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 31. 남진〈가슴 아프게〉, 문주란〈동숙의 노래〉(2021.10.04.)
지난달 27일은 우리나라 대중가요계의 살아있는 전설, 가수 남진(본명 김남진)의 생일이었고, 30일은 4살 터울인 가수 문주란(본명 문필연) 누님의 생일이었습니다. 1965년과 1966년에 데뷔해 아직까지도 활동하고 계시니 20세기·21세기 두 세기를 풍미하고 있는 국민가수들이죠.
남진과 문주란은 1974년 영화 ‘애정이 꽃피는 계절’에 남여주인공으로 함께 출연도 했습니다.
「불멸의 가수 남진」1945년 9월 27일 ‘목포일보’ 발행인, 5대 국회의원 집안인 목포 최고의 부잣집에서 태어나 목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배우의 꿈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와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입학했습니다. 그후 종로에 위치한 한동훈 음악학원에서 노래와 가수로서 자질, 발성법 등을 배우고 1965년〈서울 플레이보이〉〈연애 0번지〉를 발표해 가수로 데뷔했습니다. 이듬해〈울려고 내가 왔나〉가 처음으로 히트를 하고, 1967년〈가슴 아프게〉〈너와 나〉〈우수〉〈마음이 고와야지〉1968년〈미워도 다시한번〉등이 연속 빅히트를 기록하면서 국민가수로 등극했습니다. 어릴적 꿈이던 배우로도 첫 발을 내딛었는데 바로 남진을 국민가수로 만든〈가슴 아프게〉가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자 주인공으로 출연했었던 것입니다. 또한 영화 ‘그리움이 가슴마다’에서도 주연으로 출연 주제가〈그리움은 가슴마다〉도 직접 기타를 치면서 부릅니다. 영화는 서울 국도극장에서 10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흥행작으로 지방까지 폭발적인 흥행기록을 올렸습니다.
가수와 배우로서 성공한 남진은 1968년 해병대 청룡부대에 입대해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했고, 1971년 전역후 MBC 10대 가수 ‘가수왕’에 오르면서 최전성기를 맞이합니다. 이듬해인 1972년〈님과 함께〉〈목화 아가씨〉〈젊은 초원〉〈아랫마을 이쁜이〉1973년〈그대여 변치마오〉1974년〈나에게 애인이 있다면〉1975년〈김포가도〉1982년〈빈잔〉1993년〈내 영혼의 히로인〉1999년〈둥지〉2002년〈모르리〉2008년〈나야 나〉2009년 장윤정과 듀엣〈당신이 좋아〉2012년〈이력서〉2014년〈상사화〉〈파트너〉2016년 윤수현과 듀엣〈사치기 사치기〉2018년〈남자다잉〉2020년〈오빠 아직 살아있다〉등 히트곡을 생산하며 국민들의 영원한 오빠로 아직까지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불멸의 국민가수입니다.」
남진이 배우로 출연한 영화의 편수는, 1967년 5편, 1968년 13편, 1969년 18편, 1970년 1편, 1971년 4편, 1972년 5편, 1973년 10편, 1974년 5편, 1975년 1편, 2003년 1편 등 총 63편입니다. 주요 영화는 1967년 ‘가슴 아프게’, ‘그리움은 가슴마다’, ‘울려고 내가 왔나’, ‘형수’와 1968년 ‘가요 반세기’ ‘고향무정’ ‘별아 내 가슴에’ ‘울고 넘는 박달재’ 1969년 ‘속 미워도 다시한번’ ‘흑산도 아가씨’ 1974년 ‘애정이 꽃피는 계절’ 1975년 ‘가수왕’ 2003년 ‘대한민국 헌법 제1조’ 등입니다. 2014년 14,263,980명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 ‘국제시장’에서 주인공 윤덕수(배우 황정민)가 베트콩에게 쫒기고 있을 때 남진 역할로 나온 동방신기 ‘유노 윤호’가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썩은 정감 있는 목소리로 “와따 이놈의 인기는”하면서 웃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 남진이 들려준 해병대 시절 이야기 한토막, “다들 가는거라 가긴 갔는데 솔직히 두려웠다. 밤에 매복을 나가면 영화 촬영을 온 건지, 실제 상황인지 분간을 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리고 당시 얼차려로 방망이 30대도 맞아봤다. 내가 연예인이라 선임들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난 엉덩이에 살이 많아서 잘 참았다. 동료 가수는 때릴려는 시늉만 해도 기겁을 하면서 도망가 버렸다. 난 그 모습에 웃다가 더 맞기도 했다. 어머니가 보내준 파김치가 세상 제일 맛있었다.”
77살 남진의 2021년 신곡은〈영원한 내 사랑〉〈그러면 안되잖아요〉〈인생은 바람이어라〉
–〈가슴 아프게〉– 정두수 작사, 박춘석 작곡, 남진(1967년 지구레코드사)
1절.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 것을
해 저문 부두에서 떠나가는 연락선을 / 가슴 아프게 가슴 아프게 바라보지 않았으리
갈매기도 내 마음같이 / 목메어 운다
2절. 당신과 나 사이에 연락선이 없었다면 / 날 두고 떠나지는 않았을 것을
아득히 바다 멀리 떠나가는 연락선을 / 가슴 아프게 가슴 아프게 바라보지 않았으리
갈매기도 내 마음같이 / 목메어 운다
〈가슴 아프게〉가수 남진이 작곡가 박춘석에게서 처음 받은 곡입니다. 남진은 우리나라 연예전문기자 1호인 정홍택을 우연히 만난 후 가수로 성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하여 정홍택의 소개로 오아시스레코드사에서 지구레코드사로 이적하여 처음 받은 곡이라고도 합니다. 원래 제목은〈낙도가는 연락선〉이었지만, 서울 충현동 작곡가 박춘석의 집에서 가수 남진, 작사가 정두수, 지구레코드사 사장 임정수가 정홍택 기자를 집으로 오라하여 박춘석의 피아노 반주에 남진이 노래를 부르자 노래의 제목을 정기자가 제안하여〈가슴 아프게〉로 바꿨다고 합니다.
1966년〈울려고 내가 왔나〉를 히트시킨 남진을 슈퍼스타로 만든 노래가〈가슴 아프게〉입니다.
어느 날, 정두수 선생님께서 필자에게〈가슴 아프게〉에 대해서 말씀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안과장, 내가〈가슴 아프게〉을 만들기 위해 부산으로 가서 현해탄(대한해협)을 바라보면서 가사를 만들려고 했는데 좀 멀어서 말이야! 가까운 인천 연안부두로 가서 만들었지. 햐! 기가 막힌 노래야 남진이 이 노래로 빵 떳지. 남진이 첫 히트곡이지. 남진이가 자주 찾아오곤 했는데…”
2013년 작사가 정두수 선생님의 ‘노래따라 삼천리’에서〈가슴 아프게〉탄생 비화를 찾아보면,
「1966년 어느 봄날, 나는 인천 연안부두에서 봄비를 맞으며 보이지 않는 바다를 원망하면서 술잔만 연거푸 비웠다. 파도소리, 바람소리, 빗소리가 들리는 부두라면 갈매기 떼라도 있어야지. 가수 남진이 부를 노래시가 영 써지지 않았다. 그날 연안 부두를 찾은 것은 애시당초 계획이 없었지만 봄비 소리를 듣다보면 사랑과 낭만, 서정과 설렘, 소생하는 생명의 숨소리가 들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어느 술집에 들어갔는데, 한산한 술집엔 젊은 여주인이 라디오 연속극을 열심히 듣고 있었다. 술과 해장국을 시켜 놓고 망연자실해 있는데 ‘부웅’하는 뱃고동소리가 들렸다. 라디오 연속극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순간 누가 뒤에서 떠밀기라도 하듯 나는 후다닥 그 술집에서 뛰쳐 나오고 말았다. 소년시절 대부분 부산 광안리 바닷가에서 보낸 내게 바다는 늘 친근하게 다가왔다. 갑자기 바다가 보고 싶었다. 서울에서 부산은 너무 멀었다.
손에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 뱅뱅 도는 이것이 무엇이기에 나를 이토록 ‘가슴 아프게’ 하는가. ‘가슴 아프게?’ 그렇다. 바다와 나 사이를 지금까지 짓누르고 있었던 봄비가 아니라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가로막고 있었던’ 게야···. 나는 달리는 차 안에서 메모지를 꺼내 단번에 써 내려 갔다.」 「애뜻한 우리 삶의 정한(情恨)이 묻어나는 노래라서 그럴까. 〈가슴 아프게〉는 빅 히트한다. 국내는 물론 바다 건너 일본 열도까지 뜨겁게 달군다. 일본에 살고있던 재일동포들에겐 고국에 대한 향수를 달래는 한류 제1호 망향의 노래였다. 새로 등극한 노래 황제 남진 방송, 영화 출연, 극장 공연 등에 정신을 못 차릴 만큼 바빠졌다. 누가 말했던가, ‘어느 구름에 비가 들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이때 남진의 나이 19세, 한양대 연극영화과 1학년 생이었다.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 만능 엔터테이너의 출현… 용모처럼 말고 앳된 목소리의 주인공 김남진(남진의 본명) 그는 타고난 만능 가수였다. 그는 세월이 가도 나이를 잊고 산다.」
☞ 주요 수상 경력. 1967년 MBC 신인가수상, 1968년 MBC 10대 가수상, 1969년, 1971년, 1973년 TBC 방송가요 남자가수 대상, 1971년 TBC 1971년∽1973년 3년 연속 MBC 10대가수상·가수왕, 1975년 MBC 10대 가수상, 2000년 KBS 가요대상 공로상, 2017년 은관문화훈장 등.
영화 ‘가슴 아프게’ 제작 황남, 기획 진항범, 각본 남태권·정도성, 박상호 감독, 배우 남정임, 남진, 이빈화, 주증녀, 전양자, 정민, 어윤길, 최병철, 장은경, 차미미 등이 출연한 영화로 서울「동아(구 아세아)극장」10월 20일 개봉. 남진과 남정임은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동문입니다.
타이틀 “선풍을 이르킨 남진의 힛트곡〈가슴 아프게〉드디어 영화화!” “아름답고 꿈많은 젊은 여성들에게 생각게해 줄 영성여화의 최고봉!”, “가수로서 인기를 발휘하는 남진의 자열(自熱)명연!”, “한국영화에서 종래 볼 수 없던 새로운 사랑의 모탈을 선열(鮮熱)한 텃치로 파헤진 애정(愛情) 명편(名篇)!”, “흐뭇한 낭만 감미로운 멜로디, 젊은이들을 위한 가장 멋진 청춘 영화”, “가슴 조이는 첫사랑! 가슴 아픈 이별(離別)!”, “무명가수 남진과 재일교포 작가 남정임의 달콤한 첫사랑!” ,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쓰라린 이별(離別)만은 없었을 것을…”
「작가인 하몬드 올겐니스트 재일교포 경아(남정임)은 고국 방문 공연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젊은 가수 성진(남진)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함께 순회 공연을 하고, 남진의 안내로 서울 구경을 하는 등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다가 어느듯 자연스럽게 서로를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하지만 순회공연 일정이 마무리되자 그녀는 사랑만을 남긴 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동숙의 노래〉– 한산도 작사, 백영호 작곡, 문주란(1966년 지구레코드사, 데뷔곡)
1절. 너무 나도 그 님을 사랑했기에 / 그리움이 변해서 사무친 미움
원한 맺힌 마음에 잘못 생각에 / 돌이킬 수 없는 죄 저질러 놓고
뉘우치면서 울어도 때는 늦으리 / 음음음 때는 늦으리
2절. 님을 따라 가고픈 마음이건 만 / 그대 따라 못가는 서러운 이 몸
저주 받은 운명이 끝나는 순간 / 님의 품에 안기운 짧은 행복에
참을 수 없이 흐르는 뜨거운 눈물 / 음음음 뜨거운 눈물
문주란(본명 문필연), 1949년 9월 30일 부산진구 전포동에서 태어나 1965년 동래여자중학교 3학년 때 부산MBC ‘톱싱거 경연대회’에 참가해서 현미의〈보고 싶은 얼굴〉로 1등상을 수상한 뒤에 1966년〈동숙의 노래〉〈보슬비 오는 거리〉(원창자 성재희)〈봄이 오는 고갯길〉이 수록된 음반을 내면서 가수로 정식 데뷔를 했습니다. 이 음반으로 그해에 ‘국제가요대상’에서 ‘신인상’을 수상했고, 1967년과 1968년, 1972년, 1973년에는 ‘MBC 10대가수’에 선정되기도 했으며, 1982년 동경국제가요제에서 ‘최고 가창상’을 수상했습니다. 가냘프게 보여도 강인한 가수 문주란이 18살의 풋풋한 모습으로 등장하자 귀엽고 예쁜 인형같은 모습과는 달리 굵고 깊은 저음이 대중들을 놀라게 하며 가요계에 돌풍을 일으키면서 등장한 가수가 문주란입니다. 지난 4월 5일 밤 10시 TV조선 ‘스타 다큐 마이웨이’ 239회에 출연했는데 최고시청률 7.4%, 전체시청률 6.3%를 기록하며 지상파 포함 동시간대 시청률 종합 1위를 차지해 국민들께 얼마나 인기가 있고, 얼마나 많은 사랑받고 있는가를 실감했습니다.
필자가 꼽는 문주란의 12대 명곡, 1966년〈동숙의 노래〉(한산도/백영호), 1966년〈타인들〉(신봉승/박춘석), 1967년〈돌지 않는 풍차〉(조흔파/박시춘),〈낙조〉(정두수/박춘석), 1969년〈주란꽃〉(하중희/서동민), 1972년〈공항의 이별〉(정두수/박춘석), 1973년〈그 사람〉(정두수/마상원)〈공항 대합실〉(박춘석/박춘석), 1974년〈공항에 부는 바람〉(이경재/박춘석), 1975년〈생각하지 말아요〉(박춘석/박춘석), 1977년〈잘있거라 공항이여〉(김준규/김준규, 원창 1974년 진송남), 1990년〈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해〉(양인자/김희갑)이며. 2021년 신곡〈파스(PAS)〉(박승욱/전경민)은 코로나 19로 힘든 국민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어루만져 주고픈 소망을 담은 곡입니다.
2011년 2월 6일 MBC-TV ‘서프라이즈’에서 방영되었던 ‘동숙의 노래’에 얽힌 사연 이야기.
「가난한 집안의 딸로 태어난 동숙은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채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서 서울로 상경해 한 공장에 취직을 한다. 공장 식구들이 힘들 때 의지를 할 만큼 항상 밝고 힘을 주는 동숙은 월급을 받으면 최소한의 돈만 남겨 놓은 채 부모님께 보내는 효녀였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에 들어가 선생님이 되고 싶은 마음에 검정 고시 학원을 다니게 된 동숙에게 등장한 한 총각 선생님은 동숙의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다 주는데, 그 선생님을 위해 밥도 해주고 옷도 빨아 주고 모든 것을 책임 지면서 동거 생활을 하던 어느 날, 선생님은 집에 보내줄 돈이 없다고 말을 넌지시 건넸고, 장래를 약속한 그에게 동숙은 한푼 두푼 모아놓은 적금도 주게 된다. 동숙에게 선생님만이 삶의 기쁨이었던 어느 날 선생님이 다른 여자와 혼인한다는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은 동숙은 선생님에게 사실 확인을 하러 달려갔지만 그로부터 “돈 몇푼으로 어찌 해볼 생각이었냐”는 싸늘한 말만 듣게 된다.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한 동숙은 “내 인생은 이런거야”라며 비관하기 시작하고 그에 대한 원한에 가득 차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그 선생님에게 다가가 칼로 찌르게 된다. 경찰 조사에서 동숙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는 “제발 선생님만 살려 달라고” 애원을 했지만 결국 살인 미수죄로 복역하게 된다.」
그뒤 그녀는 감옥에서 어느날 잡지에 난 여성생활체험수기 공모전을 보게되고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써 공모하게 됐는데, 동숙의 글은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의 통탄을 자아냈습니다. 글을 읽고 “이 사연을 노래 가사로 써야겠다” 고 생각한 작사가 한산도는 동숙을 찾아 갔다 합니다. 그러나 이 사연과 관련해 “실화다.” “아니다.”라는 논란도 있습니다.
2016년 1월 29일 부산MBC-TV ‘가요1번지’ 에 출연한 문주란은 “그런 말이 나긴 났었지만 ‘동숙’은 ‘최후전선 180리’ 영화 주제가고, 영화 주인공 이름이 ‘동숙’이였다.”라고 말했습니다.
가수 조항조와 한서경이 진행하는 부산 MBC ‘가요 1번지’에 출연했던 문주란의 인터뷰 내용, “〈동숙의 노래〉가 나올 때 그때는 라디오에서 노래가 나오면 ‘아야? 여자야? 아니 남자야?’ ‘어른이야! 아니 애야!’ ‘덩치도 크고 키도 크데, 아니야 쬐끔하데’하는 말이 많았었죠.” “당시 우체부 아저씨가 하루 700〜800여 통 편지를 배달하고 갔는데, 뜯어 볼 겨를도 없었습니더.” 어떤 진행자는 “그때는 가수 문주란의 음반을 살 수가 없어서 음반 도매상들이 소속사인 지구레코드사 앞에서 줄을 서 기다리다 음반이 나오면 가져갔다. 했습니다.
그때 방송된 ‘가요1번지’ 문주란편 내용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필자가 2015년에 뵌 적이 있는 대중음악평론가 박성서님도 게스트로 출연해 1966년 문주란 데뷔 때 한 작곡가는 “이미자는 목소리가 식물성이라면 패티김과 김상희는 동물성, 문주란은 광물성이다.”라고 했다. 13살 때 오메가레코드사에서 취입한 노래 3곡은〈크리스틴 킬러〉〈내 사랑아 안녕〉〈남자란 모두 그런가요〉를 취입하기도 했던 문주란은 “그때 ‘아리랑 잡지사’가 있었는데 아리랑 독수리상 시상식 때 날 그 무대로 세웠는데 그 날이 가수 성재희씨가〈보슬비 오는 거리〉로 ‘신인가수상’을 수상하는 날인데 나 보고〈보슬비 오는 거리〉를 성재희씨 보다 한음을 낮춰서 불러보라고 해서 무대로 나갈 때에는 부들 부들 떨렸는데, 전주가 나오니까 하나도 안 떨리는 거야. 노래가 끝나고 나니까 거짓말 하나도 안하고 객석이 뒤집어진거야.” 그 자리에 있던 지구레코드사 소속 작곡가인 백영호(1920년〜2003년, 4,000여곡 작곡)가 막바로 “니 집이 어데고? 얼른 가자” “이래 갖고 아버지 한테 가서 말하자 집안에서 한바탕 난리가 났지. 그런 끝에 아버지를 잘 설득해 지구레코드사에 전속됐다.” “내가 한창 인기가 있을 그때에 박춘석 선생님께는 속을 많이 썩혔고, 백영호 선생님께는 속을 안 썩혔다. 백영호 선생은 히트곡이〈동숙의 노래〉한 곡이었지만, 박춘석 선생님은 계속해서 히트곡이 나오니까 속을 많이 썩였지”. “처음 박선생님 곡을 받은게 영화주제가〈타인들〉이였지.” 그 후 문주란은〈내 몫까지 살아주〉〈공항의 이별〉〈낙조〉〈공항 대합실〉〈파란이별의 글씨〉등으로 1960년대∽1970년대에 왕성하게 활동했습니다.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팔당 가시면 문주란 누님이 운영하시는 ‘문주란 뮤직카페’가 보입니다.
☞ 영화 ‘최후전선 180리’ 1966년 임원직 감독, 김석훈, 태현실(동숙역), 남궁원, 이대엽, 김운하 출연. 서울 ‘국도극장’ 부산 ‘국제극장’에서 개봉했으나 흥행에는 실패했고, 주제가인〈동숙의 노래〉만 크게 히트해 신인가수 문주란만 데뷔곡부터 하루아침에 스타가 됐습니다.
문주란이 출연한 영화는 1967년 ‘장렬 509전차대’, 1974년 ‘애정이 꽃피는 계절’(남진 출연) 2편이고, 1967년 쇼프로그램 사회를 보던 코메디언 후라이보이 곽규석의 가수 문주란 소개 멘트는 필자의 눈과 귀를 청량하게 해 주었습니다. “나이 어린 가수이면서도 나이 많은 사람 목소리를 내는 문주란양의 노래를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들으실 곡목은 〈돌지 않는 풍차〉”
〈덕수궁 돌담길〉〈바보처럼 울었다〉가수 진송남이 학생 문주란을 기억하는 일화 한토막, “부산MBC 라디오 ‘톱 싱거 경연대회’ 신청자 중 교복을 입은 앳띤 소녀가 왔어요. 너무 어려 학생은 곤란하니 나중에 졸업하고 오라고 돌려보냈죠. 어차피 어려서 방송은 불가할 거라고 생각했죠. 그렇게 예심을 마치고 본선에 진출할 인원이 선정됐는데, 이때 한 청년이 다가와 그 여학생의 오빠라며 노래를 한번만 들어 봐 달라고 사정을 해서 마지못해 내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를 시켰는데, 도저히 10대 소녀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저음의 허스키보이스가 자그마한 몸집에서 울려 나왔어요. 모두들 깜짝 놀랐죠. 그래서 부랴부랴 선정된 다른 사람을 다음 주에 꼭 출연시켜주겠다고 약속을 하고, 그 자리에 대신 여학생을 끼워 넣었죠.” 이 10대 소녀는 주말 장원을 거쳐, 월말 대회, 연말 최종 결선까지 올라가 현미의〈보고 싶은 얼굴〉을 불러 우승컵을 거머쥐었습니다. 이 소녀가 바로 동래여자중학교 3학년생 文必蓮, 즉, 우리나라 여가수 중 가장 낮은 최저음을 구사한다는 문주란(文珠蘭)이었습니다. 진송남은 그 당시를 “특히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듯 저음으로 구사하는 음색이 아주 매력적이었다.”고 회상했습니다.
예명인 문주란(文珠蘭)은 어느 날 극장쇼에서 무명가수 문필연의 목소리를 듣고 반한〈누가 울어〉〈보슬비 오는 거리〉등의 작사가 전우(1937년〜1978년 본명 전승우)가 문필연이라는 이름이 부르기 너무 어렵다며 자신의 단골 카페 상호인 ‘문주란’을 예명으로 지어 주었습니다.
영화. ‘최후전선 180리’ 기획·제작 제일영화사(대표 박의순), 총지휘 전석진, 임원직, 각본·감독, 배우 남궁원, 태현실, 김석훈, 이대엽, 독고성, 김희갑, 소동파, 김운하, 추석양, 최성 등이 출연해서 1966년 6월 22일 서울「국도극장」과 부산「국제극장」에서 개봉됐으나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하였고, 그 대신 주제가인 문주란의〈동숙의 노래〉는 대중들에게 빅히트를 했습니다.
타이틀 “한국전사(韓國戰史)에 길이 빛날 공수특전단(空輸特戰團)의 생생한 전쟁기(戰爭記)” “한국(韓國) 영화사상(映畫史上) 최대규모(最大規模)의 군장비(軍裝備) 연동원(延動員)”
「6.25 전쟁당시로 화약고를 폭파하고 보급로를 차단하는 등 작전임무를 맡아 북에 침투한 특전대원 중 한명(남궁원)과 사랑하게 하게 된 북한의 여성 동숙(태현실)은 임무를 완수하고 다시 남으로 내려가는 사랑하는 애인을 따라 함께 내려갈 수 없음을 알고 애인만은 살려준다는 북한군의 꼬임에 빠져 특전대원들이 숨은 곳을 밀고하여 북괴군과 치열한 교전중에 동숙이 총탄에 맞아 사랑하는 애인 특전대원의 품에서 숨을 거둔다. 또한 특전대도 모두 전사한다.」
또다른 주제가로는 한산도 작사, 백영호 작곡, 블루벨즈의〈검은 베레모〉〈최후전선 180리〉〈하늘의 백장미〉가 있습니다. 특히〈하늘의 백장미〉는 우리나라의 공수특전대 군가이고, 〈검은 베레모〉는 1973년 황문평이 작곡한 공수특전대 군가〈검은 베레모〉이전 곡입니다.
다음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라디오 연속극 주제가인〈청실 홍실〉에 대한 글을 올리겠습니다.
*상기 컬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