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 80. 1941년〈선창〉, 〈아리랑 낭랑〉(2022.10.03.)
오늘은 단기 4,355년 개천절(開天節)입니다. 대한민국의 ‘하늘이 열린 날’로 국경일. 법정 공휴일입니다. 원래는 음력 10월 3일에 기념하다가 1949년부터 양력으로 바꾸었습니다.
필자가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만 하여도 학교에서 기념식을 거행했는데, 1절만 겨우 따라서 부르던〈개천절 노래〉(정인보 작사, 김성태 작곡) 기억나시나요? 「1절.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 이 나라 한아버님은 단군이시니 / 이 나라 한아버님은 단군이시니 2절. 백두산 높은 터의 부자요 부부 성인의 자취따라 하늘이 텄다 / 이날이 시월상달의 초사흘이니 / 이날이 시월상달의 초사흘이니 3절. 오래다 멀다해도 줄기는 하나 다시 필 단쪽잎에 삼천리 곱다 / 잘 받아 빛내오리다 맹세하노니 / 잘 받아 빛내오리다 맹세하노니」지금도 1절은 자신있는데…
오늘은 1941년도입니다.
1941년의 전통가요는 고운봉〈선창〉(조명암/김해송), 백난아〈아리랑 낭랑〉과〈직녀성〉(처녀림/김교성), 〈황하다방〉(김영일/이재호), 백년설〈고향길 부모길〉(박남포/이재호)〈대지의 항구〉(남해림/이재호)〈만포진 길손〉(박영호/이재호), 이난영〈열일곱 낭랑〉(김다인/이봉룡)〈진달래 시첩〉(조명암/이봉룡), 이화자〈가거라 초립동〉(조명암/김영파), 장세정〈역마차〉(조명암/김해송), 최병호〈아주까리 등불〉(유광주/이봉룡) 등이 있습니다.
이 해에는 3월 15일 소학교를「국민학교」개칭,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대한민국 건국 강령」발표, 12월 7일 일본「진주만」기습, 12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 선전포고, 탄생한 인물은 1월 14일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 2월 4일 시인 김지하, 2월 8일 탤런트 강부자, 음력 7월 22일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 선생님, 10월 25일 탤런트 김혜자, 11월 11일 배우 태현실, 10월 30일 탤런트 나문희, 12월 19일 제17대 대통령 이명박, 작고한 인물은 영국 문학가 버지니아 울프, 6월 2일 야구선수 루 게릭, 8월 7일 인도 시인 타고르, 8월 30일 음악가 홍난파 등입니다.
–〈선창〉– 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 고운봉(1941년 오케레코드사)
1절. 울려고 내가 왔든가 웃을려고 왔든가 / 비린내 나는 부둣가엔 이슬맺힌 백일홍
그대와 둘이서 꽃씨를 심든 그 날도 / 지금은 어데로 갔나 찬비만 나린다
2절. 울려고 내가 왔든가 웃을려고 왔든가 / 울어본다고 다시오랴 사나이의 첫 순정
그대와 둘이서 희망에 울든 항구를 / 웃으며 돌아가련다 물새야 울어라
3절. 울려고 내가 왔든가 웃을려고 왔든가 / 추억이나마 건질손가 선창아래 푸른 물
그대와 둘이서 이별에 울든 그 날도 / 지금은 어데로 갔나 파도만 스친다
〈선창〉은 1941년 가수 고운봉이 부른 노래로 8월 박향림〈철둑밑의 여인숙〉(조명암/박시춘)과 함께 오케레코드사에서 발매한 음반에 실려있는 곡입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야만적 수탈과 참혹한 악행으로 피폐한 삶을 살던 대한국인들은 슬픔과 궁핍한 생활속에서도 사랑과 이별이 있는 그리운 님을 찾는 선창가를 노래에 담았습니다.
데뷔 2년차 신인가수 고운봉(1920년∼2001년 본명 고명덕, 충남 예산 출생)의 첫 히트곡입니다. 노랫말 중 첫사랑은 빼앗긴 조국을, 부두는 조국의 강산, 이슬 맺힌 백일홍은 내 조국 내 강산에 살면서 남의 나라 백성인 되어 버린 조선의 백성, 첫 순정은 빼앗긴 조국을 나타내고 있어 학생들과 지식인층에서 애창됐습니다. 월북한 작사가와 납북된 작곡가 노래 금지령이 내리자 작사가는 고운봉 친형인 고명기로 작곡가는 김해송 처남 이봉룡으로 변경해 금지곡을 피한 노래입니다.
1937년 17살 청년 고명득은 가수가 되기위해 무작정 상경하여 태평레코드사를 찾아 문예부장 박영호와 작곡가 이재호(1919년∼1960년 본명 이삼동, 경남 진주 출생)를 만나 전속가수가 되어서 ‘운봉(雲峰)’이라는 예명을 받고 3개월간 순회공연을 따라 다니다 1939년〈국경의 부두〉(유도순/전기현)으로 데뷔하고 1940년〈남강의 추억〉(무적인/이재호)로 인기가수의 반영에 오릅니다. 당시 그를 눈여겨 보고있던 오케레코드사 이철 사장은 1940년 10월 그를 스카우트해 1941년〈선창〉을 발표하자 엄청난 히트를 기록하면서 스타로서의 입지를 굳혔습니다.
고운봉은 짙은 우수가 깔린 깔끔하고 점잖은 창법과 적당한 울림으로 깊은 호소력으로 노래하는 가수로 평가를 받으면서 가수활동을 했고, 하늘의 별이 되기 전까지 가요무대 등을 통해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인기가수였습니다.
고운봉의 대표곡인〈선창〉은 2000년 6월 고향인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덕산온천지구에 노래비가 세워졌습니다. 그 밖에도〈남강의 추억〉, 〈홍등야곡〉, 〈명동 블루스〉, 〈백마야 가자〉 등을 남겼습니다.
☞ 작곡가 이재호는 우리나라 “가요계의 슈베르트”로 불렸는데, 대표곡은〈나그네 설음〉, 〈불효자는 웁니다〉, 〈꽃마차〉, 〈복지만리〉, 〈대지의 항구〉, 〈황하다방〉, 〈갈매기 쌍쌍〉, 〈귀국선〉, 〈홍콩 아가씨〉, 〈경상도 아가씨〉, 〈아네모네 탄식〉, 〈물방아 도는 내력〉, 〈무영탑 사랑〉, 〈단장의 미아리고개〉, 〈산장의 여인〉, 〈울어라 기타줄〉, 〈산유화〉 등이 있고, 진주중학교 음악교사로 재직하던 때 학생 이봉조를 작곡가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아리랑 낭랑〉– 처녀림=박영호 작사, 김교성 작곡, 백난아(1941년 태평레코드사)
1절. 봄이오는 아리랑고개 제비오는 아리랑고개 / 가는 님은 밉상이요 오는 님은
곱상이라네 / 아리 아리랑 아리랑 고개는 님오는 고개 / 넘어 넘어도 우리 님만은 안넘어요
2절. 달이뜨는 아리랑고개 꽃도 뜯는 아리랑고개 / 우는 님은 건달이요 웃는 님은 도련님이지 / 아리 아리랑 아리랑 고개는 님오는 고개 / 울어 울어도 우리 님만은 안 넘어요
3절. 경사났소 아리랑고개 입춘대길 아리랑고개 / 족두리에 나삼소매 시집가는 봄이 왔어요 / 아리 아리랑 아리랑 고개는 족도리 고개 / 어찌 어찌도 좋았던지요 살짝 웃었소
일제강점기 대한국인들의 마음을 달래고 삶에 위로와 희망이 된 노래입니다. 1960년 TV에서 백난아가 아름답고 발랄하게 부르는 모습을 본 국민들은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낭랑(朗朗)은 밝고 아름다운 젊음을 뜻하고, 낭랑(娘娘)은 부녀자를 높혀 부르는 말입니다. 아리랑(정릉)고개는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서 정릉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합니다.
–〈진달래 시첩〉– 조명암 작사, 이봉룡 작곡, 이난영(1941년 오케레코드사)
1절. 진달래 바람에 봄치마 휘날리더라 / 저 고개 넘어간 파랑마차 / 소식을 싣고서
언제오나 / 그 날이 그리워 오늘도 길을 걸어 노래를 부르나니 / 노래를 불러 앉아도
새가 울고 서도 새 울어 / 맹세를 두고 간 봄날의 길은 멀다
2절. 갈길도 길건만 봄날도 길고 길드라 / 돌집어 풀밭에 던져보면 이렇단 대답이
있을소냐 / 그날이 그리워 오늘도 길을 걸어 노래를 부르느니 / 노래를 불로 산넘어
산이 있고 물건너 벌판 / 기약을 두고 간 봄날의 길은 멀다
3절. 범나비 바람에 댕기가 풀어 지드라 / 산허리 휘감은 아즈랑이 봄날은 소식도
잊었는가 / 그날이 그리워 오늘도 길을 걸어 노래를 부르느니 / 노래를 불러 아가씨
가슴속의 붉은 정성과 / 행복을 두고 간 마차의 길은 멀다
〈진달래 시첩〉은 1941년 가수 이난영이 부른 노래로 1월 발표한〈꿈꾸는 타관역〉에 이어 3월 장세정〈역마차〉와 함께 오케레코드사에서 발매한 음반에 실려있는 곡입니다. 〈진달래 시첩〉은 수려한 노랫말과 생동감 넘치는 멜로디로 조국 해방의 그 날을 기다리는 심정을 노래한 것 같아요. 그러나 작사가 조명암과 편곡자 김해송의 납북으로 1952년 금지곡으로 지정되면서 한동안 듣지 못하다가, 1958년 반야월이 가사를 바꾸고 작사가를 박남포로 표기해서 음반을 발매됐고, 1992년 금지곡에서 풀린 노래였습니다.
진달래 필 무렵 이른 봄, 아가씨의 마음은 싱숭생숭 봄노래 부르며 낭군을 기다리는데, 왜 이리 봄날의 길은 멀기만 한지… 필자도 어릴적 진달래꽃을 따먹던 추억은 있습니다.
다음은 1972년 2월 22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이난영의 데뷔 당시를 설명한 내용입니다. 「1931년 7월회(會)를 개편한 박승희의 太陽劇場(태양극장)이 전국을 순회중 목포에들러 공연을 하고 있었다. 공연이 반쯤 끝났을 무렵 무대뒤로 박승희(朴勝喜)를 찾아온 앳된 소녀가 있었다. 막간가수가 마땅치않아 고민하던 박승희는 다짜고짜 가수를 시켜달라고 졸라대는 소녀를 바라보다가 문득 집히는 것이 있었다. 즉석에서 테스트를 해본 그는 속으로 크게 놀라 쾌재를 불렀다. 소녀에게서 기가 막힌 素質(소질)을 발견한 것이다. 당일로 幕間(막간)에 출연한 소녀는 청중의 환호속에 활홀경에 빠져 노래를 불렀고, 공연중 태양극장에 전격적으로 입단(入團)했다. 이 소녀가 훗날〈목포의 눈물〉을 불러 萬人(만인)의 심금을 울려준 엘레지의 여왕 이난영이었다. 본명이 玉禮(옥례)였던 그녀는 박승희가 지어준 “蘭影(난영)”이란 藝名(예명)을 받아 꿈에 그리던 가수가돼 일본공연을 떠나게 됐다. 막간에서〈아리랑〉과〈도라지〉등을 노래하면 극장을….생략」
–〈아주까리 등불〉– 유광주 작사, 이봉룡 작곡, 최병호(1941년 오케레코드사)
1절. 피리를 불어주마 울지마라 아가야 / 산 너머 고개 너머 까치가 운다
고향길 구십리에 어머니를 잃고서 / 네 울면 저녁별이 숨어 버린다
2절. 노래를 불러주마 울지마라 아가야 / 울다가 잠이 들면 엄마를 본다
물방아 빙글빙글 돌아가는 고향길 / 날리는 갈대꽃이 너를 부른다
3절. 방울을 울려주마 울지마라 아가야 / 엄마는 돈을 벌러 서울로 갔다
바람에 깜빡이는 아주까리 등잔불 / 저 멀리 개울 건너 손짓을 한다
〈아주까리 등불〉은 1941년 가수 최병호가 부른 곡으로 2월 박향림〈해저문 황포강〉(조명암/김해송)과 함께 오케레코드사를 통해서 발매한 음반에 실려 있는 노래입니다.
아주까리, 일명 피마자. 열매에서 추출한 기름으로 등잔불을 밝혔던 시절인 1941년〈아주까리 등불〉을 들으면 영문도 모른채 엄마를 잃고 울고 있는 아기에게 할머니가 대화를 하듯 들려주는 가사가 깊은 슬픔에 빠지게 합니다. 일제 치하에서 대한국인들의 눈시울을 적셨고, 나라 잃은 아픔을 가득 담은 이 노래는 전국노래자랑 사회자 송해(1927년∼2022년 본명 송복희, 황해도 해주 출생) 선생님이 가장 애창하시던 노래로 1990년과 1991년 6월 30일 등 가요무대에 여러번 출연을 하셔서 〈아주까리 등불〉을 부르기도 했습니다. 당시 제목에 아주까리가 들어간 노래는 1942년 백년설〈아주까리 수첩〉(김다인/이봉룡)과 1943년 차홍련〈아주까리 선창〉(처녀림/김용환)이 있습니다.
최병호(1916년∼1994년)의 본명은 최재련으로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 이난영의 오빠인 작곡가 이봉룡의 권유로 1940년 제1회 오케레코드사 주최 콩쿨대회에서 광주예선과 서울 본선에서 입상하면서 가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1987년 10월 26일 KBS –1TV ‘가요무대’에 출연해〈아주까리 등불〉을 부르시는 동영상을 올려드리겠습니다.
다음에는 1942년〈낙화유수〉,〈뗏목 이천리〉,〈꽃마차〉 3곡에 대한 글을 올리겠습니다.
*상기 컬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