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 36. 부산광역시편〈해운대 엘레지〉〈용두산 엘레지〉(2021.11.08.)
어제(7일)는 ‘불세출의 가수 배호’가 1971년 11월 7일 타계한 지 50주기가 되는 날이었습니다.
부산광역시(釜山廣域市), 필자의 고향입니다. 녹산 생곡·세산·구랑, 가락 봉림, 명지 정겨운 곳.
1972년 5월 12일 부모님 따라 고향을 떠나 구리에 정착을 한지도 벌써 50년 세월이 흘렀네요.
동쪽은 동해, 서쪽은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와 김해시, 남쪽은 다대만·부산만·수영만을 끼고 있는 남해바다, 북쪽은 울산광역시 온양면·서생면, 경상남도 양산시, 김해시와 접하고 있습니다. 위치는 동경 128°45’∼129°18′, 북위 34°52’~35°23’이고, 면적은 765.82㎢, 인구수는 341만 925명(2020년말 현재)입니다. 행정청사는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주요 산(山)과 강(江)은 양산시의 원효산(元曉山, 922m)부터 금정산(金井山, 802m)·백양산(白楊山, 642m)·엄광산(嚴光山, 504m)·구덕산(九德山, 565m)·시약산(蒔藥山, 590m)·승학산(乘鶴山, 496m)으로 이어진 금련산맥(金蓮山脈)과 기장군 일광면 달음산(586m)부터 장산(萇山, 634m)·금련산(金蓮山, 419m)·황령산(荒嶺山, 428m)을 지나 영도 봉래산(蓬萊山, 394m)으로 이어지고, 서쪽으로는 양산시 원동면의 토곡산(土谷山, 855m)부터 김해시의 신어산(神魚山, 630m)·용지봉(龍池峰, 750m)· 불모산(佛母山, 802m)·굴암산(屈巖山, 662m)· 보개산(寶蓋山, 479m)을 지나서 가덕도의 연태봉(烟台峰, 495m)으로 이어진 신어산맥(神魚山脈)이 있습니다.
주요 하천으로는 낙동강을 비롯해서 양산시 원효산에서 발원하는 수영강(水營江), 금정산에서 발원해 수영강과 합류하는 온천천(溫泉川), 장산에서 발원하는 해운대천(海雲臺川) 등이 수영만으로 흘러들고, 또한 백양산에서 발원하는 동천(東川), 엄광산에서 발원하는 보수천(寶水川), 구봉산에서 발원하는 부산천(釜山川) 등이 부산만으로 흘러 들어 가며, 낙동강의 지류인 학장천(鶴障川)·구포천(龜浦川)·화명천(華明川) 등이 있습니다. 서부 평야지대는 대부분 고도 5m 이하의 낮은 충적평야로 이뤄져 있는데, 이는 낙동강 하구에 발달한 우리나라 제 1의 삼각주로 김해평야를 형성하며, 특히 을숙도·신호도·장자도를 중심으로 넓은 간석지가 발달해 있습니다.
–〈해운대 엘레지〉– 한산도 작사, 백영호 작곡, 손인호(1958년 빅토리레코드사)
1절.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 헤어지지 말자고 / 맹세를 하고 다짐을 하던 / 너와 내가 아니냐
세월이 가고 너도 또 가고 / 나만 혼자 외로이 / 그때 그시절 그리운 시절 / 못잊어 내가 운다
2절. 백사장에서 동백섬에서 / 속삭이던 그 말이 / 오고 또 가는 바닷물 타고 / 들려오는 지금도
이제는 다시 두번 또 다시 / 만날 길이 없다면 / 못난 이별을 던져버리자 / 저 바다 멀리 멀리
3절. 울던 물새도 어데로 가고 / 조각달도 기울고 / 바다마저도 잠이들었나 / 밤이 깊은 해운대
나도 가련다 떠나 가련다 / 아픈 마음 안고서 / 정든 백사장 정든 동백섬 / 안녕히 잘있거라
2020년에 시작돼 지금도 코로나가 전세계를 팬데믹 현상에 잠식시켜서 87억 명의 세계인들이 고통 속에 있을 때 우리나라도 그 고통 속에서 벗어 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국민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던 게 독자는 각 방송사의 ‘트로트 경연대회’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트로트 경연대회’에서 상위권에 들었던 무명가수인 송가인, 임영웅 등은 지금 최고의 가수가 되어서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명성과 부(富)를 쌓아가고 있는 것이 대중가수입니다. 영화배우, 탤런트, 코메디언, MC 등 연예인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부분이 저작권료인데, 가수와 작곡가, 작사가들은 노래가 불리워질 때마다 매월 정기적으로 저작권료가 입금되기 때문이죠.
그런데〈해운대 엘레지〉의 가수 손인호님은 가수가 부업이었습니다. 본업은 영화 녹음기사…
가수 손인호(1927년〜2016년)의 본명은 손효찬, 평북 창성에서 출생해 해방 후에 신의주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열린 이북도민 전체 노래자랑대회인 ‘관서콩쿨대회’에서〈집없는 천사〉를 불러 1등상을 차지했는데, 이때 심사위원장이 가수가 되려면 이남으로 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1946년 서울로 이사를 옵니다. 당시 작곡가 김해송이 이끌던 KPK악단에서 실시한 전속신인가수모집에 응모해 또 최고상을 수상한 후 악극단 생활을 시작했고, 이어 윤부길이 단장으로 있던 ‘부길부길쇼단’에서 가수활동을 했습니다. 전쟁 중에는 군예대에 편입돼 ‘군번없는 용사’로 위문공연을 했으며, 휴전 후 공보처에 입사해서 ‘대한뉴스’ 녹음을 담당하며 영화 녹음기사로 일하던 중 작곡가 박시춘을 만나 1954년〈나는 울었네〉를 취입했습니다.
그는 우리나라 영화녹음의 산증인인 처남 이경순이 설립한 한양녹음실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3500여 편의 영화를 녹음했고, 이때까지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영화의 약 70〜80% 정도를 녹음했다고 합니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 ‘빨간 마후라’, ‘미워도 다시 한번’ 등 영화 크레딧을 보면 ‘녹음 손인호’라는 자막을 볼수가 있습니다. 녹음기사로서 ‘대종상’, ‘청룡상’, ‘아시아녹음상’ 등 각종 영화제에서 8차례나 녹음상을 수상했습니다. 영화 ‘팔도강산’에도 출연 백마강에서 뱃사공으로 가수 박가연과 허민의〈백마강〉을 부르며 노를 젓는 장면이 있습니다.
본래 직업이 영화 녹음기사로 너무 바빠서 노래는 잠시 짬을 내어 취입했기에 음반만 발표하고 무대에 거의 출연을 안해 다수의 히트곡을 내면서도 ‘얼굴 없는 가수’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손인호가 무대에 출연한 것은 1956년과 1957년 ‘오아시스 그랜드쇼’ 1958년 딱 3번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2001년 가요 무대의 ‘얼굴 없는 가수 손인호편’에 아들인 가수 손동준과 함께 출연해〈울어라 기타줄〉〈청춘 등대〉등을 열창하며 처음으로 대중 앞에 얼굴을 선보였습니다.
손인호는 1956년〈비 나리는 호남선〉를 발표해 대중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이 노래로 인해 큰 고초를 겪기도 했습니다. 「1956년 대통령 선거 때 야당인 민주당 소속 신익희 후보가 유세 중 호남선 열차안에서 갑자기 사망하자 국민들이〈비나리는 호남선〉을 신익희 추모곡으로 불렀습니다. 이에 민주당에서는 당가로 활용했고, 노랫말을 신익희 선생 부인이 썼다는 헛소문까지 나돌면서 작사자인 손로원과 작곡가 박춘석, 노래를 부른 손인호는 경찰에 끌려가 노래를 만든 배경에 대해 집요한 조사를 받는 등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이 노래가 신익희 사망 3개월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져 이들은 혐의를 벗고 풀려났다고 합니다. 경찰 조사 중 한 토막. 경찰이 “이 노래를 취입할 때 어떤 감정으로 불렀냐?”고 묻자, 손인호 “가수는 감정을 가지고 노래를 해야지, 감정없이 노래를 부르면 그건 가수가 아니죠.”라며 답했다고 합니다. 손인호는 송해 선생님과 동갑이고 이북이 고향이라서 아주 친했습니다.
1958년 발표한〈해운대 엘레지〉는 작곡가 백영호가 손인호의 목소리에 매료되어서 그에게 주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해운대 엘레지〉노래가 발매되자마자 대중들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받는 곡이 됐고, 지금까지도 국민 애창곡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그의 대표곡은,〈하룻밤 풋사랑〉〈한많은 대동강〉〈짝사랑〉〈물새야 왜 우느냐〉〈동백꽃 일기〉
〈이별의 부산항〉〈돌아가자 남해고향〉〈함경도 사나이〉〈청춘등대〉〈남원땅에 잠들었네〉
‘해운대 해수욕장’은 ‘용두산’, ‘태종대’, ‘영도다리’, ‘구포다리’, ‘자갈치시장’, ‘부산 국제극장’과 더불어 부산의 얼굴입니다. 해마다 여름 피서철이 오면 각 방송국 뉴스에 나오는 단골 멘트가 “오늘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에는 피서철을 맞아 1백만 명의 피서객이 몰려 절정을 이뤘습니다.” 그런 해운대를 관할하는 해운대구청에서 2000년 주민들에게 해운대를 가장 잘 나타내는 노래를 공모 조사한 결과 압도적으로〈해운대 엘레지〉가 선정됐고, 그 것을 기념해 노래비를 해운대 해수욕장 중심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불과 80m 옆에〈돌아와요 부산항에〉노래비가 있습니다.
–〈용두산 엘레지〉– 최치수 작사, 고봉산 작곡, 노래 고봉산(1964년 아세아레코드사)
1절. 용두산아 용두산아 너만은 변치말자 / 한발 올려 맹세하고 두발 딛어 언약하던
한 계단 두 계단 일백 구십 사계단에 / 사랑 심어 다져놓은 그 사람은 어디가고
나만 홀로 쓸쓸히도 그 시절 못잊어 / 아아 아아 못잊어 운다
2절. 용두산아 용두산아 그리운 용두산아 / 세월따라 변하는 게 사람들의 마음이냐
둘이서 거닐던 일백 구십 사계단에 / 즐거웠던 그 시절은 그 어디로 가버렸나
잘있거라 나는 간다 꽃피던 용두산아 / 아아 아아 용두산 엘레지
〈용두산 엘레지〉이 노래에는 작사·작곡가를 겸한 가수 고봉산(본명 김민우)의 울분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전화위복(轉禍爲福)이랄까 고봉산이란 이름을 대중들에게 각인시킨 곡입니다.
고봉산(1927년〜1990년). 예명입니다. 남석일이란 예명도 있었죠. 별명은 고대포 ‘뻥이 쎄다’고 붙혀졌다 합니다. 황해도 연백 안악에서 출생해 1944년 금성좌 전속단원으로 데뷔, 6·25때 서울로와서 트럼본을 불며 무대가수로 꿈을 키워오면서 1954년 오리엔트레코드사와 1958년 도미도레코드사 소속가수로 활동했으나 무명가수에 불과했는데, 그러던 중 1961년 정식 데뷔곡으로 발표한〈아메리칸 마도로스〉(김진경 작사, 고봉산 작곡)이 히트해 가요계에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1988년 3월 7일 방송된 가요무대에 출연해서 직접 불렀던〈용두산엘레지〉에 담긴 고봉산의 울분은,「1957년 발표된〈울어라 기타줄〉(무적인=이재호 작사 이재호 작곡)은 원래 고봉산이 부르기로 하고 죽도록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지방 순회공연 중이던 어느 날 라디오를 통해서 가수 손인호(1927년〜2016년)이 부르는 것을 듣고 알게 되어 울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날부터 직접 노래를 작곡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피아노에 매달려 죽도록 작곡 공부를 하고, 아세아 레코드사 최치수 사장에게 가사를 의뢰했으며, 어느날 용두산 194계단을 단숨에 뛰어서 올라가 용두산 꼭대기(용두산공원)에서 비장의 곡을 준비해 두었던 것입니다.
1964년〈용두산 엘레지〉일명〈추억의 용두산〉이 완성되자 고봉산 또 죽어라 연습했습니다. 용두산에 올라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노래를 불렀고, 뱃고동에 맞춰 소리를 내질렀습니다. 용두산에 추억 한 올 사랑 한 줌이라도 묻은 사람들은 이 노래를 잊지 못합니다. (필자도 20여 년전 부산 서대신동 작은집에 놀러갔을 때 밤에 용두산에 올라가서 이 노래를 불러 본 좋았던 추억이 있습니다.) 사랑하다 실연한 청춘들은 아픔을 달래기 위해서 부르고, 고향 떠나 삶이 힘겨운 사람들은 추억을 더듬으면서 이 노래를 부릅니다. 그래서 대중들은〈용두산 엘레지〉를 57년의 세월을 건너 지금도 부르고 있습니다. 2019년 ‘미스트롯’ 진(眞) 송가인(1986년생)이〈용두산 엘레지〉를 불렀는데 송가인은 노래가 나온지 22년 후에 태어났고, ‘트롯트가 좋아’에서 전유진(2006년생), ‘미스트롯2’에서 김의영(1993년생)도 불렀던 노래가〈용두산 엘레지〉입니다.
고봉산이 작곡해 직접 부른 노래에는, 1961년〈아메리카 마도로스〉1962년〈등대불 사랑〉(이철수 작사), 1964년〈남포동의 밤 0시〉(배삼룡 작사), 1966년〈이별의 대구정거장〉(호심 작사)〈청춘항구〉(김영인 작사), 1965년〈사장님 환영회〉(반야월 개사 with 송춘희 1968년 아리랑자매, 1971년 하춘화, 원곡은 1938년 처녀림 작사 김송규 작곡 ‘마누라 대문열어’), 1973년〈잘했군 잘했어〉(반야월 작사 1965년 with 송춘희 1971년 하춘화)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작곡해 가수들에게 부르게 한 곡은 이미자 선생님의 1966년〈영산포 아가씨〉(반야월 작사)〈눈물의 묵호항구〉〈바닷가 처녀〉(이용일 작사, 1971년 하춘화 ‘물새 한 마리’ 원곡), 1967년〈목포의 달밤〉〈유달산아 말해다오〉(반야월 작사)〈유자꽃 피는 내고향〉(한산도 작사), 1968년〈비련〉〈추억의 하동포구〉1970년〈어이해 못오나〉1972년〈한송이 해당화〉(정두수 작사), 1972년〈섬처녀〉(반야월 작사), 1973년〈여자의 마음 2〉(김중순 작사)와
남진의 1967년〈목포의 연가〉(강사랑 작사), 1969년〈어머님〉(김중순 작사), 1970년〈철새〉(정두수 작사, 1972년 하춘화, 1973년 나훈아, 1974년 이미자 선생님 ‘바람따라 세월따라’),
하춘화 정식가수 데뷔곡 1971년〈물새 한 마리〉(이용일 작사)〈다정한 부부〉〈부부싸움〉〈아벡크 부부〉〈만약에 천만불이 생긴다면〉(반야월 작사), 1972년〈영암 아리랑〉(백암 작사) 등이 있고, 가수 정재은의 1981년 데뷔곡인〈항구〉도 고봉산 작사·작곡의 노래입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 황선우 작사·작곡, 조용필(1975년 지구레코드사)
1절.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 마다 / 목메어 불러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2절. 가고파 목이 메어 부르던 이 거리는 / 그리워서 헤매이던 긴긴 날의 꿈이었지
언제나 말이 없는 저 물결들도 / 부딪쳐 슬퍼하며 가는 길을 막았었지
돌아왔다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이 노래가 전국에 울려퍼질 무렵 재일 조총련계 재일동포들의 고향 방문이 러시를 이루었는데, 재일동포들은 하나같이 이 노래를 애창하고 불렀습니다. 조용필을 가요황제로 만든 바로 이 곡.
필자가 고등학교 2학년 때 후라이보이 곽규석님이 진행하던 ‘쇼쇼쇼’에 소개된 신인가수(?) 조용필이〈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르는 것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아담하고 참 앳띠다 생각했습니다. 원제는〈돌아와요 충무항에〉1970년 작사 김성술, 작곡 황선우, 1970년 통영출신 무명가수인 김해일이 불렀고, 1975년 황선우가 개사해 조용필이 불러 국민가요가 됐습니다. 김해일(1946년〜1971년) 본명 김성술. 24살 때인 1970년 유니버샬레코드사를 통해〈돌아와요 충무항에〉를 발표합니다. 그러나 1971년 12월 25일 서울 대연각호텔 화재사고로 요절했습니다.
2018년 10월 13일 통영에〈돌아와요 충무항에〉노래비가 세워집니다. “우리는 요절한 젊은 가수의 절절한 고향 사랑에 답하기 위해 통영항(옛 충무항)과 유년 시절 그가 살던 집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이곳 서피랑 공원에 노래비를 세운다.”고 기록해서 김해일을 기리고 있습니다. 필자는 또 한팀의 젊은 가수들을 떠 올립니다. 1971년〈젊은 연인들〉의 민병무, 방희준 듀오.
1977년 9월 3일 문화체육관(서울 중구 정동)에서 개최된 제1회 MBC 대학가요제는 서울대 농대 4학년이던 포크송 가수 이수만(현 SM회장)과 한양대 2학년이던 탤런트 명현숙이 진행을 맡았고 작곡가 황문평님이 심사위원장을 맡았습니다. 전국 333개팀이 참가해 예선을 통과한 18개 대학 19개팀이 출전해 150분 동안 펼친 열띤 경연은 지상파 TV로 전국에 생중계됐고, 그 결과 대상에는 샌드페블즈〈나 어떡해〉(상금 50만원과 트로피), 금상 박선희〈하늘〉은상 이명우〈가시리〉외 1팀, 동상 서울대 트리오(민경식, 정연택, 민병호)〈젊은 연인들〉외 1팀.
〈젊은 연인들〉노래가 만들어진 사연은「어느 겨울 날씨가 좋아 간단한 음식과 장비만 가지고 산행을 떠났던 대학 동아리 선후배는 정상이 가까워 올 무렵 갑자기 눈보라가 쳐 폐허가 된 산장을 겨우 찾았으나 땔감이 부족하자 제비뽑기로 동그라미가 그려진 종이를 뽑은 한 명을 하산 시키기로 했다. 후배가 동그라미가 그려진 종이를 뽑았고, 이들은 하산길은 위험하다며, 가진 음식과 장비를 모두 후배에게 줘서 내려보냈습니다. 4일 후 날씨가 풀리자 구조 대원들과 산장을 찾았지만 모두 몸을 붙이고 손을 꼭 잡은 채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구조 대원들이 손을 펼치자 그들의 손에는 동그라미가 그려진 종이가 하나씩 접혀 있었습니다.」 이 노래는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노래였던 것입니다. 또 하나의 비극적인 사연을 담고 있었습니다.
2017년 8월 5일 MBC-TV ‘서프라이즈’에서 방송된〈젊은 연인들〉의 내용과 필자가 알고있던 사연은,「대학에 입학한 민병무는 친구 방희준과 팀을 결성해 무명으로 밴드 활동을 하던 중 직접 만든 곡에 방희준이 가사를 붙힌〈젊은 연인들〉을 무대에서 선보이자 사람들에게 많은 호응을 받았고, 언젠가는 발표하자고 했다. 어느 날 친구들과 서울 대연각호텔에서 생일 파티를 했고, 친구들은 다음날 아침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간다.”며 일찍 나갔는데, 두 사람은 조금 더 잠을 청했습니다. 그들이 잠든 사이 큰 화재가 발생해 모두 사망했습니다. 〈젊은 연인들〉은 사장됐습니다. 당시 13살이었던 동생 민병호는 6년이 지나 대학생이 된 후, 형의 유품들을 다시 정리하던 중 악보를 발견했고, 형의 노래를 많은 사람들에게 다시 알릴 방법을 고민하던 중 대학가요제 포스터를 보고 친구들을 설득해서 제 1회 대학가요제에 참가해 수상했던 것입니다.
☞ 대연각 호텔 대화재 : 서울 중구 충무로동 위치, 1971년 12월 25일 오전 9시 50분경 발생, 원인은 프로판 가스 폭발(당시는 LP가스가 보편화되지 않았음.) 사망 191명, 부상 68명 발생. 소방관 528명, 의용소방대 113명, 경찰 750명, 공무원 400명, 군인 115명, 의료진 30명 출동, 재산 피해 8억 3,820만원, 이후 대형 건물에 스프링클러와 옥상 헬리패드 설치 의무화 법 개정
–〈돌아와요 충무항에〉– 김성술(김해일) 작사, 황선우 작곡, 김해일(1970년 유니버샬레코드사)
1절. 꽃피는 미륵산에 봄이 왔건만 / 님 떠난 충무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세병관 둥근 기둥 기대어 서서 / 목메어 불러 봐도 소식없는 그 사람
돌아와요 충무항에 / 야속한 내 님아
2절. 무학새 슬피우는 한산도 달밤에 / 통통배 줄을 지어 웃음꽃에 잘도 가네
무정한 부산배는 님 실어 가고 / 소리쳐 불러 봐도 간 곳 없는 그 사람
돌아와요 충무항에 / 야속한 내 님아
–〈돌아와요 부산항에〉– 황선우 작사·작곡, 조용필(1972년 지구레코드사)
1절.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 님 떠난 부산항은 갈매기만 슬피 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 마다 / 목메어 불러되도 말 없는 그 사람
돌아와요 부산항에 / 그리운 내 님아
2절. 해 저문 해운대에 달은 떳는데 / 백사장 해변가에 파도만 밀려 오네
쌍고동 울어 주는 연락선 마다 / 소리쳐 불러 봐도 말 없는 그 사람
돌아와요 부산항에 / 보고픈 내 님아
〈돌아와요 충무항에〉를 작사하고 노래를 했던 김해일과〈젊은 연인들〉을 작사한 방희준, 작곡한 민병무 세 사람은 똑같이 젊은 나이에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발생한 서울 대연각호텔 화재로 인해 유명을 달리한 안타까운 사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노래는 사장 되지 않았으며 50년 세월이 흘러간 지금까지도 우리 국민들은 잊지 않고서 애창을 하고 있습니다.
–〈석양〉– 정두수 작사, 박춘석 작곡, 이미자 선생님(1973년 7월 10일 지구레코드사)
1절. 꽃피던 봄날은 어느덧 가고 / 낙엽에 가을마저 저물어 가네 / 인생은 나그네
나그네 인생길은 / 홀로 갈 머나먼 길 / 하염없이 생각해도 / 가슴에 사무치는 옛일인데
가신 님의 이름 불러 보아도 / 석양은 말이 없네.
2절. 그늘진 비탈길 홀로 가자니 / 지나간 그 세월이 그리워지네 / 인생은 나그네
나그네 인생길은 / 홀로 갈 머나먼 길 / 가슴 깊이 그려봐도 / 모두가 지나간 옛일인데
가신 님의 이름 불러 보아도 / 석양은 말이 없네
〈석양〉29세 요절가수 배호를 그리면서 정두수 선생님이 노랫말을 쓰고 박춘석이 작곡하고 이미자 선생님이 취입해서 1973년 7월 10일 지구레코드사를 통해 발매한 배호 추모곡입니다.
2013년 10월 10일 편찬된 가요산맥 정두수 선생님의 ‘노래따라 삼천리’에서 발췌한 가수 배호,「가수 배호와 나는 무척 친했다. 그는 아세아레코드사의 전속으로 있었기에 나와는 그렇게 많은 작품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구레코드사로 소속을 옮기면서 사정은 사뭇 달라졌다. 1971년 한 겨울. 그날은 몹시 추웠다. 그때 그는 신장염이 악화돼 얼굴이 초췌해져 있었다. 약값과 치료비를 벌어야 했던 배호는 마냥 쉬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극장 공연이 잦았다. 하루는 극장 분장실에서 그를 만나기로 했다. 나는〈내 고향 남촌〉이라는 노래시를 갖고 나갔다. 노래시를 읽어 본 배호는 “하동이 그렇게 좋은 데입니까? 노래마다 고향 향수를 담았으니 우리 언제 한번 같이 갑시다.” 배호는 천재 가수, 음악성이 뛰어난 가수였다. 한번 암기한 것은 절대 잊지 않았다. 작품을 해독하는 능력도 탁월했다. 혼으로 노래하던 가수 배호. 그가 요절하자 그를 떠올리며 추모의 노래시를 썼다. 그 노래가 이미자가 부른〈석양〉이다.」
다음에는 충청남도편으로〈백마강〉〈서산 갯마을〉〈칠갑산〉에 대한 글을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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