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해군을 강원도 강릉으로 비정한 일제식민사학
강원도 강릉시 옥천동에는 참으로 이상한 비석이 하나 서있다. 비석 앞면에는 ‘창해역사유허비(滄海力士遺墟碑)’라는 글자가 조각되어 있는데, 여기서의 창해역사는 다름 아닌 장량과 함께 박랑사에서 진시황제를 저격했다가 실패한 여홍성이고, 그의 고향은 예국의 옛 도읍지였던 지금의 강릉시 대창리라는 사실을 밝혀주는 유허비라고 한다.
먼저 비석 옆에 있는 안내판의 문구를 보기로 한다. “강릉은 고대 예국(濊國)의 고도(古都)이다. 창해역사는 예국의 한 노파가 시냇가에서 떠내려오는 호박만한 알을 주웠는데 그 알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얼굴빛이 검어 ‘검을 여(黎)’를 성으로 하고 이름을 용사(勇士)라고 불렀다.
여용사는 예국의 사나운 호랑이를 퇴치하기도 하고 만근이나 되는 종을 옮기는 등 괴력을 지녀 왕은 상객으로 대우하였다고 한다.” 홍만종의 [순오지]에 실린 내용이다.
창해역사에 대한 기록은 사마천의 [사기]’장량열전’ 홍직필의 [창해역사유허기],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등에 기록되어 있다. 창해역사는 알에서 태어난 부래(浮來) 이동 인물로 강릉 출신이고 진한시대 중국과 통하였으며, 장량과 함께 폭정을 일삼는 진시황을 없애려했던 인물이며, 강릉지역에서는 한때 장군신인 육성황신으로 모셨셨다. 창해역사 여용사의 고향이며 예국의 수도였던 이곳에 (중략) 유허비를 건립하였다.”
게다가 비석의 뒷면에는 “창해역사는 단기 2080년 경 기준조선시대의 인물이다. 그는 당시 창해군왕의 아들로 성명은 여강중이라 전해오며 강릉 동문 외 대창리 현 위치에 거주했던 것으로 고증된다.(이하생략)”는 문구가 있는데, 참으로 역사에 무지한 사람들이 벌인 작태라 아니할 수 없다. 만약 창해군이 강원도 강릉에 있었다면 치욕의 한사군(漢四郡)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일제식민사학과 무엇이 다른가 말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 분들의 무지함만을 탓할 수도 없는 일이다. 먼저 조선중기 홍만종(1643~1725)이 쓴 [순오지]에서 창해역사 여용사(홍성)의 고향을 반도사관에 입각하여 강원도 강릉으로 이해하도록 언급한데서 유래한 것이며, 오히려 이를 일제식민사학이 적극 계승·장려했으며, 현 강단사학의 이론 역시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여홍성의 고향인 창해군은 어디일까?
그렇다면 장량과 함께 박랑사에서 진시황제를 저격했다 실패한 창해역사 여홍성의 고향 창해군은 과연 어디일까? 먼저 창해군에 대해 언급된 사서의 기록을 보기로 한다.
➀<한서 무제기>에 “원삭 원년(B.C 128) 가을 동이족 예의 임금 남려 등 28만 명이 항복하여 창해군으로 했다. 3년 봄에 창해군을 없앴다.(元朔元年秋 東夷濊軍南閭等口二十八萬人降爲蒼海郡 三年春罢苍海郡)”는 기록
※ 복건의 주 “예맥은 진한의 북쪽에 있고, 고구려와 옥저의 남쪽에 있고, 동쪽 끝이 대해이다”, 안사고의 주 “남려는 예의 임금 이름이다”
②<사기 평준서>에 “팽오가 예와 조선을 구매해 창해군을 설치하니 연과 제 사이에서 소요가 일어났다.(彭吳買濊朝鮮 置滄海之郡。則燕齊之間 靡然發動”라고 전하며, <한서 식화지>에는 “팽오가 예맥·조선을 뚫어 창해군을 설치했다.(彭吴穿秽貊朝鲜置沧海郡。)”고 전한다.
※ (주) 팽오가 구매한 조선은 <한서지리지> 유주의 낙랑군에 속한 조선현이고, 창해군은 연과 제 부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③범엽이 쓴 <후한서 동이 예전>에 “원삭 원년 예의 임금 남려 등이 우거왕을 배반하고는 28만 명을 이끌고 요동에 도착해 내속되었다. 무제가 그 땅을 창해군이라 했고, 수년 뒤 폐지했다.(元朔元年, 濊君南閭等畔右渠 率二十八萬口詣遼東內屬 武帝以其地爲蒼海郡 數年及罷。)”는 기록이 있는데, 위 기록들의 공통점은 예 땅이 바로 창해군의 땅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의 위치를 찾으면 창해군이 어디였는지를 알 수 있는데, 바로 『수경주』에 그 답이 있다.
<수경주 권10 탁장수(水經注 濁漳水)>의 “탁장수는 (산서성 동남부) 상당군 장자현 서쪽 발구산에서 나오고, 장수는 발구산 남쪽 산기슭이 만나는 녹곡산에서 나온다. 탁장수는 동으로 진류현 남쪽을 흘러 그 성 동쪽을 지나면서 꺾여 동북쪽으로 흘러 강수가 있다. 강수는 동북쪽으로 흘러 둔류현 고성 남쪽을 지나고 동북쪽으로 장수로 흘러 들어간다.”는 기록과
(원문) 浊漳水出上党。长子县西发鸠山, 漳水出鹿谷山,与发鸠连麓而在南。东迳陈留县南,又屈迳其城东,东北流有绛水注之,绛水东迳屯留县故城南,东北流入于漳,
“청장수는 장무현 고성 서쪽을 지나니 옛 예읍(濊邑)이다. 여기에서 한 지류가 나오니 곧 예수(濊水)로 동북쪽 참호정을 지나 두 지류로 나뉜다. <위토지기>에 말하기를, (발해군의) 장무군에서 다스렸으며 옛 장무고성이다. 또 동북쪽에서 두 강으로 나뉜다. 한 물은 우측에서 나와 정이라 했고, 한 물은 북으로 흘러 호라 했다. 소위 예구(濊口)이다. 청장수는 급하게 흘러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는 기록이 있어 청장수가 지나는 곳에 예(濊)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원문) 清、漳迳章武县故城西,故濊邑也。枝渎出焉,谓之濊水。东北迳参户亭,分为二渎。《魏土地记》曰:章武郡治。故世以为章武故城,非也。又东北,分为二水。一水右出为淀,一水北注呼池,谓之濊口。清漳乱流,而东注于海。
또한 <수경주 권9 기수(水經注 淇水)>편에 “청하 역시 동북으로 흘러 예수(濊水)가 나오는 예읍(濊邑) 북쪽을 지난다. 동북으로 흘러 향읍 남을 지나고, 청하는 동으로 흘러 두 물길로 갈라진다. 지류는 나룻터 우측에서 나온다. 동쪽으로 흘러 한 무제의 옛 대북을 지난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물길들은 과연 어디를 흐르는 강일까?
(원문) 清河又东北,濊邑北。濊水出焉。又东北,过乡邑南。清河又东,分为二水,枝津右出焉。东迳汉武帝故台北。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 언급된 탁장수와 청장수의 위치는 다음과 같다.
(탁장수) 장하의 상류로 발원지가 두 군데이다. 북쪽 발원지는 산서성 심현 서북쪽 천봉령이고, 남쪽 발원지는 장자현 서남 발구산에서 나와 장치현 동남까지 동류하다가 북쪽으로 방향을 바꿔 로성현과 양원현을 지나 북쪽에서 발원한 물길과 만나고 여성현까지 동북쪽으로 흘러 소장수에 합쳐진다. 다시 동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흘러 로성과 여성, 평순을 지나 하남성 섭현으로 들어가 청장수와 합쳐진다. (이하생략)”
(원문) 浊漳水: 漳河之上游也,有二源,北源出山西沁县西北千峰岭,南源出长子县西南发鸠山,东至长治县治东南,改北流经潞城、襄垣二县与北源合,又东北流至黎城县与小漳水合,改东南流经潞城、黎城、平顺入河南涉县,合于清漳。
“청장수 : 장하의 상류로 산서성 평정현 남쪽 대민곡이 발원지이다. 서남쪽으로 흘러 화순의 경계로 흐르다 꺾여 남쪽으로 흘러 요현을 경유해 서장수와 합쳐져 하남성 섭현으로 들어가 탁장하와 만나 합쳐진다.”고 기록되어 있다.
(원문) 清漳水: 漳河之上游也,源出山西平定县南大黾谷,西南流入和顺境,折南流迳辽县,合西漳水入河南涉县,与浊漳河合,《汉书地理志》沾县大黾谷,清漳水所出。
즉 탁장수는 산서성 남부에 있는 장치시 장자현에서 발원해 흐르다가 동남쪽에 있는 하남성 섭현에서 청장수와 합쳐지는 강이고, 청장수는 산서성 중동부에서 발원해 남쪽으로 흐르다 하남성 섭현에서 탁장수와 만나는 강이다. 따라서 예(濊) 땅은 산서성 동남부에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창해역사 여홍성은 산서성 동남부 출신으로 거기에서 가까운 박랑사 부근의 지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진시황을 저격할 수 있었던 것이지, 그가 식민사학계의 이론대로 강원도 강릉 출신이었다면 말도 다를 것이며 지형도 모르기 때문에 절대로 이런 일을 기획할 수도 실행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여홍성의 일화로 우리의 역사강역이 한반도와 만주만이 아닌 저 멀리 황하 부근까지였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고, 또한 치욕의 한사군은 한반도에 절대로 없었다는 사실도 재차 확인하게 되었다.
- 상기 컬럼은 본지의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