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 07. 이미자 선생님의〈님이라 부르리까〉(2021.04.19.)
오늘 61주년 4.19혁명 기념일을 맞아 이미자 선생님의 1960년도 발표〈님이라 부르리까〉를 주제로 하였습니다.〈님이라 부르리까〉김운하 작사, 나화랑 작곡, 이미자 선생님 노래입니다.
1992년 4월 26일 작사가 정두수님의 동아일보 ‘가요 100년 그 노래 그 사연’에 실린 내용은,
「1959년초 은행원 김운하는 명동의 약속다방으로 달려가 마담 조금숙을 만나는 것이 빼놓을 수 없는 일과였다. 해맑은 얼굴에 서글한 눈매를 지닌 미인 조금숙, 그러나 얼굴에는 언제나 우수가 깃들여 있었다. 어쩌다 웃을 때면 김운하의 가슴에는 바람에 이는 보리밭 이랑만큼이나 큰 파문이 일었다.
남인수의〈항구의 청춘시〉과 이인권의〈눈물의 춘정〉을 작사하기도 했던 김운하는 해방 후 세관에 다니다가 은행으로 직장을 옮겼다. 그 은행 명동지점으로 출근하던 첫 날 아침, 그는 빼어난 미인에 끌려 약속다방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조금전의 그 여인이 마담으로 변신해 상냥스런 인사말을 건네왔다. 마담과 그림, 서정적인 실내악에 함께 취한 김운하는 이때부터 이 다방의 단솔 손님이 됐고, ‘위스키 티’를 마시며 여인의 과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마담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인이었기에…, 이화여전에 다니던 조금숙은 공교롭게도 방학 중에 38선이 그어져 고향인 평양에 갖혀 버렸다. 1.4후퇴 때 서울에 다시 온 그녀는 세브란스의전 학생이었던 약혼자를 찾았으나 그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버리고 없었다. 몇 년후 겨우 약혼자를 찾아냈지만 그는 이미 머나 먼 당신이었다. 이때부터 조금숙은 웃음을 잃었다. 남의 남자가 됐지만 꼭 한번은 만나고 싶은 사람, 그래서 다방을 열고 이름을 ‘약속’이라고 했다. 이 사연을 들은 그날 밤 김운하는 작사가로 돌아와 그 여인을 위해 곡을 만들었다.
‘님이라 부르리까 당신이라고 부르리까 / 사랑을 하면서도 사랑을 참고 사는
마음으로 만 그리워 마음으로 만 사무쳐 / 애타는 가슴
그 무슨 잘못이라도 있는 것처럼 / 울어야 만 됩니까 / 울어야 만 됩니까.’
1960년 발표된〈님이라 부르리까〉는 1963년 작곡가 나화랑이 운영하던 라미라레코드사에서 음반을 발매했습니다. 그 당시 어느정도 인기는 있는 노래였지만, 1964년〈동백아가씨〉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노래에 담긴 사연과 이미자 선생님의 애잔한 목소리가 어우러져 국민들의 애절한 한을 반영해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이미자 선생님의 대표곡으로 자리잡았던 것입니다.
– 님이라 부르리까 – 김운하 작사, 나화랑 작곡(1960년)
1. 님이라 부르리까 당신이라고 부르리까 / 사랑을 하면서도 사랑을 참고 사는
마음으로 만 그리워 / 마음으로 만 사무쳐 / 애타는 가슴
그 무슨 잘못이라도 있는 것처럼 / 울어야 만 됩니까 / 울어야 만 됩니까
2. 님이라 부르리까 당신이라고 부르리까 / 밤이면 꿈에서나 다정히 만나 보고
잊지 못하고 언제나 / 가슴 속에 만 간직한 / 못난 이 마음
그 무슨 잘못이라도 있는 것처럼 / 울어야 만 됩니까 / 울어야 만 됩니까
4.19혁명과 관련된 대중가요는 남인수의〈사월의 깃발〉(반야월 작사, 박시춘 작곡)이 있습니다. 또 그해 3월 2일 발생한 부산 국제고무공장(국제상사)에 큰 불이 나서 62명이 사망하고 39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는데, 대부분 어린 여성노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루 400환을 받으며 일했는데, 당시 네 식구가 보리밥은 먹을 수 있었고, 쌀밥을 먹기에는 어려운 돈이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월간잡지「세계」나「현대문학」가격이 1권에 400환이었고, 서울 화신빠에서의 맥주 한 병값이 400환으로 여공들의 일당과 같았으니 당시에도 빈부격차는 심했던 것 같습니다.
– 사월의 깃발 – 반야월 작사, 박시춘 작곡, 나화랑 편곡(1960년)
1. 사월의 깃발이여 잊지 못할 그 날이여
하늘이 무너져라 외치든 민주 주권 / 그 주권 찾은 날에 그대들은 가셨나니
임자없는 책가방을 가슴에 고이 안고 / 흘리는 눈물 속에 어린 넋을 잠재우리
2. 사월의 불길이여 피에 젖은 꽃송이여
빈 주먹 빈 손으로 쏟아져 나온 교문(校門) / 어른이 못한 일을 그대들은 하였나니
민주 대한 새 터전에 초석된 어린 영웅 / 조국의 품 안에서 고이 고이 잠드소서
3. 사월의 태양이여 뭉쳐진 대열이여
양처럼 순한 마음 진리는 명령되어 / 거룩한 더운 피를 그대들은 흘렸나니
역사 위에 수를 놓은 찬란한 어린 선열 / 조국의 별이 되어 길이 길이 빛나소서
– 한많은 네 청춘(원제 ‘사백환의 인생비극’) – 반야월 작사, 나화랑 작곡(1960년)
1. 열여덟 꽃봉오리 열아홉 꽃봉오리 / 눈물의 부산 처녀 고무공장 큰 애기야
하로(하루)에 사백환에 고달픈 품삵으로 / 행복하겐 못 살아도 부모 공양 극진 터니
한 많은 네 청춘이 불꽃 속에 지단 말이냐
2. 새파란 그 순정은 수줍은 그 순정은 / 그리운 님의 품에 하소연도 못하고서
새벽 별 바라보며 얼마나 울었더냐 / 남과 같이 못 배운 게 가슴 속에 한이더니
피지도 못한 사랑 재가 되어 갔단 말이냐
또한, 4.19혁명과 관련된 가슴 아픈 영화도 있었으니, 그 대표적인 영화가 작곡가겸 오향영화사 대표였던 박시춘씨가 전 재산을 끌어 모아 제작한 ‘장미의 곡’ 권영순 감독, 노능걸, 문정숙, 김희갑, 허장강, 주선태(여로에서 시아버지), 구봉서, 곽규석, 전영선(아역, 1954년생, 작곡가 전오승의 큰딸이며 가수 나애심의 친조카)이 출연한 코미디뮤지컬영화입니다.
오향영화사(대표 박시춘)은 1958년 영화 ‘딸 7형제’를 제작 400여 만원의 순이익을 올리고, 연달아서 제작한 ‘육체의 길’과 ‘가는 봄 오는 봄’의 성공으로 영화 제작에 자신감을 갖고 네 번째 영화 ‘장미의 곡’을 제작해 4월 29일 국도극장에서 개봉했으나, 4.19혁명의 여파와 겹쳐 첫날 관객이 19명이였다고 하며, 영화 참패 후 박시춘은 장충동 집까지 팔아서 빚을 갚았고, 오향영화사도 문을 닫았습니다.
작곡가 박시춘이 애지중지 했던 가수 백설희(신랑 황해, 아들 전영록)가 주제곡〈장미의 곡〉(반야월 작사 박시춘 작곡)을 불렀는데, 김희갑, 구봉서, 곽규석 등 희극인들이 포풀러가 길다랗게 늘어선 가로수 길을 자전거로 달릴 때 낭만적으로 주제곡이 흘러 나옵니다. 또한 경쾌한 낭만을 가득 담은 도미의〈청춘 부라보〉(반야월 작사 박시춘 작곡)도 주제가로 나오고, 그 밖에도 백설희의〈장미는 내 사랑〉〈님 가신 발자국〉(반야월 작사 박시춘 작곡)도 주제가로 나옵니다.
영화 ‘장미의 곡’ 줄거리는「차일주(노능걸)이 작곡에 전념하는 동안 병든 아내 영란(문정숙)는 손써볼 겨를도 없이 죽는다. 그는 작곡을 포기하고 실의에 찬 나날을 보낸다. 이 사실을 안 이웃의 아마츄어 6인조 악단이 차선생이 작곡을 계속하도록 그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한편, 시골에서 상경한 가수 지망생 아가씨 은실(김혜정)을 그에게 추천한다. 용기를 얻은 그는 다시 작곡에 전념하여〈장미의 곡〉이라는 대히트곡을 발표하게 된다.」는 내용의 영화입니다.
또 한편의 새드 뮤비는〈타향살이〉(1934년 금릉인 작사 손목인 작곡)과〈짝사랑〉(1936년 박영호 작사 손목인 작곡)의 국민가수 고복수님이 전재산을 쏟아부어 만든 영화 ‘타향살이’도 개봉한 지 3일만에 4.19혁명이 일어나 영화의 막을 내려 작고할 때까지 어려운 생활을 하셨습니다.
이미자 선생님께서 정식 가수 데뷔곡인〈열아홉 순정〉을 발표한 1959년까지 나온 노래들은,
1958년 유니버샬레코드사에서 발매한 첫 앨범에〈도라지 부르스〉(손로원 작사 김성근 작곡)〈무명초〉(임청조 작사 김성근 작곡)〈미련에 우는 여인〉(박대림 작사 김성근 작곡)외 1곡
1959년〈열아홉 순정〉(반야월 작사 나화랑 작곡), 〈아리랑 상사병〉(손로원 작사 김성근 작곡)〈워싱턴 부르스〉(손로원 작사 나화랑 작곡, 유니버샬레코드사) 등이 있습니다.
☞ 작사가 김운하(1914〜1978년, 본명 김득봉, 예명 무인도, 함경북도 웅기 출생)
1939년 남인수〈항구의 청춘시〉1958년 손인호〈물새야 왜 우느냐〉1962년 최숙자〈나룻배 처녀〉1965년 박철로〈나는 왔네〉1966년 이미자 선생님〈서산 갯마을〉오기택〈고향무정〉 〈충청도 아줌마〉1969년 김부자〈내 고향 금산〉1971년 김하정〈금산 아가씨〉 등 작사
☞ 작곡가 나화랑(1921〜1983년, 본명 조광환, 예명 탁소연, 경상북도 김천 출생)
1942년 태평레코드사 가수 데뷔, 1943년 포리돌레코드사 작곡가(태성호〈삼각산 손님〉),
1954년 KBS경음악단 지휘자, 1962년 라미라레코드사 설립, 가수 남일해와 이미자 선생님 등 발굴하였습니다. 2014년 경상북도 김천에서 나화랑기념사업회 주최「나화랑 가요제」개최
1943년 태성호〈삼각산 손님〉1952년 유춘산〈향기품은 군사우편〉1955년 심연옥〈도라지 맘보〉1956년 도미〈비의 탱고〉〈청포도 사랑〉1957년 김정애〈닐리리 맘보〉황금심〈뽕따러 가세〉1958년 송민도〈행복의 일요일〉1959년 남일해〈찾아온 산장〉이미자 선생님〈열아홉 순정〉황금심〈가야금 타령〉1960년 남인수〈울리는 경부선〉〈무너진 사랑탑〉1961년 남일해〈이정표〉1965년 이미자 선생님〈정동대감〉1969년 김상희〈울산 큰애기〉1975년 군가〈멸공의 횃불〉
부인, 가수 유성희(1942〜2013년, 본명 유난옥 강원도 삼척) 1962년〈사랑은 즐거운 스윙〉1963년〈양산도 부기〉, 1967년 강릉여중 국어교사, 1972년〈내 고향〉〈어쩌면 잊어질까〉
아들, 삼형제 가수 조규천·조규만·조규찬, 나화랑은 작사가 박영호(예명 처녀림)가 작명했다.
맏형, 작사가 고려성(1910년〜1956년, 본명 조경환), 8.15해방제1호가요〈남대문을 열어라〉
1940년 백년설〈나그네 설움〉(작곡 이재호), 1958년 최갑석〈고향에 찾아와도〉(작곡 이재호)
〈님계신 전선〉의 ‘금사향’ 고려성이 ‘거문고에 실이 울려서 나는 교향악’이란 뜻으로 지어줬다.
2014년 12월 30일 김천직지공원에 작사가 고려성, 작곡가 나화랑 형제노래비가 건립됐습니다.
또한 2020년 3월 문화재청에서는 두 형제가 태어난 김천시 봉산면 봉산마을 창녕조씨 집성촌 소재 황산댁(黃山宅) 고택(古宅) (1801년 건립)을 국가등록문화재(775호)로 지정하였습니다.
「엘레지여왕 이미자 팬클럽」은 2009년 1월 27일 결성돼 매년 11월 말 정모를 개최하고 있다.
다음(daum)카페에서「엘레지여왕 이미자 팬클럽」을 치셔서 왼쪽 상단 ‘가입등업방’에서 신규 회원 가입 등업 신청하시면 카페지기인 동백꽃님이 등업해 드립니다. 회원으로 빨리 가입하셔서,
이미자 선생님의 노래 1000여 편을 매일 24시간 들으면서 짧은 인생 더욱 즐겁고 행복하게…
다음에는 이미자 선생님의〈황포돛대〉에 대한 글을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