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 44. 대전역 개통 117주년 〈대전 부르스〉(2022.01.03.)
임인년(壬寅年),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절). 지난 1월 1일은 ‘대전역’(大田驛)이 생긴지 117주년되는 날인데, 그때가 1905년이었죠. 역광장에는 1999년 9월 우송대학에서 한국철도 100주년(1899년 9월 18일 경인선) 기념으로 코레일에 기증한〈대전부르스〉노래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2016년 50톤의 무게 때문에 지반 침하를 이유로 철거해서 지금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해 애석합니다. 대전(大田)하면 떠오르는 게「1993년 대전 엑스포」당시 대단했지요. 필자도 직장 직원 연찬회를 대전엑스포장으로 잡았는데 부족한 예산으로 인해 3차에 걸쳐 사전 답사를 했고, 800명의 인원을 3기로 나누어서 인솔을 했습니다. 단체 입장권 가격이 7천원이었는데 예산이 부족해 먹고 자는 장소를 계룡산에 위치한 청소년수련관으로 정했지만 그래도 모두 즐겁게 연찬회를 마쳤는데, 아주 재미있는 사건이 한가지 벌어졌습니다. 아침에 인원점검을 하는데 처녀 총각 두명이 안보였습니다. 난리가 났죠. 직장으로 복귀한 후 연락이 겨우 닿았는데, 둘이서 그날 밤 인근 모텔에서 잤다고 하더군요. 화가 날 때로 났지만 둘이 꼭 혼인해야 한다고 약속하라 했더니 꼭 혼인할 것이라 대답해 용서해 줬습니다. “용기있는 자만이 미인을 얻는다.” 이듬해에 혼인을 한 후 지금은 딸 2명과 4식구가 잘 살고 있습니다.(^^)
대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중가요가 1959년 안정애〈대전 부르스〉이지만 그 보다 1년전에 나온 가요가 있었으니, 바로 경상북도 칠곡 태생의 가수 남성봉의 곡〈눈물의 대전역〉(최치수/김성근)입니다. 또다른 곡은〈바닷가에서〉〈사랑이 메아리 칠때〉의 가수 안다성이 1962년 부른〈못잊을 대전의 밤〉과〈춘천호의 밤〉을 부른 아나운서 출신 가수 1호 이정민(본명 이규환)의 1968년 오아시스레코드사 발매〈대전역 광장〉(지웅/최녹영) 등이 있습니다.
필자가 학창시절과 군인·직장 다닐 때 고향 김해를 갈 때에는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내려 갔는데, 대전역에 기차가 도착할 쯤이면 스피커를 통하여 들려오는 역무원의 정겨운 목소리 “승객 여러분! 열차가 곧 대전역에 도착합니다. 대전역에서 10분간 정차하겠습니다.” 잠시후 기차가 정차하면 후다닥 뛰어서 가던 곳이 플렛폼에 있던 일천원짜리 ‘가락국수’ 판매대였죠.
높이 쌓아놓은 가락국수 사발에 국수 다발을 넣은 철망을 뜨거운 국물에 몇 번 휘휘 흔들어서 고춧가루 한 숟가락과 파 몇점, 어떤 때에는 고춧가루 한 숟가락과 단무지 몇점이 함께 나온 가락국수를 후후 불면서 내가 내린 기차가 떠나나 힐끗힐끗 쳐다보며 먹던 추억이 아련합니다.
–〈대전 부르스〉– 최치수 작사, 김부해 작곡, 안정애(1959년 신세기레코드사)
1절. 잘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 떠나가는 새벽 열차 대전발 영시 오십분
세상은 잠이 들어 고요한 이 밤 / 나만이 소리치며 울 줄이야
아아아아 보슬비에 젖어 우는 / 목포행 완행열차
2절. 기적소리 슬피 우는 눈물의 프랫트홈 / 무정하게 떠나가는 대전발 영시 오십분
영원히 변치말자 맹세했건 만 / 눈물로 헤어지는 쓰라린 심정
아아아아 붙잡아도 뿌리치는 / 목포행 완행열차
〈대전 부르스〉안정애가 1959년 부른 노래로 신세기레코드사에서 발매한 앨범에 수록됐습니다.
1959년 어느 봄날. 신신레코드사 사업부장 최치수는 종로5가 금호다방에서 작사가 손로원을 만나 메모지에 적힌 노랫말을 건네며 “내 딴엔 고심해서 써 본긴데, 괜찮을지 우짤지, 여하간 한번 봐 주시기나 하이소.” 울산이 고향인 최치수는 다방아가씨들 사이에 ‘보이소! 부장’으로 불렸는데, 커피 등을 주문할 때 꼭 “보이소! 보이소!하고 불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14년간 열차 검표원 등 열차 승무원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어 열차에 대한 추억과 애정이 남달랐습니다. 제목이 ‘대전발 영시 오십 분’ 최치수는 레코드사에 입사해서도 수금 때문에 한달에 한번씩은 완행열차를 타야 했습니다.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전주 등 꼭 야간열차로만 다니던 어느날 밤 11시 40분경. 산책을 나왔던 그의 시선이 대전역내 플랫폼 가스등 아래에 머물렀습니다.
이름 모를 젊은 청춘남녀가 두 손을 꼭잡고 눈물이 글썽 글썽한 시선으로 애틋하게 이별을 아쉬워하고 있는 광경을 보았고, 잠시 후 남자를 떠나 보낼 목포행 0시 50분 증기기관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오자 두사람을 서로 안고서 눈물짓고 있었습니다. 두사람의 헤어지는 광경을 보고 곧바로 묵던 여관으로 되돌아가서 그들의 사연을 생각하면서 한편의 노랫말을 완성했습니다. ‘대전발 영시 오십분’. 최치수는 수금 때문에 대전역 인근에서 유숙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최치수는 손로원에게 보여주고 합격점을 받은 후 작곡가 김부해를 찾아가 작곡을 맡겼습니다. 그러자 김부해는 곡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야간열차를 타보기도 했습니다. 완행열차 그것도 야간완행열차의 전경과 열차를 탄 사람들의 그리움까지 잘 표현을 하려면은 블루스 리듬 밖에는 없다고 판단한 그는 일사천리로 곡을 만들었는데 걸린 시간은 딱 3시간. 그렇게〈대전 부르스〉는 탄생을 했습니다.
노래를 부를 가수는 데뷔곡〈밤비의 부르스〉로 블루스를 잘 부르는 ‘안정애’로 정해 녹음에 착수했습니다. 음반이 발매된 지 3일만에 서울과 지방의 도매상들로부터 주문이 쇄도했고, 이에 신신레코드사에서는 야간작업까지 강행하면서 음반을 찍어내어 창사이래 가장 많은 판매량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레코드사의 사장은 작사가 최치수와 작곡가 김부해, 가수 안정애에게 특별보너스와 함께 월급을 인상해 주는 혜택까지 주었습니다. 대중들은 모임이 있을 때 술이 몇 순배가 돌면은 누군가 좌중을 헤치고 비틀비틀 일어나 술병을 입에 대고 부르는 노래가〈대전부르스〉였습니다.
이 노래에는 우리의 전통적 정서를 잘 담고 있습니다. 만남과 이별, 귀향과 가출, 생성과 소멸의 상반된 이미지를 내포한 역(驛)을 내세워 1960년대에 어려웠던 소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었던 것입니다. 1959년 2월 제33열차로 탄생한 이 기차는 밤 8시 45분 서울역을 출발, 대전에 0시 40분 도착, 다시 목포를 향해 0시 50분에 출발했는데, 지금은 서대전역을 통해 호남선이 다니지만 당시는 대전역을 거쳐갔습니다. 이 열차를 이용한 사람들은 대전역 인근의 시장에서 광주리 물건을 팔던 농사꾼이거나 술에 얼큰하게 취해 막차를 기다리던 지방사람들이었고. 방학철에는 캠핑이나 귀향하는 학생들로 새벽열차가 북적대기도 했습니다. 대전발 0시 50분 열차는 지금은 없는데, 1960년 2월 대전발 03시 05분 발차로 시간이 변경되면서 짧은 수명을 다했습니다. 최치수는 뒷날 아세아레코사를 설립해 사장님이 됐고, 고봉산〈용두산 엘레지〉박정심〈목포는 항구더라〉배호〈물방아 고향〉, 〈안개낀 장충단 공원〉, 〈정다워라 내고향〉, 〈황토 십리길〉등을 작사했습니다.
1959년 가수로 데뷔, 허스키하고 애조 띤 목소리로 한 시대를 풍미한 ‘블루스의 여왕’ 안정애.
본명은 안순애로 1936년 경상남도 하동에서 태어나서 서울 종로에서 가수 고복수가 운영하던 ‘동화예술학원’에서 이미자 선생님 등과 함께 가수의 길을 걸었습니다. 어린 시절 한 작명가로부터 이름에서 달이 구름에 가린 형상이라 객지로 자리를 옮겨야 빛을 발한다는 말을 듣고 바로 서울로 상경해 가수의 꿈을 키웠던 것입니다. 그의 형제들은 모두 열 두명. 형제들 모두 노래를 잘했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은 집안에서 노래를 가장 못한 축에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동시외버스터미널 앞에 위치한 커다란 집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연예인들이 지방공연을 오면 종종 그녀의 집에서 기거했다 합니다. 그런 환경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들을 보면서 더욱 가수의 꿈을 키웠고, 특히 그 당시 신인가수였던 박재란과는 친구처럼 지냈다고 합니다. 1956년 그녀가 스무 살이 되던 해에 가수의 꿈을 안고서 몰래 가출을 감행했습니다.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으나 정작 가수의 길은 전혀 찾을 길 없어서 두달 간은 친구 언니집에서 일을 거들어주고 기거하다 결국 고향 하동으로 되돌아 갔습니다. 안정애는 몇 개월 뒤 또다시 몰래 집을 다시 빠져 나와 서울로 상경해 레코드사의 특약점 등을 돌아다니면서 가수 데뷔의 길을 찾아보다가 우여곡절 끝에 겨우 가수 고복수가 설립해 운영하던 동화예술학원에 등록해 가수 수업을 받았던 것입니다. 학원에 등록한지 1주일만에 신인콘테스트 선발무대에 서게되었는데, 심사기준은 블루스, 트로트, 발라드를 각각 한곡씩 모두 세곡을 부르게 되어 있어서〈카츄샤의 노래〉, 〈봄날은 간다〉, 〈과거를 묻지 마세요〉를 불러 신인가수로 발탁이 됐습니다. 그때에 신세기레코드사 문예부장이었던 작곡가 김부해에게 픽업되어〈밤비의 부르스〉을 첫 취입곡으로 음반을 발매했습니다. 가수안정애는 데뷔곡인〈밤비의 부르스〉를 NG없이 단 한번에 녹음을 끝냈다고 하는데 이 노래가 빅히트를 하면서 그녀는 단 한순간에 가요계의 신데렐라로 급부상했습니다. 〈밤비의 부르스〉취입때 예명 안정애를 썼다고 합니다. 그후 신세기레코드사의 복덩이로 사랑 받았고, 미 8군무대에서도 출연해 줄 것을 요청했고 영화사에서도 영화 출연을 제의했지만 레코드사 강윤수 사장은 가수 수명이 단축될 것을 우려해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안정애의 대표적인 블루스 곡들은〈대전 부르스〉〈밤비의 부르스〉〈순정의 부르스〉〈다방 부르스〉〈도라지 부르스〉〈연락선 부르스〉〈여인 부르스〉〈탄식의 부르스〉등 총 20여 곡이 있고, 여섯살 아랫 동생인 안숙자와 함께 부른〈자매의 부르스〉도 있다고 합니다.(^^)
1959년 가수 안정애가 부른〈대전 부르스〉는 1999년 조용필이 리바이벌해 또다시 빅히트를 했고, 대전역 광장에〈대전 부르스〉노래비가 세워졌을 때 가수 안정애 이름은 없었다 합니다. 안정애는 1987년 4월 20일과 1987년 9월 14일 ‘가요무대’에서〈대전 부르스〉를 불렀습니다.
영화 ‘대전발 0시 50분’. 1963년 제작 동아영화사(이성근), 기획 임병호, 각본 이종기, 음악 김부해, 감독 김화랑·이종기, 출연 최무룡, 이민자, 최지희, 신성일, 양미희, 유계선, 황정순, 남양일, 김동원, 서영춘, 박성대, 독고성, 문태선, 주란지, 김주오, 임운학, 아역배우 박종화 등이 출연해 1963년 9월 4일 서울「국제극장」에서 개봉했고, 영화 타이틀은 “마즈막 기적(汽笛)이 울리는 비극(悲劇)의 종착역(終着驛)에서 목메어 부르는 청춘애곡(靑春哀曲)” 줄거리는「육군 소위인 그(최무룡)에게는 장래를 언약한 한 여인(이민자)가 있는데, 그녀는 정식으로 약혼할 것을 성화같이 독촉을 한다. 그러나 그는 꿈에서도 잊지 못해하는 누님(최지희)를 찾아 누님의 축복 속에서 약혼식을 갖는 것이 소원이어서 하루 하루를 미루어 온다. 그러던 어느날 그렇게도 그리던 누님을 만났으나, 누님이 어느 빠의 여급으로 전락했을 줄이야. 때마침 그에게 전방 수색대장의 임무가 떨어지자 살아있기를 원치 않는 그는 죽음으로써 임무를 수행한다.」
–〈사랑은 기차를 타고〉– 전우 작사, 외국곡, 김인배 편곡, 케리부룩(1968년 지구레코드사)
1절. 사랑은 둘이서 기차를 타고 속삭여요 / 시원한 벌판을 달려가면서 속삭여요
하늘에 흐르는 흰구름처럼 포근한 마음을 / 꿀같은 당신의 사랑에 간직해요
2절. 사랑은 둘이서 기차를 타고 속삭여요 / 시원한 벌판을 달려가면서 속삭여요
무성한 수풀의 푸르름처럼 싱싱한 젊음이 / 달콤한 당신의 사랑에 웃음져요
3절. 사랑은 둘이서 기차를 타고 속삭여요 / 시원한 벌판을 달려가면서 속삭여요
하늘에 흐르는 흰구름처럼 포근한 마음을 / 불같은 당신의 사랑에 간직해요
4절. 사랑은 둘이서 기차를 타고 속삭여요 / 시원한 벌판을 달려가면서 속삭여요
무성한 수풀의 푸르름처럼 싱싱한 젊음이 / 달콤한 당신의 사랑에 웃음져요
무성한 수풀의 푸르름처럼 싱싱한 젊음이 / 달콤한 당신의 사랑에 웃음져요
〈사랑은 기차를 타고〉자매듀엣 케리부룩이 1968년에 부은 노래로 지구레코드사에서 발매한 ‘김인배 작곡집, 조영남의 딜라일라’ 앨범에 수록된 곡으로, 이 음반은 조영남 데뷔음반입니다.
1965년 프랑스 샹송가수 ‘마조리 노엘(1945년〜2000년)’이 발표한 ‘Dons Le Wagon’은 ‘같은 기차 간에서’로 직역되는데, 1968년 전우가 번안 가사를 작곡가 김인배가 편곡해서 자매듀엣 ‘케리부룩’이 불러 국민 샹송곡으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노래입니다. 그 당시 라디오와 동네 전파사 등에서 흘러나오면서 이 샹송 원곡도 덩달아 인기를 끌었습니다. 특히 학창시절 완행열차를 타고 등교할 때가 그리워 질때 더욱 듣고 싶은 노래입니다. 또한 젊은시절에 기차나 버스를 혼자 타게될 때면, 노래 가사처럼 내심 멋진 사람이 옆에 앉아주기를 기대하곤 했었죠.
옛 추억을 떠 올리게하는 경쾌한 올드 샹송곡〈사랑은 기차를 타고〉절로 미소를 짓게 합니다.
‘케리부룩’은 부산방송국 출신의 가수로 김정희와 김은영으로 구성된 여성 듀엣 가수팀입니다.
1964년 데뷔 독집 앨범을 내지 못하고 옴니버스 음반에 한두 곡씩 노래를 끼워 넣는 정도의 음반활동을 했고, 라디오 연속극주제가나 영화주제가를 부르기도 했으며, 절정기인 1968년에〈사랑은 기차를 타고〉가 크게 히트를 했습니다. 밝고 시원한 목소리와 맑은 화음으로 다양한 대중가요를 부르다가 1970년대 중반에 가수 활동을 접으면서 소식을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기다립니다〉〈나룻배〉〈남매〉〈목포항 아가씨〉〈물새 우는 해협〉〈사랑의 푸른 꿈〉〈산유화 부르스〉〈순정의 왈츠〉〈아리랑 노총각〉〈아침인사 웃으면서〉〈양지를 찾아서〉〈어부의 아내〉〈진주조개의 노래〉〈짝사랑 하소연〉〈하와이안 밤〉〈한강의 달밤〉곡 등.
여러분! 1977년 한계순이 출연한 그 유명한 고급수제화 ‘케리부룩’ TV-CM송 기억나시나요. 「허리를 미끈하게 펴고, 무릎을 쭉 뻣으면 케리부룩 케리부룩 예쁘게 걸어요. 리듬을 타고 케리부룩 예쁘게 걸어요. 케리부룩” ♡ 아뜨레 숙녀화 ♡ 벤케리 신사화 ♡ 케리부룩 샌들.」
–〈Dons Le Meme Wagon〉– 에디 마르네 작사, 귀바장타 작곡, 마조리 노엘(1965년)
1절. Nous voyageons dans le meme wagon / Tous les deux (Tous les deux)
Et nous allons dans la meme direction / Tous les deux (Tous les deux)
Mais moi, je ne te connais pas / Et toi, tu ne me connais pas
Pourtant dans peu de tant a changera
2절. Car tout a l’heure dans le meme wagon / Tous les deux (Tous les deux)
Tu m’as souri et tu as cherche mon nom / Dans mes yeux (Dans mes yeux)
Bientot dans des bruits de tonnerre / Nos cœurs ne pourront plus se taire
De tout le train c’est toi que je prefere
3절. Nous voyageons dans le meme wagon / Tous les deux (Tous les deux)
En arrivant je crois bien que nous seront / Plus heureux (Plus heureux)
Et si tu penses comme moi / Au bout de ce voyage-la
L’amour viendra nous prendre entre ses bras
4절. Et si tu penses comme moi / Au bout de ce voyage-la
L’ amour viendra nous prendre entre ses bras
Nous voyageons dans le meme wagon / Tous les deux (Tous les deux)
Et nous allons dans la meme direction / Tous les deux (Tous les deux)
〈Dons Le Meme Wagon〉마조리 노엘이 1965년 부른 노래로 함께 탄 기차안에서 우연히 만난 청춘 남녀가 기차여행이 끝나갈 무렵 어느듯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낭만적인 노랫말이 신선하게 다가오고 신나고 흥겨운 멜로디가 더욱 좋습니다. 필자도 기차를 타고 갈 때 옆자리에 아가씨가 같이 앉기를 바라면서 탓지만 한번도 그런 적이 없습니다. 참 불행한 일이죠?(^^)
마조리 노엘(Marjorie Noel)의 본명은 프랑스와즈 니보. 1945년 크리스마스날에 태어나 예명을 노엘(Noel)로 했고, 마조리는 인기가수 위크오프레이(Hugues Aufray)가 지어 주었다합니다. 카페를 경영하는 부모님을 도우면서 노래를 공부해서 1964년 음반을 발매하면서 가수로 데뷔했고, 1965년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열린 ‘유러비젼 송페스티발’에 몬테카를로 대표로 참가해〈모정의 계절〉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짧은 가수생활과 55세에 작고를 했습니다.
–〈목포행 완행열차〉– 신유진 작사, 임경현 작곡, 장윤정(2019년 세일뮤직)
1절. 목포행 완행열차 마지막 기차 떠나가고 / 늦은 밤 홀로 외로이 한잔 술에 몸을 기댄다
우리의 사랑은 이제 여기까지가 끝인가요 / 우리의 짧은 인연도 여기까지가 끝인가요
잘가요 인사는 못해요 아직 미련이 남아서 /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나는 그날
2절. 그냥 편히 웃을 수 있게 / 우리의 사랑은 이제 여기까지가 끝인가요
우리의 짧은 인연도 여기까지가 끝인가요 / 잘가요 인사는 못해요 아직 미련이 남아서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나는 그날 / 그냥 편히 웃을 수 있게 / 그냥 편히 안을 수 있게
1959년 안정애의〈대전 부르스〉는 60년이 지난 2019년 장윤정의〈목포행 완행열차〉로 다시 태어납니다. 〈대전 부르스〉의 마지막 구절 ‘목포행 완행열차’에서 제목을 정해 탄생한 노래로 〈목포행 완행열차〉는 정들었던 사랑하는 연인을 보내고 혼자 남은 또 다른 연인의 심경을 담아 장윤정의 정규앨범 제8집 앨범에 실었습니다.
〈목포행 완행열차〉는 전통 트로트로 시작해 발라드로 마무리되는 오리엔탈 발라드로 장윤정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가 감성을 자극합니다. 국민가수 장윤정은 1980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여덟 살 때 KBS ‘전국노래자랑’ 평택편에 출전했고, 1999년 서울예술대학 방송연예과 재학 중 ‘MBC 강변가요제’에 참가〈내안의 넌〉으로 대상을 받으면서 가요계에 데뷔했습니다. 하지만 7년 동안 지방 행사를 다니며 무명가수 생활을 이어온 그녀는 MBC ‘신비한TV 서프라이즈’, ‘사랑과 전쟁’의 재연배우로 활동했습니다. 2004년 장윤정에게도 대스타의 기운이 움텄으니 바로 장윤정의 제1집에 수록된〈어머나〉였습니다. 작곡가 윤명선이 계은숙의 제안으로 만들었지만 거절당했고, 주현미, 김혜연, 송대관 등에게 외면을 받아 사장될 위기에 장윤정에게 최종적으로 제의가 들어와 댄스가수로 출발한 장윤정도 곡이 마음에 들지않아서 며칠동안 눈물을 흘렸을 만큼 싫었다는데 사람이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언젠가는 빛을 보게된다는 진리는 장윤정에게도 송대관의〈해뜰날〉같이 찾아온 것입니다. 이 노래로 세미트로트라는 신조어를 유행시키며 장윤정 열풍을 몰고왔던 것입니다.
다음에는 1982년 시작된 우리나라 프로야구팀의 대중가요 응원가에 대한 글을 올리겠습니다.
*상기 컬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