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 56. 김상희〈대머리 총각〉,〈경상도 청년〉(2022.03.28.)
지난 23일 전라남도 해남군에서 태어난 불세출의 가수 오기택(1939년〜2022년)이 지병으로 하늘의 별이 되셨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져 필자는 가슴이 무척 아픕니다.
오기택은 1962년 12월〈영등포의 밤〉으로 데뷔〈우중의 여인〉, 〈아빠의 청춘〉, 〈고향무정〉, 〈마도로스 박〉, 〈충청도 아줌마〉 등 주옥같은 노래로 국민들의 애환을 달래준 ‘저음의 마법사’라 불리웠습니다. 남겨진 유산은 모두 고향의 해남고등학교에 기부하셨다고 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오늘은 필자가 영원한 소녀로 생각하고 있는 국민가수 김상희님의 80번 째 생신 날입니다. 사랑해요♡ 상희 누나! 아니 순강 누님! 김상희(金相姬)의 본명은 최순강(崔順江). 1943년 3월 29일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 풍문여자고등학교에서 전교 1등을 도맡아 했던 수재로 부모님의 뜻에 따라 고려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으나, 노래가 너무 좋아 1학년이던 1961년 서울 중앙방송국(KBS) 전속가수 모집에서 1등으로 입상해 1962년〈삼오야 밝은 달〉로 가수 데뷔를 했습니다. 그러나 학생 신분이고 가족들이 원치않아 2년동안 ‘얼굴없는 가수’로 활동했습니다. 1964년 발표한〈처음 데이트〉가 처음 히트를 해 가수 김상희라는 이름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면서 인기가수의 반열에도 올랐습니다. 그 당시 가수 김상희는 단발머리에 미니스커트 등을 소화한 앞서가는 가요계의 ‘패션 아이콘’이었고, ‘여성학사가수 1호’, ‘여성MC 1호’ 등의 별칭이 항상 따라 다녔으며, 1969년 KBS PD인 유훈근과 혼인했습니다. 1967년과 1971년 ‘TBC 방송가요대상’에서 ‘여자가수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국민가수 김상희는 지금도 소녀같은 예쁜 외모와 맑고 깨끗한 목소리, 상냥함과 정직한 이미지가 빛나는 가수라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대표곡은 1962년〈삼오야 밝은 달〉1964년〈처음 데이트〉를 비롯해〈대머리 총각〉, 〈울산 큰애기〉, 〈경상도 청년〉, 〈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 〈빨간 선인장〉, 〈빗속의 연가〉, 〈즐거운 아리랑〉, 〈팔베개〉 등의 노래가 있습니다. 〈단벌신사〉는 북한에서 대남방송을 통해 “남조선 지성파 가수 김상희의 노래에 따르면 남한 사람들은 단 벌 옷에 넥타이가 두 개뿐이고, 주머니가 텅텅 비어있다고 합니다.”라는 흑색선전을 하게되자 금지곡으로 지정되기도 했습니다. 2000년 7월 우리나라의 육지에서 해가 빨리 뜬다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간절곶에〈울산 큰애기〉노래비가 세워졌는데, 그때를 김상희는 “참, 행복했다.”고 말했습니다. 소녀가수 김상희는 “나는 노래를 부를 수 있고 무대만 있으면 언제나 행복하다.”고 사랑스럽게 말했습니다.(^^)
–〈대머리 총각〉– 진원 작사, 정민섭 작곡, 김상희(1967년, 아세아레코드사)
1절. 여덟시 통근길에 대머리 총각 오늘도 만나려나 떨리는 마음 / 시원한 대머리에 나이가 들어
행여나 장가갔나 근심하였죠 / 여덟시 통근길에 대머리 총각 내일도 만나려나 기다려지네
2절. 무심코 그를 따라 타고 본 전차 오가는 눈총 속에 싹트는 사랑 / 빨갛게 젖은 얼굴
부끄러움에 처녀 맘 아는 듯이 답하는 미소 / 여덟시 통근길에 대머리 총각 내일도 만나려나
기다려지네 / 내일도 만나려나 기다려지네
〈대머리 총각〉은 참 좋은 노래입니다. 밝고 경쾌한 리듬과 가사의 희소성 때문일 것입니다. 가볍게 듣고 가볍게 부를 수 있는 노래라 생각하는데, 필자도 어릴 때 자주 불렀던 노래입니다.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하여도 우리나라 서울의 대중교통 수단은 전차였습니다. 필자는 고향이 시골이라 전차를 한 번도 타 보지 못했습니다. 서울에서는 1968년 전차가 사라지고 시내버스가 통학과 출근 길의 중요한 교통 수단이 되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사람의 신체적인 특징을 가지고 노래의 소재로 등장시킨 예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리고 대머리는 그 단어 자체가 다분히 코믹성을 지니고 있어서 여러 분야를 통해 소재의 대상이 되었지만 가요로선 첫 등장이었습니다. 김상희의 노래도 좋았지만, 가사의 희극성이 더욱 묘미가 있어서〈대머리 총각〉은 대중들에게 대단한 히트곡으로 대접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 노래는 자체에 이미 하나의 완벽한 이야기를 담고 있기도 했습니다.
노래의 이야기를 풀어 보면「직장에 다니는 처녀가 매일 아침 8시면 출근하기 위해 버스정류장에 나갔습니다. 어느날 대머리 남자를 보게되고, 그후 아침 8시면 대부분 출근길 버스정류장에서 그 남자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그후 자주 보게되는 동안 그의 생김새라든가 행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무엇을 하는 남자인가 궁금해지기 시작했으며, 차츰 8시만 되면 그 남자가 기다려집니다. 어느덧 그 남자에 대한 사랑의 감정까지 가지게 된 그녀는 여자라는 체면 때문에 차마 먼저 말을 걸어 볼 수가 없었습니다.」 1967년 이 정도의 건강한 소재와 대머리라는 희극성 때문인지, 이 노래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노래가 널리 불리면서 ‘대머리회’라는 계(契)도 조직되어 ‘회가’로 채택했던 후일담이 있었고, 특히 1968년에 침범한 무장간첩 김신조가 아는 노래라고 해서 또 한번 화제가 됐기도 했습니다. 항상 단발머리에 앞머리를 내린 김상희 모습에 노래까지 히트를 하자 “이마에 상처가 있다.” “진짜 대머리여서 가발을 썼다.”는 등의 루머가 나돌았고, 심지어 그녀에게 다가가서 머리를 당기는 팬들도 있었으며, 또한 ‘김상희형 머리’ 상표의 수출용 가발까지 생산되었다고 합니다.
–〈경상도 청년〉– 월견초 작사, 전오승 작곡, 김상희(1965년, 그랜드레코드사)
1절. 내 마음을 나와 같이 알아줄 사람은 / 경상도 그 청년 한 사람뿐입니다 / 덥수룩한
얼굴에 검은 수염은 / 나이보다 칠팔세 위로 보지만 / 구수한 사투리에 매력이 있어 /
단 한번 데이트를 하였답니다
2절. 내 가슴에 감춘 사랑 바칠 사람은 / 경상도 그 청년 한 사람뿐입니다 / 유모어는
없어도 너털웃음은 / 점잖하신 사장님 타입이지만 / 사랑엔 약한 것에 재미가 있어 /
단 한번 극장 구경을 하였답니다
김상희(金相姬), 이 예명은 단순하게 지었다고 합니다. 당시 가장 흔한 성씨인 김에 친구 두 명의 이름에서 한글자씩 조합해서 지었답니다. 그 친구 두분의 이름이 궁금해지는군요.(^^) 대학교 4학년 때 버스를 타고 가다 버스가 굴러 가벼운 부상을 입었는데 학교의 학보사 기자가 함께 타고 있어서 신문에 기사화 되어 학생 최순강이 가수 김상희라는 것이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다는 일화도 있었다고 합니다. 김상희는 “1970년대 초 서울시민회관 연말 빅쇼때 쟈니리의 〈뜨거운 안녕〉을 불렀는데 관객들이 일제히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낸 준 것이 영원히 잊을 수 없다.”고 말했으나 1972년 서울시민회관 대형화재 때에는 팔 등에 큰 화상을 입기도 했습니다. 〈경상도 청년〉은 가사가 매우 설득력 있는 사실적 묘사로 일관하고 있는 점이 특색입니다. ‘덥수룩한 얼굴’이라든지 ‘검은 수염’ ‘구수한 사투리에 매력이 있어’ 등이 그것인데, 이러한 내용은 작사자 월견초가 아마도 어떤 실존한 대상을 테마로 하였으리라 짐작하게 됩니다. 이 노래에는 우리들의 주변에 항상 숨쉬며 건강하게 살아가는 소시민의 사랑스러운 감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대중들에게 널리 애창된 것과 그런 친숙한 의미가 있었을 것입니다. 작곡가 전오승은 완성된 가사를 보고 가사의 의미에 맞추어 곡의 분위기를 살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곡이 완성된 뒤에도 노래에 담긴 의도를 충분히 살릴 수 있는 가수의 발굴에 무던히 신경을 썼는데, 그 결과 김상희가 스카웃 되었으며, 그는 이러한 의도를 아주 세련된 창법으로 살아서 뛰는 물고기처럼 싱싱하고, 발랄하며 따뜻하게 불러 노래의 의미를 잘 살렸다고 합니다. 현실의 김상희는 전라도 전주 사람하고 혼인해 경상도 가면 이 노래를 못 부른다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울산 큰애기〉– 탁소연(나화랑) 작사, 나화랑 작곡, 김상희(1965년 라미라레코드사)
1절. 내 이름은 경상도 울산 큰애기 / 상냥하고 복스런 울산 큰애기 / 서울 간 삼돌이가
편지를 보냈는데 / 서울에는 어여쁜 아가씨도 많지만 / 울산이라 큰애기 제일 좋대나 /
나도야 삼돌이가 제일 좋더라
2절. 내 이름은 경상도 울산 큰애기 / 다정하고 순직한 울산 큰애기 / 서울 간 삼돌이가
편지를 보냈는데 / 성공할 날 손꼽아 기다려 준다면 / 좋은 선물 한 아름 안고 온대나 /
그래서 삼돌이가 제일 좋더라
〈울산 큰애기〉를 작사·작곡한 나화랑(작사가명 탁소연)은 울산에 사시는 친척 아주머니가 서울에 올라와서 집안의 큰 며느리에 대해 들려준 이야기를 듣고 만들었다고 합니다. 아들은 며느리를 혼자 두고 서울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났는데, 아들과 떨어져 살면서도 한눈 팔지않고 착실하게 살아가는 큰며느리를 칭찬했습니다. ‘큰애기’는 ‘맏며느리’를 지칭하는 경상도 은어로 사랑스럽고 인물이 뛰어난 울산의 여인상을 ‘울산 큰애기’로 표현했다 합니다.
또한 나화랑은 신인가수 김상희가 울산 큰애기 이미지와 딱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노래를 줬다고도 했습니다. 가수 김상희는 생각지도 않게〈울산 큰애기〉를 취입했는데 예상외로 크게 히트를 했다합니다. 1970년 서울신문사 문화대상 수상 기념 공연인 ‘김상희 리싸이틀쇼’가 코메디언 배삼룡의 사회와 신중현 악단 연주로 개최됐는데, 공연 실황 음반을 유니버샬레코드사에서 발매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울산 큰애기’는 울산광역시 중구 반구동 여성들을 일컫던 말에서 유래했다고도 합니다. “울산광역시 중구 반구동(伴鷗洞)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퇴사제 이응춘이 태화강변에 반구정(伴鷗亭)을 세웠고, 이 곳은 땅이 비옥하고 바람도 잘 통하고 아주 부유했던 마을이라 마음씨 좋고 피부도 좋은 반구동 처녀를 인심 후한 ‘울산 큰 애기’라는 애칭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또다른 반구정은 황희 정승이 지은 파주 임진강변의 반구정과 강원도 횡성 반구정, 전라남도 곡성 반구정이 있고, 한명회가 한강변에 지은 정자 압구정이 현재 서울 압구정 지명이 된 것입니다.
〈울산 큰애기〉노래비는 2000년 간절곶에 세워졌는데, 국민가수 김상희 누님의 회고담, “당시 박진구 울주군수, 이두철 울주문화원장, 남편과 상의한 결과 군수님이 한반도에서 해가 제일 먼저 뜨는 간절곶 그 좋은 곳에다가 노래비를 세우면 좋겠다는 의견에 남편이 건립비를 부담해 저에게 선물로 세워줬습니다.” 프로축구 울산현대 치어리드팀명이기도 합니다. 울산광역시 중구에서는 2017년〈울산 큰애기〉속 여성을 모티브로 캐릭터 개발과 ‘울산 큰애기 하우스’를 건립해서 1층은 관광안내소와 캐릭터상품 판매소 운영, 2층은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거리 제공, 3층에는 비즈니스룸으로 세미나실과 휴게실, 자료 검색 공간으로 꾸며놓았고, 주변에는 문화의 거리, 야시장 등 걸을거리와 먹거리 관광단지로 조성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다른〈울산 큰애기〉는 당초 1943년 고마부 작사, 이면상 작곡, 황금심이 빅타레코드사를 통해서 발표한 신민요가 있습니다. 지금도 대중가수들과 성악가들이 자주 부르고 있습니다. 오늘은 2018년 4월 23일 가요무대에서 국악인 김세연이 부른〈울산 큰애기〉를 올려드립니다.
「1절. 동해나 울산은 잣나무 그늘 경개도 좋지만 인심이 좋구요 / 큰애기 마음은
열두폭 치마 / 실백잣 얹어서 전복쌈일세 / 에헤에에 에헤라 울산은 좋기도 하지
2절. 울산의 큰애기 거동 좀 보소 / 님 오실 문전에 쌍초롱 달구요 / 삽살개 재 놓고
문밖에 서서 / 이제나 저제나 기다린다네 / 에헤에에 울산의 큰애긴 좋기도 하지
3절. 동해나 울산의 큰애기들은 / 유정도 하지만 알뜰도 하지요 / 하룻밤 정든 님
이별이 설워 칠성단 모으고도 축원이라네 / 에헤에에 에헤라 울산은 좋기도 하지」
–〈참사랑〉– 고향(=남국인) 작사, 남국인 작곡, 김상희(1971년, 오아시스레코드사)
1절. 그대 지금은 남남인 줄 알고 있지만 / 아름답던 그 시절은 오늘도 눈물 주네
참사랑이란 이렇게 눈물을 주나 슬픔을 주나 / 멀리 떠나간 내 사랑아 / 나는 잊지 못해요
잊을 수가 없어요 / 고독이 밀리는 이 밤을 어이해요 / 그대 지금은 남남인 줄 알고 있지만
/ 아름답던 그 시절은 오늘도 눈물 주네
2절. 참사랑이란 이렇게 눈물을 주나 슬픔을 주나 / 멀리 떠나간 내 사랑아 / 나는 잊지
못해요 잊을 수가 없어요 / 고독이 밀리는 이 밤을 어이해요 / 그대 지금은 남남인 줄
알고 있지만 / 아름답던 그 시절은 오늘도 눈물 주네
김상희는 1968년 KBS 유훈근 PD와 혼인을 했는데, 54년을 살면서 싸운 적이 거의 없었다는 잉꼬부부입니다. 여성가수 MC 1호가 된 것도 신랑 덕분입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여성이 MC를 하는 것은 꿈도 못 꿨어요. 방송국 윗선에서도 반대했었고요. 당시 남편은 KBS ‘당신의 멜로디’라는 프로그램 담당 PD였는데, 김상희가 MC로 성공하지 못하면 사표를 내겠다고 했대요.” 결국 MBC와 TBC 등 방송국을 넘나들며 MC로 맹활약했고, 그와 혼인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혼인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양쪽 집안이 뒤집어질 정도로 반대가 심했어요.” 서울에서 극장을 3개나 소유하며 부유하게 살았던 부모님은 딸을 종갓집 맏며느리로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고, 남편 집안에서도 600년 전통의 종갓집 종손 며느리로 가수를 맞으면 망한다며 반대했어요.” 남편이 양쪽 부모님을 설득했으나 여의치 않자 둘이서라도 혼인하겠다며 일방적으로 혼인 날짜와 장소를 알려주었는데, 다행히 양가 부모님께서 참석해 혼인식을 마쳐 ‘참사랑’을 실천했습니다.
한편〈참사랑〉을 작사하고 작곡한 남국인의 대표곡으로는 나훈아〈가지마오〉, 남진〈님과 함께〉, 설운도〈잃어버린 30년〉특히 부인 정은이 작사, 남국인 작곡의 대표적인 노래는 주현미의〈비 내리는 영동교〉, 〈눈물의 부르스〉, 〈비에 젖은 터미널〉등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작사가, 작곡가 부부 대중가요는 5월 21일 ‘부부의 날’에 소개하겠습니다.
추가로 ‘저음의 마법사’ 오기택의 명복(冥福)을 빌고, 기리면서〈고향무정〉〈영등포의 밤〉〈충청도 아줌마〉3곡을 올리고, 다음 기회에 다시 오기택의 노래에 대한 글을 올리겠습니다.
–〈고향무정〉– 무인도 작사, 서영은 작곡, 오기택(1966년 신세기레코드사)
1절. 구름도 울고 넘는 울고 넘는 저 산 아래 / 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 있었건만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 산골짝엔 물이 마르고 /
기름진 문전옥답 잡초에 묻혀 있네
2절. 새들도 집을 찾는 집을 찾는 저 산 아래 / 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 있었건만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 바다에는 배만 떠 있고 /
어부들 노래 소리 멎은 지 오래일세
☞ 본 영상은 1985년 11월 4일 방영된 가요무대 제1회에 출연하셔서 부르시는 영상입니다.
–〈영등포의 밤〉– 김방아(=김부해) 작사, 김부해 작곡, 오기택(1962년 신세기레코드사)
1절. 궂은 비 하염없이 쏟아지는 영등포의 밤 / 내 가슴에 안겨 오던 사랑의 불길
고요한 불빛 속에 빛나던 그대 눈동자 / 아 아아아아 영원히 잊지 못할 영등포의 밤이여
2절. 가슴을 파고드는 추억 어린 영등포의 밤 / 영원 속에 스쳐오는 사랑의 불길
흐르는 불빛 속에 아련한 그대의 모습 / 아 아아아아 영원히 잊지 못할 영등포의 밤이여
☞ 본 영상은 1996년 4월 1일 방영된 KBS-1TV 가요무대에 출연해서 부르시는 영상입니다.
-〈충청도 아줌마〉- 김운하 작사, 서영은 작곡, 오기택(1966년 신세기레코드사)
1절. 와도 그만 가도 그만 방랑의 길은 먼데 / 충청도 아줌마가 한사코 길을 막네 / 주안상
하나 놓고 마주 앉은 사람아 / 술이나 따르면서 따르면서 / 네 설움 내 설움을 엮어나 보자
2절. 서울이고 부산이고 갈 곳은 있지만은 / 구수한 사투리가 너무도 정답구나 / 눈물을
흘리면서 밤을 새운 사람아 / 과거를 털어 놓고 털어 놓고 / 새로운 아침 길을 걸어 가보자
☞ 본 영상은〈충청도 아줌마〉뮤직비디오(MV)를 제작하면서 구수하게 부르시는 영상입니다.
다음에는 2회에 걸쳐 1983년 MBC, 1972년 TBC ‘조선왕조 500년’ 드라마 글을 올리겠습니다.
*상기 컬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