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마와 사상의학 –
요즘에는 사상의학에 대해서 다들 알고 있는 듯하다. 체질에 대해서 관심도 만다보니 필자에게 물어오는 분들도 제법 계시다. 하지만 사상의학이 꽤 어렵기도 해서 실제 현장에서 이야기 하는 경우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별로 하지 않는다.
개원 초기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체질별 식이요법을 5년간 지키신 환자를 보고 웬만해서는 병증이 드러난 경우를 제외하고는 체질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지 않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과 공부를 하던 중 결국 관계 맺기의 시작과 끝은 나를 알고 너를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다. 해서 다시 사상의학으로 돌아보게 된 것이다.
사상의학을 다시 처음부터 공부해보려고 한다. 먼저 이제마에 대해서 한번 알고 넘어가 보고자 한다. 설렁설렁 말고 차근차근 함 알아보자. 이제마는 크게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 그리고 중년기 시절로 크게 대별해 본다. 이제마는 이성계의 고조할아버지의 둘째 아들인 안원대군의 19대 손이고 아버지는 소과에 합격한 진사이고 어머니는 주모의 딸이나 기록이 없다. 일종의 서자인 셈이다.
여기서 에피소드하나 소개해 보고자 한다. 이제마의 아버지인 이진사가 어느 날 술에 취해 주막에 묵게 되었는데 주모가 과년한 딸을 이진사의 방에 들여보냈다고 한다. 인물이 박색하고 사람됨이 변변치 않아 시집보낼 생각조차 못했다고 한다. 어느 날 이제마 할아버지가 제주도에서 가져온 용마를 얻는 꿈을 꾸었을 때 어느 여인이 강보에 쌓인 아기를 안고 집으로 들어왔다 하여 이름을 濟馬(제마)라 지었다고 한다. 흡사 공자의 출생과 유사하다. 공자도 이름도 모르는 어머니와 야합(야외에서 부부관계)을 해서 태어난 출생이야기가 있듯이 말이다.
이제마는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총명하였으며 작은 할아버지로부터 글공부를 배워 경서와 역경에 밝았고 특히 무예를 좋아했다고 하며 나중에 훌륭한 장수의 꿈을 꾸어서 자신의 호를 동쪽의 무인이란 뜻에서 東武(동무)라 지었다고 한다.
이제마의 소년시절은 좀 특이하다. 13세에 가출을 감행한다. 경향 각지를 다니면서 견문을 넓혔으며 청년기에는 만주와 러시아를 여행하면서 다양한 문물을 경험하기 시작하였다. 이제마의 청년기는 조선후기의 어려운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었으며 앉아서 경륜을 쌓기보다는 여행이나 돌아다니면서 얻는 현장중심 실천중심 행동 중심의 기질이 드러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제마의 나이 30세를 전후에서 사상의 확립의 징표가 나오는데 한선지의 저작물인 명선록(明善錄)을 보고 조선 제일의 명저라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명선록은 주자의 성리학을 비판하고 공맹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며 격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내용으로 이제마는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사변적인 유학에서 벗어나 실천적이고 心과 공맹의 도를 중시여기는 유학자적인 사상적 기반을 확보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책이기도 하다. 그 후 39세에 무과에 등용되었고 소양인 육미탕의 치험 예가 있음을 볼 때 의학경험도 39세 이전부터 지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후 이제마는 학문적 성취가 집약되기 시작하는데 44세 이후부터 이제마의 철학적 토대인 격치고가 집필되기 시작하여 57세에 완성하였고, 이제마의 의학적 토대인 동의수세보원이 58세에 완성하였다. 60세에 민란을 수습하고 61세에 군수로 임명되어 관직생활을 하였으며 62세에 모든 관직에서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보원국이란 간판으로 한의업을 하다가 64세에 일생을 마감할 때까지 동의수세보원을 다시 쓰곤 하였다고 한다. 우리가 보는 동의수세보원은 그의 제자 김영관에 의해 신구본이 합하여 출판되었다.
이제마의 삶을 돌아보니 무술을 좋아했지만 갑갑한 현실을 타파할 무언의 사상적 연유를 꾸준히 찾아간 구도자적인 자세와 철학적. 의학적인 자기 생각을 정리해낸 선비이기도 하였다. 마음의 중요성을 철학뿐 아니라 의학적인 분야까지 실로 독창 스럽고 획기적인 의학체계를 확립한 분이라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