아오던 그 청년은 고시를 핑계로 소식을 뚝 끊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언젠가 돌아올 사람이라 생각하며 약국을 차려 놓고 청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만큼 기다렸으면 됐지. 언제까지 이러면서 살래? 올 사람이면 벌써 왔지. 아버지 건강도 안 좋으신데, 이참에 정리하고 서울에 가려므나” “전 기다릴래요. 그 사람이 올 때까지”
1960년. 친구가 지병으로 결국 별세하자 진방남은 친구에 대한 애도의 마음을 담아 노래시로〈삼천포 아가씨〉를 쓴다. 청순하면서도 애틋한 친구 딸의 사랑에 크게 감동했기 때문이다.」
1950년대 말 반야월 일행은 진주 공연을 마치고 삼천포 공연을 위해 가던 중 삼천포 수산시장에 사는 친구 집에 들렸다가 그 친구의 딸에 대한 가슴 아픈 사연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노래의 작곡가 송운선은 법대를 졸업하고서도 음악을 접을 수 없었다. 연가곡의 달인인 송운선은〈쌍고동 우는 항구〉〈삼천포 아가씨〉〈무정한 그 사람〉〈영산강 처녀〉〈하동포구 아가씨〉등 히트곡을 쏟아낸다. 가수 은방울자매는 그리움을 부르는 매혹적인 목소리의 주인공이다. 마치 은쟁반에 구슬이 굴러가듯 고운 음색은 절묘한 조화를 이뤄 수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1950년대 중반, 솔로 가수로 각각 활약하던 두 사람은 어느 날 부산의 송도 바닷가에서 듀엣을 결성한다. 동갑내기지만 박애경은 키가 크다는 이유로 큰 방울이 되고, 김향미는 작은 방울로 불린다. 은방울자매는〈마포종점〉을 마지막 히트 송으로 남기고 대중 곁을 떠난다. 1997년엔 서울 마포구에〈마포종점〉노래비가 세워졌고, 2005년엔 사천 삼천포항에〈삼천포 아가씨〉노래비가 세워졌다. 애잔하면서도 청아한 음색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은방울자매의 하모니를 기념하기 위한 노래비들이다. 2011년부터 시작이된 ‘삼천포 아가씨 가요제’는 매년 삼천포 ‘남일대 해수욕장’에서 개최되고 있다. 노래를 사랑하는 삼천포 주민들의 열정 없이 누가 이 행사를 추진하겠는가? ‘삼천포 아가씨’ 가요제가 가요사의 새 장을 펼치기를 기대해 본다.」
1966년 강찬우 감독이 제작한 영화 ‘삼천포 아가씨’는 신성일, 황정순, 방성자, 김석훈, 강문, 김승호, 이빈화, 한은진, 이수련, 양훈, 김희수 등 배우가 출연했습니다. 줄거리는「삼천포에서 태어난 그녀는(황정순) 혼인후 7년만에 남편을 잃고 오직 아들 두 형제를 위해서 살아가는데, 아들들은 하나같이 어머니의 속을 무던히도 썩혔습니다. 고생만 하던 그녀는 불행하게도 교통 사고로 숨지자, 아들들은 생전의 불효를 뉘우치며 어머니의 주검 앞에서 목 놓아 통곡을 한다.」
진주시(晋州市)는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고향이라 불릴 만큼 작곡가와 가수들의 출신지입니다.
진주 출신 대중가요 작곡가로는 김서정, 이재호, 문호월, 손목인, 정민섭과 가수는 남인수를 비롯해 작년과 올해 트롯 경연대회인 ‘트롯신이 떳다’의 한봄과 ‘트롯 전국체전’의 오유진이 있으며,〈백지로 보낸 편지〉의 김태정(1959년∼2016년)과 UN 멤버 김정훈 등이 있습니다.
–〈내 고향 진주〉– 손석우 작사, 손석우 작곡, 남인수(1955년 유니온레코드사)
1절. 삼천리 방방곡곡 아니 간 곳 없다만은
비봉산 품에 안겨 남강이 꿈을 꾸는 / 내 고향 진주만은 진정 못해라
유랑천리 십년만에 고향 찾어 왔노라 / 마음에 채쭉치며 달려 왔노라
2절. 고향에 그 누라서 가고 싶다 않을까만
의곡사 종소리에 의암이 슬피자는 / 내 고향 진주만은 진정 가고파
뛰는 가슴 적시면서 고향 찾어 왔노라 / 옛 이름 부르면서 물어 왔노라
3절. 고향이 반드시야 변했을 리 없다만은
촉석루 어데가고 이 발을 울리느냐 / 내 고향 진주만을 진정 그리며
삼백 육순 사시절을 울고 보내 왔노라 / 환 고향 그 날만을 바래 왔노라
「1955년. 이 무렵은 연예인의 지방공연이 활발했던 시기. 1950년대 초 재즈음악가인 엄토미가 창단한 ‘토미와 그 악단’은 마산공연을 마치고서 진주공연을 위해 가수 남인수가 좌장이 되어 악단장인 엄토미와 손석우, 노명석, 김창호 등 악단 멤버와 함께 열차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열차가 마산을 지나 진주로 향하고 있을 때, 남인수는 손석우의 방을 찾았습니다. “손형! 이번 ‘진주 공연’이 나에겐 10년 만인데, 나는 여태껏 고향 노래를 부른 적이 없었소. 손형이 아시다시피 그동안 인연이 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마음의 걸림돌이 되어 마치 고향의 죄인처럼 진주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아팠소. 진주의 노래를 이번 방문 때 꼭 부르고 싶소. 노래를 부탁합니다.” 남인수는 너무 진지했습니다. 누가 들어도 감동을 느낄 만큼 고향 진주에 대한 절실한 사무침이었습니다. 진주에서 태어나 진주 노래를 못 부른 가수 남인수는 누구보다도 애향심이 강했고, 김서정, 손목인, 이재호 등 진주 출신의 내로라하는 작곡가는 있었지만 레코드회사의 소속이 저마다 달라서 ‘고향 사랑’의 노래를 못 부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던 고향 진주에 대한 노래의 꿈은 진주로 가는 열차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손석우는 진주를 잘 몰랐습니다. “진주 이야기를 해주십시오. 산이며 강이며 역사, 그리고 유래며 전설, 들려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상념에 잡힌 손석우는 망향의 강렬한 일념에 사로잡힌 남인수의 심정이 되어서 기타를 잡았습니다. 남인수가 들려준 진주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노래 시와 곡을 동시에 진행했습니다. ‘삼천리 방방곡곡 아니 간 곳 없다마는〜 중략,
환고향 그날 만을 바래왔노라.’ 가요황제 남인수의 진주 공연은 그를 기다리던 고향 팬들이 모여들어 대성황이었는데, 진주는 물론 인근 사천, 삼천포, 하동, 남해, 의령, 고성, 산청, 함양 등지의 팬들까지 찾아와서 입추의 여지가 없었던 것입니다. 극장이 떠나갈 듯한 박수와 환호 속에서 남인수가〈내 고향 진주〉를 끝 곡으로 불렀을 때에는 팬들은 눈물을 글썽대며 숙연해지기도 했습니다. 남인수는 자신이 취입 못한 진주 노래도 불렀습니다. 「1절. ‘물소리 구슬프다 안개 내린 남강에서 너를 안고 너를 안고 / 아 울려주던 그날 밤은 울려주던 그날 밤은 / 음 파고드는 옛 노래여. 2절. 촉석루 옛 성터에 가을달만 외로이 낙엽소리 낙엽소리 / 아 처량쿠나 그날 밤은 너를 안고 울었소 / 음 다시 못올 꿈이여. 3절. 고향에 임을 두고 타향살이 십여 년에 꿈에라도 꿈에라도 / 아 잊을소냐 그대 모습 정들자 헤어진 임 / 음 불러라 망향가를」〈남강의 추억〉은 1940년 남인수의 고향친구 이재호가 작사·작곡해 고운봉이 불러 히트한 곡으로 그는 고향 팬들을 위해〈남강의 추억〉을 부른 후〈진주라 천리길〉을 또 불렀습니다.
☞ 엄토미(1922년〜2002년 본명 엄재욱) 함북 경성생. 재즈음악가, 배우 엄앵란 작은아버지.
‘엄토미 악단’ 창단, 길옥윤, 박춘석, 이봉조, 김희갑, 신중현 등이 그의 문화생이었다고 합니다.
2011년 MBC 월화드라마 ‘빛과 그림자’에서 김용건이 맡았던 유성준은 그를 모티브로 했습니다.
1962년 6월 26일 남인수가 입원해 있던 백병원 병상에서 남인수는 이난영의 무릎을 베고서 나즈막히 말합니다. “난영아. 그 노래를 좀… 불러다오···” 잠시 후 남인수는 이난영과 장세정, 백설희, 현인 등 동료들이 부르는〈황성옛터〉를 들으면서 운명했는데, 이때가 44세였습니다.
〈황성옛터〉는 그가 무대에서 즐겨 부르던 애창곡. 특히 3절은 남인수가 두견새의 울음처럼 피를 토하듯 가슴이 찢어지게 불렀던 부분입니다. 정두수 선생님께서는 어느날 필자에게 이때의 상황을 직접 말씀해 주시기도 하셨는데, 절세 절창의 ‘가요 황제 남인수’는 정두수 선생님의 스승님이셨습니다. 남인수의 고향 진주와 정두수의 고향 하동은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서라벌 대학시절부터 자주 뵈었다고 했습니다. 독자는 광주시 초월읍 산이리 정두수님 자택에서 신사복 차림의 남인수와 대학생 모자를 쓴 정선생님이 1958년 찍은 사진을 봤습니다.
–〈애수의 소야곡〉– 이부풍 작사, 박시춘 작곡, 남인수(1938년 오케레코드사)
1절.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 /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
고요히 창을 열고 별빛을 보면 / 그 누가 불어주나 휘파람 소리
2절. 차라리 잊으리라 맹세하건만 / 못 잊을 미련인가 생각하는 밤
가슴에 손을 얹고 별빛을 보면 / 애타는 숨결마저 싸늘하고나
3절. 무엇이 사랑이고 청춘이던고 / 모두 다 흘러가면 덧없건마는
외로운 별을 안고 밤을 새우면 / 바람도 문풍지에 싸늘하고나
1938년 무명가수였던 19살 남인수를 일약 ‘가요황제’로 만든 노래가〈애수의 소야곡〉입니다.
구리시 출신 중 제일 부자는 부원공업사 故 장종식 회장. 그 분의 애창곡인〈애수의 소야곡〉
「남인수는 19살 때 가수가 되기 위해 서울 충무로 시에론레코드사를 찾았다. 레코드사 문예부장이던 작사가 박영호는 남인수의 노래를 듣고 즉석에서 전속가수로 받아들였다. 고복수의〈짝사랑〉백년설의〈번지없는 주막〉등의 가사를 썼던 박영호는 작곡가 박시춘에게 쪽지를 한 장 전했다. ‘그는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가수다. 타고난 목소리, 잘생긴 용모 등 가수로서의 자질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남인수는 첫 취입곡으로〈눈물의 해협〉을 발표했는데, 반응은 허망했다. 이때의 충격으로 박시춘은 작곡에서 손을 떼고 ‘낭랑 좌극단’의 악단장이 돼 전국을 유랑한다.
〈눈물의 해협〉에 대한 자초지종을 들은 OK레코드사 이철 사장이 작곡가 박시춘을 찾았다. “박 선생님〈눈물의 해협〉곡에다 다른 가사를 붙여 봅시다. 좀 더 구슬픈 가사로 말입니다.” 그리고 작사가 이부풍에게 작사를 의뢰해 탄생한 곡이〈애수의 소야곡〉이다. 남인수가 부른〈애수의 소야곡〉은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이로부터 ‘박시춘·남인수 30년 콤비’의 서막이 열린다. 그러니까〈눈물의 해협〉〈애수의 소야곡〉은 곡목과 노래시만 다른 이명동곡(異名同曲)이다.
남인수는 왜 전설의 가수인가? 노래는 바로 우리 삶의 정서, 그래서 인생의 향기다. 고달프고 궁핍할 땐 노래가 있어 위안을 받고, 기쁘고 즐거울 땐 신바람이 나서 또 노래를 부르지 않는가. 노래는 진실이기에 그런 것이다. 불세출의 가수 남인수도 초창기에는 무척 고전했다. 취입한 노래마다 불발탄이었다.〈눈물의 해협〉〈범벅 서울〉등 참패였다. 1918년 10월18일 경남 진주 봉래골에서 태어나 그 곳 보통학교(초등)를 졸업했다. 그러나 집안이 어려워 진학은 애당초 포기해야만 했다. 양복 재단기능공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그의 가슴속엔 가수가 되겠다는 열망으로 가득했다. 그는 노래도 잘했지만 하모니카에 장구나 북치는 솜씨도 걸출했다. 음악 재능을 타고난 것이다.」(정두수 ‘노래따라 삼천리’ 발췌)
다음엔 ‘영화의 날’ 기념 〈미워도 다시 한번〉,〈아네모네〉,〈빨간 마후라〉글을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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