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 40.〈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 〈흙에 살리라〉(2021.12.06.)
이제 2021년 신축년(辛丑年) 올해 달력도 한장 남았습니다. 한해 잘 마무리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12월 1일은〈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 〈우리 마을〉, 〈사랑의 송가〉로 사랑받는 국민 가수 한명숙 선생님의 86번째 생신이었습니다.
2015년 11월 26일 오후 8시 45분에 서울 회기동의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에서 유준상·김혜수의 공동사회로 ‘제36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이 열렸는데, 첫 축하무대에서 가수 장미여관(육종완 등)은 노란색 양복을 입고서〈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를 열창해 시상식 분위기를 한층 북돋았습니다. 5년 전 2010년 10월 20일 KBS홀에서는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 50년-한명숙 헌정음악회’가 한국싱어송라이터협회 주관으로 열렸습니다.
가수 최백호가 위원장을 맡고 가수 송창식·임희숙·인순이 등도 참석해 축하를 했습니다. 데뷔 50년만에 신곡〈난 바람이어라〉를 부르던 한명숙은 목이 메어 노래를 이어가지 못했고, 1960년대〈노란 샤쓰이 사나이〉등으로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줬던 국민스타 한명숙은 “아! 이게 얼마만인가. 일흔 다섯 나이에 신곡이라니.”라며 회한에 젖어 눈시울을 붉혔다고 합니다.
한명숙(韓明淑) 1935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때인 1951년 어머니와 단 둘이서 월남해 인천에서 성장을 했는데, 1952년 평양음대 교수였던 외삼촌의 제자인 임원근의 소개로 ‘태양악극단’에 입단해서 일하다가 군예대의 일원으로 ‘군번없는 병사’로 활약했습니다. 그러다 1953년 미8군 쇼단인 ‘럭키쇼단’에 입단해 ‘세븐스타쇼’ ‘에이원쇼’에 출연했는데, 영어를 모르는 한명숙에게 방송인 이백천이 영어 가사를 한글로 토를 달아줘 불렀다고 합니다. 어느날 작곡가 손석우는 지인으로부터 뛰어나게 노래를 잘 부르는 가수가 있다는 말을 듣고 대구의 한 극장을 찾았습니다.
손석우님은 그 곳에서 노래하는 한명숙의 세련된 무대 매너와 특유의 목소리를 접하자 한명숙님에게 어울리는 악상이 떠올랐을 때 ‘노란 샤쓰’ 가사가 저절로 나와 곡을 완성해 자신이 설립한 ‘뷔너스레코드사’ 첫 작품으로〈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를 발매했으나 한명숙의 허스키 보이스와 느린 부르스풍 재즈곡이라 대중들에게 철저히 외면받았고, 레코드상인들로부터는 녹음이 잘못됐다며 반품이 속출했습니다. 1962년 부산「삼일극장」공연 때 공연 포스터를 보고 찾아온 아버지를 만났는데, 이미 다른 분과 재혼해 함께 살지는 못했습니다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 손석우 작사·작곡, 한명숙(1957년 뷔너스레코드사)
1절. 노오란 샤쓰 입은 말없는 그 사람이 / 어쩐지 나는 좋아 어쩐지 맘에 들어
미남은 아니지만 씩씩한 생김 생김 / 그 이가 나는 좋아 어쩐지 맘이 쏠려
아아 야릇한 마음 처음 느껴본 심정 / 아아 그이도 나를 좋아하고 계실까
노오란 샤쓰 입은 말없는 그 사람이 / 어쩐지 나는 좋아 어쩐지 맘에 들어
2절. 아아 야릇한 마음 처음 느껴본 심정 / 아아 그이도 나를 좋아하고 계실까
노오란 샤쓰 입은 말없는 그 사람이 / 어쩐지 나는 좋아 어쩐지 맘에 들어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발표년도는 우리들이 알고있는 1961년이 아니라 1957년 손석우가 작사·작곡해 가수 한명숙이 불렀던 노래입니다. 한명숙의〈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는 손석우의 야심작인데 어렵게 음반을 제작한 후 각 레코드점을 찾아다니며 판매를 부탁했으나, 당시는 맑고 꾀꼬리 같은 맑고 청아한 목소리로 부르던 노래가 대중들에게 인기를 받았던 시절이라서 신인가수 한명숙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는 “목소리가 쉰 것같다.” “진짜 가수가 부른 노래가 맞느냐?”며 대중들로부터 외면을 받았습니다. 가요계 관계자들 또한 이 노래는 대중가요가 아닌 아이들이나 부를 수 있는 동요 수준이라는 악평을 했습니다.
반 년정도 지나서 손석우는 당시 유행하던 맘보 트위스트를 착안해〈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를 빠른 ‘스윙템포’의 트위스트곡으로 편곡을 해 한명숙에게 다시 부르게 했는데, “하룻밤 자고 나니 유명해졌다.”는 말이 실감나듯 전국에 온통〈노오란 샤쓰의 사나이〉가 흘러나왔습니다. 이는 당시 심란하고 암울했던 대중들의 마음을 밝고, 환하게 만들어 주는 효과도 노래의 인기 상승에 크게 작용했다는데, 1961년 12월 31일 KBS-TV 개국 특집방송에서 김광수가 지휘하는 KBS 관현악단 반주에 맞춰 한명숙이 불러 방송됐고, 그후 KBS 쇼프로에서 자주 방영되어서 전국의 거리 거리마다, 학교운동장 등 사람이 모이는 장소마다 울려 퍼졌고, 각종 응원가로도 많이 불렸다고 합니다. 한명숙은 하루에 백번 넘게〈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를 불렀을 정도로 일약 대스타가 되었고, 대중가요계에서 무명이나 다름없던 한명숙은 1961년 발표한〈노오란 샤쓰의 사나이〉공연이 한번 끝날 때마다 유명 연예인들이 전성기 시절을 말할 때 흔히 썼던 “부대자루에 갈퀴로 돈을 긁어모을 정도로 많이 벌었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당시 연예인 국세청 납세자 1위에 오를 정도로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연예인이 됐습니다.
이듬해인 1962년 3월 30일 엄심호 감독, 신영균, 엄앵란 주연 영화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가 서울「국도극장」에서 개봉되자 장안의 화제를 몰고와 영화관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단일극장 관객수 15만 명을 동원해서 흥행에도 대성공을 거뒀습니다. 한명숙도 단역으로 출연해 영화배우로도 데뷔했고, 손석우는 작품료로 쌀 70가마니 값인 100만환을 받았다 합니다. 특히, 1963년 프랑스 샹송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샹송가수 ‘이베트 지로(Yvette Giraud)’가 서울 시민회관에서 내한공연을 가지면서〈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를 한국어로 부른 후, 멜로디에 반해 곡을 취입 ‘비너스레코드사’에서 프랑스어 음반을 제작한 후 발매해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후 한명숙의 위상은 나날이 높아져 일본·대만·홍콩·싱가폴·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에서 공연 요청이 쇄도했고, 1965년 아시아 톱가수 대우로 이루어진 동남아 순회공연을 비롯 태국에서 음반 취입과 대만에서 중국어 번안 음반 발매, 그리고 1966년 파월장병 위문공연에 이어서 미국 공연을 갖는 등 눈코 뜰새 없는 나날들을 보냈습니다. NHK방송 초청으로 일본 공연도 가졌습니다. 또한 1972년 일본의 인기가수 ‘하마무라 미츠코’가 일본어 음반을 발매하기도 했습니다. 1960년대 한명숙의〈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의 폭풍은 전 세계에 한류 열풍을 불러 일으키자 가요계에서는 가수 한명숙을 지금으로 치면 ‘K-Pop 한류 원조’ 또는 ‘제1호 한류가수’라고 인정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명숙님은 열심히 노래했지만 그녀가 한 말씀, “내겐 돈복이 없는지 한 푼도 내 손에 남는 게 없었다. 희한하게도 벌면 꼭 새어나가는 구멍이 생기더라”며 씁쓸해 하면서도 “그래도 불러만 주면 단 한사람의 관객 앞에서라도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노래를 했다.”고 했습니다. “노래만 부르면 행복하다.” 하시는 한명숙님은〈눈이 내리는데〉,〈우리마을〉,〈센티멘탈 기타〉,〈사랑의 송가〉,〈검은 스타킹〉,〈그리운 얼굴〉,〈울고웃는 인생〉,〈내 별은 어느 하늘에〉,〈강가에 피는 꽃〉,〈세월〉등 400여곡을 불러 지금도 팬들의 사랑을 받는 영원한 디바입니다.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원제목은〈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노래를 작사·작곡한 손석우님의 말씀. “당시 KBS에서 ‘노래자랑’을 공개방송으로 진행해 수많은 청취자가 듣고 즐기면서 때론 참가하기도 했는데, 당대 최고의 임택근(가수 임재범, 배우 손지창 아버지) 아나운서가 사회를 보면서 항상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로 소개해서 전국적으로 굳어 버린 것 같다.”고 했습니다.
영화. 제작 차태진, 기획 마원일, 각본 유한철·이영일, 음악 손석우. 엄심호 감독. 배우 신영균, 엄앵란. 한명숙, 박암, 김희갑, 구봉서, 후라이보이(곽규석), 윤일봉, 양훈, 황정순, 남미리, 주선태, 석금성, 노경희, 김아미, 조용수, 박경주, 김숙일, 전영숙 등이 출연, 타이틀 “인생항로(人生航路)를 말없이 굳세게 살아가는 노란샤쓰 입은 사나이” “노란샤쓰 입은 사나이의 힛트쏭, 인기가수 한명숙 드디어 은막(銀幕)에 첫데뷰!” 영화의 줄거리「항상 노란샤쓰만 입고 다니는 무뚝뚝한 사나이(신영균)은 어느 여고 체육선생님으로 인형작가(엄앵란), 가수(한명숙), 다방 마담(노경희) 등 많은 직업여성들이 그에게 매력을 느끼고 구애를 하는 바람에 수난을 겪다가 여가수는 아내가 도망간 작곡가(박암)과 혼인을 하였고, 이어서 노란 샤쓰만 입는 사나이는 사랑하는 인형작가와 혼인을 하게 된다.」 이 영화로 배우 신영균은 톱스타로 성장을 했습니다.
☞ 2019년 2월 5일 설특집으로 진행된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한 국어학자인 인하대 한성우교수는 노래방 홈페이지에 실린 1923년〈희망가〉부터 2019년까지 발표된 우리나라의 대중가요 26,000여 곡의 제목과 가사를 분석한 ‘노랫말에 사용된 명사단어 빈도수 20선’ 중〈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가사에 들어 간 ‘사랑’, ‘말’, ‘사람’, ‘맘’ 등 순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1위 : 사랑 43,549회(12.3%), 2위 : 말 22,049회, 3위 : 사람 19,559회, 4위 : 눈물 16,650회
5위 : 때 15,949회, 6위 : 맘 15,705회, 7위 : 이제 15,483회, 8위 : 마음 15,316회
9위 : 날 14,897회, 10위 : 속 14,072회, 11위 : 가슴 13,980회, 12위 : 세상 13,581회
13위 : 눈 11,354회, 14위 : 오늘 10,876회, 15위 : 시간 10,850회, 16위 : 밤 10,319회
17위 모습 9,256회, 18위 : 꿈 9,113회, 19위 곁 8,875회, 20위 길 7,393회. 정말 대단하죠?
–〈우리 마을〉– 손석우 작사·작곡, 한명숙(1961년 뷔너스레코드사)
1절. 수양버들이 하늘하늘 바람을 타고 하늘하늘 / 물동이 이고 가는 처녀 치맛자락 하늘하늘
푸른 호박이 주렁 주렁 초가지붕에 / 주렁 주렁 일하는 총각 이마에는 땀방울이 주렁 주렁
우리마을 살기좋은 곳 경치좋고 인심좋아/ 봄가을엔 오곡이 풍성 주렁주렁 너울너울 무르익어요
밤이 깊으면 소근 소근 저마다 별이 소근 소근 / 앞집 처녀와 뒷집 총각 냇가에서 소근 소근
2절. 우리마을 살기좋은 곳 경치좋고 인심좋아/ 봄가을엔 오곡이 풍성 주렁주렁 너울너울 무르익어요
밤이 깊으면 소근 소근 저마다 별이 소곤 소곤 / 앞집 처녀와 뒷집 총각 냇가에서 소근 소근
〈우리 마을〉한명숙이 1961년 부른 노래로 뷔너스레코드사에서 발매한 ‘손석우 작곡집, 나 혼자만이’ 앨범 SIDE B면에 실려 있는 타이틀곡입니다. 음반에는, SIDE A면. 블루벨즈〈나 혼자만이〉,이춘희〈여심은 서반아로〉(旅心, 西班牙) ,김성옥〈내일은 개인데요〉,한명숙〈못잊어〉, SIDE B면. 한명숙〈우리 마을〉,이춘희〈그이는 멋쟁이〉,김성옥〈그리움은 샘물처럼〉,블루벨즈〈꿈은 사라지고〉등 8곡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 서반아(西班牙)=에스파냐=스페인.
당시 한국전쟁의 상흔이 아직까지 남아있고 보릿고개를 넘기기 어려워서 젊은이들이 무작정 서울로 도시로 향하던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낭만과 희망만은 잃지 않았는데, 한폭의 풍경화 같은 내 고향 마을인 농촌의 평화로움과 밝은 미래를 꿈꾸는 처녀 총각들의 풋풋한 사랑을 노랫말에 실어서 한명숙의 밝고 환한 음색과 도돔바 리듬을 타고〈우리마을〉은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특히, 1970년 ‘근면’ ‘자조’ ‘협동’ 기치로 펼쳐진 범국민적 지역사회 개발운동인 ‘새마을운동’이 시작되자 TV와 라디오를 비롯한 방송매체와 마을앰프방송을 통해 1972년에〈새마을 노래〉가 나오기까지는〈우리 마을〉이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 퍼졌습니다.
–〈사랑의 송가〉– 세고천 작사, 전오승 작곡, 한명숙(1963년 케네디레코드사)
1절. 바람결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 지금은 그대의 마음 변했나
영원토록 변치 말자든 님의 말이 / 지금은 이슬같이 사라졌네
차라리 몰랐던들 몰랐던들 / 이 마음 그대 생각 않을 것을 / 이 마음 그대 사랑 안 할 것을
2절. 차라리 몰랐던들 몰랐던들/ 이 마음 그대생각 않을 것을/ 이 마음 그대 사랑 안 할 것을
〈사랑의 송가〉한명숙이 1963년 부른 노래로 1963년 1월 케네디레코드사에서 발매한 ‘전오승 작편집, 데이트와 시계 / 사랑의 송가’ 앨범 Side B면의 타이틀 곡입니다. 음반 Side A면에는, 송영란의〈데이트와 시계〉(폴카),〈기분은 마찬가지〉(투위스트),〈엉뚱한 사나히〉(히리비리),〈나도 모르게〉(림보),〈돌아오는 봄에는〉(차차차),〈뻔딕이 장수〉(룸바) Side B면에는 한명숙의〈사랑의 송가〉(월쯔),〈끝없는 여정〉(스로도롯도),〈센치멘탈〉(부르-스),〈청춘 교향곡〉(맘보),〈혹시나〉(월쯔),〈팔당 뱃사공〉(부르-스),등 12곡이 함께 수록되어 있습니다.
음반 발매 당시〈데이터와 시계〉가 더 인기 있으리라 판단해 전면 A면에 싣고〈사랑의 송가〉를 B면에 실어 예상대로〈데이터와 시계〉가 먼저 사랑을 받았고, 이미 떠나간 사랑의 아픈 가슴을 왈츠 리듬의 선율을 타고 흐르는 노래〈사랑의 송가〉도 더 오랜기간 사랑받았습니다.
작사가 세고천은 작곡가 전오승(1923년∼2016년 본명 전봉수) 필명으로〈과거를 묻지마세요〉,〈미사의 종〉, 가수 나애심(1930년∼2017년 본병 전봉선)의 큰오빠이고, 〈DDD〉가수 김혜림의 큰외삼촌, 그리고 1961년 영화〈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아역배우인 전영선의 아버지이십니다.
전오승과 나애심은 한명숙과 같은 평안남도 진남포가 고향으로서 아주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12월 5일은〈흙에 살리라〉한 곡으로 평생 행복한 가수 홍세민이 71번째 맞이한 생일입니다.
가수 홍세민 하면, 떠오르는 오직 한 곡〈흙에 살리라〉1973년 김정일 작사·작곡의 곡입니다.
1973년 3월 16일 오아시스레코드사에서 ‘흙에 살리라/고향처녀’를 타이틀로 신인가수 홍세민의 음반이 발매됩니다. A면.〈흙에 살리라〉,〈옥이야〉,〈내마음 전해주오〉,〈모정의 메아리〉,〈눈을 감고 사랑하리〉 B면. 〈고향처녀〉,〈청춘이여 다시 한번〉,〈사랑은 옛이야기〉,〈미니아가씨〉,〈그리움이 사무쳐〉 10곡인데 유일하게〈흙에 살리라〉만 대중들의 호응을 받았으며,
그후 1974년〈나는 몰랐다〉,〈못 잊을 뿐입니다〉,〈왜 말 못해〉 , 1975년〈사랑은 물레방아〉 , 1976년의〈모국방문〉, 1977년〈나의 생각〉, 〈향수〉, 1978년〈잊지 못해요〉, 〈추억〉, 〈추억의 남포동〉, 〈복돼지 가요〉, 1979년〈고향의 순이〉, 1983년〈이제는 만나야지〉, 1984년〈마지막 부르스〉,〈아니었잖니〉1987년의〈이태원의 밤〉, 〈인연〉, 1991년〈그 여자가 나를 울리네〉, 1994년〈고백〉, 1997년〈사랑에 우네〉, 1999년〈고향 가는 길〉 등 100여 곡을 발표했습니다.
다른 노래는 한 곡도 모르겠고 48년이 지나도 오로지〈흙에 살리라〉똘똘한 한 곡만 기억나는 국민가수는 1950년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출생으로 동대문상고·동양공업전문대학 졸업입니다.
홍세민의 큰어머니 김길임(1928년〜1999년)은 우리나라 민속놀이인 ‘강강술래’를 부를 때에 선창을 하는 ‘메김소리’의 일인자로서 중요무형문화재 제8호 강강술래 예능보유자이셨습니다. 1928년 문내면 선두리에서 태어나 스무살 때 시아주버니 눈에띄어 인근 동녕리로 시집갔는데 남편은 “인물이 반반해 남의 손때 탄다.”며 소리를 못하게 했지만, 어릴 때 함께 자란 친구와 자식뻘 되는 이웃들과 함께 ‘해남 강강술래’ 팀을 만들어 1966년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때서야 남편도 하는 수 없이 “니 맘이다.”며 승낙을 했다 합니다. 해남 ‘강강술래’는 1975년 제16회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이듬해 대회에서는 ‘대통령상’을 수상했습니다.
‘강강술래’는 손만 잡고 추는 집단 원무형태의 놀이로서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께서 전라 우수영에서 진을 치고 있을 때, 열세인 병력의 수를 감추기 위해 ‘강강술래‘를 추게해 왜군을 물리친 기록이 있습니다. ‘강강수월래(强羌水越來)’는 ‘힘쎈 오랑캐가 물을 건너온다’는 뜻을 담고 있는데, 이는 수많은 외침에 시달려 온 우리 민족의 정서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흙에 살리라〉– 김정일 작사·작곡, 홍세민(1973년 오아시스레코드사, 원창 1972년 서정우)
1절. 초가삼간 집을 지은 내 고향 정든 땅 / 아기 염소 벗을 삼아 논밭 길을 가노라면
이 세상 모두가 내 것인 것을 / 왜 남들은 고향을 버릴까 고향을 버릴까
나는야 흙에 살리라 부모님 모시고 효도하면서 / 흙에 살리라
2절. 물레방아 돌고 도는 내 고향 정든 땅 / 푸른 잔디 벼게 삼아 풀 내음을 맡노라면
이 세상 모두가 내 것인 것을 / 왜 남들은 고향을 버릴까 고향을 버릴까
나는야 흙에 살리라 내 사랑 순이와 손을 맞잡고 / 흙에 살리라
(3절. 푸른 들녘 시내 흘러 내 고향 정든 땅 / 구름 함께 길을 걸어 가로수를 따라가면
이 세상 모두 다 내 것인 것을 / 왜 남들은 고향을 버릴까 고향을 버릴까
나는야 흙에 살리라 / 아이들 키우며 먼 훗날 위해 / 흙에 살리라)
〈흙에 살리라〉를 부른 원창 가수는 서정우입니다. 1972년 8월 27일 오아시스레코드사에서 취입했지만 빛을 보지 못하고 사장된 것을 1971년 데뷔한 무명의 신인가수 홍세민이 1973년 불러 농민들의 애창곡이 돼 그해 3월 26일 오아시스레코드사에서 음반을 제작해 발매를 하자 농촌이 고향인 대중들의 각종 모임과 향우회 행사 등에서 불리워 지면서 홍세민을 일약 스타로 만든 불후의 명곡이 됐습니다. 원창자 서정우의 본명은 서상희. 1953년 경기도 평택 출생으로 1971년〈희미한 옛사랑〉(오민우/정주희)〈다시 못올 님이건만〉(정두수/정주희)를 부른 가수,
2012년 8월 13일 ‘가요무대 광복절 기획-8월의 노래 특집’에 출연〈흙에 살리라〉를 불렀습니다.
이 노래를 작사·작곡한 김정일(1943년생)의 본명은 이종원.〈흙에 살리라〉는 그의 작곡가 데뷔곡입니다. 〈나는 못가네〉,〈물 한 모금, 술 한 모금, 사랑 한 모금〉의 미스코리아 출신 가수 박윤영과 혼인해 2남 1녀를 뒀고, 1989년〈사랑했어요〉로 KBS ‘신인가수상’을 수상한 가수 김상아(본명 이재하)가 두 분의 아들입니다. 그가 만든 곡은, 설운도〈마음이 울적해서〉, 이자연〈여자는 눈물인가봐〉, 현숙〈사랑하는 영자씨〉, 송현섭〈오래 오래 살아주세요〉, 오은정〈가평 아가씨〉, 〈울산 아리랑〉과 박영규〈카멜레온〉, 김상아〈사랑했어요〉, 〈꼬마 청바지〉, 동그라미〈같이 있게해 주세요〉, 김연자〈못잊을 건 정〉 등이 있습니다. 두분 행복하세요.(^^)
가수를 제외한 배우 등 연예인들은 작품 하나 출연해서는 이름도 없고, 먹고 살기도 힘듭니다.
그러나 오직 가수만은 히트곡 한 곡만 있으면 평생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다는 말도 있고, 가수들도 그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표적인 사례를 예로들면, 홍세민의〈흙에 살리라〉가 발표된 지 48년이고, 한명숙〈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60년, 성재희〈보슬비 오는 거리〉56년, 유주용〈부모〉53년, 이석〈비둘기 집〉53년, 정은숙〈석류의 계절〉52년, 이승재〈눈동자〉51년, 한세일〈모정의 세월〉49년, 이용〈잊혀진 계절〉39년, 주병선〈칠갑산〉32년 등입니다. 홍세민의 유일한 히트곡인〈흙에 살리다〉는 ‘농민 대중가요’로 통합니다. 흙에 묻혀 고향을 지키며 살고 싶다는 농민들의 희망가이자 애향가로 손색이 없는데, 초가삼간, 고향, 흙, 정든 땅, 아기염소, 물레방아, 풀내음, 부모님, 효도 등의 노랫말들이 이를 잘 말해줍니다.
〈흙에 살리라〉의 실제 작사가로 명창 출신 가수 최세월(본명 최장봉)이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최세월님은 S.E.S. 출신 가수 겸 뮤지컬 배우 ‘바다’(본명 최성희)의 아버지로 명창 박초월님의 문하생이었습니다. 2008년 문화일보〈흙에 살리라〉작사 배경 설명 보도기사.「내 고향 완도에 살 때의 이야기를 아내와 함께 만든 것.”이라며 “당시 고향을 등지고 떠나는 사람들이 안타까워 만든 노래고, 노래에 나오는 순이는 아내 조복순이다.”」고 공개했습니다. 2017년 평화신문과 인터뷰에서 “내가 양보하고 손해 볼 때 그게 사랑입니다. 이익을 볼 때는 사랑이 없죠”라고 말씀했다고도 합니다. 서로 서로 양보하면서 “내 탓이요”하는 삶이 진정한 삶이 아닐까요?
다음에는 황금심님의〈외로운 가로등〉과 박재란님의〈님〉2곡에 대한 글을 올리겠습니다.
*상기 컬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