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한·중 경계 갈석산은 산서성 남단
고대 중국과 우리와의 경계였으며 중국의 유명한 황제 9명이 등정했다는 갈석산은 과연 어디일까? 식민사학계에서 주장하는 황해도 수안도 아니고, 재야사학에서 주장하는 진황도 창려현도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갈석산의 원래 위치를 찾기 위해 <중국고대지명대사전>의 설명을 보기로 한다.
갈석산 : <우공>에 전하기를 “(갈석산은) 우측 끝 바위를 끼고 황하로 들어간다.”, <공전>에 “갈석은 해반산이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전해진 위치학설이 하나가 아니다.
(갑) <한서무제기주>에 “문영이 말하길 갈석은 요서군 루현에 있다.” <수경주>의 곽박의 주에 “(요서군의) 임유 남쪽 물 안에 있다.(중략) 수경의 탑수주에 갈석은 해중으로 물이 돌아간다.”
(을) <한서지리지> “우북평군 려성현은 대게석산 서남에 있다.”
(병) <후한서 군국지> “갈석산은 상산군 구문현에 있다.”
(정) <사기정의> “갈석은 유주 계현 서쪽 35리에 있다.”
(무) <사기색은> “태강지지에 낙랑군 수성현에 있는 갈석산은 장성의 기점.”
(기) <당서지리지> “영주 유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경) <수서지리지> “북평군 노룡현에 갈석이 있다.”
(신) <조역지> “산동 해풍현 마곡산이 즉 대갈석산이다.”
(원문) 碣石山 : 《书禹贡》夹右竟石入于河,《孔传》“碣石,海畔山。” 其所在古今传说不一,
(甲)《汉书武帝纪注》“文颖曰,碣石在辽西垒县”, 郭璞注《水经注》“谓在临榆南水中,盖因垒县后汉省入盐榆,即文颖之说也,水经漯水注云,碣石沦于海中”,濡水注又云,濡水东南至垒县碣石山,今海有石如甬道数十里,当山顶有大石如柱形,世名之曰天桥术,韦昭以为喝石,明一统志则曰在昌黎西北五十里,府志又以为即今县北十里之仙人台,皆言在是黎境,而又各不同,(乙)《汉书地理志》“右北平骊城县,大揭石山在西南。”骊城,《禹贡锥指》骊城之山称大碣石必有小碣石在,盖即垒县海帝之石矣,(丙)《后汉书郡国志》“常山九门县,碣石山,战国策云在县界,” 《书疏》郑云,战国策碣石在今九门县,今属常山郡,盖别有碣石与此名同,今九门无此山也。(丁)《史记正义》“碣石,在幽州蓟县西三十五里,”(戊)《史记索隐》“太康地志,乐浪遂城县有碣石,长城所起。”(已)《北齐书文宣帝纪》天保四年,大破契丹于青山,道至营州,登碣石山,《唐书地理志》“营州柳城县有碣石山,”(庚)《隋书地理志》“北平卢龙县有碣石”。《括地志》通曲通考诸说相同,《清一统志》云“卢龙南不滨海,今县志亦无此”。(辛)《肇域志》“山东海丰县马谷山,即大碣石。”刘文伟亦以马谷山在古九河这下,合于禹贡入海之文,断为碣石,海丰,
위 설명을 종합하면 갈석산은 유주에 속한 우북평군의 려성현과 북평군의 노룡현, 상산군의 구문현과 낙랑군의 수성현, 유주의 계현과 요서군의 루현, 임유현, 유성현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의미는 갈석산이 한국의 지리산처럼 4개 군(요서, 낙랑, 상산, 북평)에 걸쳐있는 큰 산이라는 뜻인 것이다.
요서군에 속하는 갈석산
그 중 백이·숙제의 무덤이 발견됨으로써 요서군이 산서성 남부 영제시 일대라는 사실과, 위만이 건넌 강으로 유주의 낙랑군에 속하며 고구려의 남쪽경계인 패수가 북부 하남성 제원시를 흐르는 추수(溴水)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밝혀짐으로써 요서군에 속하기도 하고 낙랑군에 속하기도 하는 갈석산도 그곳 어딘가에 있어야 할 것이다.
(辽西郡 요서군) 秦置。有小水四十八,并行三千四十六里。属幽州。户七万二千六百五十四,口三十五万二千三百二十五。县十四:且虑,有高庙。莽曰鉏虑。海阳,龙鲜水东入封大水。封大水,缓虚水皆南入海。有盐官。新安平。夷水东入塞外。柳城(유성),马首山在西南。参柳水北入海。西部都尉治。令支,有孤竹城 (고죽성이 있는 영지현)。 莽曰令氏亭。肥如(비여=노룡),玄水东入濡水(유수)。濡水南入海阳。又有卢水,南入玄。莽曰肥而。宾从,莽曰勉武。交黎,渝水首受塞外,南入海。东部都尉治。莽曰禽虏。阳乐,狐苏,唐就水至徒河入海。徒河,莽曰河福。文成,莽曰言虏。临渝(임유),渝水首受白狼,东入塞外,又有侯水,北入渝。莽曰冯德。絫(루)。下官水南入海。又有揭石水(게석수)、宾水,皆南入官。莽曰选武。
북평군에 속하는 갈석산
또한 갈석산이 북평군의 노룡현과 우북평군의 려성현에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 영락현(永乐县)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북평군은 산서성 영제시의 동남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여러 자료에 북평군은 요서군에서 분리되었다고 언급되어 있다.
“(영락현) 북주 때 황성현에 속했고, 당나라가 황성현의 동북 2리에 있는 영고보를 영락현으로 나누었다. 송 때 진이 되고 고성은 산서성 영제현 동남 120리에 있다. <환우기> 주나라 때 영락현이 되었고 군으로 되지 않았다. <수지>에 영락군으로 만들어졌다. 한나라 때 북평현이라 했으며, 북위 때 영락현으로 불렀다. 당나라 천보원년(742년) 만성현으로 개칭했다.”
(원문) 后魏置,故城在今河北省满城县西北鱼条山下,北周移治北平故县,而此城废。后魏置,故治在今河北省徐水县西。后魏置,故治在今山西祁县东。辽置,为锦州治,元省入州,即今辽宁省锦县治。北周置,寻省,以地属黄城县,唐分黄城于县东北二里永固堡重置永乐县,宋省为镇,故城在今山西永济县东南一百二十里,按《元和志》、《寰宇记》皆云后周置永乐县,不去置郡,隋志作永乐郡,盖字之误也。汉为北平县,北魏称永乐县,唐天宝元年(742)改为满城县。
<한서지리지>에 기록된 갈석산 위치 >
<한서지리지>의 “道汧及岐,至于荆山,逾于河; 壶口(호구)、雷首(뢰수),至于大岳; 厎柱(지주)、析城(석성),至于王屋(왕옥); 太行(태행)、恒山(항산),至于碣石,入于海。”라는 문구에 갈석산의 위치가 언급되어 있는데, <대청광여도>에 뢰수, 지주, 석성, 태행 등이 그려져 있어 갈석산이 산서성 남부에 있는 산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 의하면, “태행산은 하남성 제원현에서 시작해 북쪽으로 산서성 진성현으로 들어가 동북쪽으로 비스듬이 산서성 동남부를 지나는 산맥을 형성한다.”고 설명되어 있으며, <한서지리지> 하내군조에 2개의 태행이 있는데 “태행산이 서북쪽에 있는 야왕현(野王,太行山在西北)은 지금의 하남성 심양시이며, 동태행산이 서북쪽에 있는 산양현(山阳,东太行山在西北)은 지금의 수무현 서북 35리이다.”라는 문구가 있어 그 위치를 알 수 있다.
항산(恒山)은 일명 상산(常山)으로 <수경주>에 “제수는 항산군 방자현 찬황산(濟出常山房子縣贊皇山)에서 나온다.”라는 문구가 있어 항산은 하남성 제원시 부근에 있는 산임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상산군에 속한 원씨현에 대해 <중국고대지명대사전>은 산서성 동남부에 있는 고평(元氏县 : 汉泫氏县,后魏改曰元氏,北齐移高平县治此,即今山西高平县治。)이라고 하므로 이 부근에서 항산을 찾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갈석산 역시 산서성 남단과 황하북부 하남성이 만나는 곳 어딘가에 있는 산임이 확실하다.
필자는 갈석산을 산서성 남단에 있는 중조산(中條山)으로 비정한다. 중조산은 주봉높이가 1,994m이고, 동서길이가 160km이고 남북길이가 10~15km인 외형상으로도 그야말로 신악(神岳)급이며, 조조가 낙양 북문인 하문에서 나와 갈석산까지 걸어가 ‘관창해(觀滄海)’라는 시를 지었다는 기록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따라서 진황도시 창려현 갈석산은 중국의 역사왜곡을 위한 지명이동의 산물이며, 이병도가 주장한 황해 수안 갈석산은 대동강 낙랑군설을 굳히기 위해 임의로 조작한 허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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