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불화(同而不和)가 판치는 세상
김 주 호 칼럼
공자는 논어에서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고 말했다. 즉 남과 친화(親和)를 지키지만 결코 정의를 굽혀 가면서 까지 뇌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소인을 일러 동이불화(同而不和)라고 했다. 소인은 친화를 지키지 못하면서 뇌동만 한다는 것이다.
가정이나 직장 어디에서고 친화를 지킨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하물며 나라의 친화, 세계 인류의 친화에 대한 문제가 나오면 이것이 더욱 어려운 일임을 나날이 보고 들으며 실감하고 있다.
친화 보다는 불화가 더 쉬운 일이다. 반면에 뇌동하지 않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다. 사람은 군중의 한 요소이다. 그 군중심리에 휩쓸리지 않고 홀로 주체성을 지킨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뇌동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이렇게 보면 친화를 지키면서 뇌동하지 않는 것이 이중의 어려움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이는 군자라야만 가능하다고 공자는 말했다.
화(和)와 부동(不同)을 분명히 하는 자세부터 지니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동(同)하면서 불화(不和)를 일삼는 소인배에 휩싸이게 된다.
동이불화는 쉬운 일이요 안전한 길일 수 있다. 진리의 길, 정의의 길, 흥부의 길은 험난하고 좁은 길이다. 그러나 생명의 길이다. 비리의 길, 불의의 길, 놀부의 길은 넓고도 평탄한 길이다. 그러나 사망의 길이다. 어리석은 중생들은 쉽게 이 길을 가려한다.
남을 위하는 희생 봉사의 삶이 결코 쉽지 않다. 독립을 위해 풍찬노숙하며 목숨을 초개와 같이 바쳤던 애국지사의 삶이 얼마나 험난했던가.
예수, 공자, 석가 같은 성인들은 인류의 친화를 위해 희생의 길을 갔던 분들이다. 우리는 이분들의 생애와 가르침을 본받아 정도(正道)의 삶을 살아야 한다.
친화를 위해선 자신을 희생하고 상대를 용서할 줄 알아야 한다. 용서엔 목숨을 내 놓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놀부로부터 갖은 구박을 받던 흥부는 제비 다리를 고쳐준 덕에 대궐 같은 집을 얻고 금 은 보화가 쌓이는 부자가 되지만 오히려 형인 놀부를 용서하고 품는다.
예수는 일시적 승리가 아닌 더 큰 승리, 영원한 승리를 위해 죄인들을 용서하며 십자가의 죽음을 택한다. 결국 거대한 로마제국은 기독교화 되고 말았던 것이다. 지면서도 이기고, 영원히 이기는 길을 택한 것이다. 무엇이 진정한 승리인가를 깨닫게 해 준다.
화(和)가 있으면 어느 곳엔 불화(不和)가 있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화이부동의 군자이고 누가 동이불화의 소인인가. 이들의 주장을 들어 보면 서로가 자신은 군자요 백로라고 한다. 상대는 소인이고 까마귀라는 것이다. 과연 누가 까마귀이고 누가 백로란 말인가.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군자는 결코 남을 비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비방은 상대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고백해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거지를 동정하지 비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초(楚)나라의 정치가이자 시인인 굴원(屈原)은 회영부(懷永賦)에서 읍견군폐(邑犬群吠)를 말했다. 고을 개가 무리를 지어 짖어 댄다는 뜻이다. 즉 소인들이 떼를 지어 남을 비방함을 이르는 말이다. 장자(莊子)는 “비방이란 자기에게 돌아오는 화살”이라고 했다. 조선조 인조의 셋째 아들로 병자호란 때 볼모로 심양(瀋陽)에 갔다 왔으며 제자백가(諸子百家)에 정통했던 인평대군(麟坪大君)은 자신의 시를 통해 비방을 일삼는 사람들을 질타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입들만 성하여서/ 제 허물 전혀 잊고 남의 흉 보는 고야/ 남의 흉 보거라 말고 제 허물을 고치고자.”
고승 도언(道彦)이 저술한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불두상방분(佛頭上放糞)’이란 법어가 있다. 글자 그대로는 “부처님 머리 위에 똥물을 퍼 붓는다”이지만 풀이 하면 “무지한 소인이 군자를 괴롭혀도 군자는 괴로워하지 않고 그냥 내 버려둔다”는 뜻이다. 성경에도 예수가 “누구든지 죄 없는 자 먼저 돌로 치라”고 했을 때 아무도 돌을 든 자가 없었다. 누가 누구를 정죄하고 비방 할 수 있단 말인가.
요즘 우리 사회는 화이부동 보다는 동이불화가 판을 치는 듯하다. 국민은 안중에 없고 당리당략, 정략에 이전투구로 날을 지새우는 정치도 역겹다. 북한 김정은이 언제 또 미사일을 쏘아대고 핵실험을 할지 모르는 불안한 안보 상황임에도 말이다.
고을 마다 까마귀 울음소리가 시끄럽다. 죽기 아니면 살기 식의 서로를 물고 뜯는 소리가 요란하다. 지금이야 말로 혼탁한 세상을 맑고 밝게 하는 청량한 법음, 광야의 외침을 원한다. 화이부동의 군자가 사는 세상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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