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 25. 이미자 선생님의〈아씨〉〈여로〉(2021.08.23.)
다가오는 29일(음력 7월 22일)은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 선생님의 만 80세 생신 날입니다.
방배동 천주교회 인근에 있는 이미자 선생님 자택에서 가족과 함께 조촐한 생신연을 하시겠죠.
TBC-TV ‘아씨’는 1970년 3월 2일부터 1971년 1월 9일까지 253회 방영된 일일연속극입니다. 극본 임희재(1919년∽1971년)과 이철향(1939년∽2006년). 최고시청률 TBC 71%, KBS 85%,
이미자 선생님의〈아씨〉노래가 흘러 나오면서 연속극이 시작되면 모두 숨소리를 죽였답니다.
‘아씨’가 방송되는 매일 저녁 9시 30분엔 TBC에서「시청자 여러분! 문단속이 잘되었나 확인한 후 시청해 주십시오.」라고 자막을 고지했다고 합니다. 집안의 수도꼭지가 잠겼는지도 확인.
–〈아씨〉– 임희재 작사, 백영호 작곡, 이미자 선생님(1970년 지구레코드사)
1절. 옛날에 이 길은 꽃가마 타고 / 말탄 님 따라서 시집가던 길
여기던 가 저기던 가 / 복사꽃 곱게 피어있던 길
한 세상 다하여 돌아가는 길 / 저무는 하늘가에 노을이 섧구나
2절. 옛날에 이 길은 새색시 적에 / 서방님 따라서 나들이 가던 길
어디선 가 저 만치서 / 뻐꾹새 구슬피 울어대던 길
한세상 다하여 돌아가는 길 / 저무는 하늘가에 노을이 섧구나
줄거리는「열아홉살이던 순덕(김희준)이 연지 찍고 곤지 찍고 말탄 님 따라 꽃가마 타고 이참봉댁으로 시집 오면서 연속극 ‘아씨’는 시작됩니다. 얌전한 양반집 규수였던 아씨는 체통을 내세우는 천석꾼 집안으로 시집 왔지만 남편 긍재(김세윤)는 아씨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신학문을 공부하러 동경 유학까지 다녀온 그에게는 이미 정을 나눈 신여성 은심(선우용녀)가 있었고, 둘 사이에 아들 봉구(노주현)까지 낳으니 아씨를 친정으로 쫒아낸다. 은심은 긍재가 유부남인 줄 모르고 사랑에 빠진 기막힌 현실 앞에 아씨와 동병상련의 정을 나누기도 합니다. 긍재는 딸을 낳고 다시 온 아씨에게 이혼을 요구하고, 시어머니(황정순)와 시누이의 괴롭힘도 아씨를 힘들게 한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새로 들어온 새 시어머니(사미자)도 까탈스럽긴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도 아씨를 안쓰럽게 여긴 시아버지의 보살핌은 아씨에게는 큰 힘이었고, 은심이 떠난 후 기생들과 어울려 가산을 탕진하고 유치장 신세까지 진 긍재는 만주로 상해로 떠돌다 객지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다. 그 사이 천석꾼 재산은 바닥이 났고, 남편 대신 의지하며 친아들처럼 키운 봉구도 사사건건 빗나가며 아씨의 속을 태운다. 긍재의 마지막과 쓰러진 이참봉댁을 끝까지 지킨 것은 아씨였다. 그 후 은심은 교육자로 사회에 헌신하며 살았고, 아씨를 평생 연모하던 수만(김동훈)은 비록 아씨와 부부의 연을 맺진 못했지만 검사가 되어 자신의 길을 걸어가며 아씨를 도와줍니다. 사람도 떠나고 재산도 바닥이 난 휑한 집에 남겨진 아씨 곁엔 몸종 간난이(여운계)가 있었는데, 아씨에겐 친구이자 형제였고 평생을 의지한 든든한 동반자였던 간난이도 시집을 가긴 했으나 삼일운동 때 남편이 만세를 부르다 죽은 후 아씨와 함께 서로 의지가 되어 살았습니다.」 ‘아씨’ 마지막 장면「여운계 “아씨! 아씨이! 아씨! 아이구 얼마나 찾아 다녔다고, 잠깐 다녀오신다고 해 놓구 여기에 와 계시우, 자 가십시다. 아니 이건 아씨께서 처녀시절에 쓰시던 노리개 아니우” 중략, 아씨는 보름달을 보면서 달 속에 비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말없이 쳐다봅니다. 배경음악은〈황성옛터〉“아씨! 그만 들어갑시다. 내일 새벽엔 또 묘소에 다녀와야 하잖아요. 이 노리개 파시겠수” “달아 주겠어?” “싫수, 아 이걸 달았다가 또 띠가는 사내가 있으면 어쩌게요?” “글쎄, 따라가지” “예에, 크히히” 두 사람이 부둥켜 앉으면서 “에휴, 이제는 아씨도 개화 되셨구려 세상이 변해서 히히히 히히히” 막이 내립니다.」
희생과 순종으로 점철된 인고의 여인상을 그대로 보여준 연속극 ‘아씨’는 마지막회 내레이션처럼 자신의 삶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묵묵히 살아간 “우리들의 어머니와 할머니”의 이야기였습니다. 출연한 탈렌트는 아씨 김희준과 남편 김창세(김세윤), 아들 노운영(노주현), 복혜숙, 주선태, 황정순, 사미자, 방수일, 지윤성, 김신재, 여운계, 김종결 등 초호화 배역이 열연했습니다. 못된 남편역의 김세윤은 길을 걸어가다 연세든 어르신들께 수차례 뒷통수를 맞았다고 했습니다. ‘아씨’ 253회가 끝나고 박종세의 사회로 연출자 고성원 PD와 출연했던 탤런트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특별 좌담회를 갖기도 했습니다. ‘아씨’는 TV 일일연속극 시대를 열었습니다.
영화 1971년 ‘아씨’. 최인현 감독, 김희준, 김창세(김세윤), 주선태, 황정순, 사미자, 여운계, 선우용녀, 송해, 김혜정 등. 원작 임희재 1971년 신정프로로 부산 ‘대영극장’ 상영 관객 3만명.
속편은 1971년 ‘서방님 따라서’ 진천 감독, 김희준, 최무룡, 여운계, 방성자, 지윤성, 김석훈, 노주현, 오유경, 윤인자, 이예성, 최재호, 임성포, 지방열, 장인환, 강루시아, 원작·각본 임희재.
27년 후 리메이크작으로 KBS2-TV 주말연속극 ‘아씨’가 1997년 10월 11일부터 1998년 3월 29일까지 50회를 끝으로 방영되었습니다. 주요 배역으로는 아씨역에 이응경, 긍재 선우재덕, 시어머니 김윤경, 시누이 신소미, 수만 최재성, 은심 이일화, 미순 장서희, 몸종 간난이 곽진영, 봉구역 안정훈, 수만 딸 정혜영, 긍재친구 의동 차광수, 이대로, 안해숙, 조양자 등이었습니다.
이때 1970년에 방영된 ‘아씨’ 원작에서 국민밉상 나쁜 남편 긍재역의 김세윤은 아씨를 아끼는 시아버지로 몸종 간난이역의 여운계는 아씨를 괴롭히는 치매걸리신 시할머니를 연기했습니다.
『한국방송사』에 실린 ‘아씨’에 대한 글.「당시 ‘아씨’가 TV 드라마 사상 굉장한 인기를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주인공 아씨가 자기희생을 일관해 온 전형적인 한국 여성의 운명에 대한 깊은 동정과 공감 때문이었으리라. ··· ‘아씨’가 방영되는 동안 드라마가 시작되기 전에 문단속을 잘하여 도둑을 조심하고 수도꼭지가 꼭 잠겼는지 다시 한번 점검한 뒤에 이 프로그램을 시청해달라는 내용의 이색 스포트가 방송된 것은 방송 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한편 아씨의 남편(김세윤 분)이 한창 외도를 하며 아씨를 냉대하는 장면들이 속출되고 있을 무렵 부인들이 떼를 지어 방송국으로 몰려와 남편을 작품에서 죽여 주든가 개심시켜 달라고 사뭇 협박조의 간청을 하던 일도 ‘아씨’를 화제 머리에 올릴 때는 빼놓을 수 없는 토막 얘기가 될 것이다. ‘아씨’는 방송가에서도 다양한 화젯거리를 낳았다. 당시 출연한 연인원은 무려 1,200명이 넘었으며, TBC 소속 탤런트 전원이 적어도 한 번 이상은 출연하는 기록도 남겼다. 방영 도중 작가가 교체되기도 했는데 애초 집필자였던 임희재가 건강이 악화돼 190회쯤에 이르러 이철향이 대필했다. 임희재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마지막 신만은 반드시 자신이 써야 한다고 주장할 만큼 강한 애착과 집념을 보였고 결국 하룻밤을 꼬박 새워 원고를 완성했다. 인기가 어찌나 대단했던지 ‘아씨’가 방송되는 중임에도 불구하고 각 영화사들이 경쟁적으로 영화화를 시도해 드라마가 끝나기도 전에 이미 두 편의 영화가 상영되었으며 주제가도 히트를 쳐 많은 사람들의 애창곡이 되었다.」 첫회부터 주제가〈아씨〉는 이미자 선생님이 불렀습니다.
1970년 9월 13일 ‘선데이서울’,「“야! 저기 아씨 간다.” 김희준이 거리를 거닐면 어린아이들까지도 아씨를 알아본다. 탤런트로서의 김희준이란 이름은 몰라도 누구나 아씨는 안다. 한국적인 고즈넉한 이미지 때문이다. 한국적이라는 것. 한국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향수 어린 그리움을 갖게 한다. 고요 속의 미덕, 고전적 한국의 여성미는 더욱 외국인들에게 어필한다. 그 실례가 있다. “아씨를 보시는 시간입니다.” 서울의 어느 외국 대사관 직원들 사이에 간혹 이런 말이 오고 가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대사관 고위층이 그 시간을 보기 때문에 급한 용무가 아니면 되도록 그 사람과의 그 시간 업무를 사양하자는, 이것도 한국적인 미덕일까..」
KBS-TV 일일연속극 ‘여로’는 1972년 4월 3일부터 1972년 12월 29일까지 매일 저녁 7시 30분에 방송되어 211회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극본 이남섭, 최고시청률 80% 기록.
‘여로’가 방송되는 시간대에는 거리마다 한산했고, 택시기사님들도 영업을 멈추고 인근 전파상 앞으로, 시장 상인들과 손님들은 근처 다방으로, 극장에서 영화를 보던 관객들은 휴게실로 가서 ‘여로’를 보고 돌아오자 아예 영화를 20분간 중단하는 등 그야말로 전국민을 ‘여로’ 열풍으로 몰아갔습니다. 또한 시중에는 ‘여로’를 보느라 어느 집은 도둑을 맞았고, 밥을 태운 집도 많았다는 에피소드가 넘쳐 났습니다. 특히 고생 끝에 부산으로 내려와 감골식당 국밥집으로 성공한 분이가 남편 영구를 만날 날이 가까워오자 국민들 사이에 “오늘 만난다.” “내일 만난다” 하는 논쟁이 심심찮게 벌어졌고, 대학교에서 강의를 듣던 학생들도 저녁 7시가 되면 강의실이 텅텅 비었고, 국무회의 석상에서도 한담 시간에 ‘여로’의 줄거리가 자주 화제가 되었다는 소문이 들릴 정도였습니다. 당초 90회 종영 예정을 211회까지 연장하여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원래 제목은 여자의 길이란 뜻의 ‘여로(女路)’였는데 연장되면서 ‘여로(旅路)’로 변경되었습니다.
필자가 5학년때, 교문동 딸기원에서 만화가게 주인아저씨가 구리극장 포스터를 10장 붙이면 ‘여로’를 볼 수 있는 TV표를 줘서 동네 담벼락마다 풀로 붙이고 다녔던 추억이 남아있습니다.
당시에 나온 새로운 이름들인 ‘여로과자’ ‘여로빵’ ‘여로다방’ ‘감골식당’ 등 기억이 나시나요?
–〈여로〉– 이남섭 작사, 백영호 작곡, 이미자 선생님(1972년 지구레코드사)
1절. 그 옛날 오색댕기 바람에 나부낄 때 / 봄나비 나래 위에 꿈을 실어 보았는데
날으는 낙엽따라 어디론가 가버렸네 / 무심한 강물 위에 잔주름 여울지고
아쉬움에 돌아보는 여자의 길
2절. 언젠가 오랜 옛날 볼우물 예뻤을 때 / 뛰는 가슴 사랑으로 부푼적도 있었는데
흐르는 세월 따라 어디론가 사라졌네 / 무심한 강 바람에 흰머리 나부끼고
아쉬움에 돌아보는 여자의 길
‘여로’의 줄거리는「홀어머니와 동생들을 데리고 끼니조차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집안의 처녀 분이(태현실)가 최주사집 도령(장욱제)와 혼인을 하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신랑 영구는 지능이 모자라고 신체가 불편했던 아들로 기껏해야 “아부지야 제기차기 하자”는 말을 할 정도에 불과했고, 나이 스물이 되어서도 글을 한 줄도 읽을 줄 몰랐습니다. 아씨는 집안의 가세가 기울어 집안을 도우려고 술집으로 팔려간 첫날에 달중(김무영)을 만나 달중의 중매로 시골부자인 최주사집(정민) 며느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분이는 남편을 눈물로 감싸고 시부모님과 시누이를 정성껏 모시며 하녀같은 생활까지 하면서 손이 귀한 집안에 아들까지 낳았지만, 시집간 날부터 시작된 극성 맞은 시어머니(박주아)와 시누이(권미혜) 사이에서 갖은 고초를 당했고, 마침내 시어머니 윤씨와 시누이는 재산 상속 욕심으로 달중을 끌여들여 분이를 내쫒았습니다. 시누이 남편이 집문서를 갖고 도망가 가세가 기운 최주사는 부산에서 고생을 하고 분이는 그곳에서 국밥집을 차려 어려운 아이들을 도우면서 살아가다가 어느날 남루한 차림으로 구두닦이를 하던 남편 영구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못된 계모와 시누이도 뉘우치고 분이가 모아둔 재산으로 옛 집을 되찾아 행복하게 살아 간다.」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 일일연속극이었습니다.
악독한 시어머니 역을 맡은 박주아는 당시 30살 미혼이었는데, 노인역을 할만한 연세의 탤런트들이 없어서 노인 분장을 해 출연했습니다. 박주아의 회고, “밖에 나가기만 하면 손가락질 받고 욕먹었고 심할 땐 폭력을 행사하려는 사람들이 있어서 방영때나 종영후에도 한동안은 시장이나 공중목욕탕을 가지 못했다.”고 했고, 더 얄미운 시누이 영숙으로 출연한 권미혜도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일본 순사역의 정래협과 분이를 짝사랑하며 온갖 권모술수의 흉계를 꾸몄던 동네 건달인 김달중역의 김무영, 그리고 신구 등도 무척이나 욕을 먹었을 것입니다.
극중 분이 역할의 태현실님 회고,「촬영을 마치고 박주아씨와 시장을 보러 다니면 저는 착한 며느리로 상인들이 한 푼이라도 깎아 주곤 했는데, 박주아씨는 착한 며느리를 못살게 구는 시어머니라며 물건 값을 깎아주기는 커녕 욕도하고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죠. 한번은 집을 나갔던 며느리가 여로의 착한 며느리 ‘분이’에 감동해 다시 집으로 돌아 왔다며 한 할머니가 몇 번이나 감사를 표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습니다. 이어 나온 박주아의 회고,「태현실씨와 함께 자동차 사고를 당했어요. 병원에 갔는데 의사선생님이 “악독한 시어머니역을 해서 벌 받은 것”이라고 말해 속상했는데, 또한 가벼운 상처를 입은 태현실에게는 사람들이 몰려와 위로의 말을 전하면서도 꽤 큰 부상을 입은 저는 거들떠 보지도 않더군요. 한번은 ‘여로’ 녹화날에 공수부대원 7명이 들이닥쳐 “시어머니, 달중이, 시누이 나와!” 하면서 고함을 지르기도 했습니다.」 당시 ‘여로’를 본 국민들은 그때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씨’ ‘여로’ 두 드라마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고, 해방을 맞이한 후 전쟁을 거쳐 1970년까지의 기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과 전통적 부덕(婦德)을 강조하며 부침이 심했던 시댁을 지켜낸 여인을 주인공으로 했다는 점, 주제가를 ‘엘레지여왕’ 이미자 선생님께서 불렀다는 점, 두 주제가를 지은 작곡가가 백영호라는 점, 그리고 당시 연속극 제작용 테이프 가격이 고가이다 보니 방송 후 재사용되어 영상물이 모두 없어졌고 일부만 남아 있어서 다시는 볼 수가 없다는 것이 공통점입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그때 시청자들은 ‘아씨’와 ‘여로’를 헛갈려 기억하는 것이 다른 부분입니다.
‘아씨’는 전국 네트워크를 못갖춘 민영방송 TBC-TV에서 방영돼 서울과 부산에서만 시청할 수 있었지마, ‘여로’는 전국 네트워크를 갖춘 공영방송 KBS-TV로 방영돼 전국에서 시청이 가능했습니다. ‘아씨’ 의 여주인공이 수동적이고 운명 순응적인 여성이라면, ‘여로’의 분이는 자신의 모진 운명을 극복하는 여성상을 그려 당시 많은 여성들을 울리고, 기쁘게 했습니다. ‘여로’는 스튜디오 촬영인 관행을 깨고, 송추에서 야외촬영을 감행한 방송사적 의미도 있습니다.
다음에는 8월 29일 경술 국치일에 즈음해〈황성옛터〉에 대한 글을 올리겠습니다.
*상기 컬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