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제와 당태종 당시 요수는 어디인가?
지난 연재에서는 시황제를 저격했다 실패한 창해역사 여홍성의 고향 창해군(滄海郡)의 위치가 산서성 동남부를 흐르는 청장수(清漳水) 부근이라는 것에 대해 알아보았고, 이번 연재에서는 그런 창해역사 여홍성이 남긴 족적을 통해 요수(遼水)가 어디인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창해역사 여홍성이 시를 읊은 요수는?
고려 말 문하시중을 지낸 행촌 이암 선생이 쓴 <단군세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2세 아한 단군 2년(B.C 1833) 무자 가을 8월에 단제(檀帝=단군)께서 나라 안을 두루 순수하시다 요하(遼河)의 좌측에 이르러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를 세워 역대 제왕의 이름을 새겨 이를 전하게 하였다. 이것이 가장 오래된 금석문이다.
훗날 창해역사 여홍성(滄海力士 黎洪星)이 이곳을 지나다가 아래와 같은 시 한수를 읊었다.
‘마을 교외 번한이라는 곳에 유난히 특이한 돌 하나 서있구나. 받침은 무너지고 철쭉꽃이 붉게 피었고 글자는 이지러져 이끼가 푸르구나. 아득한 옛날에 만들어져 흥망의 황혼에 서있구나. 문헌으로 고증할 길 없으나 이 어찌 단씨(=단군)의 유적이 아니겠는가.’”
여홍성은 120근 대철추를 휘두르는 괴력의 소유자인 동시에 시도 잘 읊는 문장가로 문무를 겸비했던 인물로 보인다. 여하튼 조선 12세 아한 단제께서 순수관경비를 세웠다는 요하 좌측 번한 땅은 과연 어디일까? 현재 식민사학계와 중국 공히 요하는 요녕성 서부을 흐르는 현 요하라고 하며, 현 요하의 서쪽이 요서이고 동쪽이 요동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위 이야기를 현재 식민사학계의 논리대로 풀면 “강원도 강릉 출신 여홍성이 요녕성 요하 부근을 지나 북부 하남성에 있는 박랑사(원양현)에 가서 장량과 함께 시황제를 저격했으나 실패했다.”이다. 그러나 완전 어불성설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강원도 출신이 말도 다르고 지리도 모르는 상태에서 강원도에서 요녕성 요하를 거쳐 하남성 원양현까지 가서 시황제를 저격했다는 논리가 과연 성립될 수 있는 건지?
교통이 불편했던 고대에는 자기 고향하고 그다지 멀지 않은 지역이 자신의 활동무대가 되는 법이다. 지난 연재에 밝혔듯이 여홍성의 고향 창해군 역시 강원도 강릉이 아니라 산서성 동남부 청장수 부근이었다. 그러기에 북부하남성 박랑사에서 시황제를 저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홍성이 지나다가 비석을 보고 시 한수를 쓴 요하도 이 부근이어야 옳을 것이다.
조조의 시 ‘관창해’
207년 조조가 오환족을 정벌하고 개선하는 길에 갈석산에 올라 관창해(觀滄海)라는 시를 지었다고 하는데, <중국백과사전>의 설명으로부터 그 대략적인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관창해라는 제목은 후세사람이 붙인 것이다. 조조는 이 작품을 ‘송서·락지’의 ‘대곡’에 넣어 제목을 ‘갈석보출하문행(碣石步出夏門行)’이라 지었다. 이 시는 207년 북쪽 오환(烏桓)을 정벌하고 승리를 얻어 돌아오는 도중에 지었다.”
조조의 시 ‘관창해’의 원래 제목인 ‘갈석보충하문행’에서 추출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은 조조가 낙양 북쪽 성문에서 갈석산까지 걸어가 시를 지었다는 것이다. 즉 갈석산은 낙양에서 걸어갈 정도로 가까워야 한다. 그런 갈석산이 낙양에서 수 천리 떨어진 곳에 있다는 중국과 일제식민사학의 이론이야말로 그야말로 코미디 그 자체라 하겠다.
수양제와 당태종 당시 요수는?
먼저 수양제와 당태종이 요동정벌과정에서 요수를 건너는 장면을 <자치통감(資治痛鑑)>으로 보기로 한다. “644년 10월 14일 장안을 출발한 당 태종은 11월 2일에 낙양에 도착해 앞서 출발한 장수 장검으로부터 요수(遼水)가 범람해 건널 수 없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러자 당 태종은 장검을 낙양으로 호출해 지형에 관한 보고를 받았다.
11월 24일 형부상서 장량을 평양도 행군대총관으로 삼아 4만3천명의 병사와 전함 5백 척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진군하라 명했다. 또 이세적을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삼아 6만 명의 보·기병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향하라고 명했다.” 그런데 이는 단지 작전명령을 하달했다는 기록이지 장량과 이세적이 바로 고구려를 향해 출동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듬해 2월 말경에야 이세적의 군대가 유주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위에서 보듯이, 10월 14일 장안을 떠난 당 태종이 낙양에 도착해 요수가 범람해 건너지 못하고 돌아온 장수 장검에게 보고를 받은 날이 11월 2일이다. 장안에서 요수까지 갔다가 낙양까지 돌아온 날짜가 약 20일이라면 요수는 낙양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을 수밖에 없다. 즉 요수는 하남성 낙양 부근에 있는 황하 또는 황하의 지류로 보인다.
참고로 당태종과 수양제는 거의 같은 코스로 진군했다고 한다. 1월 3일부터 시작된 300만 대군의 출병식이 40일 걸려 2월 중순에 끝났고, 이후 수양제가 요수에 도착한 날이 3월 14일이니 출발 한 달 만에 도착한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수양제의 요수 도착이 2월로 기록되어 있다. 과연 수양제가 수천 리나 떨어진 요녕성 요하까지 15일~1달 만에 올 수 있었을까?
게다가 당태종과 수양제 공히 낙양에서 요년성 요하까지 오려면 그 사이에 건너야할 수많은 강과 지나야할 수많은 지명들이 있음에도 사서에 기록된 지명이라고는 정주(定州) 하나 밖에 없다. 또한 수천 리나 떨어진 멀리서 수많은 강들을 건너서 걸어와야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요수에 도착할 수 있었는지? 기록에 언급된 날짜로 미루어 보건데, 요수는 현 요녕성 요하가 아니라, 낙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어야 한다.
조조의 시 ‘관창해’
207년 조조가 오환족을 정벌하고 개선하는 길에 갈석산에 올라 관창해(觀滄海)라는 시를 지었다고 하는데, <중국백과사전>의 설명으로부터 그 대략적인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관창해라는 제목은 후세사람이 붙인 것이다. 조조는 이 작품을 ‘송서·락지’의 ‘대곡’에 넣어 제목을 ‘갈석보출하문행(碣石步出夏門行)’이라 지었다. 이 시는 207년 북쪽 오환(烏桓)을 정벌하고 승리를 얻어 돌아오는 도중에 지었다.”
조조의 시 ‘관창해’의 원래 제목인 ‘갈석보충하문행’에서 추출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은 조조가 낙양 북쪽 성문에서 갈석산까지 걸어가 시를 지었다는 것이다. 즉 갈석산은 낙양에서 걸어갈 정도로 가까워야 한다. 그런 갈석산이 낙양에서 수 천리 떨어진 곳에 있다는 중국과 일제식민사학의 이론이야말로 그야말로 코미디 그 자체라 하겠다.
『흠정대일통지』권121 요주(遼州)편에는 “요수(轑水/遼水): 일명 요양수(遼陽水) 또는 서장수(西漳水)라고도 하는데, 화순(和順)현 서북에서 발원하여 팔부령으로 들어가 동쪽으로 흘러 주의 성 서남쪽으로 지나며 청장수(淸漳水)에 들어간다. <수경주>에 요수는 요하(轑河)현 서북쪽 요산(轑山)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요하현 옛 성 서남쪽을 지나 동쪽으로 속성에 이르러 청장수에 합류한다”는 기록이 있다. 명나라 이묵이 그린 <대명여지도의 산서여도>에 요와 요산이 산서성 동남부 장치시 일대로 그려져 있다.
민족의 정신을 좀먹고 있는 해충보다도 못한 식민사학자들이여! 이렇듯 문헌기록이 확실하거늘, 아직도 요수는 요녕성에 있고 패수는 청천강이며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그 엉터리 이론 이제는 접을 때도 되지 않았는가? 위대했던 단군의 조선과 고구리의 영토가 저 멀리 중원 황하까지였다고 왜 말을 못하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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