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 28. 전라북도 대중가요〈고향역〉〈매화같은 여자〉(2021.09.13.)
다가오는 9월 18일부터 22일까지는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인「한가위 추석(秋夕)」연휴입니다. 추석하면 생각나는 단어가 고향, 귀성, 보름달 등이 있지만 전통가요는〈고향역〉이 대표적으로 떠오를 것입니다. 나훈아가 부른 또 다른 명절 노래는 1973년 발표한〈귀향〉(백영호 작사·작곡)이 있는데, 1972년 이미자 선생님이 발표하신〈서울간 님〉의 곡에 노랫말을 바꾼 노래이며, 그리고 1972년 이미자 선생님의〈자주댕기〉(정두수/정민섭)도 명절에 듣던 노래입니다.
나훈아가 1970년 취입한 〈차창에 어린 모습〉이 정부의 방송 불가 판정으로 방송도 한번 못 타보고 묻힌 것을 가사와 멜로디, 제목을 고쳐서 1972년 2월〈고향역〉을 발표했던 것입니다.
-〈차창에 어린 모습〉- 임종수 작사, 임종수 작곡, 나훈아(1970년)
1절. 떠돌다 머무는 낮선 타향에 / 단 한번 정을 준 그 사람을 홀로 두고서
혼자만 몸을 실은 열차는 외로워 / 눈 감아도 떠오르는 차창에 어린 모습
2절. 우연한 인연에 만난 그 사람 / 이별이 있을 줄 알면서도 잊지 못하고
기적에 작별 인사 열차는 무정해 / 멀리가도 떠오르는 차창에 어린 모습
1972년 나훈아가 히트 시켜 무명이던 작곡가 임종수를 알리게된 노래로 지금까지 애창 되고 있는〈고향역〉은 작곡가 임종수가 어린 시절에 실제로 체험한 이야기로 2016년 9월 6일 방송된 부산 KBS-TV 조항조와 한태경이 진행하는 ‘가요1번지’에서 임종수가 작곡노트를 보면서 〈고향역〉과 원곡인〈차창에 어린 모습〉의 이야기를 밝혔습니다.
“중학생 시절 걸어서 학교까지 갈려면 4시간을 걸어야 돼, 그러면은 길이 없어서 산길을 걸어 ‘황등역’이라고… ‘익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마지막역인 ‘황등역’이라고 있어요. 그렇게 학교를 다니는데, 새벽에 가방을 들고 한 번도 안 쉬고 언덕 길을 단숨에 달려가 역에 도착해! 공복에 20리를 뛰어 겨우 기차에 몸을 싣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보게 된 길가에 코스모스를 보면 어머니 생각이 나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배도 고프고해서… 그걸 평생 잊을 수가 없어서 만든 노래지.” 우리들이 너무 신나게 부르는 나훈아의〈고향역〉에는 작곡가의 어린 시절 슬픈 사연들이 담겨있었습니다.
「원래는 그 노래를 작곡해 가지고 5년 동안 작곡가 생활을 했는데, 그 많은 가수 중에 노래를 주고 싶었던 유일한 가수가 나훈아였어요. 오아시스레코드사에 전화를 해 가지고 3개월 동안 쫒아 다녔어요. 우여곡절 끝에 취입을 해 음반이 나왔는데, 그 당시 당국에서 슬픈 노래 보다는 경쾌하고 진취적이고 신나는 노래를 권장하던 때라 노래에 ‘이별, 슬픔, 아픔, 상처, 고통’ 등이 들어가면 방송 불가 판정을 받았는데,〈차창에 어린 모습〉도 방송 불가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나훈아가 엄지척을 하면서 말하길 “햐! 선생님 이 곡은 멜로디는 최곤데, 지금 노랫말을 바꿔서 못합니꺼?” 노래 가사 중 ‘혼자만 몸을 실은 열차는 무정해’ ‘무정해’가 들어가면 안 되는거야! 너무 슬프니까. 나훈아는 “선생님 신나게 편곡해서 다시 취입하면 안돼겠습꺼?”라고 제안을 해〈고향역〉이 탄생했습니다.
임종수는 “그래서 내가 평생 나훈아씨한테 감사를 해, 그렇지 않았으면〈고향역〉이란 노래가 안 나왔지. 그래서 집에와서 정서적이고 서정적이고… 말은 쉽지? 그래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을 때 문득 떠오른 기억이 중학교 통학길에 기차역에서 보게 된 코스모스, 뛰어가면서 엄마 생각하면서 울었던 기억들, 그 생각이 나는 동시에 노래 제목이〈고향역〉으로 결정됐어요. “칙칙 폭폭 칙칙폭폭 짜라짜라 짠짠짠, 짜라짠짠짠짠, 두두두둥 땡땡땡, 짜리 짜라짠 헤이 헤이”」 그렇게 슬픈 멜로디의 곡〈차창에 어린 모습〉은 나훈아의 제안으로 빠른 템포로 편곡해 발표했던〈고향역〉은 국민에게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전라북도 순창이 고향인 작곡가 임종수는 어머님이 46세에 낳은 8남매 중에서 막내였습니다.
작곡가 임종수의 무명시절을 날려보낸〈고향역〉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1970년대 우리나라 음반시장은 오아시스레코드사(대표 손진석)과 지구레코드사(대표 임정수)가 장악하고 있었는데, 나훈아의 소속사는 오아시스레코드사였습니다. 지구레코드사는 작사가 정두수, 작곡가 박춘석, 이미자 선생님, 남진, 문주란, 하춘화, 은방울자매 등 기라성같은 가수들이 소속돼 있었죠.
청계천 8가 평화시장 건너 편 건물 3층에 있던 오아시스레코드사에 1970년 1월의 추운 어느 날 아침, 남루한 차림의 임정수(당시 28살)는 자신은 작곡가인데 사장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직원에게 말했고, “지금 사장님이 안 계신다.” 말을 듣고 다음날부터 2주일 동안 매일 아침 똑같은 시간에 오아시스레코드사로 출근했습니다. 결국 손진석 사장을 만나 “나훈아에게 주고 싶은 곡이 두 개 있으니 나훈아를 만나게 해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나훈아가 언제 오는지 우리도 모른다.”는 답변만 돌아왔고, 3개월 동안을 무작정하고 기다렸습니다. “나훈아를 만나 야한다. 딱 5분 간만이라도…” 사무실에 아침 9시에 출근해 저녁 5시까지 기다렸습니다.
어느 날 사무실이 왁자지껄하자 사장실 문이 열리며 “훈아 왔노?” 마침내 나훈아를 실물로 본 첫날, 두 사람이 사장실에서 대화를 하는 동안을 기다린 끝에 나훈아가 사무실 현관문을 나선 순간 뒤에서 나훈아의 어깨를 잡았습니다. “와예?” 준비한 말을 속사포처럼 쏟아냈습니다. “전 무명작곡가 임종수입니다. 3 개월 기다림. 주고 싶은 2 곡, 1 절씩만 5분이면 충분합니다. 딱 5분만 시간을 주십시오.” 나훈아는 임종수를 따라 피아노가 있는 방으로 들어갑니다. 임종수는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불렀고, 나훈아는 임종수 앞으로 와서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임선생님! 지보다 노래를 더 잘하시네예, 한 번만 더 해주이소.” 또 1절을 부르자 “한 번만 더 해주이소.” 또 1절을 부르고 나자 나훈아는 “제가 한번 따라해 보겠심더.” 임종수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세 번 듣고 어떻게 저렇게 잘할 수 있을까?” 나훈아는 악보에 서명을 했는데, 취입을 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나훈아〈차창에 어린 모습〉 취입 결정. 동료 작곡가와 사무실 직원들의 축하의 인사말과 악수 세례! 그의 인생에도 마침내 해뜰 날이 왔습니다. 그러나 방송불가.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난 1971년 12월말 오아시스레코드사를 찾은 임종수는 우연히 나훈아를 만났습니다.
뜻밖의 제안, “임선생님!〈차창에 어린 모습〉이 너무 아깝심니더, 어차피 방송도 안됐으니까 슬픈 가사를 띠고 건전하게 고쳐 주이소. 리듬도 트로트에서 고고로 바꿔주시고예. 고고로 바꾸면 경쾌하게 들리지 않겠어예?” 프로는 뭐가 달라도 다른 가 봅니다. 취입한 노래가 발표도 못해 보고 사장됐고, 젊은 작곡가 임종수의 집념과 의지가 너무 고마워서 그랬을 것이라 필자는 생각합니다.
임종수가 집에 돌아와서 밤새 고민하다 문득 떠오른 중학생 시절의 ‘황등역과 이리역’ 그리고 ‘어머니와 코스모스’ 등등. 1972년 2월 8일 나훈아는〈고향역〉을 취입했습니다. 행운의 여신은 그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회사의 대표적인 가수 나훈아가 전격적으로 지구레코드사로 옮겨〈녹슬은 기찻길〉을 발매했던 것입니다. 다급해진 오아시스레코드사는 전국 방송국 PD들에게 설문을 돌려 나훈아의 앨범 중에 타이틀곡을 제외한 알려지지 않은 곡 ‘베스트 10’을 골라 달라는 내용이었는데, 설문결과〈고향역〉이 1위였습니다.
그해 9월〈고향역〉을 타이틀 곡으로 앨범이 발매되자, 전국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9월 22일이 추석이었는데 명절만 되면 귀성 전쟁이 한창이었던 그 시절, 고향을 떠나서 타향살이에 지쳐 고향을 그리워 하던 국민들과 추석을 맞아 고향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춥고 배고팠던 젊은 작곡가 임종수의 시대는 그렇게 추석과 고향, 코스모스와 함께 활짝 피어났습니다. 1972년 이후 설과 추석 등 명절만 되면 전국 방방곡곡〈고향역〉이 흘러나왔습니다. 이미자 선생님께서 1972년에 발표하신〈자주 댕기〉도 명절 때마다 함께 울려서 퍼졌습니다.」
임종수의 꿈은 가수였습니다. 학창시절부터 노래를 “허벌창 나게 잘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1963년 12월 이등병 군인시절 그는 MBC 주최 ‘톱싱거대회’에 출전 후 심사위원이던 작곡가 황문평 선생을 찾아가 “고향 순창에 계신 어머니께서 막둥이 가수 성공을 기원하며 매일 정한수 떠놓고 빌고 계신다.”며 가수의 꿈을 말했고, 황문평은 명함 두장을 꺼내서 뒷장에 메모를 해 한 장은 작곡가 계수남 음악학원장에게, 한 장은 그의 소속 부대장에게 전해 주라고 했습니다. 그는 동대문 계수남음악학원에서 숙식을 하며 나화랑 작곡의〈호반의 등불〉로 가수 데뷔를 했습니다. 그러나 연습 중 음색에 개성이 없다고 판단해 나화랑에게 가수 포기를 전했습니다.
이 때 나화랑이 “정말 현명한 판단을 했다. 그런데 너! 오늘부터 작곡을 해라. 네가 적을 수 있는 멜로디를 악보에 적어서 1주일 후에 와라.” 임정수는〈돌아와 주마〉라는 곡을 만들어서 나화랑을 찾아갔고, 나화랑은 피아노를 쳐보고 말했습니다. “처음 작곡해 본 사람이 이런 곡을 쓸 수가 없다. 너는 반드시 작곡으로 성공한다.” 그는 악상이 떠오를 때마다 곡을 썼습니다. 〈차창에 어린 모습〉은 68번째 곡, 그의 대표곡 중 한 곡은〈아내에게 바치는 노래〉입니다. 1976년 하수영이 불러 속썩이던 남편들이 반성해 아내의 두 손을 꼭 잡고 불러줘 이혼을 막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했다는 노래. 하수영은 그 해 MBC 10 대 가수에 선정돼 이 노래를 불렀죠. “혼인해서 고생을 하면서도 변함없이 자기 곁을 지켜준 아내를 생각하면서 작곡했다.”고 합니다.
–〈고향역〉– 임종수 작사, 임종수 작곡, 나훈아(1972년)
1절. 코스모스 피어있는 정든 고향역 / 이쁜이 곱분이 모두 나와 반겨주겠지
달려라 고향 열차 설레는 가슴 안고 / 눈 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운 나의 고향역
2절. 코스모스 반겨주는 정든 고향역 / 다정히 손잡고 고갯마루 넘어서 올 때
흰머리 날리면서 달려온 어머님을 / 얼싸안고 바라보았네 멀어진 나의 고향역
특이하게도 1절과 2절 모두 코스모스로 시작되는〈고향역〉은 1절엔 사랑하는 고향의 애인과 임종수가 학창시절 애용했던 ‘황등역’과 ‘이리역’을 우리 모두의 ‘고향역’으로 표현을 하였고, 2절에선 고향에 계신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과 어머니의 자식 사랑을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작곡가 임종수는 가수로서의 자질도 매우 뛰어나다고 필자도 인정합니다. 2014년 3월 25일 ‘가요무대’에 출연 1957년 남인수의〈무정열차〉(반야월/이재호)를 경쾌하게 잘 불렀습니다.
–〈매화같은 여자〉– 양규태 작사, 송운선 작곡, 최영주(2005년)
1절. 매화핀 매창공원 나 홀로 찾아를 왔네 / 이끼 낀 돌비 새겨진 만인의 연인 매창
사랑을 기다리다 지쳐서 새가 되었나 / 애달픈 산새 소리만 산자락을 적신다 아 아아아
시와 함께 노래와 함께 / 살다 간 매화같은 여자여
2절. 배꽃 핀 매창공원 쓸쓸히 찾아를 왔네 / 사랑을 글로 엮었던 만인의 연인 매창
세상을 원망하다 지쳐서 빗물 되었나 / 추적추적 내린 비에 돌비가 적신다 아 아아아
시와 함께 거문고와 함께 / 살다 간 배꽃같은 여자여
사랑을 기다리다 지쳐서 새가 되었나 / 애달픈 산새 소리만 산자락을 적신다 아 아아아
시와 함께 노래와 함께 / 살다 간 매화같은 여자여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매창로 ‘매창공원’에 가면 부안문화원이 있고 조선시대 황진이,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여류문장가로 유명한 부안 기생 ‘매창’의 묘소가 있습니다. 이매창(李梅窓 1573년〜1610년), 이름은 계생(癸生, 桂生)·향금(香今), 호 매창(梅窓). 부안의 현리(縣吏)의 딸로 태어나 아버지한테 글을 배워 한시(漢詩)에 뛰어났고, 가무에도 능했으며, 특히 거문고를 잘 탔다고 합니다. 또한 시조에도 능하여 이별을 노래한 시로 으뜸인『梨花雨 흩날닐제..』를 비롯 수십편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의 시문이 한양에 알려지자 문인, 호걸들이 교류하기를 원해 이귀를 비롯해 홍길동의 저자 허균, 천민 출신 학자인 촌은 유희경 등과 깊게 교류를 했습니다. 1591년 유희경(1545년〜1636년)은 부안에서 매창을 만나 서로 한눈에 사랑하게 되나 몇 달 후 한양으로 떠나고, 16년만인 1607년 재회하나(촌은 62세, 매창 34세) 열흘 후 또다시 이별한 3년 후인 1610년 매창이 37세 나이로 작고해 ‘매창뜸’에 거문고와 함께 묻혔습니다.
현재 1655년에 세워진 묘비와 상석이 남아있는데, 매창묘는 1983년 지방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됐습니다. 그리고 1668년 개암사에서 매창의 한시 58편을 모아『매창집』을 간행했습니다. 『매창집』은 현재 세권이 남아 있는데, 서울 간송미술관에 두 권, 미국 하버드 대학 도서관에 한 권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956년 시인 신석정이 최초로 대역해 역은『매창집』이 있습니다. ‘매창의 묘제’는 매년 음년 4월 5일 부풍율회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학창 시절 개성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황진이’와 ‘화담 서경덕’, ‘박연폭포’가 있다 배웠는데, 부안 출신인 신석정이 선정한 부안삼절(扶安三絶)은 ‘매창’과 ‘촌은 유희경’, ‘직소폭포’입니다.
부안기생 매창과 천민시인 유희경이 처음 만난 때가 매창이 19살, 유희경이 47살 때였는데, 신분적인 공감대와 함께 멀리서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 운명적인 정(情)과 사랑을 나눴습니다.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노라.” (부안 매창→ 한양 유희경)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한양에 있어 /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오동나무에 비 뿌릴 제 애가 끊겨라.” (한양 유희경→ 부안 매창)
필자는 2009년 6월 13일에 어부인과 함께 매창공원을 찾았고, 2011년 4월 24일 초등학교 동창생 40명과 부안 봄나들이 때 격포항 횟집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채석강에서는 변산 바닷물에 발을 담궈 보기도 하면서 탐방을 한 후 주과포(酒果脯) 사들고 매창묘소를 찾았습니다.
부안 출신 가수는〈님의 등불〉〈보릿고개〉〈안동역에서〉의 진성(1960년, 본명 진성철)과 ‘내일의 미스트롯 2’에서〈바람길〉〈아버지의 강〉등으로 감명을 주면서 최종 4위를 차지한 김태연(2012년)이 있습니다. 전라북도 출신 가수로는 김성환(1950년 군산), 송대관(1946년 정읍), 최진희(1957년 전주), 이진관(1960년 군산), 임수정(1963년 정읍), 정음(1968년 진안군), 박명수(1970년 군산), 화사(1995년 전주) 등이 있고, 대중가요로는, 1948년 옥두옥〈눈물의 오리정〉1954년 김용만〈남원의 애수〉1966년 이미자 선생님〈님떠난 군산항〉2012년 김용임〈내장산〉2015년 정음〈변산아 격포야〉2020년 진성〈채석강〉등이 있습니다.
다음에는 제주도편으로〈찔레꽃〉〈삼다도 소식〉〈서귀포를 아시나요〉글을 올리겠습니다.
*상기 컬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