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우천왕은 우리민족 역사상 최고영웅
국가적으로 내세울만한 역사영웅이 없는 중국은 현재 중국판 람보 같은 오락영화를 통해 국민들에게 자존심을 심어주어 그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있다. 그 이유는 중국의 6천년 역사에서 한족의 통일왕국(漢+宋+明)의 역사는 다 합쳐도 채 천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보잘 것 없으며, 대부분 자체분열과 이민족에게 지배당했기에 자랑스러운 역사영웅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는 실존영웅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최상위권이다. 국내영화 역대흥행 1위는 23전승 신화의 주인공 이순신 장군의 ‘명랑’과 일본제국주의의 심장인 이또 히로부미를 척살한 안중군을 소재로 한 뮤지컬 ‘영웅’이다. 이 두 분도 역사적으로 대단한 영웅임에 틀림없으나,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위대했던 영웅을 꼽으라면 단연 치우천왕(蚩尤天王)과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으뜸일 것이다.
치우천왕은 동방의 군신, 전신, 병신, 무신
배달국 14대 자오지 환웅(慈烏支桓雄)인 치우천왕은 동방의 군신(軍神), 전신(戰神), 병신(兵神), 무신(武神)이라는 호칭처럼 귀신같이 뛰어난 용맹을 온 천하에 떨쳤다. 9개 대장간(九冶)에서 캐낸 광석을 주조해 인류 최초로 칼, 창, 활, 갑옷 등 철제무기와 투석기도 만들었으며 군대를 조직하고 진법과 전술을 구사하니 감히 그에게 대적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사기』에 “제후들 모두가 와서 복종하며 따랐기에 치우가 극히 횡포했으나 천하에 능히 이를 처벌할 자가 없을 때 헌원이 이를 섭정했다. 치우에게는 형제가 81명 있었는데, 모두 몸은 짐승의 모습에 사람의 말을 하며, 동두철액(銅頭鐵額)을 하고 모래를 먹으며 오구장, 도극, 태노를 만드니 그 위세가 천하에 떨쳐졌다. 치우는 옛 천자의 이름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배달국 14대 자오지환웅 치우천왕의 우측 그림은 김산호 화백 작품>
치우천왕은 염제신농의 쇠퇴함을 보고는 마침내 큰 뜻을 세워 여러 차례 천병(天兵)을 일으켜 서쪽으로 병사를 진격시켜 회대(淮岱)를 차지했다. 이어 황제헌원과 73회 싸워 모두 이겼고, 마지막 탁록 전투에서 이겨 헌원에게 항복을 받고 그를 신하로 삼았다. 또한 유망이 쇠약해지니 군대를 보내 정벌했다. 집안에서 인재 81명을 골라 각종 부대의 장으로 임명해 마치 질풍노도와도 같이 연전연승하니 적들이 겁에 질려 굴복하여 그 위세를 천하에 떨치었다.
치우천왕이 12명 제후를 공격하여 죽어 쓰러진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니, 서토의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해 도망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치우천왕이 예과(芮戈)와 옹호극(雍狐極)을 휘두르며 큰 안개를 일으키니 적들은 혼미해져 스스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치우천왕이 다시 군대를 진격시켜 탁록을 에워싸 일거에 이를 멸망시키니, 『관자』에서 “천하의 임금이 전장에서 한번 화를 내자 쓰러진 시체가 들판에 그득했다.”는 문구가 이를 말함이다.
공손 헌원이 스스로 천자가 될 뜻을 가져 병마를 일으켜 공격해오니, 치우천왕이 이를 포위해 전멸시켰는데도 헌원은 굴복치 않고 계속 싸움을 걸어왔다. 치우천왕이 전군에 출동명령을 내리고는 자신은 보·기병 3천명을 이끌고 사방에서 적을 참살하니 그 숫자를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또 큰 안개를 일으켜 지척을 분간 못하게 하니 적군은 마침내 두려움에 혼란을 일으키고 도망가 숨으며 달아나니, 백리 안에 병사와 말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헌원의 무리는 모두 다 신하되기를 원하며 조공을 바쳤다. 대체로 당시 서쪽에 살던 사람들은 활과 돌의 힘을 믿기에 갑옷의 쓸모조차 알지 못했는데, 치우천왕의 높고 강력한 법력에 간담이 서늘해져 싸울 때마다 매번 패했다. 『운급헌원기』에 “치우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어 썼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구리로 된 머리에 쇠로 된 이마라고 말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당시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갑옷, 투구, 창, 칼, 활 등 철제무기로 무장한 치우천왕의 군대는 헌원과 10년 동안 73회를 싸워 모두 이겼다. 헌원도 군사를 일으켜 치우천왕처럼 병기와 갑옷을 만들고 또 전차의 수레도 만들어 감히 싸움터마다 출전했다. 이에 치우천왕은 불같이 진노하며 노여움에 부들부들 떨더니 형제와 종당들로 하여금 싸움의 준비에 힘쓰도록 하면서 위세를 떨쳐 헌원이 감히 공격해올 뜻을 품지도 못하게 했다.
더불어 한바탕 큰 싸움이 일어나 한 무리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멈췄으니 이 싸움에서 아군 장수 치우비(蚩尤飛)가 불행하게도 공을 서두르려고 나서다가 진중에서 죽게 되었다. 『사기』에서 “치우를 잡아 죽이다.”라는 기록은 이를 말함이다. 이에 대노한 치우천왕이 군사를 움직여 새로이 투척기를 만들어 진을 치고 나란히 진격하니 적진은 종내 저항할 방도조차 없었다.
결국 황제헌원은 치우천왕에게 항복하고는 황룡(黃龍) 지역으로 유배를 떠난다. 헌원 이래로 세상은 안정되지 못했고, 그 역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편안하게 베개를 베고 눕지 못했다. 『사기』에 “산을 뚫어 길을 내고 단 한 번도 편안히 있은 적이 없다. 탁록의 강에 도읍하고 옮겨 다니며 항상 거처를 안정시키지 못하고 장수와 사병을 시켜 지키게 하는 전장에서 살았나니…”라는 문구는 아마도 헌원이 살았을 때 전전긍긍하던 모습을 보여주는 기록일 것이다.
<황제헌원이 치우천왕에게 항복하는 그림. 김산호 화백 작품>
치우천왕이 헌원에게 잡혀죽었는지 여부는 한고조 유방을 보면 알 수 있다. 유방은 병사를 풍패(豊沛)에서 일으켰는데, 그곳에는 치우에게 제를 지내는 풍속이 있다. 즉 동이의 군사들이었던 것이다. 마침내 10월에 함양을 평정하고 한왕(漢王)에 즉위해 10월을 한 해의 시작으로 정하는데, 동황태일(東皇太一)과 치우를 받들어 제사를 지내다가 뒤에 축관에게 명해 치우사당을 장안에 세우게 했다는 의미는 치우가 결코 헌원에게 잡혀죽은 패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서』지리지에는 “치우총은 산동성 동평군 수장현 관향성에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 산동성 유성시 양곡현 십오리진이다. 높이가 7척이고, 10월에 제사를 지낼 때 마치 붉은 깃발 모양의 연기가 뻗치는데 이를 치우기(蚩尤旗)라고 한다. 치우천왕의 영걸스러운 혼백과 사내다운 기백은 스스로 보통사람과는 매우 다른 바, 천년의 세월을 지나서도 오히려 없어지지 아니 하는 듯하다.
< 산동성 유성시 양곡현에서 매년 열리는 치우천왕 탄신절 기념행사 >
그러나 현재 한국인 대부분은 치우천왕이 우리 조상인지 잘 모르고 있고 그 여부에 대해 관심조차 없다. 그러는 사이 중국이 치우를 가져다가 자기네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 우리는 이제 피가 다른 한족들에게 조상까지 빼앗기고 있는 중이다. 이제는 제정신을 차릴 때도 되었건만, 여하튼 참으로 멍청한 후손들이 아닐 수 없다.
<북경 서북쪽 하북성 탁록현 三祖堂에 헌원·신농과 함께 모셔져 있는 치우천왕>
치우천왕 외에 또 한 분의 위대했던 영웅은 바로 고구리 말기의 대막리지 연개소문을 꼽을 수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연개소문은 고구려 9백년 이래로 구제도를 타파했고, 장수왕 이래의 정책을 변경해 남수서진정책을 세웠고, 그래서 국왕과 대신·호족 수백 명을 죽여 자기의 독무대로 만들고, 서국의 제왕 당태종을 격파해 지나 대륙의 침략을 시도했는데, 그 선악현부(善惡賢否)는 별문제로 하고 아무튼 당시 고구려뿐 아니라 동방 아시아에 전쟁사 중에 유일한 중심인물이다.”라고 호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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