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 32.〈청실홍실〉, 〈수덕사의 여승 〉〈사장님 환영회〉 (2021.10.11.)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
10월에는 국경일과 기념일이 참 많습니다. 지난 1일은 ‘국군의 날’ 2일은 ‘노인의 날’ 3일 단기 4354년 ‘개천절’ 5일 ‘세계 한인의 날’ 8일 ‘재향군인의 날’ ‘한로(寒露), 9일 ‘한글날’ 10일 ‘구리시민의 날’ 15일 ‘체육의 날’ 16일 ‘부마항쟁 기념일’ ‘문화의 날’ 21일 ‘경찰의 날’ 23일 ‘상강(霜降)’ 24일 ‘국제연합일’ 25일 ‘독도의 날’ 26일 ‘금융의 날’ 28일 ‘교정의 날’ 29일 ‘지방자치의 날’ 등입니다.
아름다운 꽃과 나무, 산들 바람, 하늘 표정이 참 좋은 계절에 뉴스아이신문 애독자 여러분께서도 건강하고 행복한 계절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조남사 극본 우리나라 최초의 연속극 주제가〈청실 홍실〉에 대한 글을 올리겠습니다.
1956년 라디오 연속극 주제가〈청실 홍실〉은 안다성·송민도가 불렀으나, 1957년 10월 15일 개봉된 영화 ‘청실 홍실’에선 현인·백일희가 불렀고, 음반도 현인·백일희가 먼저 발매했습니다.
1923년 충청북도 영동에서 태어난 극작가 조남사는 1947년 중앙방송국(HLKA 현 KBS) 방송연기 연구생(성우 특1기) 공모에서 위진록(아나운서), 장민호(성우, 연극·영화), 황정순(영화) 등과 합격해 연출도 맡았습니다. 피난시절 부산에서 서울로 돌아올 무렵 KBS 연출계장으로 근무했는데, 1956년 3월. 6개월 과정의 미국연수를 다녀온 후 전쟁으로 피폐화 된 국민들의 마음을 달래주려면 마음을 끌 수 있는 방송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멜로드라마 ‘청실홍실’ 극본을 쓰고 연속극 최초의 주제가 노랫말도 지었습니다. 그는 방송국 관계자들을 설득하여 일요 연속극으로 편성해서 10월 7일부터 방송하기로 했지만 사정상 다소 지연되어 12월 2일 첫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남녀간의 애정이 담긴 일요연속극 ‘청실홍실’은 첫 방송을 타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이에 청취자들은 일주일은 기다리기가 너무 길다며 시간을 늘려 달라는 성화가 빗발쳐 이에 부응하여 일일 연속극으로 전환해 이듬해 4월 28일까지 7개월간 30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장안의 화제를 모으면서 라디오 연속방송극 최초의 멜로 드라마, 최초의 방송 주제가를 탄생시킨 우리나라 근대 방송사에 길이 길이 남은 작품 ‘청실홍실’에 대해 조남사는, “청실 홍실을 쓰면서 세상이 메마르고 거칠수록 사람들은 무엇인가에 의지하고 싶은데 그 중에 애정 문제가 가장 으뜸가는 것이라 이것을 테마로 잡았다,”고 했습니다.
‘청실홍실’ 줄거리는,「동방화학의 여비서로 70여 명의 응모자 중에 한동숙(성우 정은숙)과 신애자(성우 김소원)이 뽑힌다. 동숙은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발랄한 여성이었고, 애자는 시험을 주관하는 나기사(성우 장민호)의 전 애인으로 그녀는 이미 혼인을 했다가 전쟁으로 인한 미망인이었다. 두 여인은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나기사에게 매력을 느끼는데, 동숙은 발랄한 성격상 적극적으로 접근하는데 반해 애자는 좋아했음에도 나기사와 혼인을 못하고 시집을 가서 미망인이 된 것을 후회하며 그에게 접근을 자재하고 지낸다. 그러나 나기사 마음은 애자편에 더 이끌리게 돼 애정의 갈등과 삼각대결이 아슬아슬하게 전개된다.」 이에 청취자들은 애간장을 녹이고, 본인이 주인공이 되어서 마치 자신이 겪는 듯한 이상 야릇한 감정을 느끼면서 연속극 속으로 빠져들었으며, 매회 연속극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다음편 시간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연속극 ‘청실 홍실’은 우리나라 멜로 드라마의 문을 활짝 열었고, 조남사는 멜로 드라마 개척자가 됐습니다.
주제가〈청실홍실〉은 처음 1947년 KBS 1기 전속가수로 데뷔한 ‘송민도’가 불렀으나, 음반을 제작할 때에는 KBS 3기 신인가수 ‘안다성’과 함께 불렀습니다. 〈청실홍실〉은 명곡으로 자리매김하면서 혼인식 축하곡으로도 전국에서 불려졌다 합니다. 그 당시 KBS 악단장인 송민영은 송민도의 친동생이었고,〈청실홍실〉작곡가 손석우도 KBS 전속 가수들을 지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연속극 ‘청실홍실’은 이듬해인 1957년 동명의 영화로 제작됐고, 이때 주제가를 현인과 백일희(본명 이해주,〈단장의 미아리고개〉이해연 동생)가 불렀으며, 음반도 먼저 발매했습니다. 그러나 국민들은 드라마로 매일 들어서 친숙도가 있던 안다성·송민도 노래를 더 좋아했답니다.
–〈청실 홍실〉– 조남사 작사, 손석우 작곡, 안다성·송민도(1956년 오아시스레코드사)
1절. 청실 홍실 엮어서 정성을 들여 / 청실 홍실 엮어서 무늬도 곱게
티없는 마음속에 나만이 아는 / 음음음음 음음음음 수를 놓았오
2절. 인생살이 끝없는 나그네 길에 / 인생살이 끝없는 회오리 바람
불어도 순정만은 목숨을 바쳐 / 음음음음 음음음음 간직했다오
3절. 청실 홍실 수놓고 샛별 우러러 / 청실 홍실 수놓고 두 손을 모아
다시는 울지 말자 굳세게 살자 / 음음음음 음음음음 맹세한다
1956년 방송된 일요드라마 ‘청실홍실’ 비하인드 하나,「1956년 10월 7일 일요일 밤 9시 15분에 조남사의 일요 연속극 ‘청실홍실’ 첫회가 방송될 예정이었습니다. 방송을 앞두고 연습이 시작되었는데, 작가는 대담하게 신인들을 주연에 기용했습니다. 김소원, 김수일, 심영식, 윤미림의 한자 이름들이 적힌 배역표가 연출계 입구 쪽에 붙어 있었습니다.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6개월간 미국 방송계를 시찰하고 오신 귀국 환영회식 자리에서 작가님은 나에게 귀띔을 했습니다. “이번에 내가 연속극을 쓰는데, 미림이는 여주인공을 맡게 될거야.” “연속극? 연속극이 뭐야?” 처음 듣는 단어였습니다. 그때까지 그런 표현은 없었습니다. 연습이 있던 날 오전, 연출계에 모인 작가와 연기자들은 가벼운 흥분을 느끼면서 연습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대본을 펴들었습니다. 자리가 부족해 나는 작가 옆에 의자를 갖다 놓고 끼어 앉았습니다.
작품 전체의 윤곽과 이지적이고 발랄한, 대조적인 두 젊은 여성 인물에 대한 설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청실홍실’의 동숙 역은 불덩어리처럼 사랑에 집착하는 자유분방하면서도 매력있는 아가씨였습니다. 동숙의 대사에는 첫 회에서 애교있게 웃는 대목도 몇 번 나왔습니다. ‘청실홍실’의 동숙 역은 정은숙으로 교체됐습니다. 기독교방송국 전속인 21세 신참 鄭恩淑은 어린 나이에 대담하고 현란한 연기와 뛰어난 노래 솜씨로 드라마를 성공으로 이끄는 한 축이 되어, 작품의 탄탄한 구성과 함께 연속극은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전국의 애청자들은 모두 정은숙에게 갈채! 갈채! 그 환영 열풍은 나날이 뜨거워져, 일요연속극이 막을 내린 1957년 4월 28일에는 불꽃놀이 할 때처럼 하늘은 온통 정은숙의 별들로 반짝였습니다. ‘청실홍실’ 동숙 역의 성공으로 그녀는 애정 드라마의 주연을 독점하면서 정은숙 독주 시대를 열었습니다. 또 한편 젊은 전쟁미망인 애자 역으로 출연해 지성적인 여성 역을 훌륭하게 그려낸 김소원씨는 정은숙씨와 함께 우리나라 방송 연기자들의 세대교체를 이끈 선두주자. ‘청실홍실’의 두 여성 주인공들은 연기뿐만 아니라 매력에 있어서도 세련된 서울 아가씨다웠습니다. 미인 연기자 김소원, 인기절정 정은숙도 애교는 끝내주고, 하얀 피부, 풍만한 몸매, 웃을 때의 귀여운 입매, 확실히 매력 덩어리였습니다.」
☞ 미림은 성우 윤미림, 김소원은 성우·탤런트로 탤런트 김민자의 언니, 최불암의 처형입니다.
드라마 ‘청실홍실’은 1977년 TBC 동양방송에서 4월 2일부터 10월 8일까지 주말연속극으로 리메이크 방영됐고, 탤렌트 김세윤, 장미희, 정윤희, 백일섭, 강부자, 전원주 등이 출연했습니다.
그리고 배우 문숙(본명 오경숙)은 철부지 부잣집 노처녀 딸로, 허진은 시누이로 출연했습니다.
드라마의 줄거리는,「고학으로 대학을 졸업해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김세윤, 그는 부잣집 딸 정윤희 덕에 회사를 물려 받을 장래가 약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어느날 회사에 옛 애인 장미희가 나타나면서 정윤희, 장미희 사이에서 성공의 길이냐 사랑이냐?의 갈림길에서 고민한다는 내용.」
영화 ‘청실홍실’, 정일택 감독에 배우 이민, 엄앵란, 주증녀, 김희갑, 이예춘, 이해랑, 김신재, 변일영이 출연했고, 영화 홍보는 ‘라디오를 통해 전국민을 열광시킨 연속방송극의 영화화!’란 영화 문구를 앞세워 노련미의 주증녀와 청순미의 엄앵란의 불꽃 튀기는 연기와 당시 김진규, 최무룡과 함께 남자배우 3인방으로 불린 이민의 열연으로 무장한 이 영화는 1957년 10월 15일 서울 명보극장에서 개봉돼 서울 관객만 10만 명을 동원하여 흥행에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영화 ‘청실홍실’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라디오 연속드라마를 영화로 만든 작품이기도 합니다.
「전쟁미망인 애자(주증녀)는 화학회사에 취직 시험을 보러 갔다가 옛 애인 나기사(이민)을 만난다. 여기에 사장의 딸인 발랄한 성격의 한동숙(엄앵란)은 장래가 촉망되는 나기사를 열렬히 사랑해 애정의 삼각관계가 형성되자 나기사는 갈등하지만 옛 연인 애자와의 사랑을 선택한다. 그 후 아버지의 회사가 파산하자 동숙은 나기사에 대한 사랑의 꿈도 산산히 부서지자 모든 것을 잃었다는 생각에 자살을 기도한다. 그때 동숙을 구한 애자는 그녀를 나기사의 품에 안겨 준다.」이 영화에서는 배우 엄앵란의 청순한 이미지가 스크린을 수 놓았고, 친엄마인 배우 ‘노재신’도 출연했지만 나기사 이모님 역할로 등장해 영화에서 모녀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 조남사(1923년〜1996년 본명 조남헌) 문예지 ‘혈맥’ 동인, 1949년 극단 ‘청막극회’ 대표,
라디오 1957년 ‘산넘어 바다건너’ ‘수정탑’ 1958년 ‘동심초’ ‘태양의 그림자’ 1964년 ‘일본인’ 등, TV연속곡 1971년 ‘보랏빛 욕망’ ‘선아의 호수’ 1972년 ‘정’ 1973년 ‘행복’ 1975년 ‘추풍령’ 등.
☞ 손석우(1920년〜2019년 전남 장흥생) 목포상고졸업, 작사·작곡가, 한국대중음악상 ‘공로상’
〈나 하나의 사랑〉〈노란 샤쓰의 사나이〉〈우리 애인은 올드미스〉〈사랑했는데〉
☞ 안다성(1930년 본명 안영길) 충북 청주생, 경희대 영문과 졸업, ‘1102 야전공병단’ 군예대
〈비극은 없다〉〈꿈은 사라지고〉〈바닷가에서〉〈사랑이 메아리칠때〉〈에레나가 된 순이〉
☞ 송민도(1923년 예명 송민숙, 백진주) 경기 수원생, 이화여고보졸업, 육군 정훈공작대 군예대
〈고향초〉〈나하나의 사랑〉〈여옥의 노래〉〈청춘목장〉〈카츄샤의 노래〉〈행복의 일요일〉
지난 8일은 가수 송춘희(1937년 평안북도 영변 출생)의 생신이었습니다. 송춘희의 일화, 「1956년 가을, 서울 답십리 경미극장 앞에서는 갓난아기를 등에 업고 손에는 장바구니를 든 19살 소녀가 서서 극장 벽에 붙은 벽보를 뚫어지게 바라보는데, 악극단 ‘단원모집’ 이란 벽보였습니다. 곧 바로 악극단을 찾아 한살배기 여섯째 동생을 등에 업고 심사위원들 앞에서 노래를 부릅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Love me tender〉일주일 뒤에 합격통지를 받고서 첫 공연길에 나서는데,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장 역할을 했던 맏딸 그녀는 눈물로 쓴 편지 한 장을 남기고 노점 좌판을 열기 위해 시장으로 향하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가슴에 품고 수원으로 떠납니다. 극단가수의 생활은 춥고 배고팠습니다. 그렇게 힘든 시기를 보낸 6년 후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1962년에 마침내〈삼다도 편지〉와〈울릉도 아가씨〉2곡이 실린 첫 앨범을 발표하고, 이듬해 마지막 기회라며 KBS 라디오 연속극 ‘남산골 샌님’ 주제가를 불렀는데, 결과는 대성공. 그 후 가수들의 꿈의 무대인 서울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 무대에도 서 가수의 길을 시작해 1964년〈영산강 처녀〉로 대중들에게 ‘가수 송춘희’ 이름을 확실하게 알립니다. 그해 이미자 선생님의〈동백 아가씨〉와 함께 가장 많이 전파를 탔던 노래 중 한곡이〈영산강 처녀〉였습니다. 그리고 2년 후인 1966년 봄. 세번 째 앨범〈수덕사의 여승〉이 10주 넘게 1위를 차지 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가수 송춘희는 10대 가수로 우뚝섰습니다. 당시 그녀가 무대에 오를 때마자 사회자가 꼭 던졌던 질문은 “수덕사에 가 보셨습니까?” “아직 못 가 봤습니다.” “수덕사에 가 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 노래를 부를 수 있어요?” 객석 여기저기서 폭소가 터져 나오고, 동시에 라디오를 듣던 청취자와 TV를 보던 시청자들의 웃음보가 함께 터졌다 합니다.
수덕사는 못가고 서울 인근 절을 찾아갔다는 송춘희는 1976년 미국 공연을 떠나 LA공연을 마치고 귀국길에 올라야 했는데, 미국에서 또다른 공연 제의를 받고 승낙을 했습니다. 며칠이면 끝날 줄 알았던 공연은 1983년까지 8년간 계속 이어졌고, 1977년 캐나다 공연때 광옥스님을 만나고 신세를 지던 중 어느 날 미국 시애틀에 있던 그녀를 만나기 위해 LA에서 2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왔다는 숭산스님을 만났는데 스님이 던진 한마디 “불자를 만들기 위해 왔습니다.” 이때부터 비로소 불자가 되면서 숭산스님께 받은 불명(佛名)이 ‘백련화(白蓮華)’였다고 합니다.
〈영산강 처녀〉노래비는 2000년 광주광역시와 전남 화순군을 잇는 ‘너릿재고개’에 세워졌고, 〈수덕사의 여승〉노래비도 2000년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수덕사 입구에 세워졌습니다.
올해 84세인 송춘희님은 매주 수·금요일 교도소 포교와 주말엔 군법당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수덕사의 여승〉– 김문응 작사, 한동훈 작곡, 송춘희(1966년 오아시스레코드사)
1절.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 적에
아아아아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2절. 산길 백 리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 염불하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맺은 사랑 잊을 길 없어 /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 적에
아아아아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가수 송춘희가 29살에 취입해 명성을 날린 대표적인 노래입니다. 1966년에 발표돼 지금까지 불려지는〈수덕사의 여승〉속세에 두고 온 애절한 사연들을 잊지 못해서 흐느끼는 비구스님이 그려지는 노랫말이지만, “노래에는 어떤 사연이 담겨 있을까?” “실화로 실제 인물은 있을까?”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시대를 앞서간 신여성 세 분이 계셨으니,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사의 찬미〉의 윤심덕과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화가·문장가 나혜석(羅蕙錫), 그리고 시인으로 유명한 김일엽 스님입니다. 이 신여성 세 분은 조선사회 남존여비(男尊女卑) 실체가 존재했던 시기에 시대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불꽃처럼 살며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건 여성들입니다. 나혜석은 사랑에 버림 받았고, 윤심덕은 현해탄에서 사랑과 함께 운명을 달리 했으며, 김일엽은 스스로 사랑을 버렸습니다.
김일엽은 실제로 수덕사 여승이었고, 우리나라 비구니계의 거목으로 추앙 받았던 인물입니다. 일엽 스님,「본명 김원주, 일엽(一葉)이란 필명은 소설가 춘원(春園) 이광수(李光秀 1892년∼1950년)가 그녀의 아름다운 필체에 반해 지어준 이름. 이런 사연으로 둘 사이 스캔들이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고, 연애대장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자유분방(自由奔放)하게 살았으며, 진취적인 삶을 여성운동으로 승화시켜 ‘자유연애론’과 ‘신 정조론’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부모의 중매로 얼굴 한번 본 적없는 남자와 혼인 했는데, 신뢰에 기반하지 못한 혼인 생활을 청산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유학생으로 일본으로 유학해 일본인 ‘오다 세이조’와 운명적인 사랑을 하게 되지만, 그는 아버지가 은행 총재로 일본 최고 명문가의 아들이며 규수제국대학 학생이었습니다. 남자 부모님의 반대로 두 사람은 혼인을 하지 못하고 헤어지는 아픔을 겪는데, 이때 둘 사이에서 아들이 한 분 태어났는데, 그 아들이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인정받는 유명한 동양화가인 김천 직지사 일당스님입니다. 운명과 같은 사랑도 아픔으로 남기고 일본에서 돌아온 김원주는 수덕사에서 여승이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사랑이 세파(世波)에 으스러지는 아픔을 이겨내고서, 또 다른 참 인생의 행로를 불자의 길로 선택한 일엽스님. 어느 날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어린 아들이 수덕사를 찾아 왔는데, 일엽은 “이 어미는 불자가 되었으니, 속세에 맺어진 너와 나의 모자 인연은 속세에서 끝이 났으니 더 이상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라”고 말하며 모자의 정을 모질게 끊고자 찾아온 어린 자식을 절 밖에서 재웠다 합니다. 이때 일엽스님의 절친인 나혜석이 아들을 수덕사 밖에 있는 수덕여관에서 같이 지내면서 어머니처럼 자신의 젖가슴도 만져보게 하고 그림도 가르쳤다고 합니다.」
1965년 고봉산과 함께 불렀던〈사장님 환영회〉라는 제목의 아주 재미난 노래를 들어보시죠.
또한 1968년에는 고봉산, 아리랑시스터즈가 1971년엔 고봉산, 하춘화가 듀엣으로 불렀습니다.
–〈사장님 환영회〉– 반야월 개사, 고봉산 편곡, 고봉산·송춘희(1965년 아세아레코드사)
1절. 사장님 환영회에 할 수 없이 갔다가 / 한시가 바쁘게 부랴부랴 왔는데
마누라 공연히 생트집만 잡지 말고서 / 어서어서 빨랑빨랑 데굴데굴 굴러나와
대문이나 열어주오 대문이나 열어주오 / 대문 좀 열어 주구료
여보!(쾅쾅쾅) 마누라!(쾅쾅) 대문 좀 열어줘, 대문!(쾅쾅쾅) 마누라(쾅쾅쾅)
(어부인) 아무리 그래도 소용 없어요 / 오늘은 들어오지 말고 썩 나가요
2절. 밤마다 저녁마다 남의 속을 썩이고 / 요핑계 조핑계 무슨 염체 있다고
공연히 큰 소리 사탕 발림 하지 말고서 / 어서 어서 팔랑 팔랑 소원대로 마음대로
좋은데가 있거들랑 깨알같이 찰떡같이 / 재미나 실컷 보구료
(사장님) 좋다. 나 간다. 마음대로 해라
3절. 싫거든 그만둬라 나는 간다 나는 가 / 내일 아침 신문에 유서 한장 날테니
마누라 공연히 후회만은 하지 말고서 / 어서어서 빨랑빨랑 버선발로 뛰어 나와
대문이나 열어주오 대문이나 열어주오 / 대문 좀 열어 주구료
이 노래는 1938년 박영호가 노랫말을 만들고, 김해송(본명 김송규, 이난영 남편)이 작곡해서 김해송 자신이 부른〈마누라 대문 열어〉라는 노래를 1965년 작사가 반야월이 가사를 새로 고쳐 쓰고, 작곡가 고봉산이 새롭게 편곡을 해서 가수 송춘희와 듀엣으로 불렀던 노래입니다.
1933년 3월 16일 조선일보 기사 한토막을 소개해 드리면은,「남성의 늦은 귀가는 예나 지금이나 가정불화를 만든다. 늘 귀가가 늦는 남편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 문을 잠가 버린 아내들 때문에 길에서 밤을 세우는 남자들이 많아졌다는 내용의 그림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 지난 4일 1950년대〈도라지 맘보〉〈시골버스 여차장〉〈아내의 노래〉〈야래향〉〈전화통신〉〈한강〉등 주옥같은 노래를 부르신 전통가수 심연옥(1927년 서울 출생)님이 살고있던 미국 뉴저지에서 생을 마감하셨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있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다음에는 충청북도편으로〈울고넘는 박달재〉와〈처녀농군〉에 대한 글을 올리겠습니다.
*상기 컬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