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국들에게 최대한 몸을 낮춘 당태종
백제 무왕의 죽음에 소복 입고 곡을 한 당태종
2017년 사회발전지수가 발표되었다. 사회발전지수란 소득과 성장률 등 경제적 측면만 중시하던 기존의 개념을 넘어, 사회·환경 등 여러 측면에서 사회시민들의 기본적 욕구충족, 복지의 기초, 기회 등 3개 영역의 50가지 지표로 비교·조사해 종합적으로 평가한 지수이다. 흔히 살기 좋은 나라 순위라고도 한다.
전 세계 128개국 중 덴마크가 종합점수 90.57점으로 지난해 3위에서 올해 1위로 뛰어올라 지구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로 평가되었다. 2위는 핀란드(90.53점), 공동 3위에 아이슬란드와 노르웨이(90.27점) 등 북유럽국가들이 최상위권으로 평가됐다. 일본은 종합점수 86.44점으로 17위, 한국이 82.08점으로 26위, 중국이 63.72점으로 83위를 기록했다.
2017년 1분기 GDP 성장율이 6.9%에 달할 정도로 IT기반의 서비스업으로 고성장을 질주하고 있는 중국은 인간의 기본욕구, 웰빙, 기회적인 측면에서 국민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려는 인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특히 언론자유지수는 최하위인 128위, 개인의 권리는 127위, 관용과 포용은 107위로 매우 낮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2016년 국가별 GDP 순위에서 미국에 이어 2위를 차지한 중국은 IMF(국제통화기금)가 발표한 국가별 일인당 국민소득 순위에서는 8,113불로 70위를 기록했다. 참고로 일본이 38,917불로 20위, 한국이 27,539불로 26위이다. 즉 중국의 국가적인 경제력규모는 세계 2위 수준이지만, 국민 개개인의 삶의 질은 아직도 세계 중하위권을 맴돌고 있다.
이런 상태인데도 시진핑은 경제와 군사적 숫자에만 고취되어 중국의 꿈인 대당성세(大唐盛世)라는 구호로 엄청난 일대일로(一帶一路)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으나, 이는 빛 좋은 개살구로 결국은 당태종처럼 피눈물을 흘리며 땅을 치고 요동정벌을 후회했던 것과 같은 날이 언젠간 올 것이다. 쌓아놓은 곡식이 많다고 해서 백성들의 삶을 등한시하면 언제든지 배는 물에 뒤집힐 수도 있다는 만고의 진리는 변하지 않는 법이기 때문
주변국들에게 공주를 바친 당태종
대당성세의 주인공으로 중국 역사상 최전성기라는 당나라의 국력도 지금 시진핑 주석의 생각과는 다르게 사실 변변치 않았다. 그 근거는 당나라가 자주 사용했던 화번공주(花蕃公主)라는 단어에서 찾을 수 있다. 화번공주란 고대 중국에서 정치·외교적 목적으로 이민족의 군주에게 바쳐진 왕녀를 이르던 말로, 전한 때 흉노족으로 보내진 왕소군(王昭君)이 유명하다.(왕소군은 http://greatcorea.kr/sub_read.html?uid=421§ion=sc1§ion2= 참조)
한나라 때와 마찬가지로 당나라 때의 국력도 주변 이민족들에 비해 많이 허약했다보니 사실상 조공제도인 화번공주를 활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태종 때 바쳐진 화번공주는 티베트 땅에 있던 토번으로 바쳐진 문성(文成)공주와 금성(金城)공주이며, 돌궐로 바쳐진 형양공주와 토욕혼에 바쳐진 홍화(弘化)공주 등이 있다. 당시 당나라가 얼마나 나약했으면 물론 양녀였지만 자신의 딸을 다른 나라로 시집보냈겠는가?
한고조 유방이 백등산에서 포위당한 상태에서 부인이 치마끈을 풀어 몸까지 바쳐가며 얻어낸 조건은 유방의 친딸을 조공으로 바친다는 굴욕적인 조건이었으나 궁녀였던 왕소군이 보내진 경우와 마찬가지로, 당태종 이세민 때도 종친의 딸을 양녀로 삼아 공주로 봉해 주변 이민족들에게 바쳤다. 문성공주는 당태종과 함께 요동정벌에 참여했던 종친 강화왕 이도종의 딸로 알려져 있다.
형양공주가 바쳐진 돌궐은 당시 신생국 당나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당고조 이연 역시 돌궐의 도움으로 장안에 입성할 수 있었으며, 이세민이 왕위에 오르고 얼마 후 돌궐의 10만 기병이 장안까지 육박하자 당태종은 소수의 측근들만을 대동하고는 비무장으로 돌궐의 힐리카 간을 찾아가 막대한 재물과 함께 화번공주를 바치는 등 굴욕적인 조건으로 동맹을 유지했다고 한다.
백제 무왕의 죽음에 소복 입고 곡을 한 당태종
또한 당시 당나라의 위상에 대해 눈여겨봐야 할 기록이 있으니 바로 당태종과 백제와 관련된 기록이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 “42년(641년) 봄 3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무(武)라고 했다. 사신이 당나라에 들어가 소복을 입고 표를 받들어 ‘임금의 외신인 부여장이 죽었다(君外臣扶餘璋卒)’고 고하자 당제가 현무문에서 애도식을 거행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구당서』권199 ‘동이열전’에는 “정관 15년(641년), 장(璋=무왕)이 죽자 그 아들 의자(義慈)가 사신을 보내 표를 받들고 상이 났음을 고하자 태종이 소복을 입고 통곡을 했다. “十五年 璋卒 其子義慈遣使 奉表告哀 太宗素服哭之”라는 기록에서 당태종이 백제 무왕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일국의 황제가 다른 나라 임금이 죽었다고 소복까지 입고 곡을 했다는 예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기록이다. 특히 중국역사상 최고의 명군이라는 천하의 당태종이 백제 무왕의 죽음에 소복을 입고 애도식을 거행하면서 곡을 했다는 내용은 우리를 대등한 관계가 아닌 동방의 작은 오랑캐 제후국 정도로 여기는 중화사관의 입장에서 보면 경천동지할 내용으로 당시 백제와 당나라의 상하관계가 자명해지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옛날에는 신분에 따라 죽음에 사용하는 글자를 달리 했다. 황제의 죽음에는 붕(崩), 제후나 왕의 죽음에는 훙(薨), 사대부의 죽음에는 졸(卒), 일반인에게는 사(死)’를 사용했다. 『삼국사기』는 무왕의 죽음을 훙으로 기록해 스스로를 비하한 면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중화사관에 의해 기록된 『구당서』에서 무왕의 죽음을 사대부의 죽음처럼 졸(卒)이라고 쓰면서도, 황제가 소복을 입고 곡을 하며 애도식을 거행했다는 내용은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기록인 것이다.
위 『삼국사기』에서는 당태종을 황제라고 기록했으나, 무왕이 올렸다는 표문에는 황제가 아닌 임금(君)이라고 기록했다. 일반적으로 신하가 황제를 지칭할 때에는 군(君)이라고 표현하지 않는 법이다. 군(君)은 처음에는 임금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다가 후대에는 봉지를 받는 제후의 개념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토록 허약했던 당나라가 중국역사상 최전성기였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로 얼마나 중국역사가 보잘 것 없었으면 대당성세라는 구호가 나왔겠는가! 이는 중국의 역사는 5%만이 진실이고 나머지는 과대포장된 허구임을 대변하는 용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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