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 47. 설날맞이 〈귀향〉, 〈서울간 님〉, 〈자주댕기〉 (2022.01.24.)
다음 주 화요일(2월 1일)은 ‘설날’입니다. 매년 음력 1월 1일로 ‘한 해의 건강과 풍요를 기원하는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입니다. 원단(元旦), 세수(歲首), 연수(年首)라고도 하는데, 일반적으로 ‘설’이라고 합니다. 정초(正初)에 차례를 통해 조상님들 제사를 모시고, 웃어른께 세배를 드리는 것으로 새해 첫날을 맞이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가족들과는 서로 덕담(德談)을 주고 받으면서 한해의 운수대통(運數大通)을 축원(祝願)하기도 합니다. 금기시 되는 덕담도 있는데, “시집 언제 갈려고 하느냐?” , “얼른 직장 구해야지.” , “살쪘네” 등. 고유의 세시풍속(歲時風俗)은 집안과 이웃에 계시는 웃어른들께 세배(歲拜)드리기와 차례상에 놓였던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음복(飮福)을 하고 조상님 묘소를 찾아 인사를 드리는 성묘(省墓)를 하고 나면 온 식구가 모여 떡국을 먹으면서 함빡 웃음꽃이 핀 대화를 나눕니다. 조상님들은 ‘떡국에 꿩고기’를 넣었지만 ‘닭고기’ 또는 ‘쇠고기’로 대체하기도 합니다. ‘구운 김’과 ‘삶은 달걀’ 고명 등도 필수 품목이죠.
민속놀이로 ‘윷놀이’ ‘널뛰기’ ‘연날리기’ 등이 있으며, 한때는 ‘고스톱’이 유행이었는데, 지금은 무슨놀이를 할까? 섣달 그믐날 복조리 장사가 “복조리 사이소” 하면 사서 집안에 걸어두었죠.
필자가 어릴 때 고향에서 부모님께서 상설시장인 부산(김해) 명지 ‘신호시장’에서 생선장사를 하셨는데, ‘설’과 ‘추석’ 명절에는 대목이라 돈을 많이 벌던 시기였습니다. 부산에선 차례상에 가장 필수적인 제사 음식이 생선이였기 때문이죠. 그때는 저도 대목이었습니다. 아버지 엄마 옆에 딱 붙어서 칭얼 칭얼되면 10원·오십원 동전과 심지어 독립문이 그려진 푸른 100원짜리 지폐도 주시면서 “저리 가, 제발 저리 가서 좀 놀아” 하셨는데, 그때가 그 시절이가 좋았습니다. 그때가 필자 인생에서 처음 느껴 본 봄날인지라 참 그립습니다. 50년이 지난 그때 우리집은 귀향(歸鄕)이라는게 없었습니다. 집에서 제사를 모시고 고향인 할머니 집도 10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서 아버지 따라 그냥 버스 타고 가서 내려서 조금만 걸어가면 됐으니까요. 그래도 설날에는 귀마개하고 설빔으로 두꺼운 외투옷 입고 걸어가면 매우 추웠습니다.
그리고 서울 와서는 설날에 꼭 김포 사시는 ‘당숙어른댁’에 새배 드리러 갔었는데, 구리에서 55번 창진운수를 타고 서울역에서 내려 또 김포가는 버스를 타고 김포에 내려서 큰집으로 갈려면 논길을 지나 가야하는데 지나가는 길이 왜 그리도 춥던지 정말 귀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고 이게 몇 년만인가? 출세했다더니 정말 장하이” 행색으로 보아서 곤궁한 삶이 뻔해도 동네 촌로들은 고향찾은 마음이 대견해서 슬며시 추겨주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 밤, 배나 곪지 않느냐는 아버지의 걱정과 보리고개를 떠올리는 큰아들의 염려가 이윽고 망년의 잠속으로 떨어진 그 밤, 어머니는 연연생 사남삼녀의 옷가지를 쌓아 놓고 바늘을 잡곤 했습니다. 강원도 춘성군 사북면 어머님 말씀 “애들이 설만되면 떡해 달라고 야단, 옷해 달라고 야단, 일단 뭐! 버선해 달라고 야단, 어떡해 거져 있는 거나 빨아 입히고 그냥 그랬죠 뭐 없는 걸 어떡해요. 양말도 사 달라고 야단이죠. 사 줄 수가 있어요? 하나 둘 아니고 그렇게 지난거죠 뭐. 고생이죠 뭐 설날만 되면 걱정이 되죠. 애들이 벌써 손을 꼽아가면서 몇 밤 남았지 몇 밤 남았지. 이래가면서 해달라니 어떡해요.」1950년대 설날 에휴!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의 귀향 풍경을 ‘그때를 아십니까’ 나레이션에서 옮겨 보겠습니다. 「마이카니 고속버스니 새마을열차니 하는 말은 생기지도 않았던 그 시절. 고향가는 직행버스 차 옆에는 연탄재가 겹겹이 놓여 있었고, 두 손으로 귀를 감싼 귀성객들이 막차를 놓칠세라 여차장의 핀잔을 받으면서도 두번 세번 확인을 받고 다짐을 받곤 했습니다. 또한 서울역, 비록 두끼를 굶고 한끼로 때울망정 고향으로 가는 차림새는 그게 아니어서 그때야 말로 모두 때뺴고 광을 냈는데 미군 담요로 만든 최상급 털오바를 걸친 아가씨나 검정 광목의 고학생이나 그날만큼은 다림질한 매무새로 광장을 보란 듯이 활보했습니다. 한해의 마지막 해가 서쪽으로 기우는 그 무렵 고향의 냇가 징검다리에서 흘깃 나타났던 금의환향, 의래히 나까오리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꼬깃 꼬깃한 넥타위 위로는 털이 숭숭빠진 목도리를 칭칭 감은 채 정종 대병과 함께 우리의 삼촌 또는 큰 형은 그렇게 나타났습니다.
-〈귀향〉- 백영호 작사·작곡, 나훈아(1973년 지구레코드사)
1절. 목화 송이 송이송이 머리에 이고 버렸던 흙 냄새를 잊지 못해서 / 비 내리는 모녀 고개
넘어 올 적에 두 번 다시 내 고향을 떠나지는 아니하리 / 아아 구름 가듯 세월이 갔네
돌아온 내 고향
2절. 목화 송이 송이송이 머리에 이고 꿈에도 잊지 못할 내 고향인데 / 비 내리는 모녀고개
돌아가 보면 이젠 다시 타향 생각 그립다고 아니하리 / 아아 바람 가듯 청춘이 갔네
돌아온 내 고향
〈귀향〉(歸鄕) 나훈아가 1973년 부른 노래로 1973년 지구레코드사에서 발매한 하춘화 앨범 ‘백영호 작곡집, 엄마랑 같이 갈래요 / 산 메아리 강 메아리’ 앨범에 실려있는 곡입니다. 음반 Side A면. 하춘화 〈엄마랑 같이 갈래요〉, 〈일요일은 아베크〉, 〈수탉같은 여자〉, 나훈아〈귀향〉, 이미자 선생님 〈내고향 섬마을〉, Side B면. 하춘화〈산 메아리 강 메아리〉, 〈도리강산〉, 나훈아 〈사랑은 나그네〉, 〈동숙의 노래〉, 김상진 〈고향에 가고 싶어〉 등 총 10곡이 수록돼 있습니다.
벌써 5년이나 지나갔네! 벌써 5년! 전 직장상사 한 분의 애창곡이 나훈아〈귀향〉이었습니다. 나훈아 팬클럽 경기북부지부 회장님이라고 하셨지만, 필자는 확인해 보지는 않았습니다.(^^)
〈귀향〉은 1972년 지구레코드사에서 발매한 ‘백영호 작곡집. 사모곡 / 고향 그림자’ 앨범에 실려 있던 이미자 선생님〈서울간 님〉이 원곡입니다. 이듬해 1973년에 백영호가 노랫말을 바꾸고 제목을〈귀향〉으로 해서 정식 가수 데뷔 2년차(실제론 11년차) 17살 성인가수가 된 하춘화 앨범 ‘백영호 작곡집, 엄마랑 같이 갈래요 /산 메아리 강 메아리’에 담아 발표한 곡입니다. 이미자 선생님께서 부르셨던〈서울간 님〉은 서울로 떠나간 님을 그리워 하는 내용의 곡이고, 귀향은 (서울에서) 고향을 그리워 하는 내용으로 수정해 멜로디는 동일하고 가사만 틀립니다.
1960~1970년대에는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서 사람들은 태어나고 어린시절을 보낸 고향을 떠나 무작정 서울로 도시로 찾아서 힘든 생활을 하던 젊은이들은〈귀향〉, 〈서울간 님〉, 〈고향역〉, 〈고향무정〉, 〈고향이 좋아〉, 〈꿈에 본 내 고향〉 등 고향 노래를 듣거나 부르면서 하루하루 지친 몸을 달래고, 향수에 젖어 들곤 했으며, 추석과 설날 등 명절이 되면은 서울역 광장 등에서 텐트 등을 치고서 몇일 몇날 밤을 세우고, 표를 살 시간이 되면은 몇시간씩 꼬불꼬불 엮어진 긴 줄을 서서 기다리다 정말 어렵게 표를 구해서 귀향하는 기차에 오르는 순간 마냥 함박 웃음을 짓곤 했습니다. 설령 고향에서 기다리던 복순이가 부모님 성화에 못 이겨 시집을 가서 없다고 해도, 고향에 가서 부모형제와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는 설레이는 마음에 귀성객들로 꽉 들어찬 고향으로 달리는 완행열차에 온몸을 싣고 고향을 향해 고향 가는 길은 언제나 즐겁고도 즐거웠던 ‘귀향’ 풍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벌써 3년째 접어들도록 코로나바이러스-19라는 역병(疫病)이 온 세계를 전부 뒤덮어 다가오는 설날에도 사적 모임을 6명 이내 제한하니 설날 제사 모시기에도 벅찹니다. 필자는 지난번 아버님 22주기 때에는 막내동생과 4명이 제사를 모셨는데, 그나마 6명으로 완화가 되니 조금 나아져 이번에는 어머니와 남동생 두명과 우리 식구 3명 합해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아버님 차례를 모실 수 있어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역병이 물러나서 올 추석 한가위에는 나훈아〈귀향〉과 원곡인 이미자 선생님〈서울간 님〉을 비교해 들으면서 모두 고향으로 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서울간 님〉- 백영호 작사·작곡, 이미자 선생님(1972년 지구레코드사)
1절. 서울가는 서울가는 기차를 타고 나도야 물어 물어 님 찾아 갈까 / 새가 우는 그 봄이
또 지나가도 편지 한 장 없는 님을 애타도록 기다려요 / 아아 가고 싶어 가고 싶어라
님 계신 서울로
2.절. 서울길이 서울길이 얼마나 멀어 그리운 그 님에게 가지 못하나 / 봄 가을이 지나고
또 지나가도 소식 없는 그 님만을 애타도록 기다려요 / 아아 보고 싶어 보고 싶어라
서울 간 그 님이
〈서울간 님〉이미자 선생님께서 1972년 부르신 노래로 지구레코드사에서 발매한 ‘백영호 작곡집, 사모곡 / 서울간 님’ 앨범에 실려 있는 곡입니다. 음반 Side A면. 이미자 선생님 연속극 주제가〈사모곡〉, 〈서울간 님〉, 〈능금이 익어가면〉, 배호〈내 고향 남촌〉, 나훈아〈황포돛대〉 Side B면엔, 김성기 〈고향 그림자〉, 〈웃음을 안고 왔소〉, 이미자 선생님 〈잠들면 떠나주오〉, 〈세월〉 , 나훈아 〈고향을 부른다〉 등 총 10곡이 함께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미자 선생님께서 부르시는〈서울간 님〉을 듣는 순간, 애절하고 또 애절하다고 밖에는 표현 할 수 밖에 없고, 구슬프고 구슬프다고 표현 할 수 밖에 없는 백영호의 노랫말과 곡조, 그리고 이미자 선생님의 구슬프고도 애절한 음색이 진하게 묻어있는 노래가 발표되었던 1972년 이때만 해도 서울에 살았던 대학생이나 젊은 사람들이 천혜의 고도인 섬마을이나 농촌 또는 산촌 등 시골 마을에 잠시 머물다가 떠났던 시절, 그 곳에서도 순수하고 싱그러운 사랑은 피어났으니 그 시절을 떠 올려보면 그 기구한 사연들이 느껴질 것입니다. 1960년대 영화〈동백 아가씨〉, 〈섬마을 선생〉, 〈미워도 다시 한번〉 등을 보면 서울 남자와 시골 여자의 맺지 못할 사랑을 주제로 했듯이 〈서울간 님〉의 여성도 그런 처지였을 것입니다. 열아홉 풋가슴 사랑을 다 바쳐서 일부종사(一夫從事)하려고 했건만 그 님은 한마디 말도 없이 서울로 도망가고 뒤늦게 순정을 다바쳤던 님이 도망간 것을 알게 된 순정 아가씨는 한해 한해가 지나가도 편지 한 장 없는 그 사람도 님은 님이라고 희망을 갖고 서울로 님을 찾아서 가야 한다는 마음을 가사에 담은 노래입니다.
필자는〈서울간 님〉을 처음 듣자마자 반복해서 들고, 따라 부르면서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 현재 약 80% 완료됐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미자 선생님의 발성이 워낙 좋으셔서 쉽지않네요.
-〈자주댕기〉- 정두수 작사, 정민섭 작곡, 이미자 선생님(1972년 지구레코드사)
1절. 겨우내 베를 짜서 품앗이 해서 혼숫감 끊다가 하도 고와서 / 남은 베로 새로 만든
자주 저 댕기 두 가닥 머리위에 자주 저 댕기 / 님 찾아가는 순이 가슴 설레이네
2절. 여름내 뽕잎 따서 누에를 쳐서 고운 님 생각에 꿈이 부풀어 / 남은 베로 새로 만든
자주 저 댕기 두 가닥 머리위에 자주 저 댕기 / 님 찾아가는 순이 가슴 설레이네
〈자주댕기〉이미자 선생님께서 1972년에 부르신 노래로 정민섭 작사·작곡가의 지구레코드사 전속기념 작품 제1탄 음반으로 12월 24일 지구레코드사에서 발매한 ‘정민섭 작곡집, 자주댕기 / 박달재 사연’ 앨범에 실려 있는 타이틀곡입니다. 음반 Side A면. 이미자 선생님 〈자주댕기〉, 〈두고 온 고향〉, 선우성 〈마미부루〉, 이도형 〈떠난 임〉, 〈망향의 블루스〉, Side B면에는 이미자 선생님 〈박달재 사연〉, 〈추억의 등불〉, 선우성 〈다이아몬드의 사랑〉, 이광은 〈비에 젖은 일요일〉, 〈사랑은 나그네〉 등 총 10곡이 함께 수록돼 있습니다. 원곡은 1967년 정민섭 작가·작곡해서 민요가수 최정자가 불렀던〈연못에 고인 눈물〉입니다.
「1절. 연못에 고인 사랑 메마를 세라 두 손을 고이 모아 빌던 그 사람 / 보고파 단숨에 달려갔건만 세월이 너무 바빠 그대 떠나고 / 한떨기 연꽃 속에 눈물만 고여 있네.
2절. 연못에 담은 사랑 흩어질세라 두 손을 마주 잡고 언약했건만 / 어이해 흩어졌나 고운 사랑아 내 희망 심어 놓은 정든 연못에 / 사랑은 메마르고 눈물만 고여 있네.」
〈연못에 고인 눈물〉 최정자가 1967년 부른 노래로 아세아레코드사에서 발매한 ‘최정자 힛트 앨범 NO. 2, 이별의 이 순간 / 백일홍 사랑’ 앨범에 실려 있는 곡입니다. 음반 Side A면에는 〈이별의 이 순간〉, 〈영원한 그 사랑〉, 〈한많은 대관령〉, 〈찢어진 사진〉, 〈연못에 고인 눈물〉, 〈버리고 가네〉 , Side B면에는 〈백일홍 사랑〉, 〈이별의 군산항부두〉, 〈한장의 손수건〉, 〈올드미쓰 챠챠챠〉, 〈눈물의 한양성〉, 〈창덕궁의 밤〉 12곡이 수록됐습니다.
최정자〈연못에 고인 눈물〉은 1971년 가수 문귀옥이 리바이벌해 불렀고, 1972년 작사가 정두수 선생님이 가사와 제목을 바꾸어서 정민섭 작사·작곡가의 지구레코드사 전속기념 제1탄 음반으로 발매했던 곡입니다. 2면에는 박재란의〈박달재 사연〉을 리바이벌 해서 수록했습니다.
2013년 7월 어느 날. 가수 나일강과 함께 정두수 선생님을 모시고 선생님의 고향 경상남도 하동으로 갔는데, 필자의 승용차로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선생님이 작사한 노래 50곡을 USB에 저장해 틀어드렸습니다. 노래 노래마다 담겨진 사연을 설명하시던 중〈자주댕기〉가 나오자 “삼태기! (가수 나일강을 선생님과 가족들은 꼭 삼태기라 불렀습니다.) 이 노래 어때?” “선생님 노래야 다 좋죠.” “좋지? 이 노래〈자주 댕기〉말이야. 그 때 이 노래가 나오자 설, 추석 명절때마다 전국 곳곳에서 참 많이 흘러 나왔지.” “네, 그랬었어요?” 필자도 대화에 끼어들어서 “선생님 이 노래 말고 명절 노래로 나훈아의〈귀향〉도 있던데요.” “그렇지! 그 때〈자주 댕기〉가 명절때마다 인기가 있자 백영호 선생이 미자 노래〈서울간 님〉에 노래시를 개사해〈귀향〉을 만들었는데 그 노래도 참 많이 나왔지. 나훈아도 내 제자 아닌가!” “네 그렇죠~ 선생님, 그런데 정민섭 그분 가수 양미란 남편이라던데요?”. “그렇지 양미란 남편이지”. “그분도 잘아셨어요?” “그럼 잘 알고 말고…그때도 참 좋았지.” 그렇게 정두수 선생님을 모시고 하동으로 달려갔습니다.
‘임진각 실향민 합동 망배제’ 해마다 설과 추석이 되면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마정리에 위치한 임진각 광장 망배제단(望拜祭壇)에서는 1천만 이산가족들 중 수많은 실향민들이 북녘 고향을 향해 합동으로 차례를 지내는 ‘망향경모제’(望鄕敬慕祭)가 열립니다. 2020년부터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온라인으로만 개최되어서 국민의 한사람으로 안따깝기 그지없습니다. 올 추석에는 꼭 만나서 개최되어 실향민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1966년 오기택의〈고향 무정〉도 작사가인 김운하가 합동차례에 참가했다가 북녁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노랫말을 지었던 것이었는데, 올해 설날을 1주일 남기고 실향민들 뿐만 아니라 고향을 그리워하는 국민들의 애창곡 〈꿈에 본 내고향〉에 대한 설명과 노래를 올리겠습니다.
-〈꿈에 본 내 고향〉- 박두환 작사, 김기태 작곡, 문일화(1943년 한정무 1954년)
1절.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 / 저 하늘 저 산 아래 아득한 천리 / 언제나 외로워라
타향에서 우는 몸 / 꿈에 본 내 고향이 마냥 그리워
(대사) “뜬구름아 물어보자. 어머님의 문안을 / 달님아 비춰다오. 인성이와 정숙이의 얼굴을 /
생시에 가지 못할 한 많은 운명이라면 / 꿈에라도 보내다오. 어머님 무릎 앞에 / 아, 어느 때
바치려나, 부모님께 효성을 / 꿈에 본 내 고향이 마냥 그리워.”
2절. 고향을 떠나온지 몇몇 해더냐 / 타관 땅 돌고 돌아 헤매는 이 몸 / 내 부모 내 형제를
그 언제나 만나리 / 꿈에 본 내 고향이 차마 못 잊어
〈꿈에 본 내고향〉 함경북도 나진 출신의 한정무가 1954년 평양 출신인 금사향〈홍콩아가씨〉와 같이 평안남도 안주 출신인 한복남이 설립한 도미도레코드사를 통해서 발표한 곡입니다. 그러나〈꿈에 본 내 고향〉은 11년 전에 문일화가 불렀던 노래였습니다. 1943년 반도악극단의 가수 문일화가 고향을 떠난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어 주려고 불렀던 노래인데, 1950년엔 송달협이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하면서 악극단 무대에서 불렀습니다. 사람들의 입을 통해 불리워지고 있던 중 1.4후퇴 이후 피난 온 실향민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부르던 노래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면서 널리 알려지면서 국민 애창곡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당시 가수겸 작곡가 한복남(1919년〜1991년)은 부산의 국제시장을 주무대로 축음기 바늘과 음반 장사를 하면서 힘겹게 생활하면서 도미도레코드사를 설립하였고, 어느 날 홀로 월남해 자신의 레코드사에서 일을 도와주고 있던 이북이 고향인 친구 한정무(1919년〜1960년)와 함께 추석이 가까워진 어느날 부산 송도 바닷가 방파제를 지나가던 도중 술에 취한 사람이 비틀거리면서〈꿈에 본 내 고향〉을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곧 휘영청 떠오른 한가위 달을 쳐다보며 두 사람은 망향의 설움과 고향이 그리워져서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한복남은 한정무에게 “한형! 저 노래 아직 취입이 안됐지? 이번에 우리가 한번 취입해 보면 어떨까? 추석이라 그런지 가슴이 미어지는 구먼…” 그렇게 두 사람은〈꿈에 본 내 고향〉취입하는 의견의 일치를 본 후 작곡가 이재호를 찾아가 노래의 편곡을 요청해 완성된 노래를 한정무가 부산의 각종 무대에서 불러서 인기를 얻은 후에 1954년 도미도레코드사에서 녹음을 해서 음반을 발매했습니다. 한정무의 떨리는 목소리와 울먹이는 듯한 창법이 더해져서 망향의 설움에 젖어 있던 실향민들과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힘들게 생활하면서 고단한 삶을 영위해 가던 사람들에게 절절히 전해져 요즘 말로는 대박! 즉,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습니다. 특히, 1절과 2절사이 대사(臺詞)는 그들의 애절한 심정을 대변했습니다. 원창자인 문일화는 음반을 발매하지 않았었고, 한정무가 음반을 발매했기 때문에 이 노래의 원창자가 한정무로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 어렵던 시절 빼 놓을 수 없는 분들이 계셨으니, 바로 우리들의 누님들이었습니다. 1959년 안다성이 부른〈에레나가 된 순희〉는 1953년 한정무가 취입한 노래입니다. 작사가 손로원이 전쟁의 아픔으로 순희에서 에레나로 이름을 바꿔야만 했던 우리들의 누님들의 아픈 가슴을 한편의 드라마처럼 써내려 간 주옥같은 노랫말은 안다성과 또 다른 한정무의 매력적인 목소리에 실려 담담하고 애달프게 불려졌는데, 필자는 노래가 너무 슬퍼 기회되면 올리겠습니다.
다음에는 ‘설날’ 기념 필자의 아버지 4대 명곡과 〈고향길 부모길〉에 대한 글을 올리겠습니다.
*상기 컬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