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 65.〈연락선은 떠난다〉, 〈하숙생〉(2022.05.30.)
그저께(28일)은〈연락선은 떠난다〉, 〈울어라 은방울〉의 가수 장세정(1921년∼2003년)이 태어난 지 101년째 되는 날이었고, 오늘은〈하숙생〉, 〈맨발의 청춘〉의 가수 최희준(1936년∼2018년)이 태어난 지 86년째가 되는 날입니다.
그리고 모레(6월 1일)은 제 8회 전국동시 지방선거일! 우리들의 1표는 대한민국을 이루는 밑거름입니다. 우리 모두 풀뿌리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신분증을 가지고 지정된 투표소에 가서 꼭 투표에 참여해 선진시민의식을 발휘해야겠습니다. 금번 선거에는 광역자치단체장 17명, 기초자치단체장 226명, 시·도의회 의원 872명, 시·군·구의회 의원 2,988명, 교육감 17명, 교육의원 5명 등 4,125명과 인천 계양을 등 재보궐선거로 국회의원 7명을 선출합니다.
꼭 투표!!!(^^) 참고로 구리시 투표소는 총 53개소로 경기도지사, 경기도교육감, 경기도의회 의원 2명, 구리시장, 구리시의회 의원 8명(중대선거구 확대로 가선거구 1명 증원) 등을 선출합니다. 구리시의회 가선거구는 갈매동, 동구동, 인창동, 교문1동 지역으로 시의원 4명을 선출하고, 나선거구는 교문2동 수택1동·2동·3동 지역으로 3명을 선출하며, 비례의원은 1명입니다.
장세정(張世貞 1921년〜2003년, 평양 출생)은 평양 경림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35년 평양의 화신백화점 악기점 점원으로 근무하다가 1936년 11월 오케레코드사가 주최한 평양방송국의 개국기념 무대인 ‘평양가요 콩쿠르대회’에 출전해 우승한 것을 계기로 오케레코드사 이철사장의 눈에 띄어 전속가수로 전격 스카우트되어 1937년 2월〈연락선은 떠난다〉를 발표하면서 정식 가수로 데뷔했는데, 이 노래가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하자 장세정은 단번에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목포의 눈물〉 이난영에 버금가는 가수가 되었고, 오케레코드사 관련 공연단체인 ‘조선악극단’의 프리마돈나로 절정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장세정은 1937년 오케레코드사의 전속가수와 해방 후 1946년 KPK 악극단 전속가수, 1950년 군예대에서 활동을 했고, 1956년 오아시스레코드사, 1958년 신세기레코드사, 1961년 아세아레코드사 전속가수로 음악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대표곡은 1937년〈연락선은 떠난다〉, 〈꼭 열일곱살이예요〉, 〈백만원이 생긴다면〉(with 김정구),〈아시나요〉, 1938년〈장전 바닷가〉(with 남인수), 1939년 〈항구의 무명초〉, 1940년〈잘있거라 단발령〉, 1941년〈역마차〉, 1948년〈울어라 은방울〉, 1952년〈고향초〉, 1953년 〈샌프란시스코〉, 1955년 〈그리운 고향길〉, 1956년 〈백장미 블루스〉, 1964년 〈이별의 월남선〉 등이고, 1973년 미국으로 이민가서 생활하다 1979년 지병으로 쓰러져 2003년에 작고했습니다. 1988년 5월 9일 가요무대 LA공연에서 휠체어를 타고 특별출연해 오케레코드사 입사동기 김정구와 백설희·최숙자·혜은이·나미·최진희·김연자·주현미 등 출연자가 안타까워 하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특히 김정구에게는 “좋은 약이 있으면 보내줘”라고 했습니다.
–〈연락선은 떠난다〉– 박영호 작사, 김송규 작곡, 장세정(1937년 오케레코드사)
1절. 쌍고동 울어울어 연락선은 떠난다 / 잘가소 잘있소 눈물젖은 손수건 / 진정코
당신만을 진정코 당신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 눈물을 흘리면서 떠나갑니다 /
아이 울지마세요 울지를 말어요
2절. 파도는 출렁출렁 연락선은 떠난다 / 정든 님 껴안고 목을 놓아 웁니다 / 오로지
그대만을 오로지 그대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 한숨을 삼키면서 떠나갑니다 /
아이 울지마세요 울지를 말어요
3절. 바람은 살랑살랑 연락선은 떠난다 / 뱃머리 부딪는 안타까운 조각달 / 언제나
임자만을 언제나 임자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 끝없이 지향없이 떠나갑니다 /
아이 울지마세요 울지를 말아요
〈연락선은 떠난다〉는 1937년 장세정이 16살 때 부른 데뷔곡으로 1937년 2월 오케레코드사에서 김해송·이은파가 부른 신민요〈천리춘색〉(박영호/김송규=김해송)과 함께 발매된 음반에 실려 있는 노래입니다. 당시 신문광고에는 “본사 공장 신축 기념, 조선 취입소 설치 기념, 임시 발매반(發賣盤), 장세정양의 데뷔반(盤), 평양이 나흔 명반 가희(歌姬)” 그리고 “민요 천리춘색, 항구의 선술집”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연락선은 떠난다〉노랫말은 그저 사랑하던 연인과의 이별 장면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식민치하에서의 고통과 한을 담고 있습니다. 당시 징용으로 강제노동에 시달리던 동포들은 가사를 바꿔 자신들의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며 부르기도 했습니다. 「무엇을 원망하나 나라가 망하는데 / 집안이 망하는 것도 이상할게 없구나 / 실어만 갈뿐 실어만 갈뿐 / 돌려 보내주지 않네 / 눈물을 삼키면서 떠나갑니다 / 연락선은 지옥선」
작사가 강사랑이 1968년 펴낸 ‘한국레코드가요사’에 실린〈연락선은 떠난다〉대사를 보면,
“현해탄, 그 곳은 한 많은 해협이었습니다. 일본사람들은 여기를 드나들면서 마음대로 실어가고 또 마음대로 실어다 팔았습니다. 부산항, 그 한 많은 부두에는 뼈에 사무치는 원한의 한숨이 점점이 서려있고, 관부연락선 그 연락선 갑판 위에 피눈물로 얼룩진 한 많은 사연들이 서리서리 젖어있습니다. 우리 대한국인이 일본을 가려면 먼저 본적지나 거주지에 도항증명서를 내야했는데, 이 도항증명서도 부산경찰국에서 인정하지 않으면 되돌아가야 했습니다. 오로지 조센징이라는 이유로 도항증명서의 확인을 받아야 하고, 보따리나 몸수색까지 당해야 했으며, 심지어 구둣발로 차이면서 따귀를 얻어 맞아야만 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을, 단 하나뿐인 아들을 산 설고 물 설은 일본 땅으로 떠나보내야 했으니, 여기 이 노래는 그야말로 만인의 심금을 울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951년 일본의 ‘엘레지의 여왕’이라는 스가와라 츠즈코가〈연락선의 노래〉라는 제목의 일본어 노래로 취입 발매해 일본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엔카로 알았을걸” 또한 1948년 송민도의 데뷔곡〈고향초〉는 1952년 피난지 대구에서 작곡가 박시춘의 권유로 리메이크해 불러 히트하면서 알려져 장세정이 원곡가수로 알고있을 정도입니다.
–〈역마차〉– 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 장세정(1941년 오케레코드사)
1절. 초록 포장 둘러치고 역마차는 달린다 / 짤랑대는 귀걸이는 어이 우느냐 / 이 거리
저 거리 등불을 흘기면서 / 간다 간다 간다 간다 타향살이 유리창엔 그림자도 외롭다
2절. 조각달을 바라보며 역마차는 달린다 / 고향 떠난 청노새는 어이 우느냐 / 오늘도
어제도 채쭉을 말아들고 / 간다 간다 간다 간다 혼자 우는 노새등은 때릴 곳이 없구나
3절. 울고 웃는 꿈을 싣고 역마차는 달린다 / 선물 받은 모란꽃은 어이졌느냐 / 희망도
행복도 가슴에 얼싸안고 / 간다 간다 간다 간다 포장 새를 내다보면 은하수가 흐른다
〈역마차〉는 1941년 장세정이 부른 노래로 오케레코드사에서 발매한 ‘진달래 시첩 / 역마차’ 앨범에 실려 있는 곡입니다. 21년이 지난 1962년 L.K.L.레코드사에서 발매한 ‘박남포 개사 / 이봉령 작·편곡·지휘, 경기 나그네(남백송) / 역마차(장세정)’ 앨범에도 실려 있습니다.
음반에는 Side A면. (남백송 노래편)〈경기나그네〉,〈고향설〉,〈알쌍급제〉,〈아주까리 수첩〉 Side B면. (장세정 노래편)〈역마차〉,〈연락선은 떠난다〉,〈울어라 은방울〉,〈잘있거라 추풍령〉 등 총 8곡이 함께 수록돼 있습니다. 〈역마차〉는 광복군이 독립운동의 힘겨움과 타향살이의 고단함 속에서도 내일의 희망을 담고 있는 노래로 1948년〈울어라 은방울〉의 원곡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미국진출 1호 가수이기도 한 옥두옥은 1956년 영어로 번안한〈Kanda Kanda〉로 취입해서 미국 빅터레코드사를 통해 발표해〈역마차〉는 ‘최초로 미국에 진출한 우리나라 가요’이기도 합니다.
-〈울어라 은방울〉 원곡 – 이가실 작사, 김송규 작곡, 장세정(1948년 오케레코드사)
1절. 해방된 역마차에 태극기를 날리며 / 누구를 싣고 가는 서울 거리냐 / 울어라
은방울아 세종로가 여기다 / 삼각산 돌아보니 별들이 떴네
2절. 자유의 종이 울어 8·15는 왔건만 / 독립의 종소리는 언제 우느냐 / 멈춰라
역마차야 보신각이 여기다 / 포장을 들고 보니 종은 잠자네
3절. 연보라 코스모스 앙가슴에 안고서 / 누구를 찾아가는 서울 색시냐 / 달려라
푸른 말아 덕수궁이 여기다 / 채찍을 휘두르니 하늘이 도네
–〈울어라 은방울〉개사 – 반야월 개사, 이봉룡 편곡, 장세정(1948년 오케레코드사)
(1절. 은마차 금마차에 태극기를 날리며 / 사랑을 싣고 가는 서울 거리냐 / 울어라
은방울아 세종로가 여기다 / 인왕산 바라보니 달빛도 곱네
2절. 연보라 코스모스 가슴에다 안고서 / 누구를 찾아가는 서울 색시냐 / 달려라
은마차야 보신각이 여기다 / 가로수 흔들흔들 네온빛 곱다
3절. 성당의 음악종이 은은히도 들리면 / 자유가 나래치는 서울 지붕 밑 / 뭉치자
젊은 가슴 새 희망을 위하여 / 건설의 청춘 복지 어서 달리자)
일명 ‘해방된 역마차’라고도 불리는 이 노래는 1941년〈역마차〉의 후속곡으로 1948년 4월 오케레코드사에서 해방 후 처음 실시된 5월 10일 총선거를 앞두고 발매됐습니다. 해방의 기쁨을 가득 담은 이 노래는 그 당시 민족의 환희를 잘 표현했고, 너무나 밝고 사랑스럽고 희망에 찬 건설적인 노래로서 가벼운 폴카리듬을 타고 애창된 곡이었으나, 충청남도 아산에서 출생한 작사가 조명암(1913년∼1993년 본명 조영출, 필명 이가실)이 1948년 8월경 월북해 금지될 처지에 놓이자 반야월이 개사하고 김해송의 처남이며 이난영의 오빠인 이봉룡이 편곡한 곡입니다. 또한 해방은 됐지만 미군정하에서 남과 북이 분단된 현실 등으로 인해 원곡 2절에 실린 “자유의 종이 울어 8·15는 왔건만 / 독립의 종소리는 언제 우느냐”라는 시대의 암울함이 문제가 된 요인도 있었다고 합니다. 1949년 6월 26일 김구 선생님(1876년 황해도 해주 텃골 출생)께서 흉탄에 서거했을 때 경교장(서울 종로) 서재에서는 이 노래가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고 합니다.
1973년 4월 동아일보 기사에서 발췌「해방직후, 한 20대 여가수의 아름다운 음성을 타고 흘러나왔다. “해방된 역마차에 태극기를 날리며…” 22세의 장세정양의 목소리가 해방의 기쁨을 얼마간 들뜬, 얼마간의 센티멘탈한 가락으로 불러넘겼다. 그 노래의 작사자 조명암은 월북했고, 작곡자 김해송(김시스터즈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노래를 부른 가수는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해방된 역마차…’라는 유행가 한가락에도 해방 30년의 엇갈린 사연들이 그만 그만큼 간직되어 있는 것이다. 이흥우(李興雨) 기획심의부장」「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 장세정 노래로된〈울어라 은방울〉은 해방의 감격을 노래한 첫 히트곡이었다. 반야월 “삐걱거리는 이층집에 담요를 치고 노래를 불렀고, 낮엔 시끄러우니 연습만하고 밤중에 취입을 했는데, 일이 늦어 새벽이되면 전차소리가 일을 망쳐놓고, 겨우 취입을해서 들어보면 모기소리만큼 들렸지요. 레코드판은 엿장수들이 모아오는 일본 노래판을 숯불에 구워 재생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일본노래가 튀어나오기 일쑤였죠.”」
☞ ‘오케레코드사’(Okeh)는 이철(1903년〜1944년 본명 이억길, 충남 공주 출생)이 일본 오케축음기상회 경성영업소장이던 1933년에 대한국인 최초로 설립한 음반회사입니다. 소속 대표가수로는 고복수·이난영·장세정·남인수·김정구·이인권·백년설·이화자·박향림 등이 있고, 작곡가는 손목인·김해송·박시춘·이봉룡 등이 있으며, 작사가는 조명암 등이 전속돼 있었습니다. 그 밖에 대표곡은〈타향살이〉, 〈짝사랑〉, 〈목포의 눈물〉, 〈애수의 소야곡〉, 〈눈물젖은 두만강〉, 〈해조곡〉, 〈꿈꾸는 백마강〉, 〈화륜선아 가거라〉, 〈선창〉등입니다. 그 당시에 5대 음반회사는 오케레코드사와 빅타·태평·포리돌·콜럼비아레코드사였습니다.
최희준(1936년〜2018년 본명 최성준, 서울 출생),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해 최초의 학사가수라 불리웠습니다. 경복고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에 진학해 3학년 때인 1957년 황병기(국악인)과 함께 서울대 축제 장기자랑대회에 법대 대표로 출전 김광수 악단의 반주에 맞춰 샹송〈고엽〉을 불러 입상한 후 ‘노래 잘하는 서울대 법대생’이란 입소문을 탔습니다. 1958년 사법고시에 탈락한 후, 1959년 졸업과 동시에 파피 김(본명 김안영)을 통해 미 8군무대에서 가수생활을 시작하던 중 1960년 서울 명동의 어느 다방에서 비너스레코드사를 설립해 음반 제작을 준비하던 작곡가 손석우를 만나 음반 녹음을 제안받고〈우리 애인은 올드미스〉를 취입해 정식가수로 데뷔했습니다. 이때 손석우는 항상 웃음을 잃지 말라는 뜻으로 예명을 ‘희준(喜準)’으로 지어주었습니다. 그는〈우리 애인은 올드 미스〉를 1961년 개국한 한국방송(KBS) 개국쇼에서 부르기도 했습니다. 196 1년 MBC 라디오 연속극주제가〈엄처시하〉를 발표한 후에 해병대 연예대에 입대하고, 1964년 제대와 동시에 영화주제가〈맨발의 청춘〉1965년〈하숙생〉이 히트했습니다. 그리고 1964년 최희준(서울대)는 유주용(서울대, 윤복희 첫남편), 위키리(서라벌예대 본명 이한필), 박형준(외국어대) 4명은 밴드 ‘포 클로버즈’를 결성해서 활동을 했습니다.
최희준은 1960년대에 ‘딴다라’로 폄하되었던 대중가수의 품격을 한층 더 높혔고, 최정상의 인기를 구가했던 대스타였지만 ‘찐빵’이란 별명으로 불릴 만큼 친숙한 이미지로 대중들과 소통했습니다. 중저음과 철학적 노랫말을 풍미한 ‘대중음악계의 신사 최희준’ 1964년〜1966년 동양방송(TBC) 가요대상 3연패, 1966년 문화방송(MBC) 10대가수상 초대 가수왕, 1995년 제2회 가요대상 특별공로상, 2007년 연예예술상 대상 등을 가수로 수상했고, 가수 중 유일하게 제 15대 국회의원으로도 활동한 영원한 ‘하숙생’이었습니다.
–〈하숙생〉– 김석야 작사, 김호길 작곡, 최희준(1965년 신세기레코드사)
1절.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말자 미련일랑 두지말자 / 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없이 흘러서 간다
2절.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 /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말자 미련일랑 두지말자 /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없이 흘러서 간다
1966년 1월말부터 KBS 라디오 연속극으로 방영된 ‘하숙생’을 영화로 제작해 그해 6월 30일 서울의「아카데미극장」에서 상영돼 관객 14만 명이 찾아 흥행에 성공했습니다. 제작 세기상사, 정진우 감독, 김지미, 신성일, 최남현, 김희갑, 전계현, 오현경 등 출연. 최희준의〈하숙생〉은 영화 오프닝에 ‘석양이 지는 강둑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을 점점 보여주면서 들려옵니다. 아코디언과 피아노 연주로 잔잔하게 배경 음악으로도 나옵니다.
줄거리는,「하숙집에 새로 들어온 청년(신성일)은 아코디언 연주자다. 3년 전 화상을 입고 성형수술을 했으며 이름을 인석에서 민구로 바꿨다는 그는 수시로 아코디언으로 같은 멜로디를 연주한다. 옆집 부자 노인(최남현)의 두 번째 아내인 황재숙(김지미)는 아코디언 소리를 듣고 기겁하는데, 그것은 3년 전 자신이 버리고 떠난 약혼자 인석이 연주하던 아코디언 멜로디였기 때문이다. 재숙은 인석을 만나 잘못을 빌지만 인석은 자신을 버린 재숙을 용서하지 못한다. 그는 재숙의 곁을 배회하며 재숙을 정신적으로 죽이려 든다.」 〈하숙생〉은 집착이 부른 복수극의 쓸쓸한 종말을 보여주는 영화로, 시종 흐르는 최희준의 히트곡〈하숙생〉이 차가운 영화의 온도를 따뜻하게 감싸주었습니다.
에피소드 하나, 최희준은 전라남도 여수 중앙극장에서 낮 공연을 마치려는데, 객석에서 갑자기〈하숙생〉을 불러달라며 연호했습니다. 여수 공연은 이 드라마 주제가가 나간 지 5일만으로 최희준은 급히 녹음만 마치고 전국 순회공연길에 올라 가사를 외우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드라마 인기가 삽시간에 치솟아 열화와 같이 노래를 청하는 관객들로 인해 당황스러웠지만 사과를 한 후, 그날 저녁 방송을 통해 가사를 외워 그날밤 공연에서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이후 최희준은 여러 극장공연에서〈하숙생〉을 부를 때마다 앵콜이 쇄도해 언제나 공연 마지막에 불렀을 정도로 노래에 대한 반응이 뜨거웠다고 합니다. 지금까지도 최희준 하면〈하숙생〉,〈하숙생〉하면 최희준인 것입니다.
〈하숙생〉은 작사가 김석야(1929년〜2000년 본명 김형근)의 고향인 천안삼거리를 배경으로 지어져 노래비는 2001년 7월 7일 ‘천안삼거리공원’에 세워졌습니다. 대표곡은〈사랑은 흘러가도〉〈꿈은 사라지고〉〈천안삼거리〉〈명월관 아씨〉등이 있습니다.
☞ 최희준 대표곡은, 1961년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 〈내사랑 쥬리안〉, 1964년 〈맨발의 청춘〉, 〈월급 봉투〉〈진고개 신사〉, 1965년 〈뜨거운 침묵〉, 〈수탉같은 사나이〉, 〈아! 장하여라 그 이름〉, 〈엄처시하〉, 〈여자가 더 좋아〉, 〈하루살이 인생〉, 1966년 〈길잃은 철새〉, 〈뜨거운 침묵〉, 〈병사의 향수〉, 〈빛과 그림자〉, 〈종점〉, 1967년 〈광복 20년〉, 〈나는 곰이다〉, 〈옛이야기〉, 〈이별의 푸렛트홈〉, 〈팔도강산〉, 1968년 〈노신사〉, 1969년 〈태양〉, 1970년 〈길〉, 〈어차피 보낼 사람〉, 1973년〈자가용 타고 친정가세〉 등입니다.
다음엔 외국의 향수를 자극하는〈인도의 향불〉,〈샌프란시스코〉등 글을 올리겠습니다.
*상기 컬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