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가 있는 백산/태백산과 흑수의 교집합으로 정리한 신시 후보지는 아래 3군데로 집약된다.
1) 길림성 동만주 흑룡강(흑수)과 백두산 천지
2) 섬서성 감천현 발원 흑수와 미현의 태백산 천지
3) 산서성 수양현 발원 흑수와 말갈의 백산 천지
이 중에서 우리 민족의 시원지인 신시는 과연 어디일까? 가장 가능성이 희박한 후보지부터 지워나가는 방식으로 추려보도록 하겠다.
필자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민족의 영산으로 알고 있는 ‘백두산’을 신시 후보에서 가장 먼저 제외시키고 싶다. 왜냐하면 백두산은 원래 신시가 아니라, 조선왕조에 의해 한반도에서 새롭게 지정된 시원지로 보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우리 민족을 동이(東夷)라고 불렀다. 만일 백두산이 신시였다면, 중국 사서에 동이의 수령으로 기록된 태호복희와 치우천왕, 역시 동이인 순임금과 강태공의 활동무대(산서남부·하남북부)가 너무 멀리 떨어지게 되어 그들과의 역사적 연관성을 설명하기 곤란해진다. 혹자는 “그들은 동만주에서 중원으로 이동해 활동했던 동이의 후예.”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중국 삼황오제의 머리 태호복희에 대해 <태백일사 신시본기>에 배달국 5대 태우의환웅의 12번째 막내아들로 신시에서 태어난 뒤 청구(靑邱)와 낙랑(樂浪)을 거쳐 진(陳)으로 옮겼다. 후예가 풍산(風山)에 살았기에 성을 풍씨로 했는데 훗날 갈리어 8개 성씨가 되었다.
산서성 제수(濟水)에 복희족의 옛 거처가 있고 무덤은 산동성 어대현 부산의 남쪽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낙랑과 제수는 패수(浿水) 부근이므로 하남북부와 산서남부 일대이고, 진(陳)은 완구(宛丘)로 하남성 회양(淮陽)이라고 하나 복양(濮陽)일 가능성이 크다. 복희의 무덤이 현 산동성 미산호 부근에 있기 때문이다. <수경주 하수4>에 풍산은 산서성 남부 북굴(北屈)현이고, 나중에 치우천왕이 천도하는 청구는 정확한 위치는 미상이나 풍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보인다. 역시 <태백일사 신시본기>에 배달국 14대 자오지 환웅인 치우천왕은 황제헌원과 10년 동안 73번을 싸워 모두 이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헌원의 본거지는 유웅(有熊)이고, 전투지는 공상(空桑)과 탁록(涿鹿)이다. 유웅은 하남성 정주의 남쪽 신정(新鄭)시, 공상은 하남성 개봉시 동남쪽 진류(陳留), 유주의 상곡(上谷)군에 속하는 탁록은 산서성 동남부 장치시 부근이다. 또한 치우천왕의 무덤은 하남성과의 경계인 산동성 유성(聊城)시 양곡(陽谷)현에 있다.
신시인 동만주를 다스려야 할 환웅이 10년간 73번이나 산서·하남성에서 싸웠다는 기록이 과연 성립될 수 있을까? 만주에서 하남성까지 가려면 최소 6개월~1년은 족히 걸리고, 또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세력끼리는 서로 싸울 하등의 이유가 없다. 치우천왕에 대한 전쟁기록은 배달국과 황제헌원이 윗동네·아래동네 식으로 서로 가깝게 있었다는 말인 것이다.
2) 섬서성 미현의 태백산 천지는 위 태호복희의 행적과 치우천왕의 전쟁기록을 충족시킬 수는 있으나, 염제신농과 화하족의 활동무대와 상당부분 겹치기 때문에 그곳을 신시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또 만일 태백산이 신시였다면 공자가 우리 민족을 동이(東夷)가 아니라 서이(西夷)라고 했을 것이다. 우리가 동이로 불린 이유는 화하족보다 동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3) 흑수가 발원하는 산서성 수양현과 말갈의 백산 사이가 신시일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인다.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 수양현 부근에 있는 백산을 검색할 수는 없었으나, 다른 확실한 기록이 있으니 바로 <신당서 열전 145-동이전>에 언급된 아래 고구려 관련기록이다. “마자(馬訾)수는 말갈의 백산(白山)에서 시작되고 색이 오리의 머리 색깔과 흡사하여 압록(鴨綠)수라 부른다. 국내(國內)성 서쪽으로 흘러 염난(鹽難)수와 합쳐지고, 서남쪽으로 안시(安市)에 이르러 해(海=황하)로 흘러 들어간다. 평양(平壤)성은 압록의 동남쪽에 있어 커다란 배로 사람을 건네고 믿음직한 참호 역할을 한다.” 고구려 도성의 위치가 언급된 아주 중요한 기록임에도 지금까지 강단사학계는 물론 재야사학에서도 제대로 해석되지 않고 그냥 이런 기록이 있다는 정도로만 소개되곤 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자신들이 주장했던 고구려 도성의 위치비정이 이 기록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혹자는 고구려 역사를 알지 못하도록 중국이 고의로 왜곡한 기록이라고도 말한다. 일제식민사학을 추종하는 강단사학계는 고구려 때 압록수는 현 압록강이고, 국내성을 압록의 동쪽이 아닌 북쪽 길림성 집안으로, 평양성을 압록의 동남쪽이 아닌 대동강 평양으로, 바록강변에 있던 안시성을 요녕성 요하가 흐르는 안산시로 비정했다.
압록강은 어떤 큰 강과 합쳐지지 않으며 국내성·평양성·안시성이 압록수변에 있다는 <신당서> 기록에 단 하나도 일치하지 않는다. <신당서> 기록이 왜곡된 건지? 아니면 사학계의 비정이 잘못된 건지?
그런데 <신당서>에 언급된 압록수를 현 산서성 분하에 대입해보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분원(汾源)천지가 있는 연경(燕京)산을 당나라 때 말갈의 백산(白山)이라 했으며, 국내성은 태원시 남쪽 평요, 평양성은 임분시, 안시성은 신강현 서북쪽 화염산 남단으로 비정된다. 한마디로 이곳이 바로 배달국 신시 부근으로 고구려의 중심지였다는 말이다.
따라서 산서성 수양현(흑수)과 연경산(백산) 사이에 있는 태원시가 원래 우리 민족의 시원지였던 신시로 보인다. 이렇게 비정되면 지금까지 이상하게 여겨졌던 치우천왕과 <단군세기>에 기록된 순임금 등 다른 모든 기록들이 자연스럽게 해석될 수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게다가 우리 고대사가 세상에서 가장 찬란했고 장엄했고 위대했다는 사실도 저절로 깨닫게 된다.
몽골에게 항복하면서부터 대륙에서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만주·한반도로 밀려들어온 뒤 명나라가 중원을 지배하자 원래 신시를 잃어버린 조선왕조에 의해 반도사관에 맞게 새롭게 제정된 시원지가 백두산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게 6백년을 지나는 동안 명나라의 3배가 넘는 영토를 보유했던 청나라가 망하고 한족의 민국이 세워지면서 중국이 졸지에 커져버린 것이다.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 발문에는 “<산해경>에 이르기를 곤륜의 한 갈래가 큰 사막의 남동으로 가서 의무려산이 되고, 이로부터 크게 끊어져 요동 벌판이 되고 마른 벌이 일어나 백두산이 되니 조선 산맥의 시조다. 산은 셋으로 층졌는데 높이는 200리, 가로는 1,000리에 걸쳐 있으며, 그 산꼭대기에는 못이 있어 이름은 달문이라 하고 둘레는 800리이며, 남으로 흘러 압록이 되고 동으로 나뉘어 두만이 된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중국 바이두 백과사전에는 “(분원)천지의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산해경>과 <수경주>이다. 후에 <자치통감> <수서> <당서> <삼소지> <진문> 등에 고루 기록되어 있다. 옛 <산해경>에는 2군데의 천지가 기재되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산서천지이다.”라고 하며, 당 정원15년(799)에 천지 주위에 황실목장을 만들어 매년 전투마 70만 필을 키웠다고 한다.
그런데 장백천지에 대해서는 “(장백)천지에 대한 중국사서의 가장 오래된 기록은 청나라 강희 16년(1677) 때 내대신 무목마가 강희제의 유지를 받들어 장백산을 올라 천지를 그리는 기술에 대해 강희제에게 상소를 올렸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대동여지도 발문에서 <산해경>이 언급된 백두산과 천지는 과연 어디일까?
얼마 전 남북의 두 정상이 오른 백두산 천지는 비록 민족의 오리지날 시원지는 아닐지라도, 고려 이후 잃어버린 신시를 아직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에게는 현실적으로 두 번째 신시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오래 걸릴지는 모르겠으나, 민족의 구성원들이 고토수복의 웅대한 꿈을 가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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