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 22. 전라남도 대중가요〈목포의 눈물〉〈목포는 항구다〉(2021.08.02.)
모레(4일)은 뉴스아이신문 창간 6주년기념일입니다. 정론직필(正論直筆)의 사이다가 돼주소서!
〈목포의 눈물〉, 문일석(본명 윤재희) 작사, 손목인 작곡, 이난영이 1935년 취입한 곡입니다.
2016년 4월 10일 MBC 서프라이즈 언빌리버블에 ‘조선의 노래’편에서〈목포의 눈물〉의 탄생 비하인드 스토리가 방영되었는데,〈목포의 눈물〉작사가인 문일석의 이야기가 그려졌습니다.
「주인공은 일제강점기를 한탄하며 시를 썼다. 그는 자신의 글이 사람들에게 희망을 줬으면 하는 바람에서 ‘문일석’이라는 필명으로〈목포의 눈물〉작사에 도전했다. 그는 3000대 1의 경쟁을 뚫고 당선됐지만 ‘300년의 원한’이라는 가사 때문에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다. 결국 OK레코드 사장 이철은 일본인들이 한국어 발음을 어려워한다는 점을 이용해 노래를 심의에 통과시켰다.
이후〈목포의 눈물〉은 전국민의 사랑을 받으며 5만 장 판매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무명 가수인 이난영(에이프릴 채원 분)을 일약 스타덤에 올리기도 했으며, 우리나라 가요로서는 처음으로 일본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노래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작사가 문일석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는 검열 통과 후 다시 가사를 문제 삼은 일본 순사들에게 끌려갔다. 이후 징역을 피해 도망친 그는 광부로 살다가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는 내용입니다.
2013년 편찬된 故 정두수님의 ‘노래따라 삼천리’에 실린〈목포의 눈물〉에 대한 글을 옮기면,
「“목포 사람이 쓴 목포의 노래를 목포 출신의 가수가 부른다.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 회사가 내걸었던 취지와도 들어맞고.” 1934년. OK레코드사와 조선일보가 공모한 제1회 향토찬가 당선작이 결정되는 순간, OK레코드사 이철 사장의 눈빛은 빛나고 있었다. 목포 사람 문일석이 쓴〈목포의 노래〉는 그만큼 감동적이었기 때문이다. 향토 사랑은 곧 나라 사랑. 더 나아가서는 조국과 민족, 그리고 겨레를 하나로 이어주는 원동력이 아닌가? 그리고 이번 향토 찬가 노래시 모집은 국민의 지대한 관심 속에 치러진 행사로 큰 성공을 거두었지 않은가? 이옥례(이난영의 본명)야! 그래, 이옥례가 바로 이 노래의 임자야.” 한해 전 이철 사장은 토월회 단장 박승희로부터 앳띤 소녀 가수를 소개 받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목포 순회 공연 중에 그를 찾아왔었다. 노래를 들어보니 너무 잘했다. 약간 비음이 섞인 목소리에 애수가 깃든 음색은 참으로 매혹적이었다. “노래는 이옥례가 부르게 하면 되고, 그런데 작곡은 누구로 하나··.” 그때였다. 이 회사 전속 작곡가인 손목인이 찾아왔다. “가수 고복수씨에게 주려고〈갈매기 항구〉를 작곡했는데,〈갈매기 항구〉라는 노래시 보다는〈목포의 눈물〉이 더 적합해서 들렸습니다.” “거, 마침 잘됐군요.” 이렇게 해서〈목포의 눈물〉은 일사천리로 탄생했다. 예상대로 폭발적인 인기였다. 수탈만 당하고 살았던 그 시대의 조선 사람들에게 이 노래는 민족 가요가 된다. 그래서 목포는 더욱 유명해지고 가수와 노래 또한 삽시간에 전국을 강타한다. 레코드판은 찍기가 무섭게 불티나게 팔려 나간다. 레코드 가게 앞은 이 노래를 배우려는 사람들로 연일 장사진을 이룬다.
종로경찰서 고등계에서는 “이거, 무언가 있어 저렇듯 조선 사람들이〈목포의 눈물〉을 부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거야.” “이보오, 유달산이나 삼학도가 나오는 1절은 그래도 괜찮아. 하지만 2절에서 삼백년은 무엇이고 원한 품은 노적봉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그건 오래 전부터 이 고장의 전설을 말하는 것입니다. 삼백년이 된 원앙새가 원한을 품고, 눈을 감지 못해 연못에서 허우적 대고 있다는.” 문일석은 전설을 핑계 삼아 둘러됐다. 」이 노래가 시중에 나오자 마자 반응은 매우 뜨거웠고, 앨범도 순식간에 5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으며, 이난영은 일약 가요계의 샛별로 급부상을 했습니다. 고은 시인은 2010년 완간된 연작시집 ‘만인보’에서 「〈목포의 눈물〉은 겨레붙이 모두의 노래였다.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임진왜란은 아직도 한으로 애끓이며 살아 있었다.」고 묘사했습니다.
–〈목포의 눈물〉– 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이난영(1935년 오케레코드사)
1절. 사공의 뱃노래 가물 거리면 /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 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 젖은 옷자락 /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2절.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 임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 임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3절.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 가는데 /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 지나
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이난영은〈목포의 눈물〉로 한창 최고의 인기가수로 한참 뜨기 시작할 때인 1936년 20세 때 당시 천재 작곡가겸 가수인 김해송(1910년 평남 개천 출생)과 혼인을 했습니다.(필자는 정두수 선생님으로부터 혼인하게된 배경을 들은 적이 있지만 생략하겠습니다) 당시 신문 보도내용은,
「김해송-이난영 결혼. 오케 회사의 인기가수로 그 전부의 목소리를 엘보나이트를 통하야 만천하에 자랑하던 양 가수는 그간 오랫동안의 연애의 시기를 지나 지난 12월 24일 오후4시 경성(요리집) 식도원(食道園)에서 (연극인) 이기세씨의 주례로 결혼식이 진행되었다. 오케 악사 일대의 결혼행진곡 이며 연회시의 그들의 쟈스(재즈)뺀드 연주, 신랑의 독창 등 참으로 유쾌하였다.」 두 사람의 혼인하기까지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양가의 반대가 매우 극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에 굴하지 않고 사랑의 힘으로 혼인을 했고, 이에 김해송은 이난영에게 고마운 마음에 아주 특별한 노래를 만들어 혼인 선물로 주었는데, 그 노래가 혼인 3년 후인 1939년, 이난영의 생일에 맞아 축하 선물로 준〈다방의 푸른 꿈〉입니다. 이 노래는 당시 처음으로 발표된 우리나라 최초의 부르스 곡인데 두 사람의 사랑이 담겨 있는 듯합니다.
다방(茶房), 저나 애독자님들이 생각하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당시에는 흔치 않은 공간이었고, 대도시에만 하나씩 하나씩 생겼으며, 다방에 드나들던 사람들을 돈 많은 부자나 사업가, 유학생 등이 주 고객층이었고, 시인, 작사가, 극작가들이 작품을 구상하고 탄생시키는 장소였습니다. 상류계층의 휴식처이기도 했지만, 또한 그 이면에는 또 다른 사회적 병폐가 생겨난 곳입니다.
지난 2월 23일 KBS1-TV ‘역사저널 그날’, 프로야구 해태타이거즈의 응원가〈목포의 눈물〉에 대한 내용을 간추려 보면,「1982년 3월 27일 서울운동장에서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합니다. 당시 슬로건은 “어린이에게는 꿈을, 젊은이에게는 정열을, 온 국민에게는 건강한 여가선용을”
〈목포의 눈물〉해태 타이거즈 팬들은 그때도 불렀고 기아 타이거즈인 지금까지도 부르고 있습니다.(前 기아 타이거즈 에이스 윤석민 선수 아버지가 필자와 초·중·고 동기동창생입니다.)
해태 타이거즈는 1983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MBC청룡을 5:3으로 이기고 우승을 차지했는데, 그날 그 순간 운동장에서 해태 팬들이 목이 터져라 불렀던 응원가가〈목포의 눈물〉이었습니다.
(MBC:해태, 1회말 0:1, 3회말 0:4, 9회초 3:5, 해태 4번타자 콧털 김봉연은 혼자 5타점 수확)
그러나〈목포의 눈물〉노랫말을 쓴 윤재희는 노랫말 응모때 ‘호수에 던져진 작은 돌맹이’라는 의미로 필명을 문일석으로 했고, 조선총독부에서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의 의미가 뭐냐는 취조를 받는 등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목포를 떠나 방랑하다 요절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정두수 선생님의 ‘노래따라 삼천리’에 실린 ‘목포 노래 제2탄〈목포는 항구다〉’ 내용을 보면,
「이런 고초와 수난을 겪으면서 민족의 노래로 승화된 것이〈목포의 눈물〉이다. 본디 이 노래의 제목은〈목포의 노래〉였지만〈목포의 눈물〉로 바뀐다. 이철 사장 자신이 기획한〈목포의 눈물〉이 빅히트 하자 이 사업가는 흥분한다. 애국심의 발로였다. “목포 노래를 하나 더 만듭시다. 이난영씨의 고향 노래를!” 고학(苦學)으로 연희전문대학을 나온 이철 사장은 애국심이 남달랐다. 축음기 회사를 차린 것도 나름이 애국심 때문이었다. 한반도의 어느 한 곳 착취와 수탈을 안당한 곳이 있을까만, 특히 목포는 그 이름처럼 목화를 많이 재배한 곳이었다. 누에실로 비단 옷을 만들고, 이불을 덮고 깔던 목화송이 때문에 유달리 약탈이 많았던 고장이었다. 1942년, 조명암 작사, 이봉룡 작곡, 이난영 노래의〈목포는 항구다〉는 또다시 목포를 빛나게 했다. 목포를 노래의 명소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한 때 이 노래는 금지곡이 된다. 작사가가 월북을 한 것이 그 이유였던 것입니다. 작곡가인 이봉룡은 가수 이난영 오빠이다.〈선창〉〈고향설〉〈낙화유수〉〈해도 하나 달도 하나〉등 많은 히트곡을 낸 가요사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필자는〈목포의 눈물〉보다〈목포는 항구다〉가 부르기 좋습니다. 애독자 여러분은?
–〈목포는 항구다〉– 조명암 작사, 이봉룡 작곡, 이난영(1942년)
1절. 영산강 안개 속에 기적이 울고 / 삼학도 등대 아래 갈매기 우는
그리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 / 목포는 항구다 똑딱선 운다
2절. 유달산 잔디위에 놀던 옛날도 / 동백꽃 쓸어 안고 울던 옛날도
그리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 / 목포는 항구다 추억의 고향
3절. 여주로 떠나 갈까 제주로 갈까 / 비 젖은 선창머리 돛대를 달고
그리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 / 목포는 항구다 이별의 고향
영산강(榮山江 138.75km)는 한강, 낙동강, 금강과 함께 우리나라 4대강에 속합니다. 전라북도 담양 병풍산(해발 822m)에서 발원하여 장성→ 광주→ 나주→ 함평→ 무안→ 영암→목포 삼학도로 굽이 굽이 흘러 나주평야, 광주 서석평야, 함평 학교평야를 품는 호남의 젖줄입니다.
이난영(李蘭影), 1916년 전라남도 목포에서 출생 1965년 작고했습니다. 본명 이옥례(李玉禮)
가수 이난영은 작사가 반야월, 작곡가 박시춘과 함께 가요계의 3보(寶 보배보)라고 불립니다.
작곡가 이봉룡이 두 살 많은 오빠입니다. 1929년 어머니, 오빠와 함께 제주도로 이사해 어머니가 식모살이를 하던 극장 창심관(暢心館) 주인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부르던 노래를 듣고 집주인이 막간가수로 활동하게 알선해 주었고, 오빠 이봉룡도 영사기사로 일하게 했다고 합니다.
1932년 태양극장에 가입 극단장 박승희가 예명 이난영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 후 오케 레코드사에 스카웃 되어서 1933년 10월〈향수〉로 데뷔 11월〈불사조〉로 첫 히트를 쳤고, 1934년〈봄맞이〉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해서 1935년〈목포의 눈물〉이 5만장의 빅히트를 쳤습니다.
1957년 동료 가수인 고복수 은퇴공연에서〈목포의 눈물〉3절을 부르다가 그 동안의 설움이 북받쳐 눈물을 흘리면서 노래를 불렀고, 그때 부른〈목포의 눈물〉은 이난영의〈목포의 눈물〉중 최고의 절창이었다고 합니다. 1962년 김시스터즈가 활동하던 미국으로가 TV쇼 등에 출연하다가 1963년 귀국했고, 1965년 ‘3.1절 기념 가요 40년제’ 출연을 마지막으로 활동을 접은 후 1965년 4월 11일 작고했으며, 그해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 노래비가 세워졌습니다.
그밖에 1935년〈봄아가씨〉1937년〈해조곡〉1940년〈울어라 문풍지〉등 히트곡이 있습니다.
☞ 걸그룹 저고리시스터즈 : 이난영 장세정은 고정가수, 홍청자, 김능자, 서봉희, 박향림, 이준희
☞ 김시스터즈 : 최초 멤버 친딸 김영자, 김애자, 김숙자, 데뷔과정에 민자(이봉룡딸) 투입
☞ 김보이즈 : 아들 김영일, 김상호, 김태성이 ‘영일, 영호, 영성’이란 예명으로 김보이즈 결성
〈목포의 눈물〉노래비는 1969년 목포악기점을 운영하던 박오주님이 6백만원을 기부해 예총 목포시지부가 유달산에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 노래비로서 2016년 7월 28일 목포시 문화유산 제27호로 지정되었고, 2006년 목포시 산정동 이난영공원에도 노래비가 건립됐습니다.
그리고 2017년 9월 13일 경상북도 구미시 진평동 동락공원에 ‘전남도민의 숲’이 개장됐는데, 이 곳에도〈목포의 눈물〉노래비가 설치됐습니다. 26일엔 목포 삼학도에 ‘경북도민의 숲’ 개장
〈목포는 항구다〉노래비는 2006년 전남 목포시 산정동 소재 이난영공원에 함께 설치됐습니다.
이난영 대표적 주요연혁 : 1. 1941년 오케레코드사 주최 ‘이난영 가수 생활 10주년 기념공연’
2. 1958년 영화 ‘목포의 눈물’ 개봉, 주제가 장세정〈목포의 사랑〉(손로원 작사 손목인 작곡)
출연 전옥(배우 최민수 외할머니), 독고성(독고영재 아버지), 황해(가수 전영록 아버지), 최봉
3. 1968년 제1회 ‘이난영 가요제’(주최 호남매일신문사, 이후 목포문화방송), 1991년 재개최
4. 2003년 목포시 양동 이난영 생가에 소공원을 조성해 흉상 건립, 2005년 기념사업회 발족
5. 2006년 경기도 파주시에 있던 이난영 묘지를 목포 삼학도 이난영공원으로 이장했습니다.
보너스,〈동백꽃 피는 항구〉는 1967년 임희재 작사, 박춘석 작곡, 이미자 선생님의 노래입니다.
–〈동백꽃 피는 항구〉– 임희재 작사, 박춘석 작곡, 이미자 선생님(1967년 지구레코드사)
1절. 동백꽃 꽃 숲에서 밤을 지새며 / 진남관 바라보며 꿈을 그리던
너와 나의 파란 꿈은 어디로 가고 / 돌산 앞바다에 파도만 설레이네
나홀로 거니는 오동도다리 / 갈매기 울음만이 애달프구려
2절. 남풍이 불어오는 장군섬 꽃길 / 달따라 님을따라 거닐던 이길
파도가 부서져도 듣지 못하고 / 당신 속삭임을 듣지도 못했죠
나홀로 거니는 오동도다리 / 뱃고동 소리만이 애달프구려.
‘동백꽃’, ‘진남관’, ‘돌산’, ‘오동도’, ‘장군섬’, ‘뱃고동’ 단어만 들어도 어딘지 알 수가 있겠죠? 네, 바로 전라남도 ‘여수’입니다. 〈동백꽃 피는 항구〉는 1967년 저녁 8시 임희재 극본 라디오 연속극 KBS라디오극장(일명 유호극장) 동명 연속극 주제가로 이미자 선생님이 부르셨습니다.
줄거리는「전라남도 여수에서 펼쳐지는 두 남녀의 순박하고 때 묻지 않은 진솔한 사랑이야기, 신참 순경(성우 남성우)와 소매치기 아가씨(성우 고은정)이 남도 항구 여수의 명소에서 애절한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로 진남관과 돌산 앞바다가 그 배경이었다고 하는데 아주 인기가 많았던 연속극이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어느 애청자의 추억속의 ‘동백꽃 피는 항구’는「따거운 8월 폭염도 흐느적 거리며 유달산 끝자락으로 숨어버리면 우리집 평상에서는 6남매가 옹기종기 모여 귀를 쫑긋이 하고 온 신경을 그 곳에 집중을 했다. 연속극 주제가〈동백꽃 피는 항구〉가 이미자 선생님의 목소리로 구성지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완고한 아버지는 학생들이 라디오를 듣는 것은 용납 되지 않았다. 라디오는 안방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만 듣는 것이었다. 노랫소리가 끝나고 약 30분간의 연속극이 시작되면 우리들은 살금살금 다가가 안방마루에 걸터 앉았다. 우리집은 라디오가 없었고 유선방송이 있었다. 그때는 대부분 유선방송을 통해 라디오를 들었다.」
필자는 여수를 두 번 찾았는데, 직장의 직원 연찬회와 어부인 두 딸과 함께한 가족 여행입니다.
첫 번째 방문했을 때 오동도 탐방차 도착하니 선착장 유람선에서는 이미자 선생님의〈동백꽃 피는 항구〉가 반복해서 흘러나왔고, 구경을 하다가 관광 온 아주머니들을 만나 대화를 하던 중 “이미자 선생님 노래 좋아하시냐” 묻자 모두 좋아하신다 해서〈동백 아가씨〉를 부르자고 제안해 그분들과 여수바다를 바라보며 불렀던 아름다운 추억의 한 자락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여수 EXPO)』가 열렸던 ‘생명과 낭만이 살아 숨쉬는 도시, 여수!’, 2008년 11월 27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박람회기구 총회에서 1차 투표 결과 대한민국 ‘여수’ 68표, 모로코 ‘탕헤르’ 59표, 폴란드 ‘보로츠와프’ 13표로 과반이 안돼, 2차 투표 결과 ‘여수’ 77표, ‘탕헤르’ 63표로 개최지로 선정돼 ‘살아 있는 바다, 숨쉬는 연안(The Living Ocean and Coast)’이라는 주제로 5월 12일부터 8월 12일까지 여수신항 일대에서 1993년 대전세계박람회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열린 국제공인 박람회가 개최됐었죠. 참가국은 105개국에 방문객수 총 8,203,956명이었고, 주요시설로는「주제관, 국제관, 한국관, 해양박물관, 국제기구관, 스카이타워, 해양공원 빅오」등이었으며, 가장 관람객이 많았던 전시관은 국제관이였습니다. 그리고 가장 인기가 있었던 곳은 다양한 바다생물을 볼 수 있었던 ‘아쿠아리움’은 관람객들이 긴 줄을 서서 기다리면서 봤던 곳이었죠. 독자 여러분!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의 마스코드 이름 ‘여니와 수니’ 기억나시나요? 그 이듬해엔 옆동네인 순천에서『2013년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가 개최되었는데, 이미자 선생님도 8월 24일 순천 孝콘서트를 하셨죠.
독자도 동료들과 순천만을 찾은 적이 있는데, 유람선을 타고 둘러보는 순천만의 낭만과 용산에 올라가서 바라 본 순천만의 웅장한 멋, 맛집을 찾아 먹었던 꼬막정식의 맛은 잊을 수 없습니다.
☞ 여수의 5대 맛 : 여수한정식, 서대회무침, 돌산갓김치, 돌게장백반, 먹갈치회·구이·조림(^^)
☞ 순천의 5대 맛 : 순천한정식, 순천국밥, 순천꼬막정식, 순천짱뚱어탕, 순천닭구이(소주 추가)
그밖에 목포를 제외한 전남과 광주 소재 노래에는, 이미자 선생님의 1965년〈진도 아리랑〉〈한많은 흑산도〉〈흑산도 아가씨〉와 1966년〈꽃피는 여수바다〉1967년〈영산포 아가씨〉〈유자꽃 피는 내고향〉1971년〈영산강 뱃노래〉1972년〈낭주골 처녀〉1973년〈홍도 아가씨〉
1956년 손인호〈비내리는 호남선〉1960년 이천년〈호남선 길손〉1961년 시민철〈호남선 가는 편지〉1964년 황금심〈무등산 처녀〉1965년 오정란〈광주 아가씨〉1968년 송춘희〈영산강 처녀〉1972년 하춘화〈영암 아리랑〉1973년 하사와병장〈해남 아가씨〉2008년 장윤정〈오동도 부르스〉2011년 신태준〈광주 아가씨〉2012년 버스커 버스커〈여수 밤바다〉가 있고,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 출신 유명 가수는 국민가수 남진(목포)와 하춘화(영암)를 비롯해서, 오기택(해남), 조미미(영광), 이수미(영암), 홍세민(해남), 박우철(해남), 홍진영(광주), 강진(영암), 김하정(진도), 송가인(진도), 김경호(목포), 류기진(고흥), 이규석(영광), 현당(장흥), 주병선(여수), 김란영(여수), 장재남·장미리·장은아 3남매(장성), 김선미(담양), 김경호(목포)
그리고, 구리시에 살고있는〈워메 좋은거〉〈좋은데 어쩌라고〉〈구리전통시장〉의 정통트로트 가수 박남진(1956년 순천)은 몇 년전까지 필자와 함께 같은 회사에 다녔던 좋은 형님입니다.
다음에는 2016년 8월 13일 작고하신「가요산맥 작사가 정두수님」에 대한 글을 올리겠습니다.
- 상기 컬럼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