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 220. 고봉산〈아메리칸 마도로스〉(2025.06.16.)
다가오는 22일은 작곡가 겸 가수 고봉산이 작고하신 지 35주년이 되는 날이고, 24절기 하지(夏至)이며, 그리고 25일은 작곡가 한복남(본명 한영순) 선생이 태어난 날입니다.
고봉산(본명 김민우)은 1927년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나 가수가 되고자 서울로 상경해 작곡가 김해송, 박시춘, 손목인 등에게 선을 대어 보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더욱이 1957년〈울어라 기타줄아〉연습 중 손인호가 취입을 하게되자 낙담한 후 작사·작곡에 전념하기도 했습니다. 데뷔곡은 1961년〈아메리칸 마도로스〉이고, 대표곡은 1962년〈용두산 엘레지〉(추억의 용두산)입니다. 1990년 6월 22일 하늘의 별이 되셨습니다.
고봉산이 작곡한 대표곡은 이미자 선생님 1966년〈눈물의 묵호항구〉〈바닷가 처녀〉1967년〈목포의 달밤〉〈영산포 아가씨〉〈유달산아 말해다오〉〈울지도 못합니다〉〈유자꽃 피는 내고향〉1968년〈부여 낙화암〉〈비련 2〉〈추억의 하동포구〉1969년〈이화부인〉1970년〈어이해 못 오나〉1971년〈꽃 한 송이〉〈임은 내 사랑〉1972년〈기다리다가〉〈미워하지 못하고〉〈섬처녀〉〈안오실까봐〉〈한송이 해당화〉1973년〈여자의 마음〉1974년〈오동추야〉1975년〈꽃씨〉〈외딴섬〉1979년〈코스모스 필때까지〉남진 1968년〈촉석루의 달밤〉〈타향〉1969년〈철새〉1970년〈목포의 연가〉문주란 1967년〈별은 알고 있네〉1968년〈먼 여로〉하춘화 1971년〈물새 한 마리〉〈잘했군 잘했어〉〈영암 아리랑〉정재은 1981년〈항구〉1982년〈연락선〉등입니다.
오늘은 고봉산 1961년〈아메리칸 마도로스〉〈등대불 사랑〉1964년〈남포동 밤 0시〉1966년〈이별의 대구정거장〉한복남 데뷔곡 1947년〈저무는 충무로〉5곡을 올립니다.
–〈아메리칸 마도로스〉– 김진경 작사, 고봉산 작곡, 고봉산(1961년 아세아레코드사)
1절. 무역선 오고가는 부산항구 제 2부두 / 죄 많은 마도로스 이별이 야속드라 /
닻줄을 감으면은 기적이 울고 / 뱃머리 돌리면은 사랑이 운다 / 아 아아 아아 아아아
항구의 아가씨 / 울리고 떠나가는 버리고 떠나가는 / 마도로스 아메리칸 마도로스
2절. 꽃물결 넘실대는 부산항구 제 2부두 / 술 취한 마도로스 항구가 무정드라 /
깃발을 올리면은 기적이 울고 / 테프가 끊어지면 사랑이 운다 / 아 아아 아아 아아아
항구의 아가씨 / 울리고 떠나가는 버리고 떠나가는 / 마도로스 아메리칸 마도로스
(3절. 갈매기 춤을 추는 부산항구 제 2부두 / 못 믿을 마도로스 맹서도 허사드라
손수건 흔들면은 기적이 울고 / 등댓불 깜박이면 사랑이 운다 / 아아아 아아아
항구의 아가씨 / 울리고 떠나가는 버리고 떠나가는 / 마도로스 아메리칸 마도로스)

〈아메리칸 마도로스〉1961년 고봉산이 부른 데뷔곡으로 1964년 1월 1일 아세아레코드사에서 발매한 ‘아메리카 마도로스’ 앨범에 실려 있는 타이틀곡입니다. 음반에는 SIDE A면. 고봉산〈아메리칸 마도로스〉최숙자〈비나리는 모녀봉〉손인호〈나그네 밤열차〉김영애〈네온가 십 번지〉SIDE B면. 손인호〈프랫트홈〉최숙자〈안동 부르스〉남성봉〈가설극장 아가씨〉지화자〈영산포 뱃길〉8곡이 수록돼 있습니다. 당시 부산항에는 하룻밤 풋사랑에 정을 나누고 다음날 떠나가는 마도로스와 눈물로 이별하는 장면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남자를 떠나 보내는 여인의 슬픈 이야기이지만 무겁지 않고 흥겹게 표현해 낸〈아메리칸 마도로스〉는 경쾌한 리듬이 더해져 수많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노래를 알면 어깨를 들썩이며 흥겹게 따라 부를 수 있는〈아메라칸 마도로스〉입니다.
주현미TV 발췌「한국전쟁 당시에는 후방의 군수기지였던 부산항을 통해 군수물자들이 보급되었습니다. ‘제1부두’에서는 주로 병사들을 배에 실어 날랐고, ‘제2부두’는 무기나 군 장비, 군수품 등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멈춘 후에도 부산항은 외국의 구호물자들이 들어오는 관문으로 사용되었고, 그 중에서도 밀가루나 옥수수같은 먹거리들이 ‘제2부두’를 통해 들어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미국 선원들과 부산 시민들이 뒤엉켜서 살아가는 분주한 모양새였지요. ‘제2부두’는 ‘아메리칸 부두’라는 별칭을 얻으며 외국 배의 선원이 되고자 했던 이들에게도 선망의 대상이 되었답니다. 이 노래를 작곡하고 부른 고봉산 선생님도 우여곡절 끝에 이 노래를 발표하게 되었는데요. 손인호 선생님의 〈울어라 기타줄〉을 이재호 선생님이 만들면서 고봉산 선생님께 줄 의도였다고 합니다. 음반을 취입하는 과정에서 가수가 바뀌어버렸으니 화가 날 만도 했겠지요. 독기를 품은 고봉산 선생님은 작곡을 공부하기 시작하였고, 싱어송라이터로서 낸 첫번째 곡이 바로〈아메리칸 마도로스〉입니다. 차후에는 노래보다 작곡가로 더 많은 활동을 남기셨지요.」
–〈등대불 사랑〉– 이철수 작사, 고봉산 작곡, 고봉산(1963년 대도레코드사)
1절. 등대불 깜박이는 비 오는 항구 / 술 취한 에레나는 추억에 운다 / 테프를
날리면서 안녕히 잘 가세요 네 / 마도로스 그 맹서는 마도로스 그 맹서는 허사였드냐
2절. 술 취한 마도로스 짖궂은 항구 / 기적이 울적마다 이별도 많다 / 눈물을
흘리면서 잘 가소 잘 있어요 네 / 마도로스 풋사랑은 마도로스 풋사랑은 이런 것이냐
3절. 사랑을 팔고 사는 청춘의 항구 / 이름도 알 수 없는 여자이건만 / 이별이
서러워서 언제나 또오세요 네 / 아메리카 무역선은 아메리카 무역선은 어데로 갔나요
〈등대불 사랑〉1963년 고봉산이 부른 노래로 대도레코드사에서 발매한 ‘등대불 사랑’ 앨범에 실려 있는 타이틀곡입니다. 음반에는 SIDE A면. 고봉산〈등대불 사랑〉조선옥〈애련야곡〉김용만〈정수동〉박재홍〈양산도 길손〉SIDE B면. 고봉산〈임차저 칠백리〉전정애〈상처받은 첫사랑〉황국성〈화류계 눈물〉김종환〈님이 떠난 나룻터〉가 있습니다.
–〈남포동 밤 0시〉– 배삼룡 작사, 고봉산 작곡, 고봉산(1964년 아세아레코드사)
1절. 남포동 밤 0시 네온불이 꺼지면 / 서투른 노래가 항구에 진다 /
낯 설은 나그네가 타고온 그 배는 / 서글픈 기적 속에 정만 싣고 가느냐 /
아아아 아아 아아아 / 넘어진 술잔 속에 넘어진 술잔 속에 / 밤은 깊어 가더라
2절. 광복동 형광등 그림자 밟으며 / 녹슬은 과거사 옛 이야기를 /
다정히 주고받던 미스 김과 미스 박 / 지금은 어느 품에 꿈을 꾸고 있느냐 /
아아아 아아 아아아 / 잠들은 이 항구에 잠들은 이 항구에 / 꿈만 짙어 가더라
〈남포동 밤 0시〉1964년 고봉산이 부른 노래로 1969년 8월 10일 아세아레코드사에서 발매한 ‘고봉산 힛트 앨범 제1집, 용두산 에레지’ 앨범에 실려 있는 곡입니다. 음반에는 SIDE A면. 〈용두산 에레지〉〈의리의 사나이〉〈남포동 밤 0시〉〈내고향 마산항〉〈떠나갑니다〉〈마도로스 쎈타〉SIDE B면.〈아메리칸 마도로스〉〈남포동 부기〉〈말도 없이 말도 없이〉〈나는 마도로스〉〈아리랑 연락선〉〈항구타령〉이 있습니다.〈남포동 밤 0시〉는 배삼룡 선생님이 작사한 곡인데, 그밖에 1963년 김용만〈아리랑 마도로스〉1965년 남미랑〈방랑의 공주〉1966년 오기택〈그처녀〉등 다수가 있습니다.
–〈이별의 대구정거장〉– 호심 작사, 고봉산 작곡, 고봉산·남강수(1966년 지구레코드사)
1절. 불빛 흐린 플랫트홈 이별의 대구정거장 / 잘가이소 잘가이소 목메인
대구 아가씨 / 달성공원 로맨스가 왜 이다지 서러운가 / 출발의 기적소리 /
사나이 이 가슴을 사나이 이 가슴을 / 한없이 울린다
2절. 시그넬도 목이 메인 눈물의 대구정거장 / 잘가이소 잘가이소 눈물의
대구 아가씨 / 단 둘이서 걸어보던 중앙통도 이별인가 / 아 아양교 팔달교의 /
추억이 날 울리네 추억이 날 울리네 / 나를 울리네
〈이별의 대구정거장〉1966년 고봉산·남강수가 듀엣으로 부른 노래로 지구레코드사에서 발매한 ‘고봉산 힛트파레이드 제3집, 선창아가씨 / 추억의 남산’ 앨범에 실린 곡입니다. 음반에는 Side A면. 박재란〈선창아가씨〉고봉산〈그리운 대동강〉〈절연의 밤〉이미자 선생님〈바닷가 처녀〉하춘화〈사이공 아가씨〉고봉산&남강수〈이별의 대구정거장〉Side B면. 이미자 선생님〈온천장 소야곡〉남상규〈추억의 남산〉〈외로운 명동뽀이〉백설희&남상규〈산메아리 강메아리〉고봉산〈나는 취했오〉하춘화〈엄마 어데갔어요〉등 12곡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대구광역시의 달성공원과 중앙통, 아양교 팔달교에서 맺은 대구아가씨와 나누었던 사랑이 대구정거장의 불빛 흐린 플랫트홈에서 이별을 하니 그녀의 구수한 사투리 “잘가이소, 잘가이소” 청춘 남녀의 애달픈 사랑이 서러워집니다.
대구·경북 출신 대중가요인 중 한 분은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출신〈나그네 설움〉〈번지 없는 주막〉가수 백년설(본명 이갑룡, 개명 이창민)로 그는 1940년대 초반부터 1956년 중반까지 대구의 봉산문화거리 근처에서 살았으며, 1949년 대봉동에 설립한 고아원 ‘청동원’과 목재상을 운영하였으며, 1955년 대구 동원예식장에서 두 번째 부인〈아내의 노래〉〈한강〉〈시골버스 여차장〉을 부른 가수 심연옥과 혼인을 했습니다. 또한 성주 출신의 작곡가는 배호의 삼종숙으로〈돌아가는 삼각지〉를 만든 배상태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연예협회 대구지부 가수분과 제1호 출신 가수 고하성(본명 배경희)은 성주군 수륜면에서 태어나 대구 파동에서 살았고, 제10대·11대 한국연예협회 대구지부장을 지냈으며, 1949년 1월 전국에서 최초로 조직된 ‘대구음악구락부’에서도 활동했습니다. 그의 대표곡은〈삼팔선 야화〉〈꽃파는 진주땅〉등이 있는데, 배호의 마지막 임종을 지킨 분입니다. 그밖에도〈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의 곽순옥,〈그 얼굴에 햇살〉이용복, 대건고 출신〈빨간구두 아가씨〉남일해, 대구 계성고 출신〈청포도 사랑〉도미, 경북고 출신〈검은장갑〉〈이별의 종착역〉의 손시향, 영남고 출신으로 오리엔트레코드사 전속가수1호인〈전선야곡〉신세영, 대륜고 출신인〈과거는 흘러갔다〉여운과 또 대륜고 출신〈기적소리만〉의 배성, 경산 출신〈내 마음은 자유천지〉의 방운아(본명 방창만), 작곡가로는〈꽃순이를 아시나요〉〈킬로만자로의 표범〉김희갑, 포항출신인〈사랑은 눈물의 씨앗〉〈여고시절〉〈울려고 내가 왔나〉김영광, 작사가로 경주 현곡면 출신인 정귀문은 조미미〈바다가 육지라면〉배호〈마지막 잎새〉등 노랫말을 썼습니다. 대중가요는 1951년 대구 교동시장에서 탄생한 현인의〈굳세어라 금순아〉가 있습니다.
그리고 가요황제 남인수와 현인은 피란시절 중구의 당구장 단골손님이었는데, 남인수의 실력은 1천이고 현인은 200정도였다고 합니다. 특히 남인수는 대구 ‘만경관’에서 악극 공연 도중에 광복 소식을 듣고 관객들과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고 합니다. 대구가 테마인 첫곡은 봉무동 출신 조선권번 예기 최계숙 1936년〈대구아리랑〉입니다.
한복남(韓福男)의 본명은 한영순(韓榮淳)으로 1919년 6월 25일 평안남도 안주에서 출생 1942년 이동연예대에 입단해 연예계 활동을 시작하다가 1946년 월남한 뒤 1947년 김해송·이난영 부부가 운영하던 ‘KPK악극단’ 무대에서 직접 작사·작곡한〈빈대떡 신사〉〈저무는 충무로〉를 불렀는데, 대중들에게 인기를 받아 히트를 하자 1948년 정식으로 취입해 가수로 데뷔했습니다. 1951년 부산 피란시절 가수 정훈희가 졸업한 ‘아미초등학교’가 있는 아미동에서 동회 사무실을 빌려 금사향〈홍콩아가씨〉박재홍〈물방아 도는 내력〉음반을 내다 팔면서 ‘도미도레코드사’를 설립했습니다. 그후 신세영〈신라의 칼〉한정무〈에레나가 된 순이〉허민〈백마강〉〈페르샤 왕자〉황정자〈오동동 타령〉〈처녀뱃사공〉〈봄바람 님바람〉김정애〈앵두나무 처녀〉손인호〈한많은 대동강〉한복남〈엽전 열닷냥〉박재란〈님〉등 많은 히트곡을 남긴 후 1991년 1월 26일 작고했습니다.
–〈저무는 충무로〉– 김초향 작사, 김해송 작곡, 한복남(1947년 아세아레코드사)
1절. 서러운 일 많어서 서울이더냐 / 신문 파는 소년들 저무는 충무로 /
들어찬 주정마다 들어찬 술집마다 넘치는 노래 / 성당의 종소리는 장단이련가
2절. 섭섭한 일 많어서 서울이더냐 / 의지 없는 천사들 저무는 충무로 /
굴뚝에 등을 대고 연통에 등을 대고 섰는 처녀야 / 황혼에 고동소리 너는 듣느냐
(3절. 서글픈 일 많아서 서울이더냐 / 아씨 태운 인력거 저무는 충무로 /
기름진 요정마다 덩실한 요정마다 돈 바람 분다 / 남산에 솟는 달아 춥다고 말아라)
〈저무는 충무로〉1947년 한복남이 직접 작사·작곡해 부른 노래로 1950년 4월 아세아레코드사에서 발매한 ‘저무는 충무로 / 울고 웃는 처녀몽(장세정)’ 앨범에 실려 있는 곡입니다. 이곡은 김해송, 이난영 부부가 운영하던 ‘KPK악극단’ 단원 한복남이 작사·작곡했지만 당시 그가 무명이라 작사는 극작가 김초향(본명 김건)으로 작곡은 ‘KPK악극단장’ 김해송으로 음반을 발매한 것 같습니다. 김초향이 광복 이후에 작사한 노래는 남인수〈달도 하나 해도 하나〉〈해같은 내 마음〉〈여수야화〉등이 있고, 한국전쟁 때 납북돼 행방불명 되었습니다. 한복남 작곡은 1947년〈빈대떡 신사〉1954년 허민〈백마강〉〈페르샤 왕자〉1955년 김정애〈앵두나무 처녀〉황정자〈오동동타령〉1956년 한복남〈엽전 열닷냥〉1958년 손인호〈한많은 대동강〉1959년 손인호〈짝사랑〉황정자〈봄바람 님바람〉〈처녀뱃사공〉1960년 현인〈불국사의 밤〉1963년 박재란〈님〉등입니다.
☞ 판소리 명창이셨던 김초향(1900년∼1983년)은 다른 분입니다. 조선(朝鮮) 최초의 여류명창 진채선(1847년∼미상)을 뒤이은 김초향은 이화중선(1898년∼1943년)과 당대 최고의 명창이었습니다. 김초향(金草香)은 대구에서 태어나 12살부터 소리의 기본을 다진 후 14살에 상경해 이동갑·김창환·정정렬·송만갑 등의 명창에게서 소리를 배웠고, 1931년 조선음률협회에서 주최한 김초향·박록주·박월정의 ‘삼대여류명창회’ 정기공연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김초향의 소리는 격정적으로 ‘흥보가’와 춘향가 중 ‘사랑가’를 잘했다 합니다. 스승 김정문도 “능히 적벽가를 배워도 아깝지 않은 목청”이라고 극찬했습니다. 비록 인간문화재로 지정받지는 못했지만 아들과 손주들의 명예에 흠이될까 봐 은둔생활을 했다고 하는데, 김초향의 인터뷰 내용은 “영감하고 살믄서도 소리는 못 잊겠데, 아침에 일어나서 육자배기라도 한마디 하면 마 눈물이 나는기라, 내 목은 육십이 넘어서도 안가고 젊은 년 소리가 났니라. 영감은 계집이 아침부터 방정 떤다고 야단이더만, 인자 다 죽은 몸이야. 목도 가고…” 소리에 대한 열망을 항상 간직하고 사셨다고 합니다.
다음에는 6월 28일 하춘화 누님의 칠순을 기념해〈잘했군 잘했어〉등 5곡을 올립니다.
기사작성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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