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하천까지 수나라 대운하로 과장한 중국
645년 5월 5일, 당태종이 흙다리를 놓아 건너갔던 요택은 고구려 침공을 위해 정주를 떠난 수문제의 30만 대군이 지나려고 했던 그 요택이며, 수양제가 영제거라는 운하를 만들어 지나갔던 늪지대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연이 있는 요택은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현재 한·중 역사학계는 당시 수·당 군대가 건넜던 요수(遼水)는 서만주를 흐르는 지금의 요하이며, 2백리 요택은 그 하구에 펼쳐진 늪지대라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당태종의 고구려 침공루트는 수양제 3백만 대군의 1차 침공 행군로와 거의 같다. 수양제는 200리 늪지대인 요택을 지나기 위해 고구려 침공 전에 미리 군수물자 수송용 운하를 만들었다. 한중 역사학계는 통제거는 낙양 동쪽에서 하남성을 관통해 회하까지 이르렀고, 영제거는 낙양 북쪽에서 하북성을 관통해 천진까지 이르는 대운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그런지 지금부터 상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우선 수양제가 3백만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1차로 침공한 해가 612년이다. 통제거는 수양제 즉위 원년(606)에 황하와 회하와 연결시키기 위해 만들기 시작한 운하이며, 영제거는 610년에 건설하기 시작했다. 과연 낙양 부근에서 하남성을 관통해 회수까지 가는 대운하를 6년 만에, 하북성을 관통해 천진까지 가는 엄청난 길이의 영제거를 2년 만에 건설할 수 있었을까? 아마 현대 기술과 장비로도 쉽지 않을 것이다.
<수서 양제기>에 “대업 원년(605)에 황하 남쪽 회수 북쪽에 사는 여러 군민 백여만 명을 동원해 통제거(通济渠)를 개착했다. 서원(西苑)에서부터 곡수와 낙수(谷洛水)를 끌어 황하에 다다르게 하고, 다시 판저(板渚)에서 황하의 물을 끌어 회수에 이르게 했다.”라는 기록이 있어 통제거는 2단계로 나뉘어 건설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곡낙수는 낙양과 황하를 연결하는 물길이다.
판저는 하남성 사수현 동북쪽에 있는 지명이다. <수경주>에 “수양제가 통제거를 개통했는데, 판저에서 황하를 끌어 변수로 들어간다.”는 설명이 있으며,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 변수(汴水)는 낙양 동쪽 영양시 대주산에서 발원해 진유, 기현, 사수를 거쳐 주구(周口)시에서 영하와 합쳐져 회하 상류로 들어가는 현 가노하라는 설명이 있다. 즉 통제거는 황하와 자연하천인 변수를 연결하는 작은 운하였던 것이다.
<수서 양제기> 대업 4년(608)에 “하북(河北) 여러 군의 남녀 백여만을 동원해 영제거(永濟渠)를 뚫어 심수의 물을 끌어다가 남쪽으로 황하에 다다르게 했다. 북쪽이 탁군과 통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의 하북은 지금의 하북성이 아니라 단어 그대로 황하 북쪽이며, 심수(沁水)는 산서성에서 발원해 남류하다 하남성에서 급격히 동류해 황하로 들어가는 강이다.
이 심수의 물을 남쪽으로 끌어 황하와 연결시킨 것이 영제거였으므로 요택은 하남성 제원시, 맹주시, 온현 일대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중국은 영제거가 하남성 심수 동쪽에서 나와 하북 평원을 지나 북쪽으로는 북경 남쪽 탁주까지 이르는 2,000리 길이의 현 위하(衛河)라고 주장하고 있다. 위하가 자연하천임에도 포함시켜서 말이다.
수양제가 영제거를 만들어 통과하려 했던 요택은 본시 거란족의 본거지였다. <요사지리지>에 “요나라는 그전에 거란이라 불렸다. 원래 선비족의 땅인 요택에 살았다.(辽国其先曰契丹,本鲜卑之地,居辽泽中) 유관까지 1,130리이며 유주까지 714리다. 남으로 황룡이 있고 북으로 황수와 접하고, 냉형이 오른쪽에 있고 요하가 왼쪽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고대지명대사전>은 “소택배수: 광령 이동에서 요하까지에 있는 큰 웅덩이 소택지로 옛날에 요택이라 불렀다. 수·당의 고구려 정벌 때 임시로 교량도로를 수축했다. 동쪽은 해성현에서 시작하여 서쪽은 광령까지로 200여리이다.”라고 요택을 설명하며, 광령(廣寧)은 하남성 수무현 서남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특히 지형적으로 큰 강인 심수(沁水)와 황하가 만나는 사이는 늪지대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 옛 요택은 현재 황하습지(黃河濕地)라는 관광지로 남아 있다.
한중역사학계에서는 위 <수서 양제기>의 기록을 근거로 영제거를 심수에서 천진까지 이르는 대운하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실제 영제거는 아주 작았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645년 5월 3일 도착한 이세민이 요택을 건너갈 수가 없자 염립덕에게 흙다리를 만들게 해 이틀 후 건너갔기 때문이다. 그런 요택을 지나기 위해 수나라가 백여만 명을 동원했다는 <수서>의 기록은 중국 특유의 과장임이 분명하다.
<당태종의 요동정벌의 자초지종과 실패원인>에서는 당시 요택에서 일어난 상황에 대해 “5월 10일 당 태종은 친히 6군을 거느리고 요수를 건너고 북평과 요택을 지났다. 당시 당태종이 만난 어려움은 수양제와 같았다. 요택에는 진흙탕이 200여리나 되어 사람과 말이 지날 수 없었기에, 장수 염립덕이 흙다리를 만들어 그나마 건널 수 있었다. 요택 위 수면에 떠다니는 수나라 병사들의 유골을 본 당 태종은 그들을 매장하라 명했으며, 요택을 지난 후 태종은 흙다리를 없애라고 명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어 “요수와 요택을 지나면 맨 처음 당도하는 곳인 요동성은 고구려로 들어가는 길목을 지키는 성이다. 게다가 평지에 구축된 요동성은 당나라 군대에게 특별한 의의가 있었다. 3차례에 걸친 수양제의 요동정벌 모두 요동성을 함락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요동성이야말로 당나라 군대가 기필코 넘어가야 할 고비였다.”는 문구가 있다. 이는 요택과 요수를 지나면 바로 고구려로 들어가는 길목인 요동성과 마주치므로 요택의 위치를 알면 요동성의 위치도 알 수 있다.
식민사학계는 이러한 요동성을 현 요녕성 요하 근처에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일제식민사학을 그대로 계승한 일고의 가치도 없는 엉터리 이론이다. 이런 기록이 있다. 612년 1월 3일, 탁군에서 고구려 정벌 제1군이 출발해 40일 만에 출발을 끝낸 수양제는 3월 14일 군사들이 있는 요수(遼水)에 도착했다. 부교 설치의 실패로 많은 인명이 살상된 수나라는 다시 부교를 설치하고서는 고구려 군사 1만 명을 죽이고 승기를 잡아 요동성을 포위했다.
요택을 지나기 위해 만든 영제거의 남쪽에 있는 탁군에서 정벌군의 사열을 위해 2월 중순까지 머물던 수양제가 한 달 만인 3월 중순에 요수에 나타났다면, 그 요수는 절대로 현 요녕성 요하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영제거는 심수의 물을 남쪽으로 황하에 이르도록 한 운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수와 요택은 낙양에서 먼 거리에 있으면 수양제와 당태종의 전쟁 기록이 성립되지 않는다.
여하튼 수양제나 당태종이 낙양부근에서 현 요녕성 요하까지 오려면 최소 6개월 이상은 걸린다. 요하까지 건넌 강이 무수히 많아야 하고 지나간 지명 역시 많아야 함에도 사서에 기록된 낙양과 요택(요수)사이에 있는 지명이라고는 달랑 정주뿐이다. 이 의미는 낙양과 요동성이 상당히 가깝다는 말인 것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수·당 전쟁기록에 언급된 정주(定州)는 낙양 동쪽에 있는 정주(鄭州)였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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