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남생 묘비명과 정확히 일치한 <태백일사> 기록
시진핑 주석은 지난해 7월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건군 90주년 기념 경축대회와 전날 내몽골자치구에서 있었던 열병식에 장쩌민(姜澤民)과 후진타오(胡錦濤) 두 전 주석을 초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직 원로들의 업적을 찬양하며 경의를 표하는 발언조차 하지 않았다. 그동안 열병식은 주로 수도 베이징에서 열렸으며 전직 주석과 총리들이 참석하는 것이 관례였다. 한 마디로 두 웃어른에게 큰 결례를 한 것이다.
부패척결이라는 구호로 정적들을 제거하고 당의 모든 주요 보직들을 측근들로 독점해 현재 일인독주체제를 질주하며 마오쩌둥(毛澤東)과 덩샤오핑(鄧小平)과 같은 반열에 오르려는 시 주석의 입지는 매우 강력한 것처럼 보이나, 세상일은 그렇게 자기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시 주석은 2022년에 임기를 10년 더 연장해 장기집권으로 가려고 하겠지만, 시 주석에게 차별받은 다른 계파의 간부들과 전직 지도부 고위인사들이 넋 놓고 당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특히 시 주석이 안하무인격으로 오늘의 자신을 만들어준 두 웃어른도 몰라보고 결례를 한다면 그간 확고했던 그의 입지는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바로 아랫사람에게는 덕(德)으로 대하고, 웃어른은 예(禮)로 모시는 것이다. 시 주석이 전직 주석이었던 장쩌민과 후진타오를 뒷방 늙은이 취급할 때 중국에서 큰 분열이 일어날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절대 권력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원래 크던 작던 조직의 장들은 일 잘하는 유능한 직원보다는 업무처리 능력은 좀 떨어지더라도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순종형의 아랫사람을 좋아하는 법이다. 시진핑이 국가주석이 될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후진타오 주석과 섭정왕이었던 장쩌민 전 주석이 다음 국가주석으로 시진핑을 선정한 데는 그의 능력보다는 그를 말 잘 들을 인물로 보았기 때문이다. 만일 능력과 국민의 지지가 우선이었다면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시 당서기가 적임이었을 것이다. 여하튼 두 전임 주석은 현재 시진핑 주석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격이다.
일인독주체제로 가려는 시 주석이 자신의 진정한 멘토로 받아들였어야할 인물이 바로 고구려 말기의 대영웅 연개소문이다. 만일 시 주석이 연개소문의 처신과 행동을 본받았더라면 살아있는 전임 두 주석의 존재를 묵살하는 어처구니없는 행동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하튼 시 주석의 수준이 그 정도라는 사실은 우리로서는 그나마 큰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그럼 시 주석이 멘토로 모셔야할 연개소문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연남생 묘비명과 정확히 일치한 <태백일사> 기록
<태백일사 고구리국본기>는 연개소문에 대해 조대기(朝代記)를 인용해 “연개소문의 성은 연(淵)씨이고 일명 개금(蓋金)이라고도 한다. 선조는 봉성(鳳城) 사람으로 아버지는 태조(太祚)라 하고, 할아버지는 자유(子游)라 하고, 증조부는 광(廣)이라 했으니 나란히 막리지를 지냈다. 영양제의 홍무(弘武) 14년(603) 5월 10일 태어났고, 나이 9살에 조의선인에 뽑혔다.”고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개소문의 성을 천(泉)씨라 하고, 조상들의 이름도 적혀있지 않다. 개소문의 원래 성씨가 淵씨였음에도 泉씨로 적힌 이유는 피휘(避諱) 즉 당나라 고조 이연(李淵)의 이름과 같은 글자사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야말로 <삼국사기>는 중화모화사대사상에 쩔은 사서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된 연개소문의 조상들 이름이 새겨진 유물이 1921년 낙양 북망산에서 발견되었으니 바로 연개소문의 맏아들 남생의 묘지명이었다.
거기에는 “공의 성은 천(泉)이며 휘는 남생(男生)이고 자는 원덕(元德)으로서, 요동군 평양성 사람이다. (중략) 증조부는 자유(子遊)이며, 조부는 태조(太祚)로서 다 막리지를 역임했고, 아버지 개금은 태대대로였는데, 조부와 아버지가 쇠를 잘 부리고 활을 잘 쏘아 군권을 아울러 쥐고 모두 나라의 권세를 오로지 하였다.”라는 문구가 있어 식민사학계에서 위서로 치부하던 <태백일사>의 기록이 옳다는 것이 유물로 입증되었다.
수나라를 세운 문왕 양견은 은밀하게 모반의 뜻을 품고 감히 복수의 군대를 내어 영주총관 위충을 요서(遼西)에 몰래 파견해 고구리의 관가를 부수고 읍락을 불 지르고 노략질했다. 이에 홍무 9년(598)에 영양대제는 연개소문의 부친인 서부대인 연태조(淵太祚)를 보내 등주(登州)를 토벌하고 총관 위충을 잡아 죽이니 이에 산동지방이 다시 평정되고 해역은 조용해졌다.
이 해에 양견이 왕세적 등 30만 군사를 파견해 싸우도록 했으나 겨우 정주를 출발해 요택에도 미처 이르지 못했음에도 물난리를 만나 식량은 떨어져 배고픔은 심하고 전염병마저 크게 돌았다. 주라후의 수군은 동래(東萊)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성으로 오다가 풍랑을 만나 선박 대부분이 깨지고 침몰되어 가을 9월에 수나라 군사들이 돌아갔는데 80~90%가 죽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연개소문의 부친은 바로 영주총관 위충을 죽인 그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삼국사기>는 중국사서처럼 연개소문을 아주 흉폭하고 잔인한 인물로 묘사했는데, <태백일사>에는 그 반대로 기록되어 있다. “의표웅위(儀表雄偉)하고 의기호일(意氣豪逸)하여 병사들과 함께 장작개비를 나란히 베고 잠자며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서 마시며, 무리 속에서 스스로의 힘을 다하였으니 혼란한 속에서도 작은 것을 다 구별해내고, 상을 베풀 때는 반드시 나누어 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하며 마음을 미루어 뱃속에 참아두는 아량이 있고, 땅을 위(緯)로 삼고 하늘을 경(經)으로 삼는 재량을 갖게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감동해 복종하니 한 사람도 딴 마음을 갖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법을 쓰는데 있어서는 엄명으로 귀천이 없이 똑같았으니 만약에 법을 어기는 자 있으면 하나같이 용서함이 없었다. 큰 난국을 만난다 해도 조금도 마음에 동요가 없었다. 당나라 사신과 말을 나눔에 있어서도 역시 뜻을 굽히는 일이 없었고, 항상 자기 겨레를 해치는 자를 소인이라 하고 능히 당나라 사람에게 적대하는 자를 영웅이라 하였다.
기쁘고 좋을 땐 낮고 천한 사람도 가까이 할 수 있으나 노하며 권세 있는 자나 귀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가 겁냈다. 참말로 일세의 쾌걸(快傑)이라 할 수 있으며, 스스로 물 가운데 살아서 능히 잠행할 수 있고 온종일 더욱 건장하게 피로할 줄 모른다고 말하였다. 무리들 모두 놀라 땅에 엎드려 절하며 가로대 ‘창해의 용신이 다시 몸을 나타내심이로다.’라고 했다. 이렇듯 모두 좋은 의미로만 적혀 있다. 그런데 왜 <삼국사기>와 중국사서에는 나쁘게만 적혀있을까?
*상기 컬럼은 본지의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