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 39. 송민도의〈고향초〉〈카츄사의 노래〉(2021.11.29.)
지난주 22일, 24절기 중 스무 번째 절기인 소설(小雪)이 지나자 기온도 영하로 떨어졌습니다. “소설 추위는 빚내서라도 한다.”는 말이 있듯이 이때부터는 살얼음이 잡히고 땅이 얼기 시작해 점차 겨울 기분이 들고 첫눈이 오기 때문에 시래기를 엮어서 달고, 무말랭이·호박오가리·곶감 말리기 따위의 겨울나기 준비에 바쁩니다.
한편으로는 아직 따뜻한 햇볕이 간간이 내리 쬐어 작은 봄(小春)이라고도 불립니다. 소설은 눈이 적게 온다고 하여 붙은 이름입니다. 소설 무렵인 음력 10월 20일에는 날씨가 차고 강풍이 불어오는데, 이 바람은 억울하게 죽은 뱃사공 손돌(孫乭)의 원혼 때문에 ‘손돌추위’가 오고 ‘손돌바람’이 분다고 해 강화도에선 외출을 삼가하고, 특히 뱃길에는 절대로 나서지 않는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고 합니다.
「고려시대에 왕이 배를 타고 통진과 강화 사이를 지나는데 갑자기 풍랑이 일어 배가 심하게 흔들렸다. 왕은 사공이 고의로 배를 흔들어 그런 것이라고 호령을 하면서 사공의 목을 베었다. 사공은 아무런 죄도없이 억울하게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 뱃사공의 이름이 손돌이었습니다.」
오늘은 가수 송민도님 데뷔곡〈고향초〉와〈여옥의 노래〉〈나 하나의 사랑〉〈송도의 밤〉에 대한 글을 올리겠습니다. 송민도(宋民道)는 1925년 경기도 수원 목회자 집안에서 태어나, 이화여고보를 졸업했습니다. 이름 ‘민도(民道)는 아버지가 ‘하늘나라에 가는 길’이라는 뜻으로 작명해 주셨다고 합니다. 예명은 송민숙, 백진주. 1947년 중앙방송국(현 KBS)에서 처음으로 전속가수를 모집했는데, 이미 혼인한 송민도는 남편의 적극적인 권유로 참가해서〈꽃중의 꽃〉원방현〈청춘 부르스〉옥두옥 등과 합격해 KBS 제1기 전속가수로 입사해 3개월만에 취입한〈고향초〉가 방송을 통해 전국으로 퍼지면서 대중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자 오케레코드사에서 송민숙이라는 예명으로 음반을 발매했습니다. 송민도는 자신에게 아무런 말도없이 송민숙이라는 이름으로 제작된 음반을 보고 깜짝 놀랐지만 그냥 넘어갔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많은 여성가수들이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던 시절이지만 그녀는 노래를 부를 때 전혀 기교없이 자신의 고운 목소리만으로 노래했는데, 그녀의 허스키하고 지성적인 음색의 노래는 지식인 계층 등 많은 대중들로부터 사랑받는 가수가 됐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노래를 라디오 생방송으로만 하던 시절이라 음반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어 방송 기록도 없고, 또한 물자가 부족해 녹음이나 녹화를 할 때에도 사용한 테잎을 지워서 다음 프로그램에 사용했기 때문에 자료들도 거의 남아있지 않고, 간혹 있던 녹음자료들도 한국전쟁으로 인해 모두 사라졌습니다.
–〈고향초〉– 김다인(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 송민도(1947년 오케레코드사)
1절. 남쪽 나라 바다 멀리 물새가 날으면 / 뒷동산에 동백꽃도 곱게 피는데
뽕을 따던 아가씨들 서울로 가네 / 정든 사람 정든 고향 잊었단 말인가
2절. 찔레꽃이 한 잎 두 잎 물 위에 날리면 / 내 고향에 봄은 가고 서리도 찬데
이 바닥에 정든 사람 어디로 갔나 / 전해오던 흙 냄새를 잊었단 말인가
〈고향초〉송민도가 1947년 데뷔곡으로 부른 노래로 1948년 오케레코드사에서 음반을 발매했습니다. 원래 1944년 4월 라미라악극단(羅美羅樂劇團)이 서울「제일극장」에서 공연한 가극 ‘오동나무’ 무대에서 주연인 장동휘(1920년∼2005년, 본명 장갑순)이 부른 노래였는데, 광복후 송민도님이 불렀던 것입니다. 가사에서 ‘뽕을 따던 아가씨’는 누에치던 잠업과 관련 있고, 일본인의 수탈을 견디지 못해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던 세태를 보여주고 있으며, 원래 ‘장미꽃’을 ‘찔레꽃’으로 바꿨다고 합니다. 그리고〈고향초〉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작곡자 박시춘이 1952년 대구 피난시절 장세정에게 녹음을 시켜 오리엔트레코드사에서 앨범을 발매 더욱 큰 인기를 얻었으며, 이미자 선생님〈동백아가씨〉와 함께 1965년부터 월남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의 애창곡이었습니다. 한편의 풍경화 같은 노랫말과 고향을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에 대한 아쉬움과 애향의 정이 담긴 한편의 서정시는 백설희, 이미자 선생님, 1972년 홍민이 불러서 오늘 날까지 국민 애창곡이 됐습니다.〈고향초〉의 인기를 몰랐던 송민도님은 “부산 피난시절 남녀노소, 모두 이 노래를 즐겨 부르는 걸 보고 한편 눈물이 겨웠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송민도는 해병 청룡부대 소속으로 월남전에 참전한 큰아들이 1968년 어느날 월맹군의 습격을 받아 연락이 두절되자 가수생활을 청산하고 직접 베트남으로 찾아갔고, 아들이 무사하게 부대로 복귀한 것을 계기로 3년간 그 곳에서 한식당을 운영하다 1971년 미국 LA로 이민을 갔습니다. 미국에서 생활하던 송민도는 1990년 11년만에 귀국하여 일정이 바쁜 가운데도 시간을 내어 1990년 11월 12일 방송된 ‘가요무대 5주년 특집 송민도와 함께’편에 출연〈고향초〉,〈행복의 일요일〉〈왠일인지〉,금사향〈소녀의 꿈〉안다성과 함께〈청실홍실〉,김부자〈카츄사의 노래〉끝으로 송민도〈여옥의 노래〉,〈나 하나의 사랑〉을 불렀습니다.
방청석엔 중국 거주 동포와 방청객들이 KBS홀을 가득 메웠고, 송민도는 김동건 아나운서와 대화 도중에 “〈고향초〉가 한창 인기를 모을 때 6.25가 발발해 빛을 발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1995년 7월 24일 ‘광복 50주년 기념 가요무대’〈여옥의 노래〉2016년 4월 7일 ‘가요무대 1000회 특집’에 출연해서는〈고향초〉〈나의 탱고〉〈나 하나의 사랑〉〈카츄사의 노래〉등을 부르셨습니다. 1995년 6월 24일 KBS홀에서 열린 ‘KBS 빅쇼, 송민도 나 하나의 사랑’ 특집 방송에도 출연했습니다. 그밖에 대표곡은〈청실홍실〉〈청춘목장〉〈하늘의 황금마차〉〈아네모네 탄식〉등이 있으며, 2000년 1월 1일〈고향초〉노래비가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건봉사’ 경내에 건립이 됐습니다.
–〈카츄사의 노래〉– 유호 작사, 한복남 작곡, 송민도(1960년 신세기레코드사)
1절. 마음대로 사랑하고 마음대로 떠나 가신 / 첫사랑 도련님과 정든 밤을 못 잊어
얼어 붙은 마음 속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 오실 날을 기다리는 가엾어라 카츄샤
찬바람 내 가슴에 흰 눈은 쌓이는데 / 이별의 슬픔 안고 카츄샤는 흘러간다
2절. 진정으로 사랑하고 진정으로 보내 드린 / 첫사랑 맺은 열매 익기 전에 떠났네
내가 지은 죄이기에 끌려가도 끌려가도 / 죽기 전에 다시 한번 보고파라 카츄샤
찬바람은 내 가슴에 흰 눈은 쌓이는데 / 이별의 슬픔 안고 카츄샤는 흘러간다
〈카츄사의 노래〉송민도가 부른 1960년 영화 ‘카츄샤’의 주제가로 신세기레코드사에서 발매한 ‘영화주제가 선곡, 카츄-샤의 노래’ 앨범 SIDE A면 두 번째에 수록된 곡입니다. 음반에는 SIDE A. 최무룡〈원일의 노래〉,송민도〈카츄샤의 노래〉박재홍〈유정천리〉,나애심〈과거를 묻지 마세요〉,안정애〈너는 말했다〉,안정애·박정심·김지여〈청춘코스〉SIDE B면. 박재홍〈홍도야 우지마라〉,황금심〈홍도의 노래〉,나애심〈백치 아다다〉,박옥련〈저 구름 흘러 가는 곳〉,안정애〈길은 멀어도〉,정씨스터즈〈푸른 하늘 은하수〉등 12곡이 함께 수록이 되어 있습니다.
〈카츄사의 노래〉는 술기운에 즉흥적으로 쓴 영화주제가였다 합니다. 당시에는 1956년 라디오 연속극 ‘청실홍실’ 주제가인 송민도·안다성의〈청실홍실〉이 현인·백일희가 영화주제가로 사용됐으며, 1959년 영화 ‘가는 봄 오는 봄’ 주제가인 백설희·최숙자〈가는 봄 오는 봄〉과 나애심〈과거를 묻지마세요〉최무룡〈꿈은 사라지고〉문정숙〈나는 가야지〉등이 영화 흥행의 보증수표가 되었던, 영화주제가 전성시대라 영화가 히트하려면 주제가부터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어느날, 경향신문사 소공동 사옥에 유두연 영화감독이 영화 ‘카츄샤’ 주제가를 부탁하기 위해 문화부장인 작사가 유호를 찾아가 양주 한잔 사겠다고 약속을 하고 단골 술집 ‘은성’카페에서 유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은성’카페는 수사반장 최불암선생의 어머님께서 경영하던 명동 최고의 문화예술인들의 공간이었습니다. 유호가 들어오자 자신이 구상한 톨스토이의 ‘부활’을 원작으로 하는 ‘카츄샤’에 대하여 열변을 토했습니다. 유감독 “자, 그러니 자네가 이 명작의 주제가를 써 주게. 아주 멋진 히트곡이 되도록 말일세.” 배역에 대해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두 사람은 술기운이 오르기 시작했고, 대화 중 유감독이 뱉은 말 “마음대로? 흥, 엿장사 마음대로군.”을 듣는 순간 유호의 머릿속에는 ‘마음대로’라는 말이 뇌리를 맴돌았고. 마담에게 메모지 몇장을 얻어 구석자리에 앉아 가사를 써내려 갔는데, 1절 가사 중 두구절만 적고 다음 가사가 생각나지 않아 술 한잔을 들이키고 있는데, 미완성 가사를 본 유감독은 “됐어. 유형! 가사 한번 기가 막히네.” “절반도 안됐는데.” 유감독은 연신 술을 따라주며 “바람이 씽씽부는 시베리아 벌판을 생각해 봐.” 그 말을 듣고 유호가 가사를 이어 쓰자. “좋다!” “아이, 시끄러!” 하면서 1절 가사를 끝마쳤습니다. 유감독은 “좋다!”를 연달아 소리 질렀고, 유호는 즉석에서 2절까지 영화 ‘카츄샤’ 주제가를 만들었습니다. 「굉장해요!」 유두연 감독은 다음날 이인권을 만나 바로 작곡을 의뢰했고, 가수 송민도가 취입해서 영화보다 먼저 발표해 전국을 강타했습니다.
〈카츄사의 노래〉가 태풍을 몰고가자 1960년 2월 11일 김지미(옥녀), 최무룡(원일) 주연의 영화 ‘캬츄샤’가「국제극장」에서 개봉돼 대박을 터트리면서 전국의 극장가를 휩쓸었습니다. 영화의 줄거리는,「시골 부농집에서 시중을 드는 옥녀(김지미)는 방학동안 집에 내려온 그 집의 상속자인 대학생 원일(최무룡)과 가까워져 그의 아이를 갖는다. 원일은 다시 서울로 떠나고, 옥녀는 그 집에서 쫓겨나 서울로 올라와 ‘카츄샤’라는 이름으로 술집빠에서 일한다. 옥녀는 뜻하지 않게 살인미수를 한 뒤, 소식을 듣고 검사직까지 버리고 달려온 원일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둔다.」
영화의 주제가는 송민도가 부른〈카츄사의 노래〉와 최무룡이 부른〈원일의 노래〉였습니다.
리메이크된 영화는 1971년 서윤성 각본, 김기덕 감독, 신성일, 문희 주연으로 제작되어 상영됐습니다. 영화의 줄거리는,「정숙(문희)는 부잣집 아들인 법학도 성준(신성일)에게 순정을 다 바쳤지만, 성준은 정숙이 식모라는 이유로 그녀를 배신합니다. 그녀는 실의와 절망 속에서 자살을 결심하지만 이미 자신의 몸에서 성준의 아이가 자라고 있어 포기합니다. 출산을 한 후 ‘카츄샤’라는 이름으로 술집에 나가고 화류계에서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그러나 아이가 죽자 그녀는 스스로 죄를 뒤집어 써 법정에 서게 되면서 모든 것을 알게 된 성준은 정숙을 구하려 하나 이미 폐인이 된 그녀는 성준의 품에서 조용히 숨을 거둔다.」 관객들 눈물, 콧물 바가지..
–〈여옥의 노래〉– 유호 작사, 김광수 작곡, 송민도(1956년 유니버샬레코드사)
1절. 불러도 대답없는 님의 모습 찾아서 / 외로이 가는 길엔 낙엽이 날립니다
들국화 송이송이 그리운 마음 / 바람은 말 없구나 어드메 계시온지
거니는 발자욱 자욱마다 넘치는 / 이 마음 그리움을 내 어이 전하리까
2절. 소나무 가지마다 그리운 말씀 / 호수도 잠자누나 어드메 계시온 지
그 날의 손길을 가슴 속에 지니고 / 이 목숨 다하도록 부르다 가오리다
〈여옥의 노래〉송민도가 1956년 부른 노래로 ‘학원사’에서 창간한 월간잡지「여원(女苑)」에 1955년 10월 창간호부터 16회까지 연재 된 정비석의 소설 ‘산유화’가 1957년 동명의 영화로 제작돼 영화에 삽입된 영화주제가입니다. 송민도의 잔잔하고 호소력 있는 음색으로 애잔하게 불려져 당시 영화와 함께 많은 여성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대중들에게 크게 히트한 노래입니다.
영화. 각색 최정·유두연, 이용민 감독, 배우 신귀환, 장혜경, 이영미, 김신재, 강계식, 복혜숙, 주선태, 석금성, 이민, 구종석, 김보애, 김은주, 남미랑 등이 출연해 1957년 4월 20일 서울의「중앙극장」에서 개봉돼 흥행에 성공했고, 영화는 대만에 수출돼〈여옥의 노래〉는 대만에서도 아주 인기가 높았습니다. 리메이크 영화는 1966년 박종호 감독. 신영균, 고은아, 이수련, 주연, 한은진, 유주용, 최길호 등이 출연해 1966년 12월 16일 서울「중앙극장」에서 상영됐습니다.
줄거리,「Y여자대학교 4년생인 여옥(장혜경)과 명숙(이영미)는 독신으로 살고 있는 불어교수 양명환(신귀환)을 열렬히 사랑하는데, 양명환은 여옥을 지극히 사랑한다. 명숙은 양교수가 여옥을 사랑하는 것을 시기하여 두 사람 사이를 이간질하자 여옥과 양교수 사이에는 큰 오해가 생긴다. 어느 비오는 날 밤에 양교수는 거리를 배회하다가 갑자기 각혈을 하면서 쓰러진다. 훗날 여옥은 양교수와의 오해가 명숙의 간계에 의한 것임을 알고는 양교수를 찾아 나섰지만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여옥은 그의 무덤을 찾아 들국화를 바치며 한없이 슬피운다.」
☞ 1995년 7월 24일 ‘가요무대’에 출연해 부르는〈여옥의 노래〉한번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 김광수(1921년〜1993년)는 서울에서 태어나 일본 메이지대에서 음악을 배웠고, 1949년까지 제1바이올린 배도순, 제2바이올린 김광수, 비올라 백경중, 첼로 윤이상과 함께 부산에서 실내악 활동을 했고, 1950년대 ‘김광수와 그의 악단’을 운영했으며, 1958년부터 1961년까지 KBS 전속경음악단장을 역임했습니다. 악단 단원 중에서 김인배, 김강섭, 박호일, 이봉조 등이 배출했고, 김광수는 ‘한국의 만토바니’라고 불렸고, 1969년 미국으로 이민갔습니다.〈가을밤 엘레지〉〈엄마야 누나야〉〈광복 20년〉〈애정산맥〉〈개여울〉〈명사십리〉을 작곡했습니다.
–〈나 하나의 사랑〉– 손석우 작사·작곡, 송민도(1955년 오아시스레코드사)
1절. 나 혼자만이 그대를 알고 싶소 / 나 혼자만이 그대를 갖고 싶소
나 혼자만이 그대를 사랑하여 / 영원히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 싶소
2절. 나 혼자만을 그대여 생각해 주 / 나 혼자만을 그대여 사랑해 주
나 혼자만을 그대는 믿어 주고 / 영원히 영원히 변함없이 사랑해 주
〈나 하나의 사랑〉이 왈츠풍의 아름다운 노래는 발표된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까지 혼인식장의 단골 ‘축가’로 널리 불리운 곡으로 1955년 KBS에서 근무하던 손석우의 작사·작곡 데뷔곡인데, 가수 송민도가 불렀습니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춥고 배고픈 가난과 정에 메말랐던 그 시절 숱한 청춘 남녀들은 그런 사랑을 꿈꾸며 마치 자신을 대신해 불러주는 듯 빠져들었습니다. 30대에 만든 합작품이 66년이 흘러간 지금 송민도는 96세, 그리고 손석우는 2019년 99세의 연세로 작고하셨습니다. 노래만큼이나 두 분 다 장수하셨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남습니다.
한국전쟁 후 피난지 부산에서 서울로 돌아와서 KBS 방송국의 경음악단을 지휘했던 손석우님의 첫 곡이〈나 하나의 사랑〉입니다. 원방현, 옥두옥, 김백희와 함께 KBS 1기 전속가수였던 인연으로 송민도의 음색과 스타일에 맞추어 작사·작곡을 했습니다. 노래는 방송전파를 타면서 호평을 받았고, 당시 소설 ‘순애보’의 인기 소설가인 박계주(朴啓周, 1913년~1966년)는 이 노래 첫 소절에서 ‘나 혼자만이..’를 딴 제목으로 소설을 발매했고, 곧 영화로 제작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중가요가 영화화 된 최초의 노래가〈나 하나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영화 ‘나 혼자 만이’. 1958년 한형모 감독, 배우 김의향, 조미령, 김진규, 이대엽 등이 출연했고 줄거리는,「작곡가인 김진규의 옆집에는 문학소녀 김의향이 살고 있습니다. 김의향은 불구의 몸으로 자신을 비관하면서 곧잘 시를 쓰곤 했는데, 어느날 아침, 작곡가 김진규는 마당을 쓸다 옆집에서 버린 휴지에서 ‘나 혼자만이’라는 시(詩)를 발견하게 되고, 그리고 그는 그 시로〈나 하나의 사랑〉작곡을 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노래를 송민도가 불러서 대힛트해 불구의 소녀와 작곡가의 마음과 마음이 이어집니다.」
〈나 하나의 사랑〉노래비는 2014년 10월, 춘천시 남이섬 노래박물관 앞에 건립되었습니다.
–〈송도의 밤〉– 소화당 작사, 한복남 작곡, 송민도(1958년 도미도레코드사)
1절. 조각달 비쳐주는 선창가에서 / 손길을 마주 잡고 맺은 인연을
잊지 말자 맹서하던 송도의 밤은 / 행복에 아롱진 무지개였소
2절. 고깃배 잠이 들고 별도 잠들은 / 바닷가 거닐면서 부르던 노래
하늘나라 푸른 나라 꿈나라에서 / 아름답게 수 놓은 사랑이었소
〈송도의 밤〉송민도가 1958년에 부른 노래로 1960년 도미도레코드사에서 발매한 10인치 LP 편집 음반인 ‘송민도 가요 힛트 앨범 제1집’ 앨범 A면 3번째 수록된 곡입니다. 음반 A면.〈그대 목소리〉(강탁수/한복남)〈장미꽃 사랑〉(김운하/한복남)〈송도의 밤〉〈청춘의 꿈〉(강성기/하기송) B면에는.〈해당화 사랑〉(월견초/한복남)〈회상의 부르스〉(한금석/하기송) 〈첫사랑의 왈쯔〉(차경철/하기송)〈나의 고백〉(김운하/한복남)등 8곡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박성서 평론〕‘나 하나의 사랑’의 가수 송민도의 삶과 노래 칼럼에서 송민도 내용을 발췌,
「우리나라 드라마주제가 1호인〈청실홍실〉을 비롯〈고향초〉〈나 하나의 사랑〉〈카츄사의 노래〉같은 히트곡과 함께 우리 가요의 수준을 한 단계 올려놓았다는 평가를 받는 송민도 여사. 1971년에 도미 현재 미국의 LA 오렌지카운티에서 생활하고 계신다. 필자가 송민도 여사를 만난 것은 2006년, 도미한 지 11년만의 귀국이었다. 체류 기간 내내 동행했는데 옛 스승이었던〈청실홍실〉〈나 하나의 사랑〉작곡가 손석우,〈행복의 일요일〉작사가 반야월, 가수 금사향 선생을 함께 만남의 자리를 주선했다. 당시 88세의 손석우 선생과 91세의 반야월 선생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하시다는 것에 감동했다며 감격스런 심정을 토로하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나 하나의 사랑〉50, 60년대 결혼축가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송민도는 서울 이화고녀를 졸업했다. 그의 어머니 역시 이화학당 출신으로 김활란 여사와 동창이셨고 송민도씨는 이휘호 여사와 동기동창이다. 송민도는 1963년 직접 ‘백만불쇼단’을 결성해 단장으로서 쇼단을 이끌었는데, 가수 남일해·고대원·무용단·밴드 등으로 구성된 ‘백만불쇼단’은 인기가 높았지만 당시 여건에서는 늘 적자로 운영됐다. 결국 창립 5년만인 68년, 송민도씨는 자신의 분신처럼 여기던 백만불쇼단을 접는다. 아들 서동헌씨 때문이었다.」 송민도씨는 ‘가요무대’ 출연후 “무대에 서니 심장이 멎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박수소리 때문에 그 큰 무대에서 견뎠지요.”라고 말했다.」
다음에는 한명숙의〈노란 샤쓰의 사나이〉홍세민〈흙에 살리라〉에 대한 글을 올리겠습니다.
*상기 컬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