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 26. 민족의 울분을 담은 가요〈황성옛터〉(2021.08.30.)
어제는 경술국치일(한일합병), 1910년 8월 29일은 우리 대한 민족의 치욕적인 날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6.25전쟁 등 황폐했던 시기를 잘 극복해 왔듯이 국민들에게는 희망찬 내일을, 후
손에는 부국강병 선진 대한민국을 물려주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파이팅!!! 내일도 화이팅!!!
원제〈황성의 적〉인〈황성 옛터〉는 왕평 작사, 전수린 작곡으로 1928년부터 나운규 작 ‘아리랑’의 주연배우 신일선이 불렀고, 이후 1931년 봄 이애리수가 취입해 1932년 빅타레코드사를 통해 발매한 노래입니다. 그리고 1933년 가수 이경설이 제목을〈고성의 밤〉으로 해 불렀으나 음반 발매와 동시에 치안 방해라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고 음반은 회수를 당했습니다. 1959년 가요 황제 남인수가 아세아 레코드사에서 취입해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미자 선생님도 기념 공연 때마다 “저는 공연 때 이〈황성옛터〉를 비롯해서 몇곡의 의미있는 노래를 1절만이라도 꼭 부릅니다.”고 하셨고, 필자도 10여 차례 이미자 선생님의 공연을 관람했는데 그때마다 전통 가요 몇 곡씩을 꼭 부르셨습니다. 일제 강점기 나라 잃은 설움에 제 2의 애국가로 불려질 정도로 3천만 국민들의 애창곡이었던 역사적 국민 가요의 으뜸가는 곡으로 지금도 애창 되고 있는 노래입니다.
1961년 조정호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김진규, 김지미, 신성일, 문정숙, 김승호, 최남현, 황정순, 김희갑, 김신재, 허장강 등이 출연한 동명 영화가 제작 되어 개봉됐으며, 10 인치 영화 주제가 모음 ‘황성 옛터’ 앨범이 신세기 레코드사에서 발매되었는데, 노래는 가수 김용만이 불렀습니다.
참여 시인 고은(본명 고은태, 1933년 군산 출생)이 1986년『세계의 문학』에 연재를 시작으로 2010년 4월 9일 총 30권으로 완간된 연작 시집 ‘만인보 萬人譜’. ‘만인의 삶에 대한 기록’이란 뜻으로 세계 최초로 사람만 노래한 연작 시집입니다. 총 작품 수 4,001편에 등장인물은 5,600 여 명에 이르며, 다양한 시대의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시로 쓴 인물 백과사전’이라는 평가 받고 있습니다. 그의 만인보에 실린〈황성 옛터〉에 대한 전문은「1932년 서울 단성사 무대 이애리수가 섰다. 처연한 투명한 가을 처녀의 목소리〈황성 옛터〉가 퍼졌다. 눈물은 가슴에 차고 등 뒤에서 비가 퍼부었다. 한 노래를 세번 불러야 했다. 청중은 울고 불고 울부짖었다. 고향 개성, 망한 고려 만월대를 노래한 것. 일본인 코가 마사오의〈술은 눈물이냐 한숨이냐〉가 이 노래의 표절이라는 소문이 났다. 〈황성 옛터〉를 학생에게 가르친 대구의 한 교사는 파면 당했다. 작곡자 전수린과 코가는 서울 소공동에서 어린 시절 소꿉동무였다. 늘 이애리수의 뒤에 형사가 따라다녔다. 늘 전수린의 집에 형사가 찾아왔다. 노래 하나에도 자유는 불가능 했다.」
–〈황성(荒城)의 적(跡)〉(황성옛터) – 왕평 작사, 전수린 작곡, 이애리수(1932년)
1절. 황성옛터에 밤이되니 월색만 고요해 /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못 이뤄 / 구슬픈 버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2절. 성은 허물어져 빈 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나
아아 가엾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 / 덧없난 꿈의 거리를 헤매여 있노라
3절. 나는 가리라 끝이 없이 이 발길 닿는 곳 /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정처가 없이도
아아 한없는 이 심사를 가슴속 깊이 품고 /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있거라
가요산맥 작사가 정두수 선생님의 2013년 ‘노래따라 삼천리’에서 발췌하면은,「가수이자 조선 연극좌 배우 이애리수(본명 이음전) 그녀가〈황성옛터〉를 취입했을 때 나이는 22살, 하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로도 불리는 이 노래는 1927년에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 탄생 무대는 개성. 1927년 개성 만월대의 여름밤은 점점 깊어가고 있었다. 어스럼한 달빛, 옛 영화를 찾을 길 없는 성터, 이끼 낀 주춧돌, 흩어져 있는 기왓장, 우거진 방초 사이에서 울어대는 풀벌레들. 주인 잃은 이 황성(荒城)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애간장을 타게 했다. 그때 조선연극좌는 전국 순회공연을 다니며 개성에 있었다. 연일 계속되는 장마로 발이 묶이고, 흥행도 엉망이었다. 가뜩이나 여관방에서 창살없는 감옥같은 생활에 우울해 있던 악극단장인 극작가 왕평과 바이올리리스트 전수린은 황성을 거닐면서 애수를 달래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고려의 패망, 조선의 몰락, 나라마저 빼앗긴 망국의 한에 눈시울을 적셔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람이 불던 밤이었다. 달빛이 여관방 문살 틈으로 스며 들었다. 그것은 한편의 서정시였다. 전수린의 뇌리에 만월대 황성의 그 밤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고려 패망을 지켜봤을 만월대의 달, 바로그 한(恨)이 서린 달빛이었다. 그의 손에는 바이올린이 들려 있었다. 바이올린의 애절한 음은 여관창 문살을 딛고 개성의 밤을, 아니 조선의 밤을 울리고 있었다. 한편 왕평은 고려 충신 포은 정몽주를 떠올리면서 시상을 가다듬었다. 망국의 한, 한민족의 비운을 종이 쪽지에 적어 나갔다.
1928년 이애리수가 서울 종로 단성사 무대에서 처음으로〈황성의 적〉을 부른다. 그녀가 애조 띤 이 노래를 부를 때면 제 설움에 겨워 눈물을 흘리기 일쑤였고, 관객들도 발을 동동 구르며 함께 울어 공연장은 울음 바다가 됐다.」 극장 안이 울음 바다가 되자 임석한 경관이 노래를 금지 시켰고, 작사자 왕평과 작곡자 전수린은 종로경찰서에 불려가 취조를 받고 유치장 에 감금되었다 풀려났습니다. 당시 시대 상황과 맞물려 국민들에게 진한 감동을 주자 ‘조선민족의 자각을 선동할 우려가 있다.’라는 사유로 우리나라 최초의 금지 가요가 되었다고 합니다.
1932년 빅타레코드사에서〈황성의 적〉을 발매 5만 장(현재 500만장)의 판매고를 올렸습니다. 가요황제 남인수(1918년∼1962년)는 이 노래를 너무나 사랑하여 1959년〈황성 옛터〉를 취입했고, 각종 무대에서도 이 노래를 항상 불렀습니다. 또한 1962년 6월 26일 병상에서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불멸의 여가수 이난영에게 “난영아! 그 노래를 불러줘”하자 이난영은 눈물을흘리며〈황성옛터〉를 불렀으며 장세정, 신카나리아, 황금심, 백설희, 김정구, 고복수, 백년설, 현인, 황해 등 동료들과 함께 조용히 노래를 들으면서 눈을 감는 그의 임종을 지켜봤습니다.
〈황성의 적〉은 우리나라 사람이 작사하고 작곡한 최초의 대중가요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황성 옛터〉노래비는 1989년 9월 26일 가사를 지은 왕평의 고향인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조양공원에 세워졌고, 노래비 뒷면엔「민족의 가슴에 뜨거운 혼을 심은 우리들의 노래」글귀가 새겨져 있으며, 또한 2009년 10월 10일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송강리 송강 솔밭에도 있습니다.
이애리수(李愛利秀, 2010년〜2009년) 본명은 이음전(李音全), 황해도 개성이 고향. 이애리수는 외삼촌인 전경희의 영향으로 어린 9살 때부터 극단 취성좌의 막간 가수로 활동했습니다. 1930년 1월 1일 조선일보 기사,「조선의 가수이자 배우. 가수이자 영화배우 이애리수 본명이 이음전(李音普)으로, 1911년 개성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외삼촌은 취성좌, 조선연극사 등에서 활약했던 희극 배우 전경희였고, 그녀의 외할머니는 개성에서 숙박업을 하면서 극단의 편의를 보아주던 ‘전씨부인’이었다. 또한 임성구 혁신단의 창단 단원이자 신극좌를 이끌며 한국 신파 연극계를 선도했던 김도산이 외가 쪽으로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9살 때(1919년) 김도산의 무대에서 데뷔했다. 하지만 그녀가 무대 연기에 전념한 것은 아니다. 그녀는 무대에 데뷔한 이후에, 호수돈녀 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이어갔다.」 그녀는 1929년 취성좌를 나와 조선연극사와 1931년 극단 대장안 참여, 1932년 태양극장에서 연기 활동을 한 후 혼인과 함께 은퇴했습니다.
정두수 선생님의 ‘노래 따라 삼천리’에서 발췌한 이애리수가 연예계를 은퇴한 사유.「당시 부잣집 외아들에다 큰 키에, 꽃미남 청년이었던 두 살 연하 연희전문 학생 배동필씨를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그녀의 운명이 송두리째 바뀐다. 배씨의 아버지 배상호씨가 “양반 가문 에 배우나 가수 출신 며느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완강하게 반대하면서 시련을 겪게 된다. 아버지는 둘을 떼어 놓으려고 아들을 유학보내 만나지 못하게 하자 결국 연인은 자살을 기도한다. 그 때서야 아버지는 외아들을 잃을까 봐 혼인 승낙을 하지만 세가지 조건을 내건다. “첫째, 혼인식은 못 올린다. 둘째 며느리가 배우, 가수였다는 사실은 일정 발설해서는 안되고 훗날 자식들에게도 알려선 안된다. 셋째, 배우, 가수를 그만 두고 며느리로서 배씨 가문에 뼈를묻어라.”는 조건이었다. 이후 2남 7녀 9남매를 키워낸 이애리수는 평생 동안 시아버지와의 약속을 지켰다.」 약 80 여 년만에 이애리수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2008년 10월 21일 우리나라 최초의 연예 전문기자인 정홍택님이 끈질긴 노력 끝에 그 분과 아들, 딸을 만났다고 합니다.
경기도 안산에서 아들과 살고 있는데, 고령이라 일산에 살고 있는 따님이 가까이서 모시고 싶다고 해 일산 백송마을의 요양시설에서 지내시다 2009년 3월 31일 99세에 작고하셨습니다.
작곡가 전수린(全壽麟 1907년~1984년)의 본명은 전수남(全壽南) 황해도 개성에서 태어나서 송도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장봉손(張奉孫)으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웠고 개성 호수돈여학교(好壽敦女學校) 니콜스(Nicols) 교장선생과 서울로 상경하여 당시 홍난파가 경영하던 음악학원 ‘연악회(硏樂會)에서 정식으로 바이올린과 악전(樂典)을 배우고 21세 때 바이올린을 특기로 무용가 조택원(趙澤元)이 소개해 순회공연 극단 동방예술단(東方藝術團)에서 배경음악을 연주하는 악사 겸 작곡가로 활동하였습니다. 1932년〈황성의 적〉이 큰 히트를 기록하며 작곡 실력을 인정 받았습니다. 대표적인 전통가요로는, 1932년 이애리수〈에라 좋구나〉와 1937년 황금심〈알뜰한 당신〉1938년 박단마〈나는 열일곱 살〉1939년 황금심〈외로운 가로등〉1963년 극작가 이서구(예명 이고범) 작사의 라디오 연속극·영화 주제가〈강화 도령〉등이 있고, 1932년 이애리수와 왕평 작사의 본인이 작곡한〈님 그리워 타는 가슴〉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작사가인 왕평(王平, 1908년~1940년) 본명 이응호는 경상북도 청송군에서 태어나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4년 11월 27일 서울 종로 와룡동 변사 김덕경의 집에서 현철이 설립한 ‘조선배우학교’ 제1기생으로 박제행, 복혜숙 등과 함께 연기를 공부하여 극작가, 배우, 작사가로 일제강점기의 설움을 달래며 살았는데, 식민지 청년의 울분을 토해내는〈황성의 적〉 노랫말을 지어 민족혼을 일깨운 그는 일본경찰로부터 집요한 사찰과 괴롭힘을 받으면서 요주의 인물로 지냈습니다. 1932년 배우 겸 가수인 이경설과 함께 ‘포리돌 레코드사 조선 지점 초대 문예부장을 맡았고, 1933년 악극 ‘항구의 일야’ 대본을 만들어 배우 전옥(1911년∼1969년)과함께 주연을 맡아 출연했습니다. 1936년 영화감독 이규환과 ‘성봉영화원’을 발족해 그의 영화‘나그네’에 복룡역을 맞으면서 영화계에서 주목을 받는 배우로 떠 올랐으나 영화는 딱 2편만출연했습니다. 1920년대 말 극단 취성좌 악극단장과 1930년 조선연극사에서 극작을 담당했습니다. 1940년 평안북도 강계에서 가수 신카나리아(1912년∼2006년)와 연극 ‘돌아온 아버지’를 공연하던 중 무대에서 쓰러져 영영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일제의 사찰 대상이었던 왕평은고향 땅에 묻히지 못하고 어린시절을 보냈던 송강리 수정사 앞 산에 묻혔습니다. 그의 묘지도고려의 황성옛터와 같이 손길이 닿지 않은 봉분은 쓸쓸하고도 피폐한 모습으로 있고, ‘왕평이응호지묘’라는 작은 돌비만이 그의 묘소임을 알려줄 뿐입니다. 그러나 경북 영천시에서는2008년 9월 6일 왕평 탄생 100주년을 맞아 고향 교촌동 일원의 도로를 ‘왕평길’로 제정했고,‘왕평야외공연장’도 건립했으며, 1996년부터 신인가수의 산실인 ‘왕평가요제’도 개최해 왕평을기리고 있습니다. 작사가 왕평이 노랫말을 지은 대표적인 전통가요는 1932년〈황성옛터〉〈님 그리워 타는 가슴〉1933년〈항구의 일야〉1936년〈조선팔경가=대한팔경〉등이 있습니다.
다음에는 2012년 9월 9일 소천 하신 조미미 누님의 주옥 같은 노래에 대한 글을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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