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구리시 토평동에 있는 장자공원에 나태근후보의 얼굴을 알리기 위해 다녀왔다.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유모차를 끄는 젊은 부부의 모습에서 아들의 어릴 적 모습이 겹쳐 떠올랐다. 공원 한 쪽에서는 초등학교 5학년 또래의 아이들이 공을 차며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운동을 좋아하던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환상에 빠지기도 했지.
1975년 7월의 마지막 날,너는 3.1kg의 몸으로 우렁찬 울음을 토하며 세상과 첫 입맞춤을 시작했지. 네가 태어나던 그날 우리는 엄마아빠가 되었다는 신비로움에 기뻐서 어쩔줄 몰랐었지.
사랑스런 나의 아들아, 수정 같은 너의 맑은 눈동자를 지켜보며 우린 언제나 행복했었지. 콸콸 쏟아지는 젖꼭지를 물고 젖을 빠는 모습에 우린 마냥 즐거웠었지.
너를 세상 밖으로 데리고 나갈 때면 “잘생겼다.” , “우량아 선발대회에 내보내라.”고 지나가는 사람마다 모두들 한마디씩 했었지.
너는 어려서부터 유달리 호기심이 많은 아들이었지. 집안에 있는 물건들을 드라이버나 송곳으로 해체하여 그 내부를 살펴보고서야 즉성이 풀리고야 마는 성격이었어.
읍내에 있는 시장에 갈 때면 즐비하게 늘어선 간판을 읽느라 시간이 꽤 걸렸었지. 세 살 때 한글을 읽었던 아들, 중학교에서도 영어책을 통째로 외워버렸던, 학원 문 앞에도 얼씬하지 않았던 흙 수저 아들이었지.
초등학교 3학년 때였어. 축구가 하고 싶어 점심시간 운동장에서 공을 따라다니는 아이가 있었지. 위험하다고 몇 번이나 경고를 주었는데도, 매일 그 시간에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지. 체육선생님은 화가 나서 그 아이에게 호통을 치셨지. 자세히 보니 엄마를 꼭 닮은 아들이었음이 해프닝으로 끝나게 되었지.
초등학교 5학년 때 모형항공기 공작경진대회에 비행기를 날리던 기억이 생각나느냐?
전주농고운동장에서 하늘높이 솟은 비행기는 전주시의 외곽을 지나 최고기록을 갱신 했었지. 전북대표로 서울여의도 광장에서 맘껏 비행기를 날려보던 그때가 생각나는구나.
1997년 국제정세의 혼란 속에서 진로의 고민 끝에 군대에 가게 되었지.
선임병한테 고생이나 하지 않을까? 엄마는 은근히 염려가 되었지. 아니나 다를 까? 두 살 아래인 선임 하사가 자꾸 귀찮게 한다는 것이었지. 먼저 입대했다는 이유로 하는 일마다 사사건건 신경 쓰게 하였지. 인내의 한계를 지나 최후의 결과까지 생각하게 되었지. 저녁식사 후 인적이 뜸한 틈을 타 얼굴 붉히지 않고 서로 잘 해결하여 눈엣가시처럼 보였던 선임병과 즐거운 병영생활을 했다는 이야기가 생각나는구나.
제대 후 광주에서 전화한통이 왔었지. 논산훈련소에서 야간훈련에 허약한 동료의 무거운 배낭을 메고 행군하여 어려운 고비를 넘겨주었다는 친구 어머니의 전화였지. 고맙고 감사하다는 전화에 엄마는 무척 흐뭇했었지.
아들은 졸업을 앞두고 대기업의 스카웃 제의도 뿌리친 채 고시에 뛰어 들었지.
그 당시만 해도 인기상승이었던 공대가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하향세로 접어들게 되었고, 치솟는 환율로 진로의 고민 끝에 내린 최선의 선택이었지. 2018년 개봉된 ‘국가 부도의 날’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흐릿해진 안경너머로 아들의 깊은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어. 대학 4년 동안 공학도를 꿈꾸며 당시 서울에서 대학재학 중인 동생과, 미국의 유수한 공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본 대학 강단에 서고자했던 꿈을 이렇게 접고 말았지.
본인의 미국유학으로 허리띠를 졸라매어야하는 부모님께 더 이상 누를 끼치지 않겠다는 맘에서였을 게였겠지.
험난한 길을 뚫고나가는 길을 다졌다 해도 쉽게 내린 결정이 아니었으리라.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기에 더 이상 말릴 수 없어 여기까지 왔을 게다.
진로를 바꾸면서 다시 도전해야하는 마음은 얼마나 착잡하고 괴로웠을까.?
어찌하여 어려운 고시를 시작했는지 엄마에게는 감당이 되지 않았지. 엉덩이가 짓무르도록 공부하는 모습은, 어버이 마음도 그에 못지않은 고통을 겪는 눈물의 굽이였지.
신림동에서 공부 할 때의 모습이 뇌리에 스친다.
배낭에 반찬거리를 매고 언덕길을 오를 때면 등에서 땀이 후줄근히 옷을 적시곤 했었지. 이 길을 오가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앞도 보이지 않는 신기루와 같은 길을 혼자서 법전과 싸우며 많은 생각을 하며 오갔을 길이었어. 그렇게 좋아하던 친구들도 끊고, 오로지 운동으로 자신을 다스리며 견뎌온 의지가 굳은 아들이었지.
대학 졸업식 오전, 넓은 캠퍼스를 돌면서 추억이 서린 교정에서 아들이 공부 할 때의 추억과 꿈과 희망이 부풀었던 교정을 낱낱이 설명하는 장면을 비디오에 담으며, 그날도 독서실로 향했던 모습이 떠오른다.
아들 고시과정에 수많은 좌절과 희망의 그림자 속에는 엄마의 고달픈 염려의 짐들이 서려있지. 셀 수 없는 간절한 기도가 한 움큼 들어 있고, 밤잠을 설치며 가슴 조였던 마음의 시간들이 고여 있다.
지금 아들이 가는 그 길은 험하고 거친 길인 줄 잘 알고 있어.
눈보라와 매서운 칼바람에 할퀴면서 길을 잃고,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곳에서 헤메이기도 할게야. 때로는 어두운 동굴에서 긴 시간을 보내야하는 고난의 길, 어려운 가시밭 길 일지도 몰라. 그 길이 정녕 아들이 가야 할 길이라면 망설이지 말고 앞만 보고 가거라. 태어나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날개를 펼칠 수 있다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 잖느냐.
초심을 잃지 말고 젊은 열정과 패기로 법조인의 본분으로서 입법부의 법치를 바로 세우는 큰 그릇이 되어라.
국민에게 올바른 국가를 위해, 올바른 법을 보여주는, 올바른 국회의원이 되었으면 한다. 언제나 나약하고 소외된 자의 편에서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어라. 위로의 어깨를 다독여 주어라. 평소 아들의 소신 있는 강직하고 멋진 삶을 살도록 하거라.
이제 전쟁의 종반전이다.
그간 많은 구리시민들의 현장의 목소리와 삶의 조각들을 낱낱이 목격했을 것이다. 그들의 아픔을 안아주고 위로해주며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 늘 시민들과 함께하며 더불어 사는 삶을 향해 꿈과 희망이 넘치는 구리건설을 위해 최선을 다하여라.
2020년 4월 8일
국회의원 나태근후보 어머니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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