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NO 41. 황금심〈외로운 가로등〉박재란〈님〉(2021.12.13.)
지난 10일은 황금심님의 탄생 101 주년이고, 사흘 후(16일)은 박재란님의 83살 생신날입니다.
또한 12월은 한 해를 갈무리 하는 달. 김장도 끝마치고 본격적인 겨울의 문턱에서 건강하고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는 달입니다. 지난 7일은 ‘대설(大雪)’이었고, 다가오는 25일은 ‘하늘엔 축복! 땅에는 평화!’ 크리스마스, 그리고 31일 밤 12시를 넘기면서 2022년 임인년(壬寅年) 새해를 맞이하는 순간 ‘보신각종’이 33번 울립니다. 새해를 맞아 희망찬 내일을 위해 축복받을 소원을 빌지만 ‘외로운 가로등’ 밑에서 ‘님’을 기다리는 슬픈 사연은 간직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외로운 가로등〉〈님〉한해를 보내면서 사랑했던 사람, 사랑하고 있는 사람과 함께 하시죠.
가로등(街路燈), 말 그대로 길가를 비추고 있는 등(燈)입니다. 1882년 미국의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했고, 우리나라에는 5년 뒤인 1887년 3월 6일 경복궁(景福宮) 경회루(慶會樓) 옆 향원정(香遠亭) 연못가에 발전기를 설치해 고종 황제께서 기거하신 건청궁(乾淸宮)에 전깃불이 처음 켜졌습니다. 조선의 5대 궁궐은 경복궁, 경희궁, 덕수궁, 창경궁, 창덕궁이지만 건청궁을 포함하면 6대 궁으로 건청궁에서 외국 사신을 접견한 것은 1872년부터입니다. 1883년 미국에 유길준 등 10명의 사절단이 파견되어 에디슨전기회사를 방문한 후 뉴욕헤럴드와의 인터뷰 보도내용(10월 15일자) “일본에서 전기용품을 관람했다. 그러나 전기불이 어떻게 켜지는지는 몰랐다. 인간의 힘으로서가 아니라 마귀의 힘으로 불이 켜지게 된다고 생각했다. 이 곳에 와서 비로소 전기가 어떻게 켜지는지 알게 됐다. 또 지금까지 사용하던 석유등 보다 값싸고 안전하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조선에도 전기를 사용하고 싶다.” 그리고 가로등이 처음 등장한 것은 124년 전인 1897년 1월, 당시에는 석유를 사용한 등(燈)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가로등이 켜졌다는 것은 조선 백성들에게는 경악할 일이었죠. 오죽했으면 ‘도깨비불’이라면서 도망을 쳤다고도 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호기심이 많았던 사람들에게는 아주 신기한 구경거리가 되었기도 했었겠죠?
1898년 최초의 전기회사인 ‘한성전기회사’가 설립됐고, 1900년 4월 10일 민간최초의 가로등이 ‘종로전차정거장’에 3개 등, 600개 가로등이 설치돼 관리하던 가로등지기 직업도 생겼답니다.
필자는 2012년 7월 19일 ‘엘레지여왕 이미자 팬클럽’에 가입을 하면서 우리나라 전통가요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해서 이미자 선생님과 정두수 선생님을 만나 볼 수 있는 영광을 누렸고, 정선생님과는 가수 나일강과 함께 일년에 몇 번씩 만났으며,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산이리 자택도 몇 번을 방문해 가요사에 대한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 중 가요 황제 남인수와의 사제 관계, 오늘 소개해 드릴〈외로운 가로등〉에 담긴 사연이 가장 필자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정두수 선생님의 ‘가요따라 삼천리’에서〈님〉일명 ‘창살없는 감옥’과 함께 일화들을 소개하겠습니다.
먼저, 당시 ‘황금심양의 새로운 창법, 전수린군의 심혈을 부은 근대희유(近代稀有)의 걸작입니다.’ 광고 문구가 실렸던〈외로운 가로등〉입니다. 당시 황금심(18살), 이부풍(23살), 전수린(39살), 2020년 6월 8일 한국농업방송 ‘NBS 그 시절 그 노래’에서 가사·자막과 함께 황금심 선생님의 노래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사회 김성환의 마무리 멘트 “자! 이별의 정서를 담고 있는〈외로운 가로등〉은 부루스계의 노래에 탱고 리듬을 결합한 아주 특이한 노래가 아닌가 싶습니다.”
–〈외로운 가로등〉– 이부풍 작사, 전수린 작곡, 황금심(1939년 빅타레코드사)
1절. 비 오는 거리에서 외로운 거리에서 / 울리고 떠나간 그 사람을 내 어이 잊지 못하나
밤도 깊은 이 거리에 흐미한 가로등이여 / 사랑에 병들은 내 마음속을 너마저 울려 주느냐
2절. 흐미한 등불 밑에 외로운 등불 밑에 / 날 두고 가버린 그 친구를 내 어이 잊지 못하나
밤도 깊은 이 거리에 흐미한 가로등이여 / 사랑에 병들은 내 가슴속을 너마저 울려 주느냐
〈외로운 가로등〉황금심이 1939년에 부른 노래로 빅타레코드사를 통해서 발매를 하였습니다.
「1965년 어느 봄날 주말. 나(정두수 선생)은 친구를 따라 처음으로 뚝섬 경마장을 찾았다. 소설가 김동리 선생님을 뵈었다. 선생님은 경마를 보시는 걸 좋아하셨다.
뚝섬경마장에 오면, 봄 여름이면 휘휘 늘어진 능수버들이 좋아서다. 김동리 선생님을 가까운 한식집으로 모셨다. 능수버들로 에워싸인 버드나무집. 민물장어와 파전, 동동주가 유명한 집이었다. 능수버들이 휘휘 감기는 봄비 소리 때문일까? 약간 취기가 오른 김동리 선생님은 한 곡조 뽑기도 했다. 〈외로운 가로등〉이었다. “비오는 거리에서 외로운 거리에서/ 울리고 떠나간 그 옛날을/ 내 어이 잊지 못하나..”」필자가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여인의 아픔과 슬픔 보다도 황금심 선생님 목소리에 노래가 더욱 슬프게 들렸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처량하면서도 애절한 노랫가락 기가 막힙니다.
「1937년도 저물어 가는 겨울, 이 날따라 비는 스산하게 뿌렸다. 작사가 이부풍(본명 박노흥)은 한잔 술에 기분 좋게 취해 약간 비틀대는 걸음으로 명동을 걸어 나왔다. 밤은 이미 깊어 있었다. 그는 이날 서민호와 함께 창설한 ‘빅타 가극단’의 기념 행사에 참석한 후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가 명월관(현재 동아일보 사옥자리) 앞을 지나는데 골목길 가로등 밑에서 웬 여인이 우산을 받쳐 든 채 서 있었다. 그 여인은 명월관을 나오는 손님들의 얼굴을 일일이 지켜보고 있는 게 아닌가. 이부풍은 이 날은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그러나 다음 날 밤에도 이부풍은 가로등 밑, 바로 그 자리에 서 있는 여인을 보자 뭔가 ‘사연이 있는 여자’일 것이라는 생각이 퍼뜩 스쳤다. 그 다음 다음 날도 그 여인은 그 곳에 있었다. 이날 밤. 이부풍은 그 여인에게 “저, 결례되는 말입니다만…. 매일 저녁 왜 이 자리에 계신지?” 그러나 여인은 말이 없었다. 그저 쓸쓸한 미소만 띨 뿐이었다. 가까이서 본 여인은 젊었다. 갸름하면서도 우수 띤 얼굴은 청초했다. 가로등 밑의 여인은 처연하리만큼 아름다웠다. 그는 용기를 내 다음 날 낮에 한번 만나줄 것을 간청했다. 여인은 그러나 얼굴만 붉힐 뿐 처음에는 거절했다. 그러나 자신이 작가라는 걸 밝히자 그제야 여인은 응해 주었다. 여인은 짐작대로 깊은 사연이 있었다. 여인은 기생이었다. 가난한 애인의 학비를 대주기 위해 여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잠시 화류계에 몸을 던진 것이다. 하지만 정절만은 수많은 유혹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지켰다. 애인과는 장래를 약속한 사이였기 때문. 그 여인의 헌신으로 애인은 고시에 합격해 검사가 됐다. 그러나 정작 출세를 한 애인은 여인을 멀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처음엔 바쁘다는 핑계를 대다 나중엔 모든 것을 과거사로 돌리자는 거였다. 그러나 여인은 애인을 단념하기엔 이미 늦었다. 못 버릴 건 정(情). 거기다 뱃속에는 애인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애인 알리기 위해 저녁마다 명월관 가로등 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검사가 된 애인이 이곳을 자주 출입한다기에…. 먼발치에서 애인의 얼굴만이라도 보고 싶었다. 검사가 된 애인을 바라보는 이목도 있고 해서 그냥 그와 마주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이는 제게 안 와도 좋아요, 제겐 이제 귀여운 우리 아기가 태어날 테니까요. 그러나 아이를 위해서도 이 사실을 그이에게 알려야 한다는 게 제 심정입니다.” 이부풍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 가련한 여인을 위해 노래시를 쓴다. 노래시를 쓰는 그의 손이 분노에 못 이겨 부르르 떨렸다.」
〈외로운 가로등〉이 발표된 지 82년이 지난 지금 2021년! 그 때나〈동숙의 노래〉가 발표된 1966년이나 지금이나, 동서고금을 막론해 드라마에서나 나올만 한 “사랑이 뭐 길래! 고두심!” 사랑의 배신과 그 당시 사회 풍조를 고발한 이 노래〈외로운 가로등〉은 전수린이 작곡하고 황금심 선생님이 노래를 불러 우리 가요사의 명가요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습니다. 내년 봄날, 봄비가 내리는 저녁. 옆지기와 함께 막걸리 한 잔씩 드시면서〈외로운 가로등〉한번 들어보시죠.
‘가요무대’에서 가수의 다양한 목소리 색깔로 들을 수 있는〈외로운 가로등〉을 들어 보십시요.
최유나 2013년 3월 23일, 2020년 2월 3일, 김연자 2017년 2월 13일, 김용임 2021년 1월 18일, 황금심 선생님 아들인 가수 고영준도 2019년 5월 8일 실버TV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2012년 10월 2일 MBC 추석 특집으로 방송된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 공연 때 흑산도 예리항 특설무대에서 이미자 선생님께서 부르신〈외로운 가로등〉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국민가수 주현미가 2019년 11월 21일부터 우리나라 전통가요에 대한 이야기꺼리와 해석을 달아 아코디언과 기타 반주에 맞추어 부르는 주현미의〈외로운 가로등〉도 아주 아주 좋습니다.
〈외로운 가로등〉은 여러 명의 가수들이 리메이크해 불렀는데, 1965년 이미자 선생님, 1979년 은방울자매, 1980년 박경애, 1981년 백영규, 1982년 김연자, 1985년 조미미, 1987년 이순길, 1995년 유성민, 2003년 한영애, 2006년 신상희, 2013년 장윤정, 2017년 고영준 등이 있습니다.
☞ 황금심(1921년〜2001년, 본명 황금동) 한국의 ‘마리아 칼라스(1923년〜1977년)’ 마리아 칼라스는 1950년대 프리마돈나, 오페라의 전설이었습니다. 황금심(黃琴心)은 부산 동래에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서울 청진동에서 보내던 중 15살 때인 1936년 ‘오케레코드사 전속가수 선발대회’에서 우승해 예명 황금자(黃錦子)로〈지는 석양 어이하리〉〈왜 못오시나요〉로 데뷔,
이듬해 작사가 이부풍이 빅타레코드사로 전속시켜 예명 황금심으로〈알뜰한 당신〉을 발표해 대중들에게 공전의 히트를 얻었고, 이때부터 작사 이부풍, 작곡 전수린, 노래 황금심 트로이카 전성시대가 열렸으나, 황금심은 소속사 이중 계약으로 법원에 고소되기도 했습니다. 흠, 그때나 지금이나 스카웃 열풍은 대단한 것 같아요. 또 이 무렵에 가수 김정구의 형 김용환이 설립한 ‘반도악극단’에서 활동했고, 공연장으로 이동하던 열차 안에서 당시로선 노총각인 10살 연상〈타향살이〉가수 고복수를 재회해 혼인하여 아들과 딸 등 8식구의 음악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아버지 고복수, 엄마 황금심, 큰아들 가수 고영준, 둘째아들 복음가수 고영민, 셋째아들 작곡가 고병준, 둘째며느리는 1983년 MBC 강변가요제 대상곡〈이름없는 새〉의 가수 손현희입니다.
대표곡〈알뜰한 당신〉〈삼다도 소식〉〈뽕따러 가세〉〈울산 아가씨〉〈장희빈〉등 4000여곡.
-〈님〉- 차경철 작사, 한복남 작곡, 박재란(1962년 도미도레코드사)
1절. 목숨보다 더 귀한 사랑이건만 / 창살 없는 감옥인가 만날 길 없네
왜 이리 그리운지 보고 싶은지 / 못 맺을 운명 속에 몸부림치는
병들은 내 가슴에 비가 내린다
2절. 서로 만나 헤어질 이별이건만 / 맺지 못할 운명인 걸 어이 하려나
쓰라린 내 가슴은 눈물에 젖어 / 애달피 울어 봐도 맺지 못할 것
차라리 잊어야지 잊어야 하나
1961년 겨울 어느 날. 당시 인기 정상의 가수 박재란은 연예인 위문공연단과 전방부대를 찾아 위문공연을 했습니다. “와! 와아아, 와아” 무대가 설치된 연병장에선 한 겨울 칼바람을 가르는 함성이 계속해서 터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위문공연단은 추운 날씨도 아랑곳하지 않고 장병들과 어울려 하나가 되었습니다. 〈맹꽁이 타령〉,〈푸른 날개〉,〈럭키모닝〉 등 발랄하고 빠른 템포의 노래는 그녀의 미모에다 사근사근한 폼, 나긋나긋한 말씨로 장병들을 열강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는데, 연신 앙콜이 터져 나오고 그때마다 박재란은 두 말없이 계속해서 무대에 섰습니다.
“저는, 오늘 장병 여러분들께 신곡〈님〉을 선사하기에 앞서 이 노래의 작사가 차경철 선생님을 한번 찾아 주셨으면 하는 간절한 부탁을 올립니다. 차선생님은 2년 전에 입대하면서 이 애절한 가사를 만들어서 작곡가 한복남 선생님께 보냈습니다. 지금쯤은 아마도 상병이 되셨겠네요. 여러분! 이 노래 많이 불러 주세요. 바로 여러분의 동료가 작사가란 걸 기억해 주시고, 아울러 이 박재란이도 많이 사랑해 주셔요. 호호호….” 장병들은 작사가가 같은 부대의 동료라는 말에 더욱 열광을 했습니다. 노래 작사가가 ‘육군 장병’이란 말이 공감대를 불러 일으켰던 것입니다.
바로 이 시각에 이 노래의 작사가 차경철(본명 차익준) 상병은 보초를 서며 박재란이 부르는 〈님〉을 스피커를 통해 듣고 있었는데, 그는 울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습니다. 그러나 윤희와의 추억은 그를 끝내 울게 만들었고, 그는 주위를 맴돌며 “윤희야! 윤희!” 목이 터져라 불렀습니다.
차경철의 고향은 경상남도 울주. 윤희는 소꿉친구. 둘은 한 마을에 살며 십오리 솔밭길을 함께 걸어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그는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부산으로 이사가는 바람에 헤어져야만 했습니다. 당시 중학교는 6년제, 두 사람은 방학이 아니고는 만날 수 없었고, 방학 때 만나면 그들은 태화강변이나 칠암포 바닷가를 찾았으며, 무슨 사랑이나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없었지만 어느덧 ‘연인’ 사이가 됐습니다. 그러나 삼대 독자였던 할아버지는 일찌감치 친구의 손녀딸을 손주 며느릿감으로 점 찍어 두고 있었습니다. 어른들끼리의 정혼은 당시로선 그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방황을 했고, 두 사람은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생각에 술에 수면제를 타서 마시기도 여러 번 했으나 그 때마다 미수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는 미칠 것만 같은 심정을 가눌 길이 없어 도피처로 군대에 자원 입대했습니다. 입영열차에 타기 하루 전날 밤. 그는 밤새워 술을 마시며〈님〉이란 가사를 썼고, 이튿날 그는 이 가사를 부산 아미동에 있던 도미도레코드사 한복남에게 부쳤던 것입니다. 〈님〉이란 노래가 대 히트를 하면서 영화 ‘창살 없는 감옥’을 만들게 했습니다. 〈님〉노래비는 그의 고향 울주군 온양읍 대운산 앞에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차경철 작사, 한복남 작곡〈남원 땅에 잠들었네〉는 1960년 4월 12일, 만 16세 김주열(1944년〜1960년) 열사의 신문 보도를 보고 넋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 손인호가 불렀습니다.
「1절. 원통하게 죽었구나 억울하게 죽었구나 / 몸부림친 3·15는 그 누가 만들었나/ 마산 시민
흥분되어 총칼 앞에 싸울 적에 / 학도 겨레 장하도다 잊지 못할 김주열 / 무궁화 꽃을 안고
남원 땅에 잠들었네. 2절. 남원 땅을 떠날적에 성공 빌던 어머니는/ 애처로운 주검 안고 목메어
슬피 울때 / 삼천겨레 흥분되어 자유 민족 찾으려고/ 학도 겨레 장하도다 잊지못할 김주열 /
무궁화 꽃을 안고 남원 땅에 잠들었네」김주열 열사 고향은 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
〈남원 땅에 잠들었네〉노래비는 2000년 창원 마산회원구 구암동 ‘3.15민주공원’에 세워집니다.
다음에는 크리스마스를 맞아〈미사의 노래〉, 〈미사의 종〉등 3곡에 대한 글을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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