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221. 하춘화〈잘했군 잘했어〉〈영암아리랑〉〈쌓인 정〉〈숙녀 초년생〉(2025.06.23.)
모레(25일)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5주년이 되는 날이고, 28일은 철도의 날입니다.
오늘은 60여 년 노블리주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가수 ‘하춘화’ 누님의 칠순을 기념하여〈잘했군 잘했어〉〈영암아리랑〉〈쌓인 정〉〈숙녀 초년생〉〈날버린 남자〉5곡 글을 올리겠습니다. 필자는 2022년 6월 27일 연재한 ‘NO 69. 작곡가 박춘석과 가수 하춘화·문주란 편’에서 세계 최연소인 6살에 음반을 발매한 하춘화 누님의 글을 올렸었습니다.
–〈잘했군 잘했어〉– 반야월 개사, 고봉산 편곡, 하춘화·고봉산(1971년 지구레코드사)
1절. 영감 (왜 불러) / 뒤뜰에 뛰어 놀던 병아리 한 쌍을 보았오 (보았지) /
어쨌오 (이 몸이 늙어서 몸 보신 할려고 먹었지) /
잘했군 잘했어 잘했군 잘했군 잘했어 / 그러게 내 영감이라지
2절. 마누라 (왜 그래요) / 오양간 매어 놓은 얼룩이 황소를 보았나 (보았죠) /
어쨌나 (친정집 오라비 장가들 밑천에 주었지) /
잘했군 잘했어 잘했군 잘했군 잘했어 / 그러게 내 마누라지
3절. 영감 (왜 그래요) / 사랑채 비워 주고 십만원 전세를 받았오 (받았지) /
어쨌소 (서양춤 출려고 쌍나팔 전축을 사왔지) /
잘했군 잘했어 잘했군 잘했군 잘했어 / 그러게 내 영감이라지
4절. 마누라 (왜 불러요) / 딱정댁 마나님의 술값의 독촉을 왔었나 (왔었지요) /
뭐랬나 (술병을 고치려고 지리산 약캐러 갔다 했지) /
잘했군 잘했어 잘했군 잘했군 잘했어 / 그러게 내 마누라지
〈잘했군 잘했어〉1965년에 발표된 신민요 대중가요입니다. 원곡은 1932년 이성춘이 토속민요(土俗民謠)를 재구성해서 한옥심·이면우가〈영감타령〉을 발표하였고, 1934년 이고범(이서구) 작사, 김면균 편곡으로 선우일선·김주호가 리메이크 포리돌레코드사에서 발표한 서도신민요(西道新俗謠)입니다. 또한 1936년 이화자·김주호가 포리돌레코드사를 통해〈영감 마누라〉앨범도 발매했습니다. 그리고 1965년 반야월이 개사하고, 작곡가 고봉산이 경쾌한 타령 리듬에 민요조 멜로디로 새로 편곡해 1965년 고봉산·송춘희가 취입했습니다. 1967년 고봉산·아리랑시스터즈, 1971년 고봉산·하춘화가 발표했습니다.
〈영감타령〉“1절. 영감 (왜 불러) 아래목 농보 속에 물멩지 수건을 보았나 (보았지) 어쨌노 (건너집 김도령 목수건하라고 주었디) 잘했군 잘했군 잘했군 그러게 내 넝감이라디. 2절. 영감 (왜 불러) 아릇목 선반위에 계란 한 끼래기 보았나 (보았지) 어쨌노
(건너집 김도령 몸보신하라고 주었디) 잘했군 잘했군 잘했군 그러게 내 넝감이라디.”
노랫말에 숨은 이야기는「부인이 이웃집 김도령하고 좋아지내는 것을 영감이 눈치채고 부인이 김도령 주려고 숨겨 놓은 물멩지 수건과 계란 한 꾸러미를 영감이 슬며시 감춰 놓았더니, 부인이 마누라가 물건을 못 봤느냐고 물어보니까 자기가 김도령 주었다.」고 하는 내용이라는데, 부부와 이웃집 도령과의 삼각관계를 해학적으로 잘 푼 것 같습니다.
☞ 물멩지는 엷은 남빛 명주실로 짠 비단이고, 농보는 옷을 넣어두던 농(籠) 같습니다.
〈진도 영감타령〉「1절. 영감 (왜 불러) 앞방 뒷방 골방 안에 멩지베 석자 보았농 (보았제) 어쨌농 (이웃집 김도령 손수건 하라고 주었제) 잘했꽁 잘했꽁 잘했꽁 잘했꽁 잘했꽁 조선 팔도 다 댕겨도 우리 영감 뿐이네」명주베는 명절실로 짠 베를 말합니다.
그러나〈진도 영감타령〉은 현재 1절만 전해져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습니다.
☞ 영감(令監)은 조선시대 종2품·정3품의 벼슬아치를 높혀 부르던 말입니다. 조선후기부터는 연세 많으신 어르신이나, 남편을 듣기 좋게 영감으로 널리 놓여 부르게됐습니다. 정2품 이상은 대감(大監),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의 높인 말은 정승(政丞)이라 했습니다.
종2품은 조선 18품계 중 제 4등급 품계로 현재 차관보급으로 참판·대사헌·관찰사·훈련대장·포도대장 등이고, 종3품은 이사관급으로 도승지·도정·참의·참지·대사간 등입니다. 그리고 국정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정3품이상 고위관리를 당상관(堂上官)이라 했습니다.
‘마누라’는 임금의 어머니 ‘대비마마’를 일컫던 말로서 ‘대비마노라’ ‘상왕마노라’와 같이 왕실에서 높혀 부르던 말입니다. 그리고 상전이나 양반집 부인을 지칭하는 ‘마님’이 있었는데, 조선후기에는 평민들도 아내를 듣기 좋게 ‘마누라’ ‘마님’ ‘마나님’이라 불렀습니다.
–〈영암 아리랑〉– 백암 작사, 고봉산 작곡, 하춘화(1972년 지구레코드사)
1절. 달이 뜬다 달이 뜬다 / 영암 고을에 둥근 달이 뜬다 /
달이 뜬다 달이 뜬다 둥근둥근 달이 뜬다 / 월출산 천왕봉에 보름달이 뜬다 /
아리랑 동동 쓰리랑 동동/ 에헤야 데헤야 어사와데야 / 달보는 아리랑 님보는 아리랑
2절. 풍년이 온다 풍년이 온다 지화자자 좋구나 / 서호강 몽햇뜰에 풍년이 온다 /
아리랑 동동 쓰리랑 동동 / 에헤야데헤야 어사와데야 / 달보는 아리랑 님보는 아리랑
3절. 흥타령 부네 흥타령 부네 목화짐지고 흥겹게 부네 / 용칠도령 목화짐은 장가밑천이라네 / 아리랑 동동 쓰리랑 동동 / 에헤야데헤야 어사와데야 / 달보는 아리랑 님보는 아리랑
〈영암 아리랑〉하춘화가 1972년에 부른 노래로 1973년 7월 1일 지구레코드사에서 ‘고봉산 작·편곡집, 하춘화 민요 스테레오 제2집’ 앨범에 수록된 타이틀곡으로, 같은해 발표된 이미자 선생님〈낭주골 처녀〉(전순남/박춘석)과 함께 전라남도 영암을 전국 방방곡곡에 알리는 데 혁혁한 공헌을 했던 곡입니다. 당시 영암이 고향이었던 이환의 MBC 사장이 두 곡 다 노랫말을 지었지만〈영암 아리랑〉작사자는 필명인 백암으로,〈낭주골 처녀〉는 부인 전순남을 작사자로 등록을 했던 것 같습니다. 2010년 7월 1일 영암군민들이 감사의 뜻으로 ‘월출산 기차랜드’에〈영암 아리랑〉노래비를 세웠습니다.
하춘화의 아버지 하종오(1919년∼2019년) 선생께서 말씀하신 하춘화와〈영암 아리랑〉탄생 비화,「저는 영암군 학산면 금계리 계천마을에서 태어났고, 고향을 떠나 부산에서 살 때인 1955년 여름에 춘화는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한번 울음을 터트리면 동네가 떠나갈 정도로 울어대던 어린 춘화는 그렇게 울어대다가도 신기하게 라디오에서 노래만 나오면 울음을 뚝 그치고 귀를 쫑긋 세우며 라디어에 귀를 기울이고 했지요. 서너살 어린 나이에 300곡 이상의 노래를 막힘없이 불러대며 동네의 꼬마가수로 유명해졌어요. 춘화가 만 6살 되던 해 재능을 살려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서울의 동아예술학원에 다니게 했고 8개월 노래를 배우게한 후 음반을 발매해 가수로 데뷔시켰죠. 그리고 고향 노래를 만들어야겠다고 마음 먹은 때는〈물새 한마리〉〈잘했군 잘했어〉이 빅 히트를 하던 1971년입니다. ‘영암’은 몰라도 ‘하춘화’는 알던 시절이라 고향 노래는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나는 제목을〈영암의 연가〉로 설정해 준비를 했는데, 처음 의도와는 좀 다르게 만들어졌지만 우여곡절 끝에 이듬해 1972년〈영암 아리랑〉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하춘화 누님이 말씀하시는〈영암 아리랑〉「1977년 3월 15일 아버지의 노력으로 개교하게 된 ‘낭주고등학교’ 개교식 날 학교 운동장에서 펼쳐진 공연은 경찰 집계로 3만 명이라는 엄청난 인파가 몰리면서 영암뿐만 아니라 남도 일대가 들썩거렸습니다. 제가 부르는〈영암 아리랑〉과 함께 눈물바다를 이룬 아버지 고향에서의 그 공연은, 영암이 아버지의 고향만이 아닌 바로 제 고향이라는 의식을 확고히 심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하춘화는 당시 ‘낭주고등학교 설립 기금’으로 서울의 집 두채 값인 200만원을 기부해 주민들은 ‘하춘화고등학교’라 부른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약 200억원 정도를 기부했고,
2019년 10월 29일 개관한 ‘영암 한국트로트가요센터’ 건립에도 많은 기부금과 물품을 기증했습니다. 영암의 옛지명은 ‘낭주’였는데 ‘낭주 최씨’의 본관이기도 합니다.
–〈쌓인 정〉– 정두수 작사, 박춘석 작곡, 하춘화(1973년 지구레코드사)
1절. 길이 아니면 오지 말 것을 사랑의 그 먼 길을 /
님 찾아 왔던 길 님 따라 왔던 길 / 지금은 나 혼자서 /
날 저문 들녘에 떨고 있는 꽃잎처럼 / 그렇게 그렇게 쌓인 정을 / 잊을 수 있나요
2절. 님이 아니면 잊었을 것을 그리움의 세월을 /
님 찾아 왔던 길 님 따라 왔던 길 / 지금도 못 잊어서 /
바람에 날리는 이슬 젖은 낙엽처럼 / 그렇게 그렇게 쌓인 정을 / 잊을 수 있나요
〈쌓인 정〉하춘화가 1973년 부른 노래로 지구레코드사에서 발매한 ‘박춘석 작곡집, 쌓인 정 / 사랑을 고백할까’ 앨범 SIDE A면에 수록된 타이틀곡입니다. 음반에는, Side A.
〈쌓인 정〉〈아랫마을 이쁜이〉〈진도아리랑〉〈그리움은 가슴마다〉〈보름달〉SIDE B.〈사랑을 고백할까〉〈파랑새야〉〈섬아가씨〉〈아네모네〉〈솔방울〉등 12곡 수록됨.
당시 필자는 초딩·중딩 시절인데 여학생들과 쌓은 정도 없었는데 전파사나 라디오에서 누님의〈쌓인 정〉만 흘러 나오면 왜 그렇게 싱숭생숭했는지? 지금까지도 모르겠네요.
–〈숙녀 초년생〉– 이희복 작사, 박춘석 작곡, 하춘화(1973년 지구레코드사)
1절. 거울 보고 물어 봐도 나는 숙녀 / 누구에게 물어 봐도 나는 숙녀 /
보란 듯이 피어난 꽃이라는데 / 보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네 /
그래도 나의 꿈은 무지개같이 / 언젠가는 피어나리 숙녀 초년생
2절. 별을 보고 물어 봐도 나는 숙녀 / 누구에게 물어 봐도 나는 숙녀 /
잘난 듯이 피어난 꽃이라는데 / 알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네 /
그래도 나의 길을 찾을 때까지 / 내 맘대로 살아가리 숙녀 초년생 /
숙녀 초년생 / 숙녀 초년생
〈숙녀 초년생〉1973년 6월 25일 지구레코드사에서 발매한 ‘박춘석 작곡집, 알고 계세요 / 숙녀 초년생’ 앨범 B면 타이틀 곡입니다. 음반에는 Side A면. 하춘화〈알고 계세요〉〈그리운 고향 하늘〉〈까치집〉이미자 선생님〈삼천 궁녀〉〈사랑합니다〉Side B면 하춘화〈숙녀 초년생〉〈오동추야〉은방울자매〈나는 못떠나겠네〉〈떠나도 마음만은〉〈새마을 소식〉10곡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원창자는 1970년 가수 김은희였는데 빨리 가요계를 떠나 1973년 18세 숙녀티가 났던 하춘화 누님이 불러 히트시킨 노래입니다. 1977년〈꽃잎편지〉의 백남숙도 불렀는데, 당당하고 활발하게 부르는 하춘화에 비해 조금은 수줍은 듯한 숙녀초년생 같은 느낌으로 불렀습니다.〈숙녀 초년생〉이 한창 유행할 당시 고등학교 졸업 후 사회로 진출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꿈많은 시절 언제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게 일을 열심히 하라는 자신감을 심어 준 노래라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숙녀 초년생〉노래가 히트를 하자 대영영화주식회사에서 동명의 영화로 제작했는데, 최인현 감독, 배우 하춘화, 남진, 이대엽, 서한나, 박암, 전숙, 박기택 등이 출연해 1974년 7월 6일 서울「중앙극장」에서 개봉, 공연무대는 부산 범일동 보림극장입니다. 타이틀 “하춘화의 숙녀 초년생” “보다 청순함을. 보다 고귀함을. 실증하는 러브·포에지!” “꽃내음의 숙내 초년생! 아무도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단지 너와 나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가요계 정상을 달리는 인기가수 신수지(하춘화)는 스타답지 않게 겸손하고 소박하다. 그런 수지를 쫓아다니는 팬 한세훈(남진). 두 사람은 곧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수지는 무리한 활동에 따른 병이 악화되어 시한부 삶을 선고 받는다. 이즈음 세훈은 자신이 다니는 회사의 사장 딸인 경아의 열렬한 구애에도 이를 뿌리치고 수지만을 사랑한다. 한편 경아는 흥신소에 의뢰를 해서 두 사람이 헤어지도록 압력을 가하고 죽음을 목전에 둔 수지는 결국 세훈의 장래를 위해 세훈의 곁을 떠나고 수지는 마지막 리사이틀 공연을 하다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서서히 생을 마감해 간다. 한편 세훈은 경아와의 혼인식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수지의 간병인 선희의 연락을 받고 수지의 임종을 지키려 공연장으로 달려가나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수지를 바라 볼 뿐이다.」
영화 개봉 전인 5월 3일∼7일「아세아극장」에서 ‘하춘화 리사이틀’ 공연을 했습니다.
–〈날 버린 남자〉– 박정환 작사, 박성훈 작곡, 하춘화(1989년 오아시스레코드사)
1절. 사랑이 야속하더라 가는 당신이 무정하더라 / 잡지도 못하고 막지도 못하고 어쩔 수가
없더라 / 여자이기 때문에 / 날 두고 떠나가면 떠나 버리면 정 때문에 나는 어떡해 /
날 울린 남자 날 버린 남자 사랑한 게 잘못이더라 / 사랑한 게 잘못이더라
2절. 사랑이 야속하더라 가는 당신이 무정하더라 / 잡지도 못하고 막지도 못하고 어쩔 수가 없더라 / 여자이기 때문에 / 날 두고 떠나가면 떠나 버리면 정 때문에 나는 어떡해 /
날 울린 남자 날 버린 남자 사랑한 게 잘못이더라 / 사랑한 게 잘못이더라
〈날 버린 남자〉는 가수 하춘화를 제 2의 전성기로 이끈 노래입니다. 1961년 6살의 나이에〈효녀 심청 되오리다〉음반을 발매했고, 1971년〈물새 한 마리〉를 취입하면서 성인가수로 성장을 한 후 최고가수로 활동합니다. 그러다 1977년〈두줄기 가로수〉를 마지막 히트곡으로 남기고 혼인과 학업을 위해 활동을 중단했다 1981년 복귀했습니다. 그리고 1989년 발표한〈날 버린 남자〉가 히트를 했던 것입니다. 음반은 1990년 6월 오아시스레코드사에서 발매하였습니다.
하춘화 누님의 말씀 “처음 노래를 받았을 때 너무 강렬한 가사와 음이라 애착이 가지 안았어요.” 그러나 발매 이후 대한민국 국민들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면서 단 번에 하춘화 누님의 히트곡에 추가되었습니다. 작곡자 박성훈 “하춘화씨가 그 전에 차분한 노래를 많이 불렀다.〈날 버린 남자〉가 강렬하고 직설적이다 보니 거절을 했다. 어머니가 하춘화씨 팬이라고 얘기하면서 부탁했더니 마지못해 승낙했다. 요즘 만나면〈날 버린 남자〉같은 노래를 더 달라고 한다.”
☞ 필자가 선정한 하춘화 누님의 ‘톱 10’곡으로는 1966년〈아빠는 마도로스〉1971년〈물새 한마리〉1972년〈잘했군 잘했어〉〈영암 아리랑〉〈하동포구 아가씨〉1973년〈연포 아가씨〉〈쌓인 정〉〈알고 계세요〉1974년〈난생 처음〉1993년〈무죄〉입니다.
다음에는 6월 29일 탄생하신〈홍도야 우지마라〉김영춘님에 대한 글을 올리겠습니다.
기사작성 편집부
*상기 컬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