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 30. 서울특별시편〈서울의 찬가〉〈덕수궁 돌담길〉(2021.09.27.)
내일은(28일), 71년 전 6.25때 수도 서울을 수복한 날입니다. 다시는 이 땅에서 동족상잔의 비극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며, 우리 모두 노력해서 밝은 미래를 후손들에게 물려줘야겠습니다.
「서울특별시」대한민국 수도 서울입니다. 세계 안전 도시 8위의 자랑스런 우리의 서울입니다.
올해로 조선(朝鮮)이 한양으로 천도한 지 627년이 됐습니다. 1932년 7월 17일 조선이 창업된 후 8월 13일 태조고황제(이성계)가 송악(개성)에서 수도의 천도를 천명했고, 이듬해 1월 2일 영서운관사(領書雲觀事) 권중화가 계룡산을 건의해 2월 10일 계룡산을 확정 건설이 시작됐는데, 12월 11일 하륜의 상소를 받아들여서 태조고황제는 도읍지의 재검토를 지시했습니다. 이듬해 1394년 2월 23일 하륜은 무악(신촌 일대)로 천도를 주장했고, 8월 11일 태조 고황제는 무악에 도착해 일대를 두루 돌아본 후 8월 13일 백악산(북악산) 아래에 천도를 결정했습니다. 마침내 1394년 10월 25일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송악에서 한양으로 출발해 3일 후 한양에 도착했습니다.
궁궐은 1395년 9월에 마무리됐는데, 삼봉(三峯) 정도전이 총괄해 백악산 아래에 남향으로 지었던 것입니다. 궁궐 이름은 ‘시경’에서 ‘기취이주(旣醉以酒) 기포이덕(旣飽以德) 군자만년(君子萬年) 개이경복(介爾景福)’을 따서「경복궁(景福宮)」이라 지었습니다. 경복궁의 정궐은 근정전(勤政殿), 그 뜻은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가 불러서 군자가 만년토록 큰 복을 누린다.’입니다. 무학대사의 의견에 따라 궁궐의 화기를 막기 위해서 정문에 ‘해태상’을 세우고 연못을 파서 동으로 만든 용을 넣었습니다.
백악산(白岳山 342m, 현재 北岳山)을 주산(主山)으로 해서 서쪽으로 인왕산(仁旺山 338m)과 남쪽으론 남산(南山 262m 木覓山), 동쪽은 낙산(駱山 125m 駱駝山)을 뒀습니다. 한양의 4대문으로 동에는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에는 돈의문(敦義門), 남에는 숭례문(崇禮門), 북에는 소지문(昭智門 또는 肅靖門), 중앙에는 보신각(普信閣)을 배치했는데,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의 오덕(五德)을 표현했던 것입니다. 또 4개의 소문을 만들어 동소문을 혜화문(惠化門), 서소문을 소의문(昭義門), 남소문을 광희문(光熙門), 북소문을 창의문(彰義門)이라고 칭했습니다. 우리들이 흔히 쓰고있는 “싸가지가 없다.”는 말은 4대문에 사용된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이 4가지가 없는 것을 지칭했는데, 사대부들에게 가장 치욕적인 말이었다고 합니다. 한양의 주산인 백악산(북악산)에 대한 한 예,
「지난 5월 9일 KBS1-TV ‘진품명품’에선 1651년 이후에 조정이 아닌 민간인이 제작한 지도 ‘동국팔역산천일통지도’가 출품됐는데, 조선팔도 각 현(縣)의 진산과 강을 표기한 지도였습니다. 한양의 주산으로 백악산이 표기돼 있었습니다. 이 지도의 감정 가격은 500만원이 책정됐습니다.
–〈서울의 찬가〉– 길옥윤 작사, 길옥윤 작곡, 패티김(1969년 신세기레코드사)
1절.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 새들의 노래 웃는 그 얼굴
그리워라 내 사랑아 / 내 곁을 떠나지 마오
처음 만나고 사랑을 맺은 / 정다운 거리 마음의 거리
아름다운 서울에서 / 서울에서 살렵니다
2절. 봄이 또 오고 여름이 가고 / 낙엽은 지고 눈보라 쳐도
변함없는 내 사랑아 / 내 곁을 떠나지 마오
헤어져 멀리 있다 하여도 / 내 품에 돌아오라 그대여
아름다운 서울에서 / 서울에서 살렵니다
3절.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 새들의 노래 웃는 그 얼굴
그리워라 내 사랑아 / 내 곁을 떠나지 마오
처음 만나서 사랑을 맺은 / 정다운 거리 마음의 거리
아름다운 서울에서 / 서울에서 살렵니다
〈서울의 찬가〉1966년 작곡가 길옥윤이 작사·작곡해 그의 부인인 가수 패티김이 불렀습니다.
이 노래는 당시 서울특별시의 불도저 시장이라 불리던 제 14대 김현옥 시장이 작곡가 길옥윤에게 특별히 부탁을 해서 만들어 진 곡으로, 그는 길옥윤에게 “서울시에서 전폭적으로 후원해 드릴테니 서울에 대한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은 노래를 만들어 주십시오.”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서울의 찬가〉가 만들어진 1966년은 길옥윤과 패티김이 갓 혼인을 한 신혼시절이기도 해, 길옥윤은 노랫말에 희망의 감흥을 담아 행진곡같은 멜로디로 만들어서, 패티김의 청량한 가창력을 더해 노래를 듣거나 부르는 사람의 가슴을 탁 트이게 했습니다. 1절은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지 말라는 염원을 담았고, 2절은 헤어졌던 사람이 돌아와서 아름다운 서울에서 함께 살기를 원하는 내용이며, 사랑하는 남녀간의 사랑이 맺어진 장소로도 서울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서울의 찬가〉는 서울시 홍보 노래로, 1966년 서울시 홍보가요로 동아방송(TBC)에서 녹음해 발표되어 전파를 탄 후, 음반은 1969년 발매됐습니다. 처음 방송을 타던 1966년 서울시청에서 확성기를 통해 매일 새벽마다〈서울의 찬가〉를 틀어대는 바람에 근처 ‘조선호텔’ 투숙객들이 새벽잠을 설쳤다고 합니다. 1986년 아시안 게임 개회식 때에도〈서울의 찬가〉가 연주됐고, 또한 서울행 열차가 서울역에 도착하기 직전에 종착역을 알리는 안내 방송으로도 사용됐습니다. 1990년 프로축구 ‘FC서울’팀과 프로야구 ‘LG트윈스’팀이 개사해 응원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1995년 3월 길옥윤 장례식때와 7월 민선1기 서울시장(조순) 취임식에서 패티김이 불렀습니다.
1995년 10월 25일 서울 4대문 안에 대중가요 최초로 세워진〈서울의 찬가〉노래비(추진위원장 황문평)은 종로구 세종문회회관옆 세종로공원에 세워졌습니다. 에피소드 하나,「KBS2-TV에서 2010년 1월 12일 방송된 ‘1대 100’ 서바이벌 퀴즈대회에서 2단계 문제로 1절이 아닌 2절에서 제출한 문제가 ‘봄이 또 오고 여름이 가고 낙엽은 지고 ( ? ), 괄호안에 들어갈 말은 무엇입니까?’. “대중가요도 1절은 대부분 많이들 아는데 2절을 모르는 경우가 많잖아요?” 결과는 98명 중 51명이나 탈락하게 만드는 만행(?)을 저질렀던 문제가〈서울의 찬가〉였습니다.(^^)
☞ 김현옥(1926년〜1997년) 경남 진주생, 군 장성 출신, 부산시장·서울시장 역임, 서울 여의도·영동지구 개발, 남산제1·2호터널 개통, 강변도로 개설, 세종로 지하차도 건설, 1981년 부산 기장 장안중학교장.
가수 김태화의 아버지이시고, 또한〈안개〉〈무인도〉의 국민가수 정훈희의 시아버님이십니다.
☞ 길옥윤(1927년〜1995년 본명 최치정) 평북 영변생, 1988년 서울올림픽 폐회식 음악 작곡
〈당신은 모르실꺼야〉〈당신만을 사랑해〉〈제3한강교〉〈빛과 그림자〉〈아침의 나라에서〉
–〈덕수궁 돌담길〉– 정두수 작사, 한산도 작곡, 진송남(1963년 지구레코드사)
1절. 비 내리는 덕수궁 돌담장 길을 / 우산없이 혼자서 거니는 사람
무슨 사연 있길래 혼자 거닐까 / 저토록 비를 맞고 혼자 거닐까
밤 비가 소리없이 내리는 밤에
2절. 밤도 깊은 덕수궁 돌담장 길을 / 비를 맞고 말없이 거니는 사람
옛날에는 두 사람 거닐던 길을 / 지금은 어이해서 혼자 거닐까
밤비가 하염없이 내리는 밤에
이 노래는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가요산맥 작사가 삼포 정두수 선생님의 작사가 데뷔곡입니다.
2013년 정두수 선생님의 ‘노래따라 삼천리’에 수록된〈덕수궁 돌담길〉에 사연을 발췌해 보면,
「1961년 어느 봄날. 그날 진종일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서대문에 살았던 나는 걸어서 출퇴근을 했습니다. 직장이 남대문로에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인가. ‘덕수궁 돌담길’을 하루에 꼭 두 번씩 걸어 다녀야만 했습니다. 출근길에 한 번, 퇴근길에 또 다시 한 번. 그때 덕수궁 돌담길은 우마차(牛馬車)도 안 다니던 한적한 산책로. 주말이면 젊은 연인들의 아베크 코스이기도 했습니다. 이 호젓한 거리를 걸으면서 청운의 꿈을 키웠고 학창 시절을 즐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거리를 걸었던 연인들은 대부분 사랑에 실패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혼인에 성공하지 못한다는 통설이 있었습니다. 대학을 나오면 남학생은 군대로 여학생은 시집을 가야 할 혼인 적령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덕수궁 돌담길을 거닐지 마라! 징크스가 있습니다. ‘마(魔)의 코스’ 덕수궁 돌담길을…” 그러나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덕수궁 돌담길은 도심지의 데이트 거리가 아니던가? 그래서 자주 찾게 되는 것었습니다. 출판 기념회에 들른 나는 약간 취기에 젖어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동 골목길에서 나는 처절하게 돌담 벽에 기대 몸부림치는 청년을 발견했습니다. 제대복을 입은 채, 술에 취해 울고 있었는데, 빗물에 눈물에 흠뻑 젖은 채. 집에 와서도 그 청년의 일로 번뇌했습니다.
“필시 그 청년에게는 사연이 있을 겁니다. 혹시, 덕수궁 돌담길…?”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자 나는 노래시를 썼씁니다. 노래로서 덕수궁 돌담길을 알리고 싶어서였습니다. 〈덕수궁 돌담길〉노래시를 노트에 써놓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났을까. 고교 동창 양병철군이 어느 날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당시 부산MBC 전속 가수로 활약하고 있었다. “가사 한 편 줘. 너무 서정적인 방송가요 노래시 보다는 대중성이 있는 것으로…”. 그는 내 노트에 적힌 시를 읽던 중에, “이거 좋겠군. 덕수궁 돌담길이라” 하지만 이 노래를 정작 부른 가수는 양병철이 아니라 진송남이었습니다. 1965년. 정두수 작사, 한산도 작곡, 진송남 노래〈덕수궁 돌담길〉은 그해 방송사로부터 품위 있고 격조높은 서정가요로 선정되면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제1회 부산 국제신보사 제정 작사상’을 비롯해 ‘문화공보부와 전국 예술인 총연합회 제정 작사상’을 수상했습니다.
노래 작곡가 한산도씨는〈동백 아가씨〉〈추억의 소야곡〉〈해운대 엘레지〉〈여자의 일생〉〈동숙의 노래〉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작사·작곡가. 가수 진송남은 (고전)초등학교 후배입니다.
‘덕수궁 돌담길’. 지금은 어느 누가 봄비를 맞으며 거닐고 있을까……. 2009년 어느 가을날. 가수 진송남은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에 있는 ‘정두수 노래비공원’에서 자신의 노래〈시오리 솔밭길〉노래비를 끌어안으면서, “가수 생활 반세기에〈시오리 솔밭길〉은 노래비가 세워졌지만, 내 사랑〈덕수궁 돌담길〉은 언제 세워질꼬…?” 그는 씁쓸하게 말했다.」 필자는 1990년 어느 봄날. 직장 연수에 대비 장기자랑 반주 연습을 하던 직장 후배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형님! 혹시〈덕수궁 돌담길〉노래를 부를 줄 아세요?” “처음 듣는데” 필자는 그때부터〈덕수궁 돌담길〉을 배워 익혀 놨는데, 한번도 노래방 등에서 불러본 적은 없습니다. 부를 줄 알지만….
1991년 길옥윤 작사·작곡, 혜은이의〈옛사랑의 돌담길〉가사에도 덕수궁 돌담길이 나옵니다.
1절. 덕수궁의 돌담길 옛날의 돌담길 / 너와 나와 처음 만난 아카시아 피던 길
정동교회 종소리 은은하게 울리면은 / 가슴이 뭉클해졌어 눈시울이 뜨거웠어
아아 지금은 사라진 정다웠던 그 사람이여 / 덕수궁의 돌담길 옛날의 돌담길
나 혼자서 걸어가는 / 옛사랑의 돌담길
2절. 덕수궁의 돌담길 옛날의 돌담길 / 오는 날도 가는 날도 이야기도 많았네
느티나무 참나무 우거지는 그늘 아래 /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지냈었네
아아 지금은 사라진 정다웠던 그 사람이여 / 덕수궁의 돌담길 옛날의 돌담길
나 혼자서 걸어가는 옛사랑의 돌담길
3절. 덕수궁의 돌담길 옛날의 돌담길 / 헤어지는 서러움에 눈물을 흘린 길
흩날리는 낙엽이 춤을 추는 바람 속에 / 사라지던 뒷 모습을 잊을 길이 없구나
아아 지금은 사라진 정다웠던 그 사람이여 / 덕수궁의 돌담길 옛날의 돌담길
나 혼자서 걸어가는 옛사랑의 돌담길
서울 소재의 대중가요는 약 1,400여 곡이 있다고 합니다. 그 중 조용필의〈서울 서울 서울〉
–〈서울 서울 서울〉– 양인자 작사, 조용필 작곡, 조용필(1988년 지구레코드사)
1절. 해질 무렵 거리에 나가 차를 마시면 / 내 가슴에 아름다운 냇물이 흐르네
이별이란 헤어짐이 아니었구나 / 추억 속에서 다시 만나는 그대
베고니아 화분이 놓인 우체국 계단 / 어딘가에 엽서를 쓰던 그녀의 고운 손
그 언제쯤 나를 볼까 마음이 서두네 / 나의 사랑을 가져가 버린 그대
서울 서울 서울 아름다운 이 거리 / 서울 서울 서울 그리움이 남는 곳
서울 서울 서울 사랑으로 남으리 / 워워워 never forget of my lover 서울
2절. 이별을 알면서도 사랑에 빠지고 / 차 한잔을 함께 마셔도 기쁨에 떨렸네
내 인생에 영원히 남을 화려한 축제여 / 눈물 속에서 멀어져 가는 그대
서울 서울 서울 아름다운 이 거리 / 서울 서울 서울 그리움이 남는 곳
서울 서울 서울 사랑으로 남으리 / 워워워 never forget of my lover 서울
서울 서울 서울 아름다운 이 거리 / 서울 서울 서울 그리움이 남는 곳
서울 서울 서울 사랑으로 남으리 / 워워워 never forget of my lover 서울
서울 서울 서울 아름다운 이 거리 / 서울 서울 서울 그리움이 남는 곳
서울 서울 서울 사랑으로 남으리 / 워워워 never forget of my lover 서울
1993년 11월 9일 동아일보 기사, 조용필「서울…」의 승리/ 이〇연 기획특집부(오늘과 내일)
「조용필은 만만찮은 예술가다. 이렇게 말하는 까닭이 있다.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당시 정부는 조국과 서울을 예찬,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밝은 노래들을 만들고 방송토록 권장했다. 자연히 그런 노래가 수없이 쏟아져 나왔다. 요즘 유행어를 빌리자면 신바람 운동의 일환이었다. 그런데 조용필만은 쓸쓸한 노래〈서울 서울 서울〉을 내놓았다. “해질 무렵 거리에 나가…… 이별이란 헤어짐이 아니었구나…” 그 애조 때문에 이 노래는 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방송 전파를 별로 타지 못했다. 방송들이 이 노래를 내놓고 들려준 것은 올림픽 폐막연 때가 처음이었다. 올림픽 이후 인기. 그러나〈서울 서울 서울〉은 올림픽 이후 가장 인기 있는 노래가 됐다. 그 때 나온 노래들 가운데서 지금도 기억되고 사랑 받는 것은 이 노래가 거의 유일하다.
한 TV방송국은 올해 서울정도 6백년에 관한 연중 프로그램의 주제 음악으로 이 노래를 선택했다. 이 노래의 생명력이 거듭 입중된 셈이다. 사람들이 온통 올림픽으로 신바람나 있을 때 조용필은 왜 이런 노래를 만들었을까. 그는 “올림픽이 끝나면 우리 사회가 우울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세상은 그의 예상대로 돼갔다. 이하는 생략하겠습니다.」이〇연 누굴까요.?
☞ 조용필(1950년) 화성 송산면, 경동고졸업, 1969년 미8군무대 데뷔, 1979년 ‘위대한 탄생’ 〈돌아와요 부산항에〉〈창밖의 여자〉〈강원도 아리랑〉〈고추잠자리〉〈모나리자〉〈비련〉〈친구여〉〈허공〉1980년〜1984년 KBS 가요대상 수상, 1985년 골든디스크 대상 수상 등.
다음엔 9월 27일과 30일 생일을 맞이하는 국민가수 남진과 문주란에 대한 글을 올리겠습니다.
*상기 컬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