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NO 23. 가요산맥 작사가 정두수님 5주기를 맞이하여…(2021.08.09.)
가요산맥 작사가 삼포 정두수, 반야월과 대중가요 작사계의 양대산맥을 이루었던 거목입니다.
나흘후인 13일은 정두수 선생님 5주기, 위키백과에 나온 故 정두수 선생님에 대한 소개 글은,
「정두수는 1937년 4월 18일에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성평리에서 태어나 부산 동래고등학교와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61년 국민재건운동본부가 주최한 시 현상 공모에서 ‘공장’이라는 제목으로 당선했다. 1963년 가요〈덕수궁 돌담길〉로 대중가요 작사가로 데뷔했다. 이후 이미자의〈흑산도 아가씨〉남진의〈가슴 아프게〉나훈아의〈물레방아 도는데〉문주란의〈공항의 이별〉정훈희의〈그 사람 바보야〉은방울 자매의〈마포종점〉등 3,500곡을 작사했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창작에 대한 열의를 놓지 않았으며, 유작으로〈작심삼일〉과〈자존심〉〈장터국밥〉을 남겼다.
작곡가겸 가수 정음의 정두수 헌정곡인〈섬진강 19번도로〉라는 노랫말에 정두수 선생께서 등장하고 있으며, 현재 전국 13곳에 정두수선생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2015년 8월 14일에 갑작스럽게 쓰러진 그는 뇌경색판정을 받고 건강을 회복하는 듯 하였으나 폐렴등의 합병증으로 1년간 투병하다 2016년 8월 13일 향년 80세로 세상을 떠났다. 모신 곳은 하동군 금오영당에 영면해 계신다.」
필자는 2013년 3월 ‘엘레지여왕 이미자 팬클럽’의 동백꽃 회장님으로부터 경기도 광주읍 한 식당에서 정두수 선생님을 소개받았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엘레지여왕 이미자 선생님의〈흑산도 아가씨〉를 비롯해 주옥같은 노래가 정선생님의 노랫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터라 너무나 영광이었죠. 대화의 억양은 같았으나, 차이가 난 것은 엄청 유명하신 분과 평범한 국민 그리고 2바퀴 돈 띠동갑이었다는 것입니다. 그해 4월 18일 정선생님 생신을 맞아 장어가 잡수시고 싶다고 하셔서 남양주시 조안면 운길산역 앞 장어집에서 생신을 축하해 드렸습니다. 약주도 한잔 하시면서 노래가 부르고 싶다고 해 구리시 소재 독자의 단골 ‘락노래방’으로 모셔서 조졸한 축하연(?)도 했습니다.
2014년 7월 하순, 고향 하동에 가보고 싶다고 하셔서 필자의 중학교 동창이고 정선생님의 양아들인 가수 나일강과 함께 필자의 차를 타고 다녀 오기도 했습니다. 1박 2일 체류하시는 동안 당시 김진태 군의원과 김태진 문화원장,〈인생 계급장〉의 가수 장현주님이 선생님을 아주 극진히 모셔서 정선생님도 매우 흐뭇하게 고향 나들이를 마치고 광주시 초월면 자택으로 돌아오셨습니다. 하동을 3번 모시고 갔는데 그때마다 이 3분이 지역특산물인 재첩국과 재첩무침, 싱싱한 모듬회에 선생님이 즐겨하시던 약주까지 산해진미를 맛있게 먹었던 기억과 깨끗하게 잘 정돈된 배다리공원에 세워진〈물레방아 도는데〉〈시오리 솔밭길〉노래비, 정공채·정두수 형제의 박물관 등이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특히, 1972년 이미자 선생님이 취입한 정두수 작사, 박춘석 작곡〈고향의 꿈〉의 배경인 곳,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성평리 생가에서 목련나무를 봤습니다.
정선생님께서는 “저 나무가〈고향의 꿈〉에 나오는 그 목련나무야” 하셨습니다. “아! 저 나무가 그 목련나무.” 머리 속으로 노래를 불러봅니다. “1절. 지금쯤 고향 집에는 떠날 때 심어놓은 하얀 목련꽃이 / 달빛에 젖으면서 곱게 피겠네 / 몸은 떠나도 마음속에 사무치는 고향 / 아득한 고향 하늘에 구름이 흘러갈 때 / 내 마음은 고향 하늘에 여울져 흘러서 가네” “2절. 두 눈을 감고 있으면 아련히 반겨주던 하얀 고향초가 / 이슬에 젖으면서 홀로 지겠네 / 몸은 떠나도 마음속에 사무치는 고향 / 아득한 고향 하늘에 철새가 날아갈 때 / 내 마음은 고향 하늘에 여울져 흘러서 가네”
뉴스아이신문 애독자 여러분! 한번 불러 보시겠어요.
2012년 12월 3일 방송된 KBS1-TV ‘가요무대’ 1300회 가요산맥 작사가 정두수편에서 가수 김용임이〈고향의 꿈〉을 부드럽고 예쁘게 잘 불러주었습니다. 김동건 사회자의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다면?” 질문에 “작품은 곧 작가의 분신이지 않습니까? 다 애착이 갑니다마는 이미자씨가 부른〈가을초〉와〈고향의 꿈〉이 제 작품 중에 가장 애착이 갑니다.”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필자에게도 “참 좋은 노래야 한편의 가곡이지” 하며 뿌듯해 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방송 진행은, 1967년 남진〈가슴 아프게〉1972년 문주란〈공항의 이별〉1963년 진송남〈덕수궁 돌담길〉1968년 은방울자매〈마포종점〉(노래 금방울자매), 1973년 하춘화〈알고 계세요〉1972년〈하동포구 아가씨〉1968년 조애희와 1970년 정훈희의〈그 사람 바보야〉(노래 이혜리), 1971년 김상진〈도라지 고갯길〉1979년 들고양이들〈마음 약해서〉(노래 오로라), 1967년〈흑산도 아가씨〉(노래 김연자), 1967년 남진〈사랑의 공중전화〉1972년 이미자 선생님〈고향의 꿈〉(노래 김용임), 1967년 이미자 선생님〈그리움은 가슴마다〉(노래 정정아), 1968년 여운〈과거는 흘러갔다〉1971년 강정화〈안개낀 고속도로〉(노래 왕소연), 1968년 이미자 선생님〈황혼의 블루스〉〈삼백리 한려수도〉(노래 김연자), 1972년 나훈아〈물레방아 도는데〉(정두수 선생님과 전출연진) 순으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물레방아 도는데〉– 정두수 작사, 박춘석 작곡, 나훈아(1972년 지구레코드사)
1절. 돌담길 돌아서며 또 한번 보고 / 징검다리 건너갈 때 뒤돌아 보며
서울로 떠나간 사람 / 천리타향 멀리 가더니 / 새봄이 오기 전에 잊어 버렸나
고향의 물레방아 / 오늘도 돌아가는데
2절. 두 손을 마주잡고 아쉬워 하며 / 골목길을 돌아설 때 손을 흔들며
서울로 떠나간 사람 / 천리타향 멀리 가더니 / 가을이 다 가도록 소식도 없네
고향의 물레방아 / 오늘도 돌아가는데
2013년 편찬하신 ‘노래따라 삼천리’에 실린 내용은,「“일제강점기 때의 암울했던 우리 민족사군요. 그러나 지금 산업화 시대에는 망향의 노래로 받아 드릴 것입니다. 도시로 떠난 사람을 애틋하게 그리는 연가(戀歌)로서 말입니다.” 1971년〈물레방아 도는데〉의 노래를 연습하던 가수 나훈아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랬다. 이 노래는 그때 학병으로 끌려간 내 숙부님의 이야기다. 내 고향 경남 하동군 고전면 성평리는 나훈아가 부른〈물레방아 도는데〉의 배경이기도 하다. ‘당산(堂山) 밑’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돌담 투성이 마을 성평리는 내가 살던 무렵, 80가구 남짓한 마을이었다. 팽나무, 감나무, 대추나무, 뽕나무, 대밭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 마을 어귀를 지나면 내 노래의 모천(母川)인 주교천이 있다. 주교천은 금오산 산자락 밑을 길게 감돌며 배다리를 지나 섬진강에 합류한다. 징검다리는 바로 마을앞 주교천에 놓여 있었고 물레방아도 그랬다. 살대 밑을 지나는 신작로가 있었지만 배다리 장날이 아니면 차가 지나지를 않았다. 내 나이 일곱살 때 일제는 패전을 필사적으로 피하려 발악하고 있었다. 순식이 삼촌은 우리 집안의 희망이었다. 당시 일본 도쿄 유학생이던 삼촌은 강제로 학병으로 끌려가야 했다. 방학 때면 멋진 사각모를 쓰고 물레방아가 있는 주교천 징검다리를 건너 돌담마을에 나타나던 그 환한 모습을 뒤로 한 채. 나는 주교천에서 멱을 감다가도 여름방학 때 삼촌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면 옷도 입지 않은 벌거벗은 채로 달려가서 ‘삼촌! 우리 삼촌! 식이 삼촌! 하면서 매달렸다. 삼촌 또한 팔을 벌리고 안아서 함박웃음으로 어린 조카를 품어 주었다.(중략) 삼촌은 트럭에 실려 학병으로 끌려갔다. 머리에 학도병이라는 띠를 두른 채 씨익하고 억지로 웃어 보이던 마지막 모습은 어린 내가 보아도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당시 대학 졸업반이던 삼촌은 그때까지 미혼이었다. 할아버지는 사립문을 부여안고 아들만 기다렸다. “하마 오나, 하마 오나” 하시면서. 4년이나 지났건만 한 번 간 삼촌은 영영 올 줄 몰랐다.」 하동으로 첫 나들이를 가던 날 필자는 정선생님의 히트곡 50곡을 USB에 담아 차안에서 틀어 드렸습니다. “아! 안과장 다 내 노래네.” “네, 선생님 노래만 50곡 담았습니다.” 그러다 1972년 정두수 작사, 고봉산 작곡, 이미자 선생님의〈한송이 해당화〉가 나오자 “이건 무슨 곡이야?” “예에! 이 노래는 1972년 선생님께서 노랫말을 지으신〈한송이 해당화〉잖아요, 고봉산 작곡” “아! 그래, 하도 많이 만들어서 잘 몰랐네. 허허허 좋지?” 3500여 곡의 노랫말을 지으셨으니… 그 50곡 중 이미자 선생님 노래만 30곡이었으니 “안과장! 노래는 역시 이미자야.” 하동에 도착할 무렵 차량의 진행방향을 바꾸셨습니다. 도착해 보니 하동 북천면의 이병주 문학관이었습니다.
저녁 무렵 하동 맛집 식당에 도착하니 김진태 군의원이 모듬회로 저녁을 대접했고, 김태진 하동문화원장과 가수 장현주가 선생님을 맞이했으며, 다음날 아침은 재첩 선착장이 있는 김의원 큰어머니가 운영하시는 재첩전문식당에서 해장에 최고인 섬진강 재첩국과 간장게장으로 해결한 후 앞마당에서 정선생님이 “전에는 말이야, 이 식당에 유명가수들이 한번씩은 다 들렸었지 그때나 지금이나 이집 재첩국과 재첩무침은 최고였지. 하춘화! 아, 생기있고 발랄하고 항상 웃었지 재첩국도 얼마나 잘먹던지, 남진도 그렇고,” “이미자 선생님은 어디가 좋으셨어요?” “미자는 눈이 예뻤지, 사슴 눈망울같이 눈이 참 이뻤어.” 식당을 떠나 도라지 고갯길을 넘어서 성평리 생가에 도착해 목련 나무를 보고 듣고, 툇마루에 앉아 사진도 찍은 후 배다리공원으로 이동하던 중 고향마을 돌담과 주교천을 가르키며〈물레방아 도는데〉에 나오는 물레방아가 있던 자리를 알려주셨고, 배다리공원에서 노래비 2개를 둘러보고 인접해 있는 정두채·정두수 형제의 박물관을 짓고 있는 현장과 모교인 고전초등학교를 찾았습니다. “할아버지께서 형님은 공자를 닮으라고 ‘공채’(鄭孔采, 1934년~2008년), 나는 두보를 닮으라고 ‘두채’(鄭杜采)로 지어 주셨는데, 작사가로 데뷔하면서 ‘두수’로 바꿨지. 정홍원 국무총리도 여기 고전초등학교 출신이야.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님도 하동 정씨라 몇 번 뵈었는데 나한테 무척이나 잘해주셨지.”
2016년 8월 15일 하동 고향 성평리 ‘정두수 노래비 공원’에서 한국예총 하동군지회(회장 김태진) 주관으로 정두수 선생님의 영결식이 있었는데, 이날 부인 이영화 여사님을 비롯해 딸 다혜, 지혜, 선혜 등 유족과 하동군의회 의장, 고전면장, 지역 주민 등 5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필자와 양아들 가수 나일강, 가수 장현주도 참석했죠. 영결식 행사는 하동중창단 TOP의〈가슴 아프게〉를 부르면서 시작해, 양아들 나일강(강병철과 삼태기 원년멤버)의 약력소개, 강태진 회장의 조사, 이지은 사무국장의 헌시(獻詩)로 정선생님의 시(詩) ‘고향의 강, 섬진강아’ 낭송, 고전면장의 추도사, 색소폰 연주〈시오리 솔밭길〉가수 김수련이〈물레방아 도는데〉를 장현주는〈그리움은 가슴마다〉가 불렀으며, 사위의 고마움의 글 낭송을 끝으로 한려해상국립공원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진교면 금오영당, 두 살 형님이신 시인이자 소설가 정공채님이 계신 옆자리에 모셔졌습니다. 강태진 회장의 조사중 일부「선생님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원로작가이셨으며 3,500여 곡의 노랫말을 작사하여 국민들의 심금을 울리신 살아있는 전설이셨습니다. 또한 각종 시상식에서 400여 차례의 상을 받으셨으며, 전국 13곳에 노래비를 세워놓고 선생님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의 예술혼을 이어 받겠습니다.」
첫 번째 하동을 내려갔을 때, 정공채님 묘소에 엎드려 우시면서 “형님, 동생 두채가 왔습니다. 보고 싶군요 형님” 하시면서 약주를 올리셨고 “안과장 옆자리가 내 자리야, 그 옆은 와이프 자리야” 그 말씀 후 2년 지나 형님 곁에 영면하셨으니 세월이 참 무심하고 그때가 그립습니다.
정두수(정두채) 선생님의 막걸리 사랑 “서울에서 먹는 막걸리 맛은 비가 올 때 먹는 맛이 최고이고, 고향 하동에 와서 먹는 막걸리 맛은 섬진강 가에서 먹는 맛이 최고야”라고 하셨는데…
–〈그리움은 가슴마다〉– 정두수 작사, 박춘석 작곡, 이미자 선생님(1967년 지구레코드사)
1절. 애타도록 보고파도 찾을 길 없네 / 오늘도 그려보는 그리운 얼굴 / 그리움만 쌓이는데
밤하늘의 잔별같이 수많은 사연/ 꽃은 피고지고 세월이 가도/ 그리움은 가슴마다 사무쳐 우네
2절. 꿈에서도 헤멨지만 만날 길 없네/ 바람부는 신작로에 흩어진 낙엽/ 서러움만 쌓이는데
밤이슬에 젖어드는 서글픈 가슴/ 꽃이 다시피는 새봄이 와도/ 그리움은 가슴마다 메아리 치네
1967년 장일호 감독, 윤정희, 남진, 김지미, 이대엽, 허장강 주연의 영화 ‘그리움은 가슴마다’는 1959년 박시춘이 설립한 오향영화사에서 제작했던 ‘가는 봄 오는 봄’이 원작이며, 가수 남진이 다섯 번째로 출연한 영화입니다. 줄거리는「그들 모녀는 6.25때 헤어졌다. 시간이 흘러, 딸은 장성해 가수가 되었고, 어머니는 그 사이에 재혼을 하였다. 딸이 취입한 레코드가 날개 돋힌 듯이 팔려 나간다. 어머니는 그 딸의 노래를 듣지만 그 노래가 미처 자기 딸의 노래인 줄은 모른다. 딸이 라디오 공개방송에 출연하던 날, 어머니가 라디오를 듣고 있다가 딸과 아나운서와의 대화에서 그녀가 자신의 딸임을 알고 방송국으로 달려 간다. 그리하여 6.25때 헤어졌던 모녀가 감격적인 재회를 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삽입곡「애수일기」도 애창곡..
영화 ‘가는 봄 오는봄’ 1959년 권영순 감독, 문정숙, 최무룡, 이민, 이대엽, 허장강 출연, 주제가는〈살고 보세〉〈그리움은 가슴마다〉〈가는 봄 오는 봄〉(반야월/박시춘/백설희) 3곡이고, 영화 ‘그리움은 가슴마다’ 1967년 장일호 감독, 김지미, 남진, 윤정희, 이대엽, 허장강 등 출연, 주제가〈잘 살아 보자〉〈애수 일기〉〈그리움은 가슴마다〉(정두수/박춘석, 이미자 선생님)
필자는 2000년 1월 아버님께서 작고하셨는데, 영구차에 타는 순간 저도 모르게〈그리움은 가슴마다〉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장지에다 모시고 집에와 아버지 방에 들어가 또 불렀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울어라 열풍아〉를 부르셨죠. 그 때부터 이미자 선생님의 광팬이 됐습니다.
–〈울어라 열풍아〉– 한산도 작사, 백영호 작곡, 이미자 선생님(1965년 지구레코드사)
1절. 못 견디게 괴로워도 울지 못하고 / 가는 님을 웃음으로 보내는 마음
그 누구가 알아주나 기맥힌 내 사랑을 / 울어라 열풍아 밤이 새도록
2절. 님을 보낸 아쉬움에 흐느끼면서 / 하염없이 헤매 도는 서러운 밤길
내 가슴의 이 상처를 그 누가 달래주리 / 울어라 열풍아 밤이 새도록
☞ 정공채(1934년〜2008년)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시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1958년 부산일보 기자, 학원사·민족일보 기자, MBC PD,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장 역임 1959년 현대문학상, 2004년 한국문학상, 2005년 문예한국대상, 2005년 설송문학상 등 수상
2008년 하동 섬호정문학공원 시의 언덕에 ‘찬불이하동가(燦不二河東歌) 시비 건립, 호 성촌(星村), 시집은 1979년 ‘정공채시집 있습니까’ 1981년 ‘해점(海店)’ 1986년 ‘아리랑’ 1989년 ‘사람소리’ 1990년 ‘땅에 글을 쓰다’ 2004년 ‘새로운 우수’ 등, 역사소설 1983년 ‘초한지’ 수필 1989년 ‘너의 아침에서 나의 저녁까지’ 평론 1991년 ‘아, 전혜린’ 평전 2002년 ‘불꽃처럼 살다간 전혜린’ 시 전집 2008년 시집 6권의 수록시 ‘정공채 시 전집’ 등이 있습니다. 필자는 전혜린평전 ‘불꽃처럼 살다간 전혜린’(서울: 꿈과 희망)을 감명 깊게 읽었었던 적이 있습니다.
☞ 전혜린(田惠麟 1934년 1월 1일〜1965년 1월 10일) 시인 정공채님이 “불꽃처럼 사랑하며, 사랑하다 죽었다”고 일갈한, 1960년대 ‘한세기에 한 명 나올까 말까한 천재’라 불린 수필가이자 번역가, 전혜린으로 인해 독일 문학에 목말라하던 한국의 문학 지망생들이 비로소 헤르만 헤세, 하일리히 빌, 에리히 케스트너, 루이제 린저를 제대로 접하기 시작했고, 그리고 슈바빙이라는 낯선 단어를 알기 시작했습니다. 문학을 흠모하는 분들이 찾아 가고픈 뮌헨의 슈바빙…..
독일 뮌헨 프라우엔 성당(Frauenkirche)에는 우리나라 최초 카톨릭 사제인 김대건 신부상이 있고, 성당 바깥에 있는 작은 박물관에는 한국관이 따로 마련돼 있어 20세기 초 베네딕토 사제들이 한국에서 선교를 하면서 가져간 물건들이 가지런히 전시돼 있다. 또 당시 선교 활동을 하면서 한국인들의 삶을 담은 사진 자료들과 한글로 번역된 성경책도 전시돼 있다고 합니다.
「사실 뮌헨이라는 도시보다 먼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유명해진 곳은 슈바빙(Schwabing)이다. 뮌헨 대학교 부근 레오폴드 거리 일대를 일컫는 슈바빙은 우리의 대학로 정도 되는 젊음의 거리. 그런 슈바빙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처음 알려진 것은 1955년인가 1956년 무렵이었다. 독일 뮌헨 대학교에서 유학하던 한 한국인 여학생이 한국일보에 글 하나를 보내 왔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전쟁의 상흔에서 헤어나지도 못하던 사람들에게 독일이니 뮌헨이니 하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마는 당시 서울 명동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김승옥, 김수영, 이호철 그리고 박인환, 천상병, 이중섭 등의 문인과 화가들은 뮌헨발 짤막한 글에 정신을 뺏겼다. 그리고 그 글을 쓴 어린 여학생에게 주목했다. 여학생 전혜린(田惠麟)」
1934년 평안남도 순천 출생, 법률가 전봉덕(田鳳德)의 1남 7녀 중 장녀. 1953년 경기여자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법학과 입학, 1955년 독일로 유학 1959년 뮌헨대학 독문학과 졸업.
뮌헨대학 조교로 근무했고, 1959년 5월 귀국 경기여자고등학교·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이화여자대학교 강사, 1960년 법학도 김철수와 혼인, 1964년 성균관대학교 조교수, 1965년 32살 작고
천주교 서울대교구 용인공원묘원 김남조 시인이 쓴 서른 두살의 짧은 전혜린 묘비명「하늘이 주신 시간에 시간을 보태고/ 사랑에 사랑을 보탠 다음/ 눈감아 여기 잠든 이/ 전혜린 여사여」
독일 유학 때부터 시작된 전혜린의 번역작품들은 정확하고 분명한 문장력과 유려한 문체의 흐름으로 많은 독자들에게서 사랑을 받았습니다. 순수와 진실을 추구하고 정신적 자유를 갈망하던 전혜린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당대의 새로운 여성상으로 평가받는 한편, 완벽한 정신세계를 지향하는 지성적인 현대 여성의 심리로서 분석되는 등 관심의 대상으로 지속되고 있습니다.
번역 작품, 1956년 사강의「어떤 미소」1958년 슈나벨의「안네 프랑크–한 소녀의 걸어온 길」1959년 이미륵(李彌勒)의「압록강은 흐른다」, 1960년 케스트너의「화비안」1961년 린저의「생의 한 가운데」1964년 뵐의「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등 10여 편을 남겼습니다.
유작 수필집은, 1966년『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미래완료의 시간 속에』가 있고, 1976년『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대문출판사)에서 일기가 유작으로 출간되기도 했습니다.
다음에는 경상북도편으로 대중가요〈신라의 달밤〉〈안동역에서〉에 대한 글을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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