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최대의 치욕 정강의 변
중국인의 가슴 속에는 지우고 싶고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는 치욕적인 역사가 새겨져 있다. 그 역사는 다름 아닌 바로 정강지변(靖康之變)이라는 사건인데, 정강이란 북송의 마지막 황제 흠종 치세에 쓰였던 연호이다. 우리가 40년간 지배했던 일본을 증오하듯이, 중국은 자기네에게 민족 최대의 치욕을 안겨준 금나라를 잊지 못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115년 여진부족을 통합한 아골타는 금(金)나라를 세우고는 요(遼)나라를 끊임없이 공격했다. 이에 송나라는 금나라와 연합하게 되면 요나라에게 빼앗긴 연운 16주의 탈환을 기대하게 되었다. 1120년 송나라는 요에 바치던 세금을 대신 금나라에게 바치겠다고 제안하여 맺어진 동맹에 따라 금군은 요의 중경으로 진격했고, 송군은 연경으로 향하다 대규모 내부민란이 일어나 1년간 공격이 중단되었다.
1123년 송나라가 다시 요 공격에 나섰으나 총사령관 동관이 연경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요나라 천조제가 도망가고 없었다. 그런데 송나라 군대가 요나라 잔존세력의 미미한 저항마저도 제대로 제압하지 못하자, 총사령관 동관이 원군요청을 하게 되고 이에 응한 금나라 군대가 쉽게 연경을 함락시켰다.
동맹에 따라 금나라는 송나라에게 연경을 반환하되 대신 연경을 점령한 댓가로 송나라가 전비를 지불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그러나 송나라는 금나라에게 약속한 전비의 지불은커녕 연운 16주의 회복을 위해 오히려 요 천조제와 비밀리에 만나 동맹을 맺고 금나라를 협공할 것을 약속하는 등 배신했다가, 1125년 천조제가 금나라 군사들에게 붙잡힘으로써 모든 계획이 드러나고 말았다.
이에 아골타의 뒤를 이은 금 태종이 10만 병력으로 파죽지세로 송의 수도 개봉을 포위했다. 휘종은 제위를 장남 흠종(欽宗)에게 물려주고 도망쳐버렸고, 흠종은 사신을 보내 영토의 할양과 배상금의 지불, 금 황제를 백부로 호칭할 것 등을 철군조건으로 논의하게 했다. 매우 굴욕적이었으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막상 금 태종이 철수하고 나니 송 흠종은 약속한 조건들을 이행하지 않았다.
이에 1126년 금 태종이 재차 수도 개봉을 공격해 약 40여 일 만에 함락시키니, 송 흠종이 화친을 청하러 직접 금의 진영을 찾았다가 포로가 되고 만다. 금 태종은 휘종과 흠종을 무릎 꿇리고는 정신이 혼미하다는 뜻으로 각각 혼덕공(昏德公)과 중혼후(重昏候)라는 모멸적인 칭호를 붙였다. 이를 역사적으로 중국역사 최대의 치욕인 ‘정강의 변’이라고 한다.
이후 금 태종은 휘종과 흠종 두 황제와 황족 등 3천여 명을 포로로 잡고는 철군했다. 휘종의 아홉 번째 아들이자 흠종의 동생인 강왕 조구가 남경으로 도망쳤다가 임안(항주)을 도읍으로 하여 스스로 황제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고종(高宗)이다. 역사는 이를 남송이라 칭하며, 정강의 변 이전의 송나라를 북송으로 구분한다.
1135년 포로로 잡혀갔던 휘종과 왕후가 죽고, 생모 위씨(韋氏)와 부인 형씨(邢氏)가 살아있음을 확인한 고종은 부왕의 유해 반환과 모친과 부인의 생환을 위해 강화교섭을 추진했다. 금나라는 남송에게 금나라에게 위협적인 장수 악비를 처형하라는 조건을 걸었고, 이에 응한 남송이 얻어낸 강화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 송나라는 금나라에 대해 신하로서의 예를 다한다.
- 금나라 왕이 송나라 왕을 황제로 책봉한다.
- 송나라는 은 25만 냥, 비단 25만 필을 세공으로 금나라에 바친다.
- 국경선은 동쪽으로는 회수, 서쪽으로는 대산관(섬서성 보계)을 연결하는 선으로 한다.
부왕 휘종의 유해와 고종의 생모 위씨는 무사히 남송으로 돌아왔으나, 부인은 이미 3년 전에 죽었다고 한다. 위씨 등 황족들이 금나라에서 몸이 많이 더럽혀진 상태라 귀환 후 정치적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다. 흠종은 자신이 귀환 대상에서 제외되자 위씨에게 다음번엔 자신의 귀환을 고종에게 꼭 의뢰해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흠종은 20년 가까이 개처럼 살다가 1156년 57세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중국 정부와 인민들은 이렇듯 우리 민족에게 처참하게 농락당했던 자신들의 미천한 역사에 대한 역사적 열등감이 외부로 반한감정 또는 혐한증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이 중국에게 눌릴 때 그들은 더 기뻐한다. 그런 와중에 시 주석이 내건 대당성세를 구현하는 중국몽에 인민들이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대당성세 자체가 거의 허구에 가까운 과장이라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다.
여하튼 지난 5월 이해찬 대통령특사에 대한 시 주석의 외교결례나 이번에 중국을 국빈방문한 문 대통령에 대한 홀대 등은 그들 나름대로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중국은 한국 대하기를 종주국 명나라가 제후국 조선을 대하듯 해야 직성이 풀리지,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역사적 열등감이 밖으로 표출되기 때문이다.
중국의 처참하면서도 우울했던 역사를 이해하는 것과 그런 사실을 몰라 덩치만 큰 중국에게 대국이라면서 고개 숙이는 못난 행위하고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중국이 자국의 역사로 억지로 편입시킨 요·금·원·청의 역사가 우리와 동족의 역사인 이유는 그들 모두 고구리와 대진국(발해)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중국이 동북공정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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