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 73. 1931년∼1933년〈방랑가〉,〈강남제비〉 (2022.08.15.)
오늘은 제 77주년 광복절(광복절)입니다.
뉴스아이신문 애독자 여러분!
가정 가정마다 태극기를 게양하여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애국애족정신 함양에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1931년의 전통가요는 이규송 작사, 강윤석 작곡, 강석연〈방랑가〉〈오동나무〉와 이애리수〈고요한 장안〉(이현경/전수린)이 있습니다. 이 해에는 1월 3일 대구 약령시 개시, 3월 15일 서울↔수원 버스 운행, 5월 1일 미국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완공, 10월 14일「조선중앙일보」창간, 11월 1일『신동아』창간, 12월 21일 경주 태종무열왕릉비 발견, 탄생한 인물은 1월 18일 제11∼12대 대통령 전두환, 6월 19일 필자의 아버지, 6월 20일 기업인 이맹희, 8월 14일 무용가 공옥진, 10월 20일 소설가 박완서, 12월 7일 정진석 추기경, 작고한 인물은 7월 23일 소파 방정환, 10월 18일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 등이 있고,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은 구리시 아치울에서 2011년 1월 22일 작고했습니다.
☞ 에디슨이 1887년 발명한 축음기는 1910년 일본에서 유성기(留聲機)라 했습니다. 최초로 한국어 레코드(SP판) 제작은 1925년 빅타레코드사 문예부장인 이기세(1888년∼1945년)가 서울 종로에 설립한 ‘조선축음기상사’였습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설립된 음반사는 1927년 빅타레코드사(미국회사)를 비롯 1928년 콜럼비아레코드사(영국회사), 1931년 포리돌레코드사(독일회사), 시에론레코드사(일본회사), 돔보레코드사, 1932년 태평레코드사(일본회사), 1933년 이철이 한국인 최초로 설립한 서울 다동의 OK(오케)레코드사, 1934년 리갈레코드사 등 8대레코드사가 영업을 하였습니다. 오늘은 1931년〈방랑가〉1932년〈강남제비〉1933년〈바리지 마라요〉3곡에 대한 글을 올리겠습니다.
–〈방랑가〉– 이규송 작사, 강윤석 작곡, 강석연(1931년 2월 콜럼비아레코드사)
1절. 피 식은 젊은이 눈물에 젖어 / 낙망과 설움이 병든 몸으로 / 북극한설 오로라로
끝없이 가는 / 애달픈 이내 가슴 뉘가 알거나 / 돋는 달 지는 해 바라보면서 / 산 곱고
물 맑은 고향 그리며 / 외로운 나그네 홀로 눈물 지울 새 / 방랑의 하루 해도 저물어
가네 / 춘풍추우 덧없이 가는 세월 / 그동안 나의 마음 늙어 가고요 / 어여쁘던 내
사랑도 시들었으니 / 몸도 늙어 맘도 늙어 절로 시드네
〈방랑가〉는 1931년 강석연이 부른 노래로 콜럼비아레코드사를 통해 발표한 곡입니다. 강석연(姜石燕)의 본명은 강복형(姜福亨)으로 1914년 제주도 제주면 삼도리에서 편모슬하 가난한 집에서 생활하다 어릴 때 서울로 상경해 살다가 2001년에 작고했습니다. 15살 때인 1929년 언니 강석제, 오빠 강석우를 따라 토월회에 입단해서 배우로 연극 ‘즐거운 인생’과 ‘초생달’에 출연했고, 1930년 김연실, 김선초, 이경설, 복혜숙, 이애리수 등과 함께 극단 막간가수로 활동하다 1925년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주제가인〈쌍옥루〉를 1930년에 불러 음반을 발매했으며, 1931년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음반 취입 제의를 해〈방랑가〉〈오동나무〉로 데뷔 앨범을 발매했습니다. 그리고 1932년 빅타레코드사와 1935년 태평레코드사에서 1939년까지 활동하다 혼인 후에는 가정에만 충실했습니다. 1931년 7월 2일 동아일보에 실린 평(評)「프롤레타리아계급에서 태어나 부르주아에게 시달려 반감을 품고 저항하는 가련하고 힘있는 여직공이나 처녀역에 적역인 배우다.」
1932년 곡 녹음을 위해서 일본 동경 빅타레코드사 본사 녹음실을 방문한 두 여가수가 있었으니 “이애리수와 강석연은 조선 최고의 가수다, 노래 몇 곡 취입하고 보내기에는 너무 아깝다.”며 50여일 간을 호텔에서 지내기도 했다는 일화가 있는 당시 최고의 가수였습니다. 2012년 대한농구협회장을 역임한 방열감독의 회고 “고교시절 우연히 다락방에서 붉은 보자기를 발견해 풀어보려 했는데, 어머니께서 깜짝 놀라시면서 감추어 버렸어요. 그 후 마이크 앞에 서 있던 어머니의 과거 배우시절의 활동 사진을 보게됐습니다. 그 분이 제 어머니 강석연이셨습니다.”
이애리수의 모습과도 비슷하게 혼인 후 가수 활동을 접고 가정에만 충실하던 강석연은 한국전쟁 때 남편이 납북돼 생활이 어려워지자 미용실 등을 운영하며 평범하게 살면서 아들을 훌륭하게 키워내셨던 그런 분이셨습니다.
1932년의 전통가요로는 김서정 작사·작곡, 강석연〈강남제비〉가 있습니다. 이해에는 1월 12일 제주 우도「제주 잠녀항쟁」과 3월 1일 일본 만주국 건국, 4월 12일 소설가 이광수 장편「흙」동아일보 연재, 4월 29일 매헌 윤봉길의사 상하이 홍커우공원 의거, 6월 5일 충무공 이순신장군 아산 현충사 낙성식·영정 봉안식, 6월 18일 스위스 제네바 국제농구연맹 창설, 8월 6일 이탈리아 제1회 베니스영화제 개막, 11월 20일 통영운하·해저터널도로 준공, 11월 27일 해주에서 최초로 크리스마스 씰 발행, 탄생한 인물은 2월 27일 영국 영화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 3월 27일 농심 기업인 신춘호, 7월 20일 현대미술가 백남준, 10월 8일 법정스님, 12월 4일 제13대 대통령 노태우, 순국하신 인물은 10월 10일 이봉창 의사, 독립운동가 이회영, 12월 19일 매헌 윤봉길 의사가 계십니다.
–〈강남제비〉– 김서정 작사·작곡, 강석연(1932년 시에론레코드사, 1934년 신카나리아)
1절. 강남제비 돌아와서 봄은 왔건만 / 나의 님은 어찌하여 못 오시려나 / 산을 넘고
물을 건너 흰구름 저쪽에 / 달과 함께 님의 얼굴 솟아 오려나
2절 금풍은 소슬하고 달은 밝은데 / 나를 품에 안으시고 눈물 뿌리며 / 꽃이 피고
새가 울면 오시마 하더니 / 님은 어이 봄이 온 줄 모르시는지
3절. 바람 부는 황야에 외로이 건너 / 굳은 의지 품고서 가신 사랑은 / 나의 심장
타는 줄을 아실 양이면 / 님은 절로 오시리라 나의 품으로
〈강남제비〉는〈방랑가〉와 함께 1930년 이애리수가 녹음하여 빅타레코드사를 통해 발표한 곡으로, 1932년 강석연이 다시 취입해 시에론레코드사를 통해 발표한 곡입니다.
〈강남제비〉는 1927년 김서정(본명 김영환)이 작사·작곡해 이정숙이 부른〈강남달=낙화유수〉와 매우 유사한 쌍둥이 같은 느낌이 있는 노래이나, 전혀 다른 곡으로 가사 첫소절을 따 이정숙의 곡은〈강남달〉강석연의 곡은〈강남제비〉로 제목이 붙었습니다.
필자의 외할머니께서 가장 애창하시던 노래가〈강남달〉,〈강남제비〉로 40대부터 86세 작고하실 때까지 앞이 보이지 않아 안타깝던 그 시절이 아련해 슬프기 그지없습니다. 〈강남달〉,〈강남제비〉가 흘러나오면 인자하셨던 외할머니가 보고 싶고 그리워집니다. 〈강남제비〉는 이애리수, 강석연 등이 처음 불렀지만 신카나리아의 노래로 더 알려져 있습니다.
함경남도 원산 출신인 신카나리아의 본명은 신경녀로 가정 형편이 어려워 원산 루씨여자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교회에서 테너 이인범의 누이 이옥현을 만나 성악을 지도받은 후 16살 때인 1928년 ‘조선예술좌’에 입단해 우리나라 최초로 ‘신카나리아’ 예명을 받고 막간가수로 활동하다 시에론레코드사를 통해서〈뻐꾹새〉〈연락선〉으로 정식가수가 되어 박단마 〈나는 열일곱살이예요〉, 이정숙 〈강남달〉, 강석연 〈강남제비〉, 선우일선 〈조선팔경가〉등을 불러 인기를 얻었습니다. 본인의 노래는 1931년 시에론레코드사를 통해〈황혼의 비〉와 함께 발표한 〈무궁화 강산〉이 큰 인기를 받았습니다. 〈무궁화 강산〉은 광복 후〈삼천리 강산 에라 좋구나〉로 지금까지 애창되고 있습니다.
1933년의 전통가요는 이고범 작사, 전수린 작곡, 이애리수의 〈바리지 마라요〉입니다. 이 해에는 1월 13일 평북 중강진 영하 44℃ 기록, 3월 2일 미국 영화「킹콩」개봉, 3월 4일 미국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 취임, 3월 7일 낙동강교 준공, 7월 7일 고흥 소록도 나환자촌 조성, 8월 6일 수인선 철도 완공, 9월 19일 조선축구협회 창립, 9월 27일 이광수「유정」조선일보 연재, 10월 29일 한글학회「한글 맞춤법 통일안」제정, 탄생한 인물은 8월 1일 시인 고은, 12월 29일 초대 문화부장관 이어령 교수 등입니다.
☞ 이어령(李御寜 1933년∼2022년)은 1933년 충청남도 아산에서 태어나 의협심이 강하고 반항의식이 있던 유년시절을 보내었고, 머릿맡에서 책을 읽어 주시던 어머니께서 11살 때 작고하시자 커다란 상실감과 슬픔 속에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1952년 서울대 문리대 국문학과에 입학했습니다. 1956년 스물 셋에 ‘우상의 파괴’를 선언하며 평론「저항의 문학」으로 한국 문단에 혜성(彗星)처럼 등장해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화전민 지역」,「분노의 미학」,「수인의 영가」등을 발표하면서 한국의 문학 평론은 이어령의 등장과 함께 비로소 ‘문학’으로서 격상되었다는 평가(評價)를 받았다 합니다.
이어령 박사님은 “이 시대 최고의 지성”, “5000년 역사상 가장 돋보이는 창조적 인물”로 칭송을 받고 계시지만, 선천적인 자유분방한 모습으로 일부에서는 강한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 총괄 지휘·감독을 맡아 ‘굴렁쇠 소년’ ‘손에 손잡고’ 등으로 개막식을 전개해 전세계에서 감동했고, 고령의 나이에도 컴퓨터 및 소프트웨어 활용 능력이 뛰어나셨으며. 서재에는 각기 다른 목적을 가진 7대의 컴퓨터가 있었다고 합니다.
필자는 1979년 KBS-TV「문예극장」에 출연해 해박한 지식과 거침없는 달변으로 작품을 설명해 주시던 모습과 마지막 영상을 통해 국민들께 남기신 작별 인사 말씀 “잘 있으세요. 여러분들 잘 있어요.”라는 말씀의 잔상이 긴 여운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바리지 마라요〉– 이고범 작사, 전수린 작곡, 이애리수(1933년 빅타레코드사)
1절. 하늘에 구름 지면 꽃잎도 움츠리고 / 님께서 눈물지면 내 맘도 섧습니다
우실 때 같이 우는 마음이 약한 나를 / 버리지 말아주세요 버리지 말아요
2절. 가물어 물 마르면 꽃잎도 시들 시들 / 님께서 성내시면 내 맘도 조입니다
성낼 때 떨고 있는 마음이 약한 나를 / 버리지 말아주세요 버리지 말아요
3절. 광풍이 불어오면 꽃잎도 나불 나불 / 님께서 뿌리치면 내 맘도 아득해요
가시는 옷깃 잡는 마음이 약한 나를 / 버리지 말아주세요 버리지 말아요
〈바리지 마라요〉는 1933년 이애리수가 부른 노래로 6월 빅타레코드사에서〈눈물에 흐린 거울〉과 함께 발매한 곡입니다. 1910년 개성에서 출생한 이애리수(본명 이음전)은〈황성의 적=황성옛터〉로 인기가 절정에 이르렀지만 1935년을 기점으로 왕수복, 선우일선, 이난영, 전옥 등의 출연으로 서서히 인기가 기울기 시작해 대중들의 관심권에서 멀어져 가던 시기에 자신의 노래를 좋아하던 대학생 배동필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당시 대학생과 여가수, 유부남과 아이가 있는 여자 가수라는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꾸 불행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만날 기회조차 없던 어느날 밤 둘은 함께 수면제를 먹고, 자해를 했으나 집주인에게 발견되어 경성제국대학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위험한 고비를 넘긴 두 사람은 언론과 사회로부터 혹독한 지탄을 받으면서도 동거 생활을 하면서 서로의 사랑을 이어갔지만 주위의 손가락질과 본부인과의 갈등 등으로 이애리수는 또다시 자살을 시도해 또다시 싸늘한 사회 여론에 괴로워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심정을 고스란히 담은 듯한 노래〈바리지 마라요〉는 그녀의 애처러운 음색과 조화롭게 어우러져 듣는 사람들의 가슴을 서럽게 만들었고, 눈물까지 흘리게 만들면서 그토록 완고하던 배동필의 부모님도 이 노래를 듣고서 결국 부부로 인정해 주어 가수 생활을 접고 현모양처로 2남 7녀의 자녀를 낳았으며, 2009년 작고하셨습니다.
이미자 선생님께서는 1967년〈버리지 말아주세요〉로 리바이벌해 음반을 발매했습니다.
다음에는 1934년〈처녀 총각〉,〈노들강변〉,〈봄맞이〉 3곡에 대한 글을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