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에게 포로가 된 명나라 황제
시진핑은 위대한 대당성세(大唐盛世)의 실현을 위해 중국몽(中國夢)을 이루겠다고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그런 단어는 역사적 사실도 아니며, 중국역사가 얼마나 초라하고 비참했는지 아직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베이징 징화학교의 역사교사인 위안텅페이(袁騰飛)는 “일본도 역사교과서를 왜곡하지만 중국만큼은 아니다.”면서 “중국 역사교과서에 기술된 내용 중 진실은 5%도 되지 않고 나머지는 완전한 허구”라는 말을 듣지 못한 것 같다.
중국 역사상 외적에게 중국의 황제가 포로가 되어 붙잡혀간 것은 1126년 금나라 태종에게 북송의 흠종과 휘종이 끌려간 ‘정강의 변’이 최초라고 하는데 그 이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으며(나중에 소개하기로 한다), 이후 1449년 또 다시 명나라 6대 황제 영종(英宗)이 몽골족을 통일한 오이라트와의 전쟁 중에 토목(土木)에서 졸지에 포로가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1435년 부황 선덕(宣德)제의 뒤를 이어 9세의 나이로 황위에 오른 영종 정통(正統)제는 태후와 세 양씨의 섭정을 받았고 환관 왕진을 기용해 총애하게 된다. 그러던 중 섭정을 하던 늙은 세 양씨가 차례로 죽게 되면서 점차 견제장치가 사라진 왕진이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며 전횡을 일삼게 되었다.
명나라에게 밀려 막북(漠北)으로 도망친 몽골의 잔족세력으로는 동쪽에 있는 달단과 서쪽에 있는 오이라트였다. 당시 오이라트는 에센이라는 지도자를 맞이하여 점차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는데, 1448년 명나라와의 말 교역과정에서의 서로의 이해가 맞지 않자 결국 명나라 국경을 침범하게 된다.
명나라는 최초 오이라트에서 말을 가지고 오는 사신의 수를 50명으로 제한했으나, 오이라트는 해마다 이를 일방적으로 마구 늘려나갔다. 명나라는 오이라트와의 평화를 위해 말 값을 지불하면서 사신이 50명보다 많이 늘어났더라도 모두에게 은상을 주었다. 명나라 입장에서는 오이라트에서 오는 사신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경제적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1448년 오이라트에서 실제인원보다 1천명이나 많은 2,500명의 사절단을 보냈다고 알렸음에도, 왕진은 실제인원에 대해서만 은상을 내리고 말 값도 오이라트가 제시한 가격의 20%만 지불했다. 이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한 에센이 거느린 오이라트의 주력부대는 다음해 7월 일제히 명나라 국경을 지나 산서성 북부 대동을 공격해 들어갔다.
각 지역을 지키던 명나라 장수들이 전사하자 명나라 조정에서는 영종이 참석한 가운데 중신회의가 열려 그 대책에 대해 논의했다. 왕진은 영종의 친정을 권유했고 다른 중신들은 반대했으나, 마침내 왕진의 주청대로 영종은 친히 50만 대군을 거느리고 북경을 출발해 북진했다. 그 50만 대군에 문신과 귀족 등 전쟁과 무관한 자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어 그 규모가 상당히 부풀려져 있었다.
왕진은 대동으로부터 회군 도중에 50만 대군을 토목(土木)이라는 성채에 주둔시켰다. 그곳은 물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곳이었다. 이런 토목 전투에서 오이라트의 4만 기병에게 공격당한 명나라 군대는 수십만 명의 사상자를 냈을 뿐만 아니라, 조정의 중신과 장수들이 장렬히 옥쇄했으며 왕진은 호위 장교에게 박살나고 말았다. 영종은 토목에서 초원에 주저앉아 있다가 오이라트군에게 포로가 되고 만다.
토목에서의 참패와 영종이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명나라 조정에서는 즉각 영종을 상황으로 올리고 영종의 이복동생을 새 황제로 즉위시키니 이가 바로 경태(景泰)제이다. 당연히 환관 왕진의 일족은 모두 체포되어 주살되었고 모든 재산이 몰수되었다. 인질 영종을 명나라와의 유력한 협상카드로 쓰려 했던 에센은 경태제의 즉위로 인해 인질로서의 가치가 떨어지자 북경을 직접 공격했다.
이에 명나라는 중신회의에서 남경으로의 천도가 제기되기도 했으나 북경 수비사령관 우겸이 “남쪽으로 도망간 송나라의 비극을 되풀이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설득하니 모두들 감동하여 북경을 사수하려는 결의를 다지게 되었다. 결국 우겸의 결사항전에 많은 피해를 본데다가, 명의 원군이 속속 북경으로 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오이라트의 에센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오아리트와 명나라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어 영종이 돌아왔으나 동생 경태제는 형을 감금해버린다. 형 대신 황제가 된 경태제는 처음에는 미안한 마음에 영종의 아들을 황태자로 세웠다가 마음을 바꿔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로 바꿔치기한다. 그러나 이듬해 아들 황태자가 죽고 이후 경태제 마저 중병으로 병상에 눕게 되자 영종 복위의 움직임이 나돌기 시작했다.
1457년 1월 경태제가 병석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연금되어 있던 영종이 장군 석형과 서유정 등의 무혈쿠데타로 옹립되어 복위해 연호를 천순(天順)이라 했고, 병색이 깊은 경태제는 폐위 후 사망했다. 구국공신 우겸은 경태제를 옹립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했고, 나중에 우겸을 모함해 죽게 했던 장군 석형과 서유정은 영종복위의 일등공신임에도 유배지에서 죽임을 당했다.
한편 오이라트의 에센은 탈탈부화 칸과 그의 일족을 제거하고 1451년 스스로 칸의 지위에 올랐다가 부하들에게 강압적인 자세와 무리한 강행으로 인해 부하들에게 살해됨으로써 오이라트의 세력도 쇠퇴하고 말았다. 이후 약 30년 후 달단부에서 다렌칸이라는 강력한 지도자가 나타나 몽골 전체를 통일하게 되었다.
다렌칸의 손자 알단칸은 막북의 실력자가 되면서 몽골족뿐만 아니라 많은 한족도 거느리게 되어 제2의 칭기즈칸 또는 쿠빌라이로 불린 걸출한 영걸이었다. 알단칸은 수시로 북경을 포위해 명나라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알단칸의 강한 압박에 다시 마시(馬市)을 열었던 명나라가 마시를 폐지했다가 알단칸에게 ‘북로의 화(北虜之禍)’라는 공격을 당하게 된다. 명나라는 몽골로 인해 이미 멸망의 수렁으로 깊이 빠져든 상태였다.
중국에서 한족(漢族)이 세운 통일국가는 한(漢), 송(宋), 명(明)나라로 이들의 존속기간을 다 합쳐도 겨우 천년 가량으로, 전한/214년 + 후한/195년, 북송/167년 + 남송/152년, 명/276년이 전부이다. 그러나 한나라는 흉노의 제후국, 송나라는 금나라의 속국이었으며, 명나라는 몽골에게 짓눌려 맥을 못 추던 존재였다. 그래서 시진핑은 대한, 대송, 대명성세라는 말 대신에 ‘대당성세’라는 단어를 쓴 것인데 그게 과연 옳은 말인지 다음 연재에서 알아보기로 하겠다.
*상기 컬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