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 18. 남북 이산가족 찾기〈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2021.07.05.)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한운사 작사, 박춘석 작곡으로 1964년 곽순옥이 부른 곡입니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한운사 작사, 박춘석 작곡, 곽순옥(1964년 오아시스레코드사)
1절.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 얌전한 몸매에 빛나는 눈 / 고운 마음씨는 달덩이 같이 이 세상 끝까지 가겠노라고 / 나하고 강가에서 맹세를 하던 / 이 여인을 누가 모르시나요
2절.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 부드러운 정열에 화사한 입 / 한번 마음주면 변함이 없어
꿈따라 님따라 가겠노라고 / 내 품에 안기어서 맹세를 하던 / 이 여인을 누가 모르시나요
곽순옥은 1932년 평양에서 태어나 1954년 미8군 언더 그라운드 라이브클럽 전속가수로 데뷔해 김광수 악단과 함께 외국 팝송과 번안곡을 주로 불렀고, 가수 박단마의 그랜드쇼단에서 활동했으며, 1958년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린 ‘세계의 휴일’ 무대를 계기로 대중가요를 불렀습니다. 육감적인 몸매와 힘차고 세련된 고음, 그리고 섬세한 감정 처리에 능한 팔색조 같은 창법을 구사해 ‘정열의 가희’로 불린 인기가수였습니다. 그러나 1965년 홍콩으로 이민해 나이트클럽 ‘코리아가든’을 운영하다 1970년 미국에 정착해서 살고 있습니다. 1964년 ‘정열의 歌姬(가희) 곽순옥 힛트쏭 퍼레이드’ 이 노래를 타이틀 곡으로 음반을 발매했습니다. 그밖에〈슬픔도 세월이 가면〉〈비창〉등을 불렀습니다. 극작가 한운사가 실화를 바탕으로 대본을 만든 HLKA라디오 연속극 ‘남과 북’ 주제가〈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는 1965년 김기덕 감독의 영화 ‘남과 북’에 삽입됐고, 1967년 가수 문주란이〈남과 북〉으로 리바이벌 했으며, 1983년 패티김도 리바이벌하여 6월 30일부터 11월 14일까지 방영된 KBS1-TV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특별 생방송 프로그램에서 배경음악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이때 이 방송을 통해서 탄생한 톱가수와 노래가 있었으니 바로, 트롯 사대천왕으로 등극한 국민가수 설운도와 그의 첫 힛트곡〈잃어버린 30년〉인 것입니다. 필자는 강원도 철원에서 군복무를 할 때 이 방송을 보았습니다.
–〈잃어버린 30년〉– 박건호 작사, 남국인 작곡, 설운도(1983년 오아시스레코드사)
1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 그리웠던 삼십년 세월
의지할 곳 없는 이 몸 서러워하며 / 그 얼마나 울었던 가요
우리 형제 이제라도 다시 만나서 / 못다한 정 나누는데
어머님 아버님 그 어디에 계십니까 / 목메이게 불러 봅니다
2절. 내일일까 모레일까 기다린 것이 / 눈물 맺힌 삼십년 세월
고향 잃은 이 신세를 서러워 하며 / 그 얼마나 울었던 가요
우리 남매 이제라도 다시 만나서 / 못다한 정 나누는데
어머님 아버님 그 어디에 계십니까 / 목메이게 불러 봅니다
1983년 당시 곽순옥과 설운도의 노래와 10주년 기념때 이미자 선생님의 노래를 감상해 보세요.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잃어버린 30년〉은 남북 이산가족들의 영원한 망향의 주제가일 것입니다. 1983년 당시, 해방 이후 남북 분단과 6.25 전쟁으로 인해 부모형제와 헤어져 살던 남북의 이산가족의 수는 우리나라 인구의 약 25%인 1천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었습니다.
휴전 된지 30주년을 맞아 6.25 특집주간에 국내외에 흩어져 살고있는 이산가족을 찾아보자는 의도로 기획해 KBS라디오「아직도 내 가족을 못 찾았소」가 방송되자 청취자들의 호응이 매우 뜨거워서 TV방송을 통해서도 한 번 추진해 보고자 현재 ‘아침마당’의 전신인 ‘스튜디오 830’ 프로그램에 아홉가족을 초대했으나 단 한 가족도 상봉이 이루어지 않아서 이에 자극을 받은 최종건 담당PD가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따로 특집방송으로 편성하자는 기획안을 내놓았고, 1983년 6월 30일 밤 10시 15분에 진행된 특집방송은 당초 6.25 전쟁 33주년과 휴전 30주년 특별기획 2부작「지금도 이런 아픔이」의 제2부에 해당하는「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코너로 편성해 이산가족 150여 명을 공개홀에 모셔 놓고 한 분 한 분의 사연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각 지역방송국을 연결해 지방에 사시는 이산가족의 사연도 소개하는 이원방송 형태로 90분간 진행한 후 ‘12시 마감뉴스’를 내보내고 30분 더 방송해 0시 30분경 방송을 종료할 예정이었는데, 시청자들의 반응이 점차 뜨거워지면서 생방송을 진행한 지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스튜디오에 설치한 전화기 10대에서 불이 나기 시작했고, KBS중앙홀에 설치된 접수대에 상봉 신청이 쇄도했으며, 밤 11시쯤 이산가족들이 사전에 출연 약속도 없이 무작정 KBS 스튜디오로 몰려왔습니다. 말 그대로 전국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탤런트 나문희님의 대사가 생각나는군요. “6.25때 난리는 난리도 아녀, 에 효효효” KBS중앙홀은 이산가족을 찾으려고 2,000여 명이 북새통을 이루었습니다. 여의도 KBS와 스튜디오에 설치한 10대의 전화통, 전국 KBS 방송국, 그리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이산가족들은 실낱같은 희망을 갖고 무작정 여의도로 여의도로 몰려들었고, 지방에서도 지역방송국을 찾아서 몰려들었습니다. 또한
이산가족들에게 희망을 가질 수 있게해서 난리 중의 난리가 난 배경에는 진행을 맡은 유철종 박사의 반복된 멘트도 한 몫 단단히 했습니다. “이산가족 여러분! 빨리 KBS로 달려와 주시기 바랍니다. 통행금지가 해제되었기 때문에 언제든 나오실 수가 있어요.” 정보 소통이 빈약하던 시절 미디어의 위력이 크다는 것을 보여 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렇지만 1천만 이산가족들에게는 단비와 같았던 말이었습니다.(시청률 78%), 다음날 7월 1일 새벽 KBS 본관 광장에는 1만여 명의 이산가족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접수를 받지 않게 되자 스스로 벽보를 써서 본관 건물 벽과 기둥에 붙이기 시작했고(벽보를 제일 먼저 붙인 곽만영 누님 상봉 영상), 여의도 광장까지 벽보를 붙이는 것도 부족해 장맛비를 맞으면서도 사연 내용을 담은 입간판을 만들어 세워 두거나, 몸 앞뒤로 매달고 다니면서 애타게 가족을 찾았습니다. 더 기발한 것은 자신의 옷에도 가족들의 이름을 도배하고, 마네킹이나 허수아비를 세우 두거나, 연을 날리고, 현수막을 내걸고, 심지어 조악한 에드벌룬을 만들어 띄우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장사진을 이룬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에는 100,952건의 사연이 접수되어 3,536명의 사연이 소개되었고, 10,189명이 재회의 기쁨을 누렸던「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이산가족들에게는 재회의 기쁨과 쓰라린 슬픔의 각본 없는 드라마였고, 나도 이산가족이라는 심정으로 생방송을 지켜보던 온 국민들이 함께 웃고 함께 기쁨과 슬픔의 눈물을 흘렸던 국민 감동의 휴먼 드라마였습니다.
(허현철, 허현옥 남매 상봉 영상) 첫날부터 하루 14시간∼16시간씩 이틀밤을 꼬박 새워 진행한 공동 MC 유철종 박사(1932년생)과 이지연(1947년생) 아나운서는 대단한 철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김동건 아나운서와 신은경 아나운서, 손석기·황인우·박용호·원종배·유애리·정미홍·김상준·강성희·황인용·송지헌 아나운서가 순차적으로 진행을 했고, 탤런트 강부자도 한번 진행했습니다.
1983년 6월 30일부터 11월 14일까지 총 138일, 총 453시간 45분 동안 생방송으로 진행해 기네스북에 세계 최장기간 연속 생방송 기록을 갖고 있는 KBS「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또한 1985년「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으로 시작된 남북이산가족 상봉이 현실화되는데 일정부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리고 2015년 10월초엔 유네스코 기록유산 국제자문회의에서 관련 기록물을 심사 완료하여서 10월 9일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도 등재가 됐습니다.
특별한 방송에는 꼭 뒷이야기가 있기 마련입니다.「이산가족을 찾습니다.」특별 생방송 프로그램이 진행될 때, 1일차에는 가요무대와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려고 현인과 김연자가 애수띤 노래를 불렀는데, 사연들이 소개될 때마다 관객들은 모두 울고 있었습니다. 김연자는 2일차엔 16시간을 대기하면서 딱 1곡을 불렀다고 합니다. 계획할 때는 곽순옥에게〈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를 부르도록 할 예정이었으나 홍콩에 거주하고 있어서 패티김이 대신해 불러서 배경음악으로 사용했고, 소식을 접한 곽순옥은 일시 귀국해 1983년 7월 9일 방송에 직접 출연해 불렀습니다. 프로그램이 상시 편성으로 변경된 후에는 무명가수 설운도의〈잃어버린 30년〉이 생방송으로 전국에 전파를 타고 계속 방송돼 설운도는 그렇게 국민가수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설운도가 2019년 11월 12일 KBS1-TV ‘아침마당’에 나와서 한〈잃어버린 30년〉에 대한 설명, “가사하고 제목이 급조됐습니다. 처음에 곡을 받았을 때는〈아버지〉라는 곡이었다. 당시에는 좋은 수록곡이 묻히는 경우가 많았다. 멜로디가 좋아서 언젠가는 활용을 하자고 생각했다. ‘이산가족’ 방송 첫날, 매니저님이 ‘이거다’라고 하더라. ‘가사를 바꿔서 내면 히트한다’며 작사가 박건호에게 연락을 해서 하루만에 가사를 받고 제목도 바꿨다. 당시 6시간 녹음해서 기진맥진한 상태였는데, 방송국에서 대충 부른거라도 가져가겠다고 하더라. 마지막 자존심에 녹음을 해서 방송국으로 보냈고, 다음날 새벽에 히트가 됐습니다 . ”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만들어 최단 시간내에 히트곡으로 탄생한 노래가 설운도의〈잃어버린 30년〉인 것입니다. 설운도가 그때를 회상한 또다른 증언은 “하루 종일 공개홀에서 아나운서들과 함께 기다리다가 PD가 찾으면 즉시 무대로 올라가서 큐! 사인이 떨어지면 노래를 불렀다. 그래서 이산가족 상봉 방송기간 동안〈잃어버린 30년〉을 천 번 정도 불렀는데, 객석에 서 있으면서 이런저런 사연도 그 자리에서 보고 듣고 같이 울고 하다 보니, 어떻게 노래를 불렀는지 기억도 안나고 무엇에 홀린 듯한 느낌이었다.”고 했습니다. 당시 필자의 선임하사님도 신청해 고모님을 찾아서 축하 드렸습니다.
영화「남과 북」은 실화를 바탕으로 해서 극작가 한운사가 쓴 1962년 HLKA(현 KBS)라디오 연속극(20분 28부작)이 영화로 제작돼 1965년 신정때 서울 아카데미극장에서 개봉됐습니다. 김기덕 감독, 최무룡, 엄앵란, 신영균, 남궁원 등 출연. 줄거리는,「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때, 이해로 대위(최무룡)의 부대에 북한군 장일구 소좌(신영균)이 귀순해 온다. 그는 해방 직후에 남쪽으로 내려온 애인을 찾기 위해서 귀순 했는데, 그녀를 찾아주면 중요한 작전 정보를 알려주겠다는 조건을 내걸고 사진을 내놓았고, 그가 내민 사진을 본 이 대위는 그 여인이 바로 자신의 아내 고은아(엄앵란)이란 것을 알고 충격에 빠진다. 이 대위는 사단의 작전참모 권중령(남궁원)에게 알렸고, 사단으로 이송된 장일구는 제안 조건을 선행하라며 고집을 꺽지 않자 권중령은 제안을 수용하고 부하들을 시켜서 고은아를 부대로 데려오도록 한다. 마침내 장 소좌는 북한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그녀를 만난다. 그러나 이미 이 대위의 아내가 된 것을 안 그는 이 대위와 고은아에게 그들의 행복을 위해 그녀에 대한 사랑을 단념한다. 그러나 이 대위도 부상 당한 자신을 구해준 고은아에게 애인이 살아오면 그녀를 놓아주겠다고 약속을 했다며 오히려 자신이 물러나겠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의 아들이 본인의 아들임을 알게되지만 아버지임을 밝히지 못하고, 일선 근무를 자원한 이 대위가 북한군과 교전 중에 전사를 하자 그 사실을 알게 된 장일구 소좌도 슬퍼하다가 끝내 벼랑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자살을 한다.」 영화는 전국을 눈물 바다로 만들면서 흥행에도 성공을 했습니다. 영화 ‘남과 북’은 그해 제4회 대종상과 제1회 백마상 각본상(한운사), 제3회 청룡영화상 각본상과 시나리오상, 남우주연상(최무룡), 제1회 대일영화상 작품상, 또한 제12회 아시아영화제에서 비극상 등을 수상했고, 제26회 베니스영화제(이탈리아)와 제9회 샌프란시스코(미국)영화제에 출품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남과 북」은 1972년 13부작 KBS-TV 드라마, 1992년 MBC 2부작 TV 드라마와 소설, 1996년 KBS라디오 연속극과 뮤지컬, 1997년 KBS1라디오 연속극으로 방송되었습니다.
또한 1984년 김기 감독, 이해룡, 원미경, 유영국이 출연해 리메이크한 영화「남과 북」에서는 패티김 노래가, 1985년 임권택 감독, 김지미, 신성일 출연「길소뜸」에 삽입되기도 했습니다.
【 대한일보 65년 1월 6일(4면 기사) 】
[스크린] 중후한 극적효과/ 김기덕 감독 ‘남과 북’「민족 양단의 비극’이라는 말은 하나의 엄연한 현실이면서도 자칫 관념화하기 쉬운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다. 영화 ‘남과 북’은 그런 관념화하기 쉬운 경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주려는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우선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때는 한국동란이 한창 치열할 무렵, 북한군의 장일구 소좌(신영균)가 최전방 전선을 뚫고 귀순하여 온다. 그는 국군의 일선 중대장인 이해로 대위(최무룡)에게 붙잡히지만 공교롭게도 장소좌가 귀순하게 된 동기인 그의 애인 은아(엄앵란)가 곧 이대위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만일 남북이 통일된다면 여기저기서 허다하게 일어날 비극의 한 단면이라고 할까. 커다란 정치의 변동 때문에 개인의 생활이 파괴되어야 한다는 비극을 우리는 전쟁과 같은 커다란 변전 속에서 수없이 보아왔다. ‘남과 북’도 그처럼 짓밟혀 부서져 나간 하나의 상처를 제시해주고 있는 가편(佳篇)이며 김기덕 감독은 그중 장소좌와 은아가 상봉하는 장면에서 중후한 극적인 볼륨감을 살려낸 연출의 솜씨를 보여주고 있어 감동이 깊었다. 한운사 작의 KA 연속극을 영화화한 것.」
【 서울신문 65년 1월 7일(8면 기사) 】
[새영화] 절실한 소재- 애절한 사랑 한운사의 <남과 북>「1964년 하반기에 일기 시작한 이른바 남과 북 ‘무드’의 고향과 같은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그 절실한 이야기에 공감과 함께 그 무엇을 느끼게 한다. 참으로 좋은 소재이다. 사랑과 자유를 찾아 귀순해 온 괴뢰군 소좌 신영균, 그가 가슴에 품고 온 사진의 여인은 국군 대위 최무룡의 아내 엄앵란- 이 세 사람의 사연으로써 이미 절실도는 짐작이 간다. 여기에 정보참모 남궁원까지 끼었으니…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남과 북의 사랑이 그야말로 극적 상봉을 하는 대목인데 이 언저리에서 남과 북의 눈물을 흠뻑 쏟게 한다. 여섯 살짜리 꼬마에게 어서 자라서 억센 주먹으로 38선의 장벽을 때려 부수라는 신영균의 말은 참…, 실화와 전쟁을 좋아하는 한운사의 KBS 연속극이 원전으로 작자 자신이 각색-날림기가 있는 연출자의 솜씨를 생각하면 한운사가 만든 영화라고 하는 것이 낫겠다. 연기진은 고르게 무난. 곽순옥의 주제가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가 좋다.
감독 김기덕. 한마디로 통일을 염원하는 백성들에게 권하고 싶은 영화이다. (아카데미극장)
다음에는 대중가요의 양대산맥〈부산과 목포〉〈목포와 부산〉에 대한 글을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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