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 16.〈단장의 미아리고개〉 , 〈굳세어라 금순아〉(2021.06.21.)
오늘은 1948년 미국 콜롬비아레코드사에서 처음으로 LP(Long Play)음반을 공개한 날입니다. 우리나라는 기존 SP음반에 1956년 모노 녹음으로 제작된 10인치 LP음반이 처음 도입됐습니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는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에 1956년 이해연이 취입한 노래입니다.
1950년 6월 25일, 서울 성북구 미아동에 살고 있던 반야월님 가족들은 6.25전쟁이 일어나자
다음날, 반야월 홀로 경상북도 김천에 있는 처갓집으로 피난을 내려갔습니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반야월 선생의 부인은 힘겹게 가족을 보살필 수 밖에 없었고, 그해 여름을 호박죽과
감자죽을 먹으며 버티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다섯 살인 둘째 딸 ‘수라’가 탈진 상태에 있다가
총과 대포소리에 놀라 죽는 불행한 일을 당했고, 부인이 미아리고개에 손으로 땅을 대충 파서
딸을 묻었다고 합니다. 반야월은 수복 후 집으로 돌아와 부인으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 듣고는
그 곳으로 찾아가서 딸의 시신이라도 찾으려 했지만 끝내 찾지 못해 대성통곡을 하면서 깊이
깊이 후회를 했습니다. 이를 가슴속에 큰 상처로 간직하고 있던 반야월은 딸을 잃은지 6년이
지난 1956년 가슴에 응어리진 한을 비장한 심정으로 노랫말을 썼고, 콤비였던 작곡가 이재호가
애잔한 곡조의 노래를 만들어서 가수 이해연이 불러 발매를 했습니다. 애절한 가사와 멜로디를
갖추고 거기에 이해연의 청아하고 애절함이 더해진〈단장의 미아리고개〉는 발매되자 국민들의
심금을 울려 크게 히트를 했고, 해마다 6월이 되면은 각종 방송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반야월은 “딸과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바꾼 것 같은 심정”이라고 회고하기도 하였습니다.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1984년 6.25하면 떠오르는 노래 선호도 조사에서 1위를 했습니다.
-〈단장의 미아리고개〉–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 이해연(1956년 오아시스레코드사)
1절. 미아리 눈물고개 님이 넘던 이별 고개 / 화약 연기 앞을 가려 눈 못뜨고 헤매일 때
당신은 철사 줄로 두손 꽁꽁 묶인 채로 / 뒤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 한많은 미아리고개
(대사) “여보 당신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계세요. 어린 용구는 오늘 밤도 아빠를 그리면서 지금 막 잠이 들었어요. 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 때, 당신은 감옥살이 그 얼마나 고생을 하고 계세요. 십년이 가도 백년이 가도 부디 살아만 돌아오세요. 네 여보! 여보오오….
2절. 아빠를 그리다가 어린 것은 잠이 들고 / 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 때
당신은 감옥살이 그 얼마나 고생하오 / 십년이 가고 백년이 가도 살아만 돌아오소
울고넘던 이 고개여 / 한많은 미아리고개
〈단장의 미아리 고개〉는 1950년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될 때 수많은 인사들이 북으로 끌려가다 미아리 고개를 넘는 순간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단장(斷腸)이란 단어는 ‘창자가 끊어질 정도로 큰 슬픔’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단장의 유래는「중국 진(晉)나라 환온(桓溫)이 촉(蜀)으로 가다가 장강 중류의 삼협(三峽)을 지나게 되었는데, 한 병사가 새끼 원숭이 한 마리를 잡아 오자 그 어미가 울며 백여 리를 뒤따라와서 배에 오르는 순간 혼절해 원숭이의 배를 가르고 보았더니 창자가 모두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다.」는데서 유래했습니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는 작사가 반야월의 아픔이 담긴 노래이지도 하지만, 남편과 아버지, 오빠, 동생 등 가족들이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는 모습을 보며 몸 속의 창자가 끊어지는 듯 헤아릴 수 없는 아픔과 슬픔을 겪었던 여인들의 한 맺힌 절규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미아리 고개’는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서 미아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1950년 6.25전쟁 당시에 서울 북쪽의 유일한 외곽도로로서 국군과 북한군 사이에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던 장소였습니다.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고 후퇴하던 북한군은 정치인과 학자, 문화예술계 인사와 국민분들을 이 고개를 넘어서 북으로 끌고 갔습니다. 노랫말에는 두 손을 묶인 채로 북으로 끌려가면서도 남겨진 가족들을 자꾸만 뒤돌아 보는 남편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고, 또한 아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끌려가는 남편을 속절없이 바라보는 광경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노랫말이 탄생한 이면에는 앞에서도 언급했 듯이 작사가 반야월의 단장을 끊는 애절한 사연이 담겨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기에 가수 이해연이 청아한 목소리로 애절하게 이 곡을 표현해 부른 것도 그 때의 슬픔을 간직한 이산가족들을 비롯한 국민들의 애창곡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또한〈단장의 미아리 고개〉는 북한에 대한 적개심보다 남편의 안전을 빌고, 무사하게 살아서 돌아오기만을 바라는 아내의 애틋한 심정을 잘 표현한 휴머니즘 짙은 노래여서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오고 있는 것 갔습니다. 이 시기에 비슷한 노래가 유행했는데, 심연옥의〈아내의 노래〉와 금사향의〈님 계신 전선〉, 유춘산의〈향기 품은 군사 우편〉등이 그러한 노래였던 것입니다.
그 당시 끌려갔던 대중가요계 인물 중 작곡가 겸 가수 김해송은 돌아오지 못하고 작고했으며, 신카나리아는 미아리 고개에서 극적으로 탈출해 가수활동을 계속하다 2006년에 작고했습니다.
4일이 지나면 6월 25일입니다.〈단장의 미아리고개〉노래에서 보듯이 전쟁은 평범하게 살고 있는 국민들에게도 얼마나 뼈아픈 슬픔을 주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는 이 땅에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되겠고, 나아가 전 세계에서도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엄중한 교훈을 우리들에게 주고 있습니다. 1996년 미아리고개 정상 미아리 예술극장에 노래비가 세워졌습니다.
☞ 이해연(李海燕), 1924년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해 2019년 작고, 1941년 10월 가수 데뷔,
배우자 트럼펫 연주자 베니김(본명 김영순), 자녀 1979년〈연안부두〉김트리오(김파, 김단, 김선)
대표적인 노래로는, 1942년〈뗏목 이천리〉〈소주 뱃사공=제주 뱃사공〉〈페르샤 점쟁이〉
1943년〈황해도 노래〉1956년〈단장의 미아리고개〉, 1957년〈공방일기〉〈세월은 간다〉〈울어라 대동강〉〈진달래 비가〉1960년〈압록강 칠백리〉〈오동추야〉1962년〈개나리 고개〉〈어여쁜 낭랑〉1963년〈양귀비〉〈한설야화〉1965년〈나를 잊어주세요〉〈달래고 가시구려〉(대사 고은정)〈당신을 못잊어서〉〈백마는 우네〉〈성터에 혼자서서〉〈인생유수〉등이 있고, 잠시 귀국했던 1988년 6월 20일 가요무대에 출연하여〈단장의 미아리고개〉를 불렀습니다.
1955년〈황혼의 엘레지〉를 불렀던 백일희(본명 이해주, 박춘석의 유일사랑)이 여동생입니다. 〈굳세어라 금순아〉는 강사랑 작사, 박시춘 작곡으로 1953년 현인이 불렀던 노래입니다.육군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10월 1일 삼팔선을 돌파한 국군과 UN군은 10월 19일 평양을 탈환, 파죽지세로 10월 26일 ‘초산’ 지역에 태극기를 꽂은 육군 제 6사단 7연대(필자는 7연대를 지원하는 포병 대대에서 군복무를 했습니다.)는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았을 때만 하여도 통일을 목전에 둔듯했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이 개입해 10월 25일 평안북도 운산에 주둔한 미군 제 1군단 예하 국군 제 1사단 15연대를 기습 공격한 것이 중공군과 첫 교전한 운산전투입니다.
흥남철수작전은 1950년 12월 15일부터 12월 26일까지 흥남에서 한국군과 미군, 피란민 10만명이 철수한 작전입니다. 미군 지휘부는 피란민을 태우고 가는 것을 매우 꺼려했으나, 미군 10 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의 고문이었던 현봉학 박사와 제 1군단장 김백일 장군의 끈질긴 설득으로 “병력과 장비를 싣고 남는 자리가 있으면 피난민을 태우겠다.”는 동의를 얻었습니다.
사상 유래없는 대규모 철수 작전에 동원된 193척의 선박은 우리들이 익히 잘 알고 있는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선장 레너드 라루)가 12월 23일 흥남 부두를 떠났고, 크리스마스 이브 날인 12월 24일 마지막 수송선인 온양호와 호위 전투함들이 흥남을 떠나는 순간 부두의 시설들이 모두 폭파 됐고, 군인들과 피란민들은 폭파의 현장을 보면서 흥남 부두를 떠났으며 12월 25일 아침에 중공군이 흥남을 점령했습니다. ‘빅토리호’는 12월 25일 부산항에 도착했지만 부산도 피란민들로 꽉찬 상태여서 거제도로 가라고 해, 또다시 항해 끝에 오후에 거제도 장승포 항에 도착했습니다. 철수 과정에서 한 명의 사망자도 없었고 오히려 5명의 생명이 태어나 미군들은 아이들의 이름을 김치1, 김치2, 김치3, 김치4, 김치5로 지어 ‘KIMCH FIVE’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외신들은 흥남부두 철수작전을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란 제목으로 전세계로 타전했습니다. ‘빅토리호’는 단일 선박으로 가장 큰 규모의 구조 작전을 수행한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됐습니다. 흥남부두 철수 현황으로는 병력 105,000명, 피난민 98,100명, 차량 17,500대, 물자 350,000톤 주요선박은 메러디스 빅토리호(14,500명), 버지니아 빅토리호(14,000명), 레인 빅토리호(7,000명) , 마다케츠호(6,400명), 토바츠 마루호(6,000명), 요나야마 마루호(3,000명) LST 6척(39,200명) 라루 선장 “이 배는 화물선으로 정원이 60명이고, 현재 승선인원이 47명이니 13명밖에 못탑니다.”
현봉학 “장군님! 라루 선장님! 저 사람들 여기에 두고가면 다 죽습니다. 제발 도와 주십시요.” 라루 선장 “군수품 다 버려, 다 내려놔! 선장의 명령이다.” 그들은 25만 톤의 군수품을 버리고 그보다 몇 배, 몇 백배, 몇 천배 중요한 인간의 생명을 살리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존경! 감사!
2014년 영화 ‘국제시장’에서 흥남부두 철수 장면을 볼 때 꼼짝도 못하고 봤는데… “끝순아아!”
-〈굳세어라 금순아〉– 강사랑 작사, 박시춘 작곡, 현인(1953년 오리엔트레코드사)
1절.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보았다
금순아 어데로 가고 길을 잃고 헤메였더냐 / 피눈물울 흘리면서 1.4 이후 나 홀로 왔다
2절. 일가 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고나 고향 꿈도 그리워 진다 / 영도다리 난간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3절. 철의장막 모진 설움 받고서 살아를 간들 / 천지간에 너와 난데 변함있으랴
금순아 굳세어다오 남북통일 그날이 되면 / 손을잡고 울어보자 얼싸안고 춤도 추어보자
〈굳세어라 금순아〉는 노래 가사를 보면 탄생지가 부산인 것 같은데, 대구에서 탄생했습니다.
1950년 6.25로 인해 인구 27만 명 정도인 대구에는 40만 명의 피난민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1947년 이병주는 대구에 오리엔트레코드사를 설립하여서 1층은 레코드사 사무실과 녹음실로 사용하고, 2층엔 함께 일하던 작곡가 박시춘의 부인 김예비여사가 ‘오리엔트다방’을 운영했습니다.
작사가 강사랑은 1950년 오리엔트레코드사 문예부장인 옛 친구 박시춘을 찾아가 의지하며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오리엔트다방에서 음반 제작에 대해 논의하다가 점심을 먹으러 단골 냉면 집인 교동시장 강산면옥으로 가던 중 강사랑은 노점상을 하고 있는 피란민들의 삶에 지친 초라한 모습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걷다가, 1.4후퇴 때 흥남부두에서 피난민으로 내려와 대구 양키市場(교동시장)에서 미군물자를 팔던 ‘금순’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에게서 들은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 사연은 흥남 부두에서 오빠와 헤어진 뒤 영도다리에서 재회하기로 약속했으나 만나지 못했다 하는 사연이었던 것입니다. 강사랑은 그녀의 이야기를 토대로 노래말을 지어서 박시춘에게 줬고, 박시춘은 받은 가사에 감동을 받아 곧바로 기타를 퉁기며 악보를 다듬어 노래를 완성했습니다.
이 노랫말과 노래에 반한 이병주 사장은〈굳세어라 금순아〉를 현인에게 주어서 연습을 시켰고, ‘오리엔트다방’에서 자정이 넘은 시간만을 이용해서 군용 담요로 창문에 겹겹이 둘러서 가리고 참으로 눈물겨운 강행군 속에 녹음을 마쳤고, 음반을 발매했습니다. 〈굳세어라 금순아〉는 피난민의 애환과 처절한 사연을 담은 노랫말과 곡조로 표현된 불후의 명곡이라 그런지 발매되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지금까지 1천만 이산가족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노래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또 다른 금순이에 대한 이야기는 어부의 딸로 태어나 남항동 영도시장에서 생선장사를 했다는 설(說)과 영선동 쌀가게 주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당시 대구 ‘매일신문’ 기사내용「1952년 여름 대구시 중구 화전동, 지금은 없어진 옛 자유극장 바로 옆 ‘남선악기점’ 2층 ‘오리엔트 다방’, 가수 현인이 오리엔트 레코드사 사장 겸 작곡가인 대구 출신의 이병주에게 냉면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옆에 있던 밀양 출신의 박시춘과 여수 출신의 작사가 강사랑도 따라 나선다. 넷이 교동시장 안 군용 천막으로 지어진 ‘강산면옥’에 갔다. 냉면을 먹고 나와 박시춘과 강사랑은 ‘강산면옥’ 앞거리를 걸어가면서 지나가던 피란민 행렬을 보고 곡과 노랫말을 완성했다. 그날 오리엔트 레코드사에서 녹음까지 일사천리로 끝낸다. 노래는 발표되자마자 실향민들의 열렬한 호응에 힘입어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된다.
정두수 선생님의〈굳세어라 금순아〉에 대한 글을 보면,「부산으로 몰려든 피란민들은 영도다리 부근과 용두산, 그리고 보수동 일대는 따닥따닥 붙은 판자촌이 됐다. 광복동과 남포동 거리, 또 ‘영도다리’는 헤어진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이산가족과 실향민이 헤메고 있었다.
‘누가 누구를 찾는다. 그때 약속한 영도다리로 나오라, 기다리고 있겠다’라는 벽보가 즐비하게 나붙었다. ‘영도다리’는 헤어질 것을 대비해서 미리 약속한 곳. 그러니까 ‘영도다리’는 만남의 장소였다. 밤이 늦도록 사람들로 붐볐다.
〈굳세어라 금순아〉1절은 눈보라가 휘날리는 흥남부두 철수상황을 그렸다면, 2절은 부산 피란생활의 참담한 현실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함이다. 굳세게 살아다오 금순아! 이 노래는 실향민들의 주제가이고, 이산가족을 찾는 피란민의 노래로서 부산항에 울려 퍼졌다. 아니, 핏빛 노래 바람으로 뒤덮은 것이었다.
그 것이 바로 이 시대의 현실이기에 너도 나도 목청껏 불렀다. 당시 피란민들의 주제가였다.」
〈굳세어라 금순아〉는 비록 전쟁 중 대구에서 만들어졌지만 아무래도 그 주무대는 부산이고 영도다리이고 국제시장이었습니다. 1951년 1·4후퇴 당시 흥남부두에서 ‘금순이’를 잃고 부산까지 피란 내려와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로 표현되던 누이동생 ‘금순이’를 그리워하는 노래였습니다. 전쟁이 낳은 노래는 실향민과 이산가족의 상실감을 어루만지며 분단의 비극을 안고 사는 대다수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며, 또한 1962년 동명의 영화가 제작돼 상영됐고, 2005년 역경속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어린 과부 이야기인 TV 드라마가 잇달아 등장하면서 금순이는 국민여동생으로 인정됐습니다. 노래에 등장한 국제시장은 깡통시장, 양키시장, 도떼기시장 등으로 불렸으며, 당면국수, 씨앗호떡, 단팥죽, 빙수 같은 길거리 음식으로도 유명합니다.
〈굳세어라 금순아〉노래를 바탕으로 1962년 최학곤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도 맡았던 영화 ‘굳세어라 금순아’는 주인공역 최무룡과 여주인공 이방진(처음이자 마지막 출연 영화)이 남매로 출연했습니다. 그 밖에 이대엽, 김홍미, 허장강, 주란지(가수 남일해 부인), 황정순, 윤일봉 등이 조연으로 출연했습니다. 영화는 6.25 전쟁 때, 월남하면서 헤어진 남매의 슬픈 운명을 다룬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은 신파 멜로영화였습니다. 영화의 백미는 최무룡이 ‘영도다리’에서 여동생을 찾아 헤메는 장면에서 현인의 목소리로 “금순아~ 어데로 갔나~”라는 애잔한 노래가 울려 퍼질 때, 영화를 관람하고 있던 수 많은 여성 관객들은 눈시울을 적셨다고 합니다.
☞ 강사랑(姜史浪), 1911년 전라남도 여수에서 출생해 1985년 작고하셨음. 극작가 겸 작사가,
본명 강대은(姜大恩), 예명 강해인(姜海人), 1954년부터 강사랑, 1935년 태평레코드사에서〈승리의 거리〉로 데뷔. 언론인 출신으로 대중가요계와 레코드업계에서 알아주는 마당발로 사람 사귀기를 좋아해 친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1932년 삼천리악극단 막간 가수였던 이난영의 재능을 알아보고 오케레코드사 사장 이철에 추천하여서 1932년〈고적〉을 취입하게 했고, 1936년 말 불세출의 가요황제가 된 남인수(1918년〜1962년)을 시에론레코드사에서 같은 姜氏라는 이유로 보증인 역할을 해주어 오케레코드사에 소개시켰고, 남인수(南仁樹)라는 예명도 지어줬습니다. 강사랑, 우리들에게 익히 알려진 작사가는 아니지만 불멸의 가요황제 남인수와 예향 목포가 배출한〈목포의 눈물〉의 이난영의 가수로서의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 보았으며, 두 분은 최고 가수의 반열에 올랐으니, 강사랑의 안목은 신비에 가까울 정도가 아니었을까요?
-〈경상도 아가씨〉- 손로원 작사, 이재호 작곡, 박재홍(1951년 미도파레코드사)
1절. 사십계단 층층대에 앉아 우는 나그네 / 울지 말고 속 시원히 말 좀 하세요
피난살이 처량스러 동정하는 판자집에 / 경상도 아가씨가 애처러워 묻는구나
그래도 대답없이 슬피우는 이북 고향 / 언제 가려나
2절. 고향길이 틀 때까지 국제시장 거리에 / 담배장사 하더래도 살아보세요
정이 들면 부산항도 내가 살던 정든 산천 / 경상도 아가씨가 두 손목을 잡는구나
그래도 뼈에 맺힌 내 고장이 이북 고향/ 언제 가려나
3절. 영도다리 난간 위에 조각달이 뜨거든 / 안타까운 고향 얘기 들려주세요
복사꽃이 피던 날밤 옷소매를 부여잡던 / 경상도 아가씨가 서러워서 우는구나
그래도 잊지 못할 가고 싶은 이북 고향 / 언제 가려나
부산 피난시절을 대표했던 또 한 곡은 박재홍의〈경상도 아가씨〉입니다. 미도파레코드사에서 발매된 이 노래는 부산 중앙동을 중심으로 담배장수, 부두노동자 등으로 고단한 시대를 살았던 피난민들에게 따뜻하게 감싸는 경상도 아가씨의 다정한 모습을 담고 있어서 삭막한 피난살이에도 위안을 가질 수 있도록 한 노래입니다. 박재홍(1924년〜1989년 경기 시흥 출생)은 은행원으로 근무하다가 1947년 오케레코드사에서 주최한 신인가수 선발 콩쿨대회에서 입상해 그해 가수 옥두옥과 함께〈눈물의 오리정〉을 불러 데뷔했습니다. 〈울고넘는 박달재〉를 취입한 지 한달만에 6.25로 인해 부산으로 피난가서 미도파레코드사와 서라벌레코드사에서〈경상도 아가씨〉〈비 내리는 삼랑진〉등을 취입했고, 그후 도미도레코드사에서〈물방아 도는 내력〉1956년 이후 신신레코드사와 아세아레코드사 등에서〈향수〉〈휘파람 불며〉〈유정천리〉등의 히트곡을 발표했으며, 그는 구수하고 푸근한 서민적인 대중가요를 불러 국민가수가 됐습니다.
다음에는〈향기품은 군사우편〉〈이별의 부산정거장〉에 대한 글을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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