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 68. 가요황제 남인수, 싱어송라이트 한복남(2022.06.20.)
다가오는 25일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2주년이 되는 날이고, 가수 겸 작곡자인 한복남이 탄생한 지 103년, 26일은 백범 김구 선생님께서 작고하신 지 73년, 가요황제 남인수가 작고한 지 60년째가 되는 날입니다.
오늘은 한복남과 남인수님에 대한 글을 올립니다. 한복남의 본명은 한영순, 1919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나 1991년에 작고하셨습니다.
남인수, 백년설, 현인 등과 함께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초창기를 이끈 분으로 고향에서 양복점을 운영하다 가족들과 함께 1947년 월남하여 서울 종로에서 양복점을 운영하던 한복남은 가수의 꿈을 간직하고 있었기에 양복점 단골손님인 작곡가 박시춘과 김해송에게 선물 공세를 하면서 김해송 등이 운영하던 KPK악단에 입단했고, 김해송 작곡의〈저무는 충무로〉를 아세아레코드사에서 발매해 가수로 데뷔했으며. 직접 작사·작곡한〈빈대떡 신사〉도 1948년 아세아레코드공사에서 발매했습니다. 그 당시 가수가 곡을 쓰면 “건방지다”는 말을 듣던 시기라 트럼펫 연주가인 양원배의 이름을 명기했습니다. 장남인 작곡가 하기송은 한복남으로 명기된 친필 오리지날 악보를 보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해 1952년 피난지인 부산 아미동에 도미도레코드사를 창립해 대중가요 작곡에도 심혈을 기울였으며, 라라·아세아·오아시스레코드사 등에서 작곡가 겸 가수로 활동을 했습니다. 특히, 1985년 11월 4일 방송을 시작한 KBS1-TV ‘가요무대’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했습니다.
가수로서의 노래는 1943년 〈빈대떡 신사〉, 〈맘보 타령〉, 〈엽전 열닷냥〉, 〈전복 타령〉이 있으며, 작곡한 노래는 김정구〈코리안 맘보〉, 김정애〈앵두나무 처녀〉, 문일봉〈경상도 사나이〉, 박재란〈님〉, 손인호〈물새야 왜 우느냐〉, 〈진주는 천리길〉, 〈짝사랑〉, 〈청춘 등대〉, 〈한많은 대동강〉, 송민도〈나의 탱고〉, 황금심〈양산도 맘보〉, 황정자〈봄바람 님바람〉, 〈오동동 타령〉, 〈처녀 뱃사공〉, 허민〈백마강〉, 〈페르샤 왕자〉 등이 있습니다. 장남인 하기송(본명 한정일)도 가수로 1962년 〈장미는 슬프다〉를 취입했고, 작곡가로서는 김용만〈회전의자〉, 박재란 〈둘이서 트위스트〉, 최숙자 〈나룻배 처녀〉, 손인호 〈향수의 탱고〉 등 800여 곡을 작곡했으며, 손자 한정호는 2017년 〈차라리 꿈이라면〉을 취입한 가수로 3대 가수·작곡가 가문입니다.
–〈빈대떡 신사〉– 한영순 작사, 양원배 작곡, 한복남(1947년 아세아레코드사)
1절. 양복 입은 신사가 요리집 문밖에서 매를 맞는데 / 왜 맞을까 왜 맞을까 원인은
한가지 돈이 없어 / 들어갈 땐 폼을내며 들어가더니 나올 적엔 돈이 없어 쩔쩔매다가 / 뒷문으로 도망가다 붙잡히어서 매를 맞누나 매를 맞누나 / 으하하하 우습다 아하하하
우스워 호호호호 우스워 와하하하 우습다 / 돈 없으면 집에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 / 한푼 없는 건달이 요리집이 무어냐 기생집이 무어냐
2절. 아버지가 모아준 아까운 전재산을 다불어 먹고 / 마즈막엔 마즈막엔 양복을 잽혀도
요릿집만 / 쳐다보진 점지안은 신사같지만 주머니엔 한푼없는 새파란 건달 / 요리먹고 술먹을땐 뽐을내지만 매맞는 꼴이야 매맞는 꼴이야 / 우하하하 우습다 아하하하 우스워 / 이헤헤헤 우습다 호호호호 우스워 와하하하 하하 우습다 / 돈 없으면 집에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 / 한푼 없는 건달이 요리집이 무어냐 기생집이 무어냐
〈빈대떡 신사〉는 한복남의 친필 악보에 1946년 5월 20일 만든 것으로 명시되어 있는 노래로 1947년 아세아레코드사를 통해 발매한 곡입니다. 작사자 한영순은 그의 본명이고, 작곡자 양원배는 당시 KPK악단 트럼펫 연주자로 그의 이름을 사용했다고도 합니다. 1954년〈토막촌의 밤〉(김초향/이봉룡)과 함께 도미도레코드사에서 재발매 하였습니다.
주인 “저 놈 잡아라, 저 놈 잡아! 자, 잡았다. 자, 내슈! 당장 내라니깐.” 신사 “아! 내, 내 약속하지. 내일 저녁 다섯 시까지 꼭 약속하지.” 주인 “어휴, 이젠 안 속아요. 속는 것도 한 번 두 번, 내 그럴 줄 알고 뒷문을 지키고 있는 거요. 당장 내쇼.” 신사 “아, 이젠 나를 안 볼 작정인가.” 주인 “아, 당신 같은 손님은 안 봐도 그만이에요. 우린 뭐 한강물 파서 장사하는 줄 아쇼? 우리도 세금내고 색시 월급주고 종업원 월급줘야 하니 당장 내쇼.” 신사 “아, 그 그러지 말고 이번 한 번만 봐 주구려. 이번만은 약속 안 어길테니까. 응? 점잖은 체면에 여기 길에서 이게 뭐람?” 주인 “점잖은 거 좋아하시네. 당장 옷이라도 벗으시오. 오늘은 그냥 못 가오. 아, 돈 없으면 쐬주에 빈대떡이 제격이지 요릿집이 뭐람. 자 옷을 벗어요.” 신사 “아, 이거 야단났구만, 야단났어. 이 늘그막에 이게 뭐람.” 당시엔 요릿집은 부자들의 술집, 빈대떡집은 서민들의 술집이었나 봅니다.
〈빈대떡 신사〉는 한과 슬픔을 간직한 노래가 아닌 양복 입은 신사의 무전취식(無錢取食)을 담은 해악적인 가사와 한복남 특유의 창법이 어우러져 가난했던 시절의 서민들에게 삶의 활력과 흥겨움을 안겨준 국민가요입니다. 후렴구의 ‘돈 없으면 집에 가서’는 당초 ‘돈 없으면 대폿집에서’였으나 한복남도 ‘돈 없으면 집에 가서’가 더 구수하다고 했는데, 노래를 만들던 당시 한복남이 보기에는 빈대떡이 아주 서민음식이었나 봅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빈대떡에 막걸리 한잔이 그리워지네요. 조선시대에는 한양 정동에 빈대떡을 파는 백성들이 많이 살아서 ‘빈대골’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엽전 열닷냥〉– 천봉 작사, 한복남 작곡, 한복남(1955년 도미도레코드사)
1절. 대장군 잘있거라 다시보마 고향산천 / 과거보려 한양천리 떠나가는 나그네에 / 내
낭군 알상급제 천번만번 빌고빌며 / 청노새 안장위에 실어주던 아아아아 엽전 열닷냥
2절. 어제밤 잠자리에 청룡꿈을 꾸었더라 / 청노새야 흥겨워라 풍악따라 소리쳐라 /
금방에 이름걸고 금의환향 그날에는 / 무엇을 낭자에게 사서가리 아아아아 엽전 열닷냥
한국전쟁 이후 가난하기만 했던 서민들의 자조섞인 말로 쓰였던 ‘엽전’ 그러한 정서를 유쾌하게 풀어낸 한복남의〈엽전 열닷냥〉은 그 당시 대중들에게 흥겨움과 희망을 안겨주었습니다. 〈빈대떡 신사〉와 더불어 그의 대표곡으로 지금까지도 애창되고 있습니다.
1절에 나오는 ‘알성급제(謁聖及第)’는 조선시대 상감마마을 모신 과거시험에서 합격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거보러 떠나는 선비나 방랑시인 김삿갓이 지녔다는 비상금이 ‘엽전 열닷냥’이었는데, 엽전 한냥은 엽전이 100개니까 열닷냥이면 1,500개인데 무게가 상당했겠죠? 18세기 황윤석의 ‘이재난고’를 참고하면은 한냥은 60,000원∼70,000원 정도이니 엽전 열닷냥의 가치는 900,000원∼1,050,000원 정도로 추정됩니다. 엽전 한 개를 한푼(=한문)이라 했는데, “한푼 줍쇼”하는 것이 그 한푼인 것이니 600원∼700원 달라는 뜻입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말 한마디에 6천만원∼7천만원의 빚을 갚을 수 있으니 이제부터 아름다운 말만 하면서 살아갑시다.(^^)
2절에 나오는 ‘금방(金榜)은 과거에 급제를 한 선비의 이름들을 기재해 알리는 방으로 노랑 종이를 사용했다 합니다. 금과 은을 파는 금방(金房)과 조금 전 금방(今方)과는 구분.
☞ 조선의 제22대 임금 정조대왕때의 화폐는 상평통보(常平通寶)였는데, 한양에 살던 유만주의 ‘흠영(欽英)일기’엔 1784년 8월 집주릅(부동산중개인)을 통해 명동에 100칸 저택을 2000냥에 구입했다고 하니 현재 시세로 1억2천만원∼1억4천만원 정도였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최고의 ‘가요황제 남인수’(1918년∼1962년)님에 대해서는 2021년 10월 18일에 34회차 “경상남도”편에서 소개하였기에 그의 약력에 대한 것은 생략을 하겠습니다.
독자논단, “고인돌의 트로트, 세월따라 사연따라”
–〈달도 하나 해도 하나 〉– 김건 작사, 이봉룡 작곡, 남인수(1949년 아세아레코드사)
1절. 달도 하나 해도 하나 사랑도 하나 / 이 나라에 바친 마음 그도 하나이련만 /
하물며 조국이야 둘이 있을까 보냐 / 모두야 우리들은 단군의 자손
2절. 물도 하나 배도 하나 산천도 하나 / 이 나라에 뻗친 혈맥 그도 하나이련만 /
하물며 민족이야 둘이 있을까 보냐 / 모두야 이 겨레의 젊은 사나이
3절. 간 길 하나 온 길 하나 갈 길도 하나 / 울부짖는 군호 소리 그도 하나이련만 /
하물며 생사인들 둘이 있을까 보냐 / 모두야 새 나라의 용감한 일꾼
작사가 김건(김초향)이 전쟁 중에 납북돼 1952년 ‘월북작가 작품 금지조치’로 금지곡 지정을 앞두고 작사가 박남포(반야월)이 1절 ‘목숨’→ ‘마음’으로 ‘배달민족’→ ‘우리들은’, 3절, ‘산도 하나 강도 하나 초목도 하나’→ ‘간 길 하나 온 길 하나 갈 길도 하나’, ‘아름다운 금수강산’→ ‘울부짖는 군호 소리’, ‘조국이야’→ ‘생사인들’, ‘남북통일 민족의 염원’→ ‘새나라의 용감한 일꾼’으로 일부 개사해 금지곡 지정을 모면하기도 했습니다. 해방 이후 1947년 고려레코드사가 최초로 국산음반 제작에 성공하자 작곡가 박시춘의 럭키레코드사, 작사가 겸 녹음기사 야인초의 코로나레코드사, 작곡가 이병주의 오리엔트레코드사가 설립되었고, 1948년 고려레코드사에서〈가거라 삼팔선〉을 발표한 남인수도 아세아레코드사를 설립해 1949년 6월 첫 번째 신보로 발매한 곡이〈달도 하나 해도 하나〉였습니다.
이 노래는 해방후 미군정 3년, 남과 북의 정부수립 1년이 지나고 한국전쟁 발발 1년전의 시대상을 노랫말에서 읽을 수가 있는데, 당시 북한에서 통행을 금지하는 조치를 해 남북의 왕래가 끊겨 마치 두 개의 서로 다른 나라처럼 돼 버렸던 것입니다. 당시 남인수가 발표한 노래들은 분단의 극복과 민족통일에 대한 염원과 충정, 살기좋은 조국 건설에 대한 내용들이 많았는데,〈가거라 삼팔선〉, 〈흘겨본 삼팔선〉, 〈망향의 사나이〉, 〈여수야화〉, 〈해 같은 내 마음〉, 〈휴전선 엘레지〉 등이 있습니다.
-〈눈물의 해협〉- 김상화 작사, 박시춘 작곡, 남인수(1936년 시에론레코드사)
1절. 현해탄 초록물에 밤이 나리면 / 님 잃고 고향 잃고 헤매는 배야 / 서글픈 파도소래
꿈을 깨우는 / 외로운 수평선에 짙어 가는 밤
2절. 님찾어 고향찾어 흐른지 십년 / 몸이야 시들어도 꿈은 새롭다 / 아득한 그 옛날이
차마 그리워 / 물 우에 아롱아롱 님 생각이다
3. 꿈길을 울며 도는 파랑새 하나 / 님 그려 헤매이는 짝사랑인가 / 내일을 묻지 말고
흘러만 가면 / 님 없는 이 세상에 기약 풀어라
〈눈물의 해협〉은 1918년 가요황제 남인수가 18살 때인 1936년 7월 시에론레코드사 신보에 가수 신난수의〈불꺼진 항구〉와 함께 실려 있는 정식가수 데뷔곡으로 작곡가 박시춘(1913년∼1996년 경남 밀양 출생)이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초기작품이라 더욱 그 의미가 있는 곡입니다. 그러나 대중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다 1937년 시에론레코드사가 문을 닫고, 1938년 작사가 이부풍이 개사해 오케레코드사를 통해 발표한〈애수의 소야곡〉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남인수를 가요황제로 만들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1938년 11월 고라이레코드사에서 원곡〈눈물의 해협〉을 재발매했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고라이레코드사도 경영난 등으로 문을 닫았습니다.
본명이 강문수인 남인수는 가수가 되고자 1935년 어느날 시에론레코드사를 방문해 노래 테스트를 받았는데, 그의 재능을 발견한 작곡가 박시춘이 직접 지도하면서 이 곡으로 가수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눈물의 해협〉은 1935년 당시 현해탄의 관부연락선에서 피고 지는 애뜻한 사연을 담은 시인 김상화의 노래시를 박시춘이 곡을 붙혀 본명 강문수 이름으로 발표했지만 반응이 별로 없어 파묻힌 곡을 개사해 1938년 오케레코드사로 전속을 옮겨 예명 남인수로 발표한〈애수의 소야곡〉은 바로 남인수 시대를 활짝 열었습니다.
가요황제의 전성기는 그가 공연하는 극장마다 기생들의 인력거들로 장사진을 쳤고, 공연이 끝나면 남인수 모시기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졌으며, 출시하는 음반을 사기 위해 종로 오케레코드사 일대의 여관이 호황을 누렸다고도 합니다. 우리들 곁을 떠난지도 벌써 60년, 1962년 6월 28일 서울 견지동 소재 조계사에서 ‘연예인장’으로 열린 그의 장례식에는 이난영의 선창으로〈애수의 소야곡〉이 추도곡으로 울려 퍼졌습니다. 쇳소리가 울리는 듯한 고음이 날카롭게 듣는 사람들의 폐부를 콕찌르고 속삭이면서도 흐느끼는 듯한 저음의 부드러움과 감미로움을 주는 매혹적인 미성(美聲)과 폭발적이고 정열적인 뛰어난 창법, 세 옥타브를 넘나드는 발성 등 거의 완벽성을 갖춘 유일한 가요황제가 그리워집니다. 필자가 선정한 대중가요 4대 창법은「남인수·이미자 선생님·배호·조용필 창법」입니다.
다음에는 작곡가 박춘석 사단의 국민가수 하춘화, 문주란에 대한 글을 올리겠습니다.
*상기 컬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