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 35. 영화의 날〈미워도 다시한번〉〈빨간 마후라〉(2021.11.01.)
지난달 25일. 1994년부터 1997년까지 한국영화제작자협회 회장을 역임한 이태원(1938년∼2021년 평양 출생) 태흥영화사 전대표가 작고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영화 ‘유정천리’(1959년) ‘기쁜 우리 젊은 날’(1987년) ‘아제 아제 바라아제’(1989년) ‘장군의 아들’ (1990년) ‘서편제’(1993년) ‘태백산맥’(1994년) ‘춘향뎐’(2000년) ‘취화선’(2002년) ‘하류인생’ (2004년) 등의 영화를 제작했습니다.「충무로 삼총사, 제작 이태원·감독 임권택·촬영 정일성」
또한 지난달 27일은 우리나라의 ‘영화의 날’이었습니다.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한국 최초의 영화인 ‘의리적 구토(투)’가 상영됐고, 이날을 기념 1963년 ‘영화의 날’로 지정됐습니다.
영화 ‘의리적 구토’는 한국인이 돈을 대고, 한국인 연출자, 한국인 배우가 만든 영화였습니다. 이때 ‘의리적 구토’는 연쇄극으로서 연극과 영화를 병합한 극이었는데, 연극으로 표현할 수 없거나 힘든 야외 장면을 영상으로 만들어 연극에서 필요하게 되면 영사막을 내리고 상영해서 무대의 연극과 연결되도록 하는 형태였습니다.
입장료는 특등석이 1원 50전, 1등석 1원, 2등석 60전, 3등석 40전이었는데, 당시 연극 관람표 가격 40전에 비해서 매우 비쌌습니다. 그러나 흥행에는 매우 성공하였다고 합니다. 극이 공연될 때 연극과 영화 장면이 서로 바뀔 때마다 호루라기로 신호를 하였다고 하는데, 연출과 주연은 배우 김도산이 맡았으나, 촬영 기사는 한국인이 없었기 때문에 김덕경을 오사카로 보내 일본인 기사를 초빙해 왔다 합니다. 연극무대에서는 만들 수 없었던 장소인 명월관과 한강철교, 장충단, 홍릉 등은 영상으로 촬영해 사용했습니다.
연쇄극 ‘의리적 구토’의 줄거리는,「간악한 계모 김영덕(여장남자배우) 밑에서 오로지 가문의 체통을 위해 갖은 수모를 참아오던 아들 김도산은 마침내 계모 일파의 흉계가 아버지의 재산을 가로채고 가문을 더럽힐 지경에 이르게 되자 결의형제인 김경환, 윤화와 더불어 응보의 칼을 뽑는다.」는 권선징악적 내용이었습니다. 조연은 강원형, 최일, 양성현 등이며, 극단은 신극좌
「우리나라 영화 사상 처음으로 영화인의 발전을 축복하고 나아가 영화를 통한 민족 예술에 이바지한다.」는 취지로 영화제작사협회에서 제정한「제1회 한국 영화의 날」은 1959년10월 27일 오후 6시 서울 소공동 국제그릴에서 개최됐습니다.
이 날 한국영화에 공헌한 영화인을 대상으로 표창이 실시됐는데, 표창을 받은 영화인은 ‘춘향전’의 홍성기(김지미 남편) 감독과 배우 전옥(최무룡 장모님), 복혜숙(낙화유수 주인공), 황정순, 도금봉, 최은희, 엄앵란, 김승호(김희라 부친), 김진규(김진아 부친), 허장강(허준호 부친), 김동원(김세환 부친), 그리고 기술자라 표현된 6인의 스태프 등이었으며, 이들이 받은 기념메달에는「전면, 呈(정) 韓國映畵人一同 4292. 10. 27.이라고 새겨져 있고, 후면에는 ‘謝恩’(사은)이라고 새겨져 있었습니다.」
☞ 한국영화 국제영화제 수상 작품과 배우들은 마부, 기생충, 윤여정, 윤정희, 강수연, 전도연 등
영화 마부(馬夫) : 1961년 제11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심사위원 특별 은곰상
영화 기생충 : 2020년 아카데미상 작품상, 각본상, 감독상(봉준호), 국제영화상
강수연(1966년생) : 1987년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 1989년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
전도연(1973년생) : 2007년 칸영화제 여우주연상(밀양)
김민희(1982년생) : 2017년 베를린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밤의 해변에서 혼자)
박찬욱(1963년생) : 2003년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올드보이)
이창동(1954년생) : 2010년 칸국제영화제 각본상(시–詩)
윤여정(1947년생) : 2021년 아카데미(오스카)상 여우조연상(미나리)
☞ 필자가 뽑은 1960년대 한국영화 10선「1위 미워도 다시한번(신영균, 문희, 김정훈) 시리즈, 2위 빨간 마후라(신영균, 최은희, 최무룡), 3위 그리움은 가슴마다(윤정희, 남진, 김지미). 4위 비나리는 고모령(문희, 김희라), 5위 여자의 일생(최은희, 남궁원, 도금봉), 6위 맨발의 청춘(신성일, 엄앵란), 7위 마부(김승호, 황정순, 신영균), 8위 로맨스 빠빠(김승호, 엄앵란, 신성일), 9위 팔도강산 시리즈(김희갑, 황정순, 신영균), 10위 워커힐에서 만납시다.(남정임, 서영춘)」
1970년 이후「1위 임예진 ‘진짜 진짜’ 시리즈, 2위 김두한 시리즈(이대근), 3위 서편제(오정해), 4위 장군의 아들 시리즈(박상민, 방은희, 송채환, 오연수), 5위 해어화(한효주, 천우희, 유연석)」
최다 관객,「1위 명랑(17,615,686명), 2위 극한직업(16,266,338명), 3위 신과 함께(14,414,658명), 4위 국제시장(14,263,980명), 5위 베테랑(13,414,483명), 6위 괴물(13,019,740명), 7위 도둑들(12,984,701명), 8위 7번방의 선물(12,812,144명), 9위 암살(12,706,829명), 10위 광해(12,324,062명)」
최초로 관객 100만명 돌파 영화는 1993년 ‘서편제’, 1,000만명 돌파 영화는 2003년 ‘실미도’
–〈미워도 다시 한번〉– 김진경 작사, 이재현 작곡, 남진·이미자 선생님(1969년 지구레코드사)
1절. 이 생명 다 바쳐서 죽도록 사랑했고 / 순정을 다 바쳐서 믿고 또 믿었건만
영원히 그 사람은 사랑해선 안될 사람 / 말없이 가는 길에 미워도 다시 한번
아아아 안녕
2절. 지난 날 아픈 가슴 오늘의 슬픔이여 / 여자의 숙명인가 운명의 장난인가
나만이 가야하는 그 사랑의 길이기에 / 울면서 돌아설 때 미워도 다시 한번
아아아 안녕
〈미워도 다시 한번〉은 1968년 1편 영화가 아닌 1969년 제2편 영화주제가로 영화 도입부에 이미자 선생님의〈미워도 다시 한번〉이 흘러나오고 후반부에서는 남진의 목소리로 나옵니다.
영화 ‘미워도 다시 한번’, 당시 정말 찡한 영화였는데, 엄마와 누나는 물론 할아버지, 할머니 등 남녀노소 불문하고 눈물샘을 터트렸던 영화 ‘미워도 다시 한번’ 지금까지 고전 멜로영화의 대표작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1968년 7월 20일 서울「국도극장」에서 개봉돼 64일간의 장기상영돼어 서울 관객만 368,831명을 동원 당시 서울 인구의 약 10% 가까이 본 영화였습니다. 신예 영화감독 정소영은 스타 감독으로, 신인급 배우 문희도 최고의 여배우로 우뚝서게 했습니다. 물론 아역배우인 김정훈도 국민 아들, 국민 동생이 되어 영화배우의 입지를 굳혔습니다.
☞ 참고로 연도별 ‘서울특별시 인구센서스 조사’ 결과 서울시 인구수는 1960년 2,445,402명, 1966년 3,793,280명, 1968년 4,334,973명, 1969년 4,776,928명, 1970년 5,525,262명입니다.
비련의 여주인공 문희, 잘 생기고 똑똑한 아들 영신(김정훈, 필자와 동갑), 신영균, 전계현 등 수많은 배우들이 출연하여 열연을 펼쳤습니다. 유부남과 미혼녀의 로맨틱한 불륜, 사생아를 둘러싼 신파적인 갈등, 그때나 지금이나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이야기, 그리고 진부한 설정. 그럼에도 미워하지 못하고 보고 또 보고 싶은 그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 이야기 속입니다.
「신호(신영균)는 고향 시골에 처자식을 두고서 서울로 올라와 하숙 생활을 하면서 10여 년 동안 온갖 고생을 하던 끝에 사업에 성공을 한 사업가였으나, 유치원 교사인 전혜영(문희)와 오랜기간 사귀면서 그녀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 하숙생 신호를 여러 가지로 돌보아 주던 혜영 또한 신호와의 혼인을 꿈꾸면서 행복한 미래를 설계한다. 신호는 그런 혜영에게 차마 고향에 가족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을 못하고 갈등을 겪고 있던 어느날, 시골에 살던 아내(전계현)이 아들과 딸을 데리고 신호를 찾아 상경하게되자 혜영은 비로소 그가 유부남인 것을 알고 충격에 빠지면서 신호와의 행복을 꿈꾸었던 혜영은 종적을 감춘다. 이때 혜영은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시골 어촌으로 내려간 혜영은 혼자 아들인 영신(김정훈)을 낳아 키우면서 김 말리는 일 등으로 어렵게 생활한다. 8년이란 세월이 흘러 학교갈 나이가 된 아들이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아 아버지를 그리워 하자 아들의 장래를 위해 신호에게 아들의 존재를 알리는 연락을 보냈는데, 그가 키우겠다고 승낙을 하자 영신을 데리고 신호를 찾아가 아들을 맡기고 떠난다. 신호와 가족들은 영신을 감싸주려고 노력하지만, 영신은 낯선 환경에 적응을 못하고 외로운 나날을 보내는데, 이를 알게 된 혜영은 아무리 생활이 어렵더라도 자기가 키우는 것이 바른 길이라고 생각해 신호의 반대를 무릅쓰고 영신과 함께 다시 시골 어촌으로 떠나간다.」
영화 ‘미워도 다시 한번’에 출연한 배우 중에 문희와 김정훈은 국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으며, 김정훈은 아역배우로 확실한 자리매김을 했지만, 신영균과 전계현은 욕을 바가지로 먹었습니다.
1편(368,831명) : 1968년 정소영 감독, 배우 문희, 신영균, 김정훈, 전계현, 박암, 각본 이성재
2편(22만명) : 1969년 정소영 감독, 배우 문희, 신영균, 김정훈, 전계현, 박암, 각본 김석야
3편(20만명) : 1970년 정소영 감독, 배우 문희, 신영균, 김정훈, 전계현, 박암, 각본 김수현
4편(16만명) : 1971년 정소영 감독, 배우 문희, 신영균, 노운영(노주현), 전계현, 각본 김수현
5편(364,538명) : 1980년 변장호 감독, 배우 김영란, 윤일봉, 각본 신봉승, ‘미워도 다시 한번 80’
6편 : 1980년 변장호 감독, 배우 김영애, 윤일봉, 조옥희, 각본 이희우, ‘미워도 다시 한번 81’
7편 : 2002년 정소영 감독, 배우 이승연, 이경영, 박용하, 각본 김수현, ‘미워도 다시 한번 2002’
–〈아네모네〉– 정두수 작사, 박춘석 작곡, 이미자 선생님(1968년 지구레코드사)
1절. 아네모네는 피는데 아네모넨 지는데 / 아련히 떠오르는 그 모습 잊을 길 없네
해가 져도 달이 떠도 가슴 깊이 새겨진 / 허무한 그 사랑을 전할 길은 없는가
2절. 이슬에 젖은 꽃송이 아네모넨 지는가 / 별빛에 피어나서 쓸쓸히 시들 줄이야
마음 바쳐 그 사람을 사모하고 있지만 / 허무한 그 사랑은 달랠 길은 없는가
영화 ‘아네모네 마담’의 원작은 동명의 주요섭 단편소설입니다. 각본 유동훈, 김기덕 감독, 엄앵란, 신성일, 안인숙, 김승호, 남궁원, 이순재, 한은진, 김동훈 등이 출연해 1968년 서울「아카데미극장」에서 개봉돼 비교적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엄앵란의 마지막 영화라 할 수 있습니다.
「혼인 1년 만에 남편(남궁원)이 15년 동안을 감옥에 가게 되자 남편만을 생각하며 수절하고 지내는 아네모네 다방의 마담 숙(엄앵란)은 매일 아침 ‘당신만을 따르렵니다’ 라는 꽃말을 가진 아네모네 꽃을 사가는 단아한 여인이다. 마담의 미모에 반해 매일 다방 앞에 찾아와 구애하는 남자(김순철)과 그녀에게 추파를 던지는 중년 남자들의 끊임없는 관심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남자에게 손목이라도 잡히면 즉시 손을 씻을 만큼 결벽증적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한 대학생(신성일)이 매일 찾아와 위스키 더블을 시키고는 정해진 자리에서 우수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한다. 그리고는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을 신청한다. 그녀는 남편에 대한 수절을 다짐하면서도, 그 대학생이 필시 자신에게 연정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그와의 달콤하고 행복한 시간을 상상하며 환상에 빠지곤 했고, 그 대학생과 사랑의 도피를 하다 뒤따라온 남편에 의해 잡혀가는 꿈까지 꾸게 된다. 어느 날, 눈에 상처가 난 그 대학생이 다방에 와서 여느 때처럼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을 틀자 다방의 물건들을 집어 던지며 울부짖다 뛰쳐나간다. 그 대학생 친구(이순재)를 통해서 죽은 애인을 닮은 모나리자의 그림을 보러 매일같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그동안 환상 속에서 나마 간음을 자행하여 온 자신에게 환멸을 느끼고 다방을 그만 둔다. 그 후 그녀를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지만 행방을 아는 이는 없었다.」
☞ 주요섭(1902년〜1972년 평양출생) 소설가, 경희대학교 교수, 시인 주요한의 동생. 대표작
‘추운 밤’(1921년) ‘할머니’(1930년) ‘사랑 손님과 어머니’(1935년) ‘아네모네 마담’(1936년)
故 신성일의 2011년 기고문 ‘청춘은 맨발이다’에 영화 ‘아네모네 마담’에 대한 회고가 있습니다.
「1964년 11월 혼인한 후 1965년 딸 경아가 태어났고, 1967년 초에 아들 석현이가 임신됐다.
67년 가을 어느 날, 극동흥업사 차태진 사장이 헐레벌떡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극동흥업은 ‘맨발의 청춘’ 등 신성일·엄앵란표 청춘영화의 산실이었고, 차 사장은 우리를 굉장히 좋아했다. 엄앵란과 극동흥업의 전속인 김기덕 감독을 혼인시키려 하기도 하고, 나와 엄앵란이 결혼할 때 함께 작전을 짠 사람도 그였다. 나와 엄앵란에겐 가족과 같은 분이었다. 차 사장은 고추 꼭지를 따고있는 엄앵란의 손을 꼭 쥐며 말했다. “앵란아, 나 좀 살려줘라. 네가 집으로 들어가고 난 후, 난 망해버렸다. 우리 영화에 출연해줘.” 배우 생활이 3년이 지나고 더구나 임신 5개월의 몸인 엄앵란은 완곡하게 사양했다. 차 사장은 햇빛에 말리기 위해 널어놓은 고추 사이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간곡하게 매달리는 통에 엄앵란은 결국 그 자리에서 출연을 약속했다. 그 작품이 ‘아네모네 마담’이다. 엄앵란이 혼인 후 촬영한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 영화는 혼인한 아내 엄앵란의 삶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차태진 사장 참 고마운 분이시다.」
-〈빨간 마후라〉- 한운사 작사, 황문평 작곡, 쟈니브라더스(1964년 아세아레코드사)
1절. 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 / 하늘의 사나이는 빨간 마후라
빨간 마후라를 목에 두르고 / 구름따라 흐른다 나도 흐른다
아가씨야 내 마음 믿지 말아라 / 번개처럼 지나갈 청춘이란다
2절 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 / 하늘의 사나이는 빨간 마후라
석양을 등에 지고 하늘 끝까지 / 폭음이 흐른다 나도 흐른다
그까짓 부귀 영화 무엇에 쓰랴 / 사나이 일생을 하늘에 건다
3절. 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 / 하늘의 사나이는 빨간 마후라
빨간 마후라를 목에 두르고 / 유성처럼 흐른다 나도 흐른다
부르지 말아 다오 내 이름 석자 / 하늘에 피고 지는 사나이란다
대한민국 공군조종사의 상징인 ‘빨간 마후라’ 당초 조종사용 마후라는 20세기 초에 영국·미국 조종사들이 하얀실크스카프를 착용했는데, 그 이유는 보온유지, 목의 찰과상 방지, 마스크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빨간 마후라 선구자는 공군조종사 김영환(1921년∼1954년) 대령, 1950년 7월 2일 F-15 무스탕 전투기 10대를 몰고 대구기지에 도착한지 얼마되지 않은 어느날, 그는 잠시 서울 형님집에 들렸다가 형수님이 자주색 치마를 입고 있어 형수님께 “형수님 그 치마로 내 마후라했으면 좋겠습니다.”하자 형수가 장롱에 남겨 두었던 치맛감을 꺼내 마후라를 만들어 주었다고 합니다. 1953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행사 때 공군 제10전투비행단 조종사들이 축하비행 후 도열할 때 모두 빨간마후라를 메어서 공군의 상징이 되었던 것입니다.
영화 ‘빨간 마후라’, 원작은 1962년 10월 MBC 창사1주년 특집 라디오연속극 ‘강릉 아가씨’(원작 한운사)로 6.25 전쟁 당시 유일한 공군전투부대였던 제10전투비행정대가 주둔했었던 강원도 강릉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됐습니다. 전투기 조종사와 강릉아가씨의 순수하면서도 애뜻한 사랑이야기로 연속극이 인기를 끌자 영화로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연속극의 주제가는 가수 김수연이 부른〈강릉아가씨〉(한운사/황문평).〈빠란 마후라〉원작자 한운사 회고의 말, 「명동거리를 걷다가 문득 가사가 떠올랐어요. ‘빨간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 하늘의 사나이는 빨간마후라…’ 명동의 어느 찻집에 들어가 담뱃갑 종이에 글을 적었습니다.” 공군기지에서 영화를 촬영하던 신상옥 감독은 영화 첫 장면에서 출격하는 조종사들이 ‘빨간마후라’를 부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신감독은 황문평 작곡가에게 하루만에 곡을 만들어 달라고 독촉하자 황문평은 당시 동아방송 음악부장이던 강수향에게 전화를 하였고 마침 방송국에 4인조 남성중창단 ‘쟈니브라더스’가 있다고 하여 방송국을 향하는 택시안에서 완성한 노래를 2〜3번 연습시킨 후〈빨간마후라〉를 녹음해 공군부대가가 될 불후의 명곡이 탄생했다니 그저 감탄할 뿐입니다.
1964년 3월 27일 서울「명보극장」에서 개봉한 영화〈빨간마후라〉는 서울에서만 25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는데, 관객들의 줄이 명동에서 을지로까지 이어졌다고 합니다.(당시 서울인구 약 300만 명) 그해 대만에서 개최된 제11회 아시아영화제에서 신상옥이 감독상을 신영균이 남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일본에 수출한 최초의 한국영화로 대만과 동남아국가에도 수출되어서 흥행에 성공했습니다. 영화에 출연했던 김희갑이 1965년 대만을 방문하고 귀국 인터뷰에서, “대만에 갔더니 완전히 한국 붐으로 난리였는데, 가는 곳마다〈빨간마후라〉노래가 흘러나와 코 흘리게 애들까지 이 노래를 불렀고, 영화 때문에 나를 첫눈에 알아보더라”고 회고했습니다.
영화 ‘빨간 마후라’가 휩쓸고 지나간 이듬해 1965년 영화 ‘성난 독수리’가 제작 상영됐습니다. 김기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신영균, 태현실, 황해, 이예춘, 최지희, 남미리 등이 출연해서 한국전 참전 이효영대령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로 실제 전투기가 출격한 영화였습니다.
주제가〈성난 독수리〉는 이미자 선생님과 권혜경, 남일해, 강수향이 함께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당시 녹음된〈성남 독수리〉원곡은 없어졌으나, 현재는 원로가수 남일해가 부르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전투기 영화는 1954년의 ‘출격명령’에 이어서 ‘빨간마후라’ 뿐이었는데, ‘성난 독수리가’ 그 뒤를 이은 것입니다. 매년 7월 3일은 ‘조종사의 날’입니다. 1950년 6.25전쟁 당시 미 공군으로부터 받은 10대의 F-51 무스탕이 강릉공군기지에서 처음 출격한 날을 기념해서 2008년 공군에서 자체로 ‘조종사의 날’로 정해 기념하고 있는 날입니다.
대한민국 공군 창설의 주역 제9대 공군참모총장 장지량(1924년∼2015년 전남 나주 출생) 장군이 전하는 영화 ‘빨간 마후라’ 탄생 비화,「한운사씨는 신상옥 감독을 대동하고 내 방을 찾아왔다. 그는 빨간 마후라의 유래가 교훈적이고 노래도 히트하고 있으며, 거기 얽힌 파일럿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도 흥미로워 대본을 만들어 영화화 하겠다고 제안했다. “여성과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던 전투조종사가 출격한 뒤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대신 조종사 친구가 그 여성을 위로하다가 새롭게 사랑이 무르익어 간다는 사연은 언제 들어도 감동적입니다.
이런 사연을 뼈대로 조종사들의 불굴의 의지, 조국 사랑 정신과 사명 의식, 사랑이야기를 소재로 영화할 생각입니다. 장 참모차장께서 영화제작위원장을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나로서는 불만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대중가요 ‘빨간 마후라’가 트로트 위주라 멜로디가 힘이 없고 너무 구슬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안했다. “영화화 하는 것은 좋은데 가요로 나온 노래를 행진곡 분위기로 바꿀 수는 없을까요? 경쾌하면서 사나이의 의리를 담는 남성적인 톤으로 바꿔주면 좋겠는데요.” “맞습니다. 우리도 그런 생각을 해 왔습니다. 더 멋지게 만들 계획으로 있으니 안심하십시오.” 나는 즉시 장성환 참모총장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난색을 표명했다. “나는 괜찮은데… 좀 곤란하지 않겠나?” 젊은 파일럿이 전사하는데 사랑 타령의 멜로물은 이해되지 않았다(영화의 극적 장면을 위해서는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공군 사기진작을 위해서도 좋은 일인가 하는 내부 의견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창작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고, 또 외국에서는 이런 영화가 비일비재하다. “총장님, 오히려 이런 때 우리 공군의 위상과 활동상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기회로 삼으면 어떻겠습니까? 제가 철저히 검증을 하고 명예를 높일수 있도록 지휘 감독하겠습니다.” 장 총장은 자신이 결정하기가 난처한지 공군 선배인 김정렬 전 총장과 상의해 보라고 지시해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였다. 김 전총장은 좋은 아이디어라며 즉석에서 OK 사인을 했다. 대선배인 김 전총장이 OK를 했는데 장 총장이 안된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곧바로 한운사씨와 신상옥 감독에게 이 사실을 통보했다. 어찌보면 그들은 굳이 공군의 재가를 받을 필요없이 영화를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공군의 협조를 받지 못하면 비행기 이용 등 난관에 봉착해 영화를 제대로 촬영할 수 없었다. 나는 이점을 최대한 활용해 파일럿의 세계를 널리 알리는 기회로 삼았다. 그래서 공군의 위상을 높일 아이디어를 제공할 심산이었다. 이렇게 해서 ‘빨간 마후라’ 노래도 멜로디로 새롭게 작곡되어 대중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영화 주인공은 최은희, 최무룡, 신영균 등 초호화 캐스트들로 더욱 화제를 모았다. 나는 영화 촬영 세트장으로 수원비행장과 F-51 전투기를 제공했다. 오늘날 처럼 컴퓨터 영상처리나 시뮬레이션 기법이 도입되지 않아서 실물을 그대로 활용했다. 그러다보니 애로가 적지 않았다. 부품 하나 망가져도 엄청난 손실을 가져왔기 때문에 나는 시간이 허락하면 촬영지인 수원비행장에 나가 감독 못지않은 지휘를 했다. 부품 때문에 촬영이 중단되는 경우 영화사가 나에게 불만을 표시할 정도였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별다른 사고없이 영화가 완성되어 국내는 물론 일본·대만·홍콩·태국 등지에서 크게 히트했다. 대한민국 공군의 이미지가 크게 신장되었다.」
☞ 우리나라 영화 최전성기인 1966년∼1970년 5년간 총관객수는 8억 3,144만 7,731명입니다.
신성일이 230여편으로 가장 많이 출연했고 이 시기에 제1대 트로이카 여배우는 남정임, 문희, 윤정희. 년도별 관객수 1966년 1억 5,633만 6,340명, 1967년 1억 6,407만 7,224명, 1968년 1억 7,134만 1,354명, 1969년 1억 7,304만 3,272명, 1970년 1억 6,639, 541명등 총 8억 3,114만7,731명이었는데 기록된 숫자이고 실제 관객수는 10억 명이 넘은 것으로 추산됩니다.
☞ 우리나라에서 관람객수가 많았던 서울 소재 주요 극장 현황을 가, 나, 다 순으로 열거하면,
국도극장(1913년〜1999년, 을지로4가), 국제극장(1957년〜1985년, 신문로1가), 단성사(1907년〜2010년, 종로3가), 대한극장(1958년〜2000년, 충무로4가), 명보극장(1957년〜2008년, 인현동1가), 세기극장(1958년〜1978년, 종로, 대한극장 부수관), 스카라극장(1930년〜2005년, 을지로), 아세아극장(1962년〜2001년, 종로 세운상가), 아카데미극장Ⅰ(1958년〜1968년, 명동), 아카데미극장Ⅱ(1969년〜1986년, 종로2가), 을지극장(1959년〜1973년, 을지로2가), 중앙극장(1922년〜2010년, 저동), 코리아극장(1968년〜2003년, 명동), 피카디리극장(1960년 돈의동 현제 롯데시네마피카디리), 허리우드극장(1969년, 낙원동) 등이 있고, 기타 서울 소재 극장은 경동극장(제기동), 낙원극장(인사동), 노벨극장(신설동), 동양극장(서대문), 미아극장(미아동), 봉래극장(마포), 불광극장(불광동), 상봉극장(상봉동), 새서울극장(상봉동), 서대문극장(서대문), 신설극장(신설동), 신영극장(신촌), 오스카극장(제기동), 초동극장(퇴계로3가) 등이 있습니다.
필자는 청년시절 경동극장과 상봉극장, 새서울극장, 오스카극장을 주로 이용했고,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극장으로는 필자가 거주하는 곳인 구리전통시장에 있던 ‘구리극장’ ‘중앙극장’과 검배길 마사회 네거리 앞 ‘동보극장’ 검배길 축협과 진순대 앞에 있었던 ‘동원극장’이 있습니다.
☞ 다음엔 부산시편〈해운대 엘리지〉〈용두산 엘레지〉〈돌아와요 부산항에〉글을 올리겠습니다.
*상기 컬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