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엔트로피
자원회수시설이란다.
쓰레기를 다시 회복시켜 재활용시키는 시설이 아름다운 구리의 랜드마크처럼 우뚝 서있습니다.
나에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아주 어렸을 적 방죽에는 민물고기가 물 반 고기 반으로
사시 장철 달가운 공기의 맛과 어디서든지 퍼먹을 수 있었던 물이 있었읍죠.
과거로 다시 되돌아가자는 것은 아닙니다.
한 때는 물처럼 쓰면서 자원이 주는 혜택을 몸소 경험하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화석에너지가 주는 에너지 효율성은 정말 대단하지요.
우리가 타는 자동차도, 밤에 아름다운 자태로 불을 밝히는 한강의 다리들..
곳곳을 보더라도 에너지의 기적이
우리의 눈과 귀를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는 점에서 인류의 진보요 역사의 전진이었습니다.
이러한 혁명적인 변화는 인류에게 무한한 자신감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미래도 장미빛일거라는 확신도 심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소수의 과학자들이 예단하기는 이르다며
미래의 환경변화에 주목해야 한다고 역설하였지만
이는 당랑거철(螳螂拒轍)도 유분수라고 치기어린 생각으로 매도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을 되돌아보면
샴페인을 터트렸던 지난 날이 무색하게도 도시에 쓰레기가 가득하며 유가급등으로
공공 물가나 생활 물가 등이 천정부지로 올라 우리의 생활이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화석에너지는 유한하지만 인간의 욕구가 무한해서 그러는 걸까요?
아니면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존재한다는 결정론적인 사고방식이 문제인가요?
재미있는 이야기하나 해보려합니다.
지난 시대의 과학은 영원하지도 않고 진리도 더 이상 아닙니다.
화석 에너지 중 효율성이 제일 높은 석유를 한번 생각해봅시다.
기실 전 자동차에 넣은 기름이 그렇게 큰 힘을 내는 것에 대하여 이건 기적이고
믿기 힘든 일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가만히 내 말을 귀 기울이고 생각해보면 고개가 끄덕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이러한 기름을 사용하고 남은 부산물인 대기 오염 때문에 정말 괴롭기 짝이 없죠.
하지만 말입니다.
여기까지 생각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소름끼칠 정도로 무서운 일이 뒤에 버티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실 에너지의 효율성과 환경오염은 서로 불가피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불가피성 말고 새로운 사실이 있다면 어찌해야할까요?
우리가 유전 개발을 해서 석유를 만들어서 그걸 정유해서 기름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기름으로 사용하는 석유는 석유의 40%정도 밖에 기름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즉 나머지 60%는 대지에 버려지거나 폐기물로 방치하고 있는 거죠.
그리고 40%의 기름에서 방출하는 대기오염의 문제로 시름하고 있는 거고요.
다시 말해서 석유를 사용하면 할수록 사용보다 더 많은 부산물이 생기고 사용 후도 부산물이 생긴다는 겁니다.
즉 에너지를 사용하면 할수록 그보다 많은 노폐물이 생겨 결국 죽음에 이른다는 ‘엔트로피 법칙”이 적용되는 셈입니다.
지구도 사람처럼 생노병사가 있어
병에 걸린 지구를 살리기 위해 소비하는 돈이 엄청나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마치 고령화된 사회처럼 말이죠.
쓰레기가 늘어나면 자원회수시설이 늘어나겠죠.
그러면 자원회수시설이 지어져야 하고 또 지어진 시설에서 분리수거를 하는지 감시도 해야겠지요.
자기 마을에 혐호 시설 설치도 반대하고
분리수거도 감시해야하고…
더 중요한 것은 에너지정책을 효율성(경제성) 관점에서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 고정된
건강적인 측면에서 혹은 미래 아이들을 위하여 – 시간과공간이 열려있는
더 큰 안목으로 접근해야만 하는 지점에 이르게 됩니다.
더 큰 안목에 접근하기위해서는
개인의 큰 목소리를 경계해야하고 이를 공동체의 힘으로 막아내야만 합니다.
나만 살고자 하면 다 죽을 것이요, 내가 죽으면 모두가 살 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