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사상과 신선사상
김 주 호 칼럼
복음을 전하러 길을 떠나는 예수에게 제자 한사람이 여쭈었다. 부친이 돌아 가셨기에 장사를 치르게 허락해 달라고. 이에 예수는 이렇게 답한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케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마태복음 8장22절). 여기서 ‘죽은 자들로’는 타락으로 죄악의 굴레에 씌워져 있는 인간들이고, ‘죽은 자를’이란 이미 육신이 죽은 자를 말하는 것이겠다. 생명나무요 독생자인 예수의 눈에 비친 인간들은 죽은 자들일 수밖에 없다. 인간에게 왜 죽음이 있는가. “따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세기 2장17절).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죽음이 있게 됐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따 먹지 않았다면 인간은 죽음이 없는 영생을 하게 됐을 것이다.
인간의 본래적 소망은 이 죽음이 없는 영생의 세계에 이르는 것이다. 어느 누가 죽음을 원하겠는가.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누가복음 20장38절)고 했다. 죽은 자의 영혼들이 하나님 품에 안길 수 있을까. 하나님은 죽은 ‘죽은 자의 신’이 아니다. 우리는 죽은 다음 영혼이나 천당 극락 간다는 교리의 담 벽을 넘어 자유자재 하고 장생불사(長生不死)하는 대도(大道)의 경지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민족은 오랜 옛 적부터 고조선(古朝鮮)의 개국시조 단군왕검(檀君王儉)이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이념으로 세상일을 마치고 아사달에서 신선이 되어 한얼의 본자리로 되돌아 간 날을 기려 왔다. 이날이 어천절(御天節)이다. 죽지 않고 산 그대로 신선이 되어 승천한 것을 기리는 것이다. 이를 반천(返天)이라고도 한다.
어천절은 홍암 나철(弘岩 羅喆)이 1909년 대종교를 중광(重光)한 이듬해 1910년 음력 3월15일을 어천절 기념일로 정해 지키도록 한데서 시작된다. 나라가 일본에 합병되던 경술국치로 온 나라 백성들이 비통해 했을 때 개천절에 이어 어천절이 제정돼 기리게 된 것이다. 기념일 제정은 근세의 일이나 그 사상은 유구하다.
신선사상엔 죽음 자체가 없어
이러한 사실은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 <古記>)》,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記 <本紀>)》, 어윤적의 《동사연표(東史年表)》, 최치원의 《조선사략(朝鮮史略)》 등 옛 문헌들이 전하고 있다. 김부식은《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평양은 본시 선인(仙人) 왕검의 집이다” 했다. 발해 고왕(高王)이 지은 《삼일신고 찬(三一神誥 贊)》이나 반안군왕 대야발(大野勃)의《삼일신고 서》 그리고 나철(羅喆)이 지은 《신리대전》, 윤세복(尹世復)의 단군고(檀君考)》등에도 단군에 대해, “이신화인(以神化人) 했다”고 한다. 즉, 단군한배검이 하늘 문을 여시고 인간으로 내려오시어 세상일을 마치고 오르실 때도 신인으로서 안 죽는 신선이 되어 갔다고 전한다. 또한 박혁거세가 선화(仙化)되어 하늘로 오를 때에 시신을 떨어뜨리고 올랐다는 것과 최치원의 우화등선(羽化登仙)을 기록해 놓았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卷三)》에는 “동명왕이 19년을 임금으로 있다가 하늘에 올라가 내려오지 아니 하였다”고 했다. 고구려 시조 동명왕도 선화되어 승천한 것이다. 이밖에 《해동이적(海東異蹟)》,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 《선불가진수어록(仙佛家眞修語錄)》 등에서도 육신을 지닌 채로 승천한 사람, 갓과 신발을 관속에 두고 승천 했거나 빈 관을 남긴 채 홀연히 승천한 사람 등을 전하고 있다.
그럼 ‘어천(御天)’이란 무슨 뜻인가 . 글자그대로 풀이하면 구름이나 말, 가마 따위를 타는 게 아니고 하늘을 타고 간다는 뜻이다. 한얼(하늘)에서 왔으니 한얼의 본자리로 되돌아간다는 뜻이다. ‘신선’은 어떤 사람인가. 사람이긴 하되 도(道)를 완성하여 사람으로서의 본래의 자리를 찾은 사람을 일컫는다고 본다. 도 자체엔 어떤 형체나, 제약이나 대립조차 없다. 도를 이루면 자유자재 하게 되는 것이 우리민족의 고유 신선사상이다.
민족경전 가운데 신선사상의 원리가 제시된 경전이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이다. 여기에선 ‘한(一)과 셋(三)’ ‘셋과 한’ 즉 ‘一三 三一’의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에서 셋으로 전개되나(하나 곧 많음), 셋은 곧 하나(많음 곧 하나)라는 뜻이다. 연역과 귀납을 동시에 지닌 원리이다. 사람은 ‘한(하늘)’에서 와서, ‘한’으로 살다가, 다시 ‘한’의 본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삼일신고》에선 성(性) 명(命) 정(情)과 심(心) 기(氣) 신(身)을 말해 놓았다. 간단히 말하면 성은 마음을 낳고, 명은 기를 낳고, 정은 육신을 낳는다고 했다. 그러니까 신선이 되어 감은 육신이 다시 정으로 되돌아가는 원리인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사람이 수(壽)를 다하면 ‘죽었다’는 표현 보다 ‘돌아 가셨다’는 말로 추모한다. 이 말 뿌리 역시 선어(仙語)에서가 아닌가 싶다. 이처럼 우리민족의 고유 뿌리사상인 선(仙: 僊)은 죽음 자체가 없는 사상이다. 살아서 신인일체가 되면 장생불사 하다가 하늘나라로 돌아갈 때 선화 되어 가는 것이다. 이것이 본래적 인간의 모습이 아닌가.
그런데 기독교 성경 속에 우리민족의 고유 선맥(仙脈)이 가지를 뻗고 있으니 놀랍다. 성경에는 죽음 없이 살아서 승천한 사람으로 에녹과 엘리야 두 사람을 기록해 놓았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 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 하였더라”(창세기 5장24절). 이에 대해 신약에서 히브리 기자는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었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 하니라”(히브리서 11장5절)고 기록 했다. 에녹은 죽지 않고 산 채로 하늘나라로 옮기어진 사람이었다. 장생불사 하고 선화 되는 사상이 선이다. 그렇다면 에녹은 이 선의 비의(秘義)를 터득한 사람이라 하겠다.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 수레와 불 말들이 두 사람을 격(隔)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 하더라”(열왕기하 2장11절). 엘리야도 선의 비의를 터득한 선지자요 올리어진 신선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는 십자가 죽음 통해 부활로
한데, 예수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부활 승천했다. 부활이란, 죽음이라는 관문을 거쳐야만 이루어 질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살폈듯이 에녹과 엘리야는 죽지 않고 산 채로 승천한 사람들이다. 이는 예수의 부활 사건과 정면 반대 되는 내용이다.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선의 개념 자체가 없는 서양 기독교에서는 이를 이해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오직 우리민족의 고유 영생사상인 선과 만날 때 그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기독교의 부활절과 고유 민족종교인 대종교(大倧敎)의 어천절을 맞으며 생각해 본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한계상황 속에서 몸부림치며 고뇌하는 처절한 실존들이다. 이들에게 전하는 복음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영생의 약속이 아니겠는가. 죽음이 없는 영생사상, 그 선의 광맥(鑛脈)을 캐자. 아울러 선과 성경을 만나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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