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호 칼럼
한글은 단군조선 때부터 있었다
일본 오사카 미에겐(三重縣)의 국조신을 모신 이세신궁(伊勢神宮)에는 신궁문고고자(神宮文庫古字), 신경(神鏡), 신사의 위독(位匵: 나무로 깎아 만든 신주) 등에 훈민정음과 글자꼴이 유사한 신대문자(神代文字)인 아히루(阿比留)문자가 새겨져 있다.
다다이(田多井四郞治)씨는 그의 저서 《일본신대문자론(日本神代文字論)》에서 “이세신궁에 한글과 같은 아히루 문자로 기술된 문헌들이 모두 99점이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가노(中野裕道) 같은 사람은 “이 아히루 문자가 조선으로 건너가서 언문(諺文)의 원형이 됐다”고 말하는가 하면, 아고(吾鄕淸彦)씨는 “아히루문자(‘親’격)와 언문(‘子’격)과의 사이는 친자의 관계다”라며 친자설을 내세우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기에따노(椑田阿禮)가 서명한 이세신궁의 아히루 문자는 화동(和銅)원년(서기 708년)의 것이다. 화동은 제44세 원명왕(元明王)의 연호이다. 세종이 1443년에 창제한 훈민정음 보다 735년이나 앞서 있는 셈이다. 그런데도 500년 전 세종의 한글 창제 설을 내세운다면, 일본학자들 특히 국수주의 학자들은 이 아하루 문자를 들고 나올 것이 분명한데 무엇으로 이들 주장을 부정하고 극복 할 수 있겠는가.
대마도(對馬島)가 어떤 곳인가. 원래 우리 조상들이 살던 땅이다. 이 아히루문자를 보존해온 ‘아히루가(阿比留家)’는 대마도에 있으며, 또 구주(仇州)지방에서도 이 글자가 발견된다고 한다. 이 두 지역에 대해 《삼한비기(三韓秘記)》를 인용한 《태백일사(太白逸史)》(조선조 중종 때 찬수관을 지낸 일십당 이맥<李陌>이 지음)의 〈고구려국 본기〉에 “옛 부터 구주(仇州)와 대마도(對馬島)는 삼한(三韓)이 나누어 다스린 땅으로서 본래 왜인(倭人)들이 살던 땅이 아니었다”(自古 仇州 對島 乃三韓分治之地也 本非倭人世居地)고 했다.
고조선의 통치강역이었던 대마도와 구주에서 옛 ‘가림다’ 글자가 발굴되는 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고 오히려 당연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세종실록》(권 제103. 세종26년 2월조)에 이런 기록이 있다. “언문은 옛 글자를 본 따서 만든 글자이지 새로운 글자가 아니다(諺文皆本古字非新字也).” 이어서 스무줄 째 지나 “언문은 전조(단군조선 또는 고려조)에 있던 글자를 빌려서 만들었다(借使諺文自前朝有之)”고 말했다. 그리고 “옛 전자를 모방했다(字倣古篆)”고 밝혔다. 정인지 역시 훈민정음 서문에서 “형상은 옛 전자(篆字)를 모방했다”고 했고, ‘《세종실록》 24년 12월조’나 최만리의 소(疏)에도 “모두 옛 전자를 모방했다”고 말했다.
《단전요의(檀典要義)》(金容起 저. 1925)에도 “태백산에 단군의 전비(篆碑)가 있으니 해독하기 어려워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번역하였다” 했고, 《정조실록》에도 “천부경은 보배로운 전문(天符寶篆)”이라 했다. 최치원이 전문(篆文)으로 된 천부경(天符經)을 한문으로 번역해 묘향산 석벽에 새겼다고도 전한다. 천부경 연구에 일생을 바친 일암 김형탁(金炯鐸)은 《단군철학석의도설(檀君哲學釋義圖說)》에서 “한글이 천부경 원리에 의해서 만들어 졌다”고 밝혔다.
발해 대조영의 친동생 반안군왕 대야발(大野勃)의 《단기고사(檀奇古史)》(729년에 재편)에도 “단군 제3세 가륵임금 2년에 을보륵(乙普勒)에게 명하여 국문정음(國文正音)을 정선하다 (白岳 馬韓村에 古碑文이 있다)”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고려 공민왕 12년(서기 1363년) 수문하시중을 지낸 행촌(杏村) 이암(李嵒)이 지은 《단군세기(檀君世紀)》에도 “삼랑(三郞)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正音)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加臨土)라 했다”고 되어 있다. 행촌은 38자 정음 글자꼴 모두를 기록해 전하고 있다. 또 조선조 중종 때 찬수관 벼슬을 지낸 일십당 이맥(李陌)이 지은 《태백일사(太白逸史)》에도 단군세기의 것을 인용하면서 “단군 가륵 제2년 삼랑 을보륵이 정음 38자를 찬하고 이를 가림다(加臨多)라 한다”고 했다. 역시 38자의 모양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여기서 ‘가람토’와 ‘가림다’의 ‘토’와 ‘다’는 다 같이 땅을 뜻한다. 또 ‘토’ 는 어조사 토씨를 말 할 수도 있다. ‘가린 땅’ 또는 ‘선택된 땅’이란 뜻으로도 풀이 된다. 이대로 풀이하면 ‘하늘이 가리신(선택하신) 땅의 백성들이 사용하는 글’이라고 말 할 수 있지 않을까.
《단군세기》를 지은 1363년과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가 1443년이니 그 사이가 80년이 되며, 이맥의 《태백일사》는 1520년에 지었으니 세종으로부터 77년 후가 된다. 《단군세기》로부터 157년 후인 《태백일사》에도 정음 38자가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는데 그 중간 시기인 세종 때 《단군세기》 같은 기록문헌이 없었을 리 만무하다. 훈민정음 창제에 공이 큰 신숙주가 세종24년(1442) 일본에 통신사를 보낼 때 서장관으로 간 일이 있고,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에 들러 계해조약을 체결한바 있다. 대마도에는 한글과 같은 아히루 문자가 많이 산재해 있는 곳으로 알려진다. 또 그는 훈민정음 창제 시 요동 땅에 귀양 와 있는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찾아 13번이나 왕래 했고, 장서각에서 고금의 희귀한 책들을 안 본 것이 없을 정도로 밤새워 가며 읽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훈민정음처럼 가림다문 38자가 전재 되어 있는 《단군세기》 같은 문헌들을 보지 않았을 리 없다고 본다.
훈민정음이 세종 때 백지 상태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 가림다문을 기원으로 하여 세종의 훈민정음으로 발전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단군 때 38자 정음이 세종 때 와서 28자로 재정리된 셈이다. 과학적 철학적으로 재정리해 발전시킨·세종의 업적은 만세에 길이 빛날 것이다. 몇 년 전 인도네시아 부톤섬의 소수민족 찌아찌아족이 자기네 말을 한글로 표기하기로 한 소식은 어린백성들을 어엿비 여기시어 훈민정음을 만드신 세종의 백성을 사랑하는 정신이 해외로 까지 펼쳐지는 것 같아 세종만의 기쁨이 아니요 우리 모두의 기쁨이요 자랑이니 날로 가꾸고 닦아 나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단군 고조선의 가림다문을 한글 창제의 기원으로 할 때 아히루 문자를 모방하여 훈민정음이 만들어 졌다는 일본 측의 친자관계 설은 부정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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