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나무
세종 때 명재상 맹사성(孟思誠)이 경상도 안동부사로 부임 할 때였다. 이 거리 저 거리로 순찰을 하는데 여인네들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끊이지 않았다. 주위 사람에게 그 연유를 물으니, 안동에는 오래 전 부터 젊은 과부가 많이 생겼는데 이 울음소리는 바로 그 과부들의 곡성이라고 했다.
풍수지리에 밝았던 맹부사인지라 안동의 지세를 세심하게 살펴보니 과연 이곳이 과부가 많이 날 형국 이었다. 그는 궁리 끝에 거리 곳곳에 회화나무(槐木)를 심게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후부터는 과부가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안동 시내에는 거목의 회화나무가 많은데 그때 맹부사가 심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처럼 우리나라엔 나무에 대한 전설이 전해 오고, 신목(神木)으로 받드는 나무도 많다. 종교와 나무와의 관계 역시 매우 밀접하다. 기독교 불교 유교 등 나무와 관계 되지 않은 종교가 없다.
우리민족의 고유 신앙에 신단수(神檀樹), 박달나무(檀木)가 있다. 환인(桓因: 한인: 하나님)의 아들 환웅(桓雄)이 신단수 아래에서 배달나라를 세웠고, 웅녀(熊女: 웅씨족의 왕녀, 또는 ‘검녀’로 땅위의 가장 신성한 여자)와 결혼하여 단군(檀君)을 낳았다. 그 단군이 백두산 박달(배달)나무 아래에서 고조선을 열었으니 우리민족 개국의 역사와 함께한 나무이다.
그런가 하면 예로부터 마을마다 또는 서낭당 있는 곳이면 으레 신령스런 고목이 우뚝 서 있는데 당나무 또는 신목(神木)이라고 부른다. 물론 상징적 의미가 더 강한 나무이다. 신목은 신이 깃들여 있으며 신이 내리는 통로이기도 하고 영험한 능력을 지닌 것으로 믿는다. 그래서 신목은 마을사람 모두를 수호하는 집단신앙으로 지켜져 왔다.
불교는 보리수(菩提樹), 유교는 은행나무가 그 상징성을 나타내지만 경전 상에 나무가 그리 많이 언급 되질 않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만큼 나무를 비유와 상징으로 많이 언급한 종교도 없을 게다. 창세기에서 부터 요한 계시록에 이르기 까지 수없이 등장한다. 성서신학 측에 따르면, 나무에 대한 그 상징적 의미는 대체로 다음 세 가지 방향으로 전개된다.
첫째, 에덴동산에 죽지 않는 생명나무와 열매를 따먹으면 죽게 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창세기 2장9절)가 있다. 그러나 인간은 미혹 되어 그 열매를 따 먹음으로써(창세기 3장2절~6절) 타락하여 생명나무에로 나아가는 길이 막히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된다(창세기 3장22절~24절). 따라서 하나님의 인류구원사는 어떻게 인간을 이 생명나무에로 다시 나아가게 하느냐이다.
둘째, 하나님 나라를 나무에 비유한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천국은 마치 땅에 심은 한 알의 작은 겨자씨가 성장하여 나중에는 온갖 새들이 와서 둥지를 트는 거목과 같다고 가르쳤다(마태복음 13장31절~32절, 마가복음 4장30절~32절).
셋째, 사형을 집행하는 도구이기도 했던 나무는 저주의 표징이 되기도 한다.(창세기 4장19절, 여호수아 8장29절, 에스더 2장23절) 또 하나님으로 부터 저주 받아 나무에 매달린 자는 거룩한 땅을 더럽힌다(신명기 21장22절~23절). 그런데 예수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걸머지셨다(갈라디아서 3장13절). 십자가에 달려서 자신의 몸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했다(베드로전서 2장24절). 이로써 십자가의 나무는 구원의 나무가 되고, 생명나무(요한 계시록 2장7절, 22장14절)에게로 나아가는 길이 열리게 됐다. 저주의 표징이었던 나무가 이젠 생명의 나무가 되었다는 말이다. 우리 인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나무에로 나아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무는 봄마다 자연의 재생을 알린다. 창조주가 자연계에 부어 주는 생명력의 구체적인 표징이다. 나무는 생명의 은인이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찍혀서 불속에 던져진다. 좋은 나무 못된 나무는 그 열매로 분간된다(마태복음 7장16절~20절).
우리 인간의 믿음은 겨자 씨 만 한 것이지만, 이를 키우면 큰 목표를 이룰 수 있다. “천국은 마치 땅위의 모든 씨 보다 작은 겨자 씨 한 알이 심은 후에는 거목이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와서 깃들이는 것과 같다.”
이제 식목일이 다가 왔다. 오늘 나는 어떤 나무를 심을까. 죽음의 ‘십자가의 나무’를 이기고 ‘생명의 나무’가 된 예수의 부활을 되새기면서.
*상기 컬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