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도 이젠 ESG 경영이다.
1976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자 미국 시카고 경제학파의 거장인 밀턴 프리드먼은 1970년 뉴욕 타임즈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이익’을 올리는 것이다”라고 선언한 바 있다. 이 말은 그 후 기업의 역할을 정의내리는 가장 강력한 문구로 자리매김하였으며, 지금도 그 위력은 맹위를 떨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실로 바벨탑과 같은 이 “정의”가 흔들리고 이를 대처할 새로운 정의가 곳곳에서 싹트는 중이다. “ESG”가 바로 그것이다. 환경을 뜻하는 E와 사회를 뜻하는 S 그리고 지배구조를 뜻하는 G로 구성되어 있다. 2004년부터 세계적인 공식용어가 되었고, 2025년부터는 ESG정보의 단계 공시를 의무화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더구나 코로나–19로 전 세계적인 팬더믹 상황과 맞물리면서 경제도 또한 불확실성의 시대에 접어들었으며, 기업의 가치가 재무 가치에서 비 재무 가치까지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개같이 벌어 정승처럼 쓰겠다는 것은 이제 과거의 유물이 되어 버렸다. 이젠 정승같이 벌어 정승처럼 써야만 기업의 생존할 수 있다는 역설의 가치인 셈이다. 가치가 불과 50여년에만 전도되었다. 물론 기후변화가 아니 기후 위기가 현실화 되었기에 가능하였지만 그것보다도 지식정보화사회로 접어듦에 따라 기업의 사회적인 책임과 투명 경영 같은 비 재무적인 가치가 필연적으로 요구되기에 이르렀다. 한마디로 환경도 바뀌고 사람도 바뀐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심지어 어느 투자자도 기업의 CEO에게 편지를 보내 2050년까지 탄소제로를 달성할 수 있는 사업계획을 발표하라고까지 한 바 있었다.
기업은 이제 돈버는 기계가 아니라 돈을 벌어드리면서 사회적인 주체로서 사회적인 책임을 지는 공동체의 필수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효율적인 조직임을 만천하가 인정한 것이나 진배없게 되었다. 생산에 있어서 초 격차 기업을 지향하여 수익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기업 운영에 있어서 남녀 고용 평등과 일자리 창출 그리고 노동 복지 등까지 임무로 하는 기업 경영인 셈이다. 이러한 ESG가 기업 표준으로 자리잡아나가는 추세에 한시라도 빨리 열차에 탑승해야 하며, 또 다르게 선진국의 사다리 걷어차기로 작동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만 할 것이다. 경제는 이렇게 혁신하고 있는데, 토끼처럼 앞으로 나아가는데 정치는 게으르고 오만방자하기까지 하다. 비전과 가치경쟁보다는 복수 경쟁과 누가 더 못 하나로 경쟁하고 있으니 말이다.
한국정치는 가히 혁명적 상황이다. 개인 사생활의 문제와 대장동 특검의 늪 속에 빠진 여당 후보와 대통령 꿈도 안 꾸어본 공무원 출신이 제1야당의 후보가 된 일이 바로 그것이다. 불임정당 소리를 들어도 싼 제일 야당이 강력한 대선후보를 정착하고 난 이후의 행보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모습이다. 오히려 정치 경험이 일천한 후보에게 전권을 내어달라는 협박과 으름장 그리고 오랜만에 고기 맛을 보는 박쥐처럼 흡혈에만 몰두하는 모습이 아닌가 말이다. 제이 야당의 안철수는 정책행보만 하고 있는 모습이 안쓰럽다. 존재감이 거의 없다. 제일야당의 대선후보의 단호한 모습을 기대한다. 우당탕탕 시끄러운 게 민주주의라는 후보자의 인식이 반가우면서도 정치의 ESG를 선언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국민을 생각하고 국민과 소통하고 국민에게 책임지는 ESG를 하루빨리 도입되기를 바란다.
시대가 변했고 사람이 변했다. 정치가 초저신뢰사회를 만들었다고 해도 누구하나 토다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정치가 이젠 신물이 나고 국민에게 지탄받아서는 아니 된다. 정치라는 기수가 경제라는 말을 잘 끌고 가야 한다. 아무리 기수가 문제 있더라도 우리는 항상 기수를 선택해야만 한다. 이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며 회피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진흙 속에서 피는 연꽃을 기다라는 마음으로 우리는 눈과 귀를 닫아서는 아니 된다. 대통령 선거가 이제 100일이 채 남지 않았다. 그래도 돈벌어 본 사람이, 일해 본 사람이 상식적이지 않는가 싶다. 가장 혁신적이고 효율적인 기업을 운영해 본 사람이 그래도 국민들과 눈높이를 맞추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상기 컬럼은 본자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